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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수
 
 
 
카페 게시글
국내 .관광 . 여행. 등산, 스크랩 쌍봉사 雙峰寺
한국남자 추천 0 조회 17 10.09.08 12: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쌍봉사 雙峰寺   ***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사동마을

절의 앞과 뒤로 두개의 산봉우리 솟아있어 쌍봉사라 한단다.

 

          # 쌍봉사雙峰寺에는 철감선사의 부도가 있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쌍봉사는 통일신라 말인 800년대 초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조 때 보수 기록에 따르면 절 집의 칸수가 400여 칸에 이른다고 해 대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과 6.25때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고 말았으며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됐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말기 이 절에 잠시 머물던 천봉 스님이 제자들에게

“이 대웅전이 세 번 칡덩굴로 덮어야만 법당에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큰 난을 세 번 겪어 이 절이 비어버린 다음에야 쌍봉사가 융성하리라는 뜻이다.

스님의 예언처럼 6.25동란까지 세 번이나 이 사찰의 대웅전이 칡덩굴로 덮였다.
지금은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보물 제 163호)과 극락전, 명부전과 요사채만 남아있어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

  

 

# 대웅전 : 보물 제 163호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목조탑 양식을 하고 있는 쌍봉사 3층 목조탑(10m)을 조선시대에는 삼층전으로 불리었고 근래에는 대웅전이라고 한다.
1962년 해체·복원공사에서 이 목조탑의 원래 형태는 보통 석탑 양식과 같은 사모 지붕이었음이 판명됐다.

각층의 옥신은 4면이 한 칸 벽면을 이루고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 들은 1층은 3출목(三出目), 2·3 층은 2출목(二出目),

공간포(空間包)는 초 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했다.

내부 초 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했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1724년(경종 4)에 삼중창(三重創)하였을 때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6년에 복원된 것이다.

 

철감선사는 사찰을 둘러싼 지형이 범주(帆舟) 형이므로

돛대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부득이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3층 목조탑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1984년 화재가 났을 때 당시 마을에 살던 할아버지가 불길을 뚫고 들어가서 석가삼존과 현판 글씨를 구해 냈다는 소개 글이 있다.
이 불상은 힘센 사람 몇 명이 합세해도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무거웠는데

힘없는 노인네의 팔목에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참으로 아리송하다.

 

   

▷쌍봉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조선숙종 20년 (1694년)에 조성되었다. 

 가운데 설법하고 계신 석가여래좌상(높이 120cm)은

수행할 때 모든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잇다.

왼쪽의 아난존자(높이 140cm)는 부처님을 오랫동안 옆에서 모신 제자답게 후덕한 얼굴이며

오른쪽의 가섭존자(높이 142cm)는 수행자의 얼굴답게 점점이 수염까지 그려져 있다.

1984년 대웅전이 화재를 만나 불길에 휩싸였을 때 마을 농부가 달려와 삼존불을 한 분씩 등에 업고 나와 부사할 수 있었다.

그 후 대웅전을 복원할 때 부처님과 제자들도 새옷을 입듯 개금과 채색을 하였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선이나 오른쪽 팔꿈치까지만 걸친 법의, 규칙적인 치마상단의 옷주름 등은 조성 당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 삼존상은 발원문과 극락전 아미타불 대좌의 묵서명에 조성 시기와 동기, 참여자 등이 기록되어 있어 불상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극락전 : 문화재자료 제 66호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린 우물천장이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창문은 2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앞쪽 단풍나무 두 그루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다.

 

▷쌍봉사 극락전 목조아미타불여래좌상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조선숙종 20년(1694년)에 조성되었다.   

 극락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높이 165cm)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있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도난당하여 최근에 다시 조성하였다.

아미타여래좌상은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을 주는데,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상 그대로이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선 등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고 닮아 있다.

다만 등이 약간 굽은 석가여래좌상에 비해 허리를 바로잡아 늘싼한 모습을 볼 때 조성 시기가 좀 뒤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인은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흘러내린 풍성한 법의는 원만한 얼굴선, 크고 두툼한 귀, 넓은 등과 잘 어울리어

아미타불 앞에 앉으면 누구라도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극락전도 대웅전 화재로 피해를 입을 뻔했으나 돌계단 옆의 수령이 수백 년 된 단풍나무가 불길을 막아 지켜냈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 양식 등을 참고해 볼 때 대웅전 석가여래좌상을 조각한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좌의 묵서명과 발원문은 조성 시기와 동기, 참여자 등을 알 수 있어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지장전   

▷쌍봉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상 일괄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53호 

지장보살(높이 104cm)의 머리는 보살의 특징대로 삭발한 빈머리이며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법의나 옷주름 등은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이나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하다.

지장보살 왼쪽에 있는 도명존자(높이 146cm)는 민머리에 합장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무독귀왕(높이 148cm)은 보관을 쓰고 있다.

이 지장삼존상 좌우에는 조선시대 시왕상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조각 기법의 국보급 시왕상(높이 156cm)이 의자에 앉아 있다.

시왕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옷은 융복과 곤룡포 차림이 섞여 있다.

의자 양쪽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목조상들의 채색은 아직도 현대기법으로 재현할 수 없어 퇴색한 예전 빛깔 그대로이다.  

 

 


# 철감선사탑雙峰寺澈鑒禪師塔(부도) : 국보 제57

 

 철감선사탑(부도)과 탑비는 문양의 조각이 가히 신공(神功)이라 할 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신라 석조부도의 통식인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부는 상, 중, 하대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평면은 팔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2단을 이룬 하대석에는 하단에는 구름문양, 상단에는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양을 조각했는데,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상대석에는  연꽃 위에 팔각 괴임대가 있다. 

탑신에는  가릉빈가伽陵頻迦가  특히 비파, 나팔, 장구, 바라 등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어서 음악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지만

원래 의도하는 깊은 뜻은 그 소리가 사방 세계에 두루 미치어 교화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을 담고 있다.

비의 몸돌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 배흘림기둥들 사이에 각각 사천왕상과 비천상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한 우아한 선으로 새겨져 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다.

옥개상면은 원형의 찰주공만 남아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 사자

                                                             # 가릉빈가

 

 

                                                            # 비천상

 

         @ 가릉빈가

             범어로 카라빈카Karavinka를 새겨 놓았다.

             가릉빈가는 히말라야 설산에 산다는 상상 속의 새다.

             극락정토에 산다고 극락조極樂鳥라고도 한다.   


 

#  탑비(보물 170호).  

 철감선사의 탑비에서 반드시 보아야할 것이 있다.

기단 부 아래에는 구름과 용, 사자를 양각했고 윗부분에는 연꽃과 가릉빈가를 새겼다.

가릉빈가는 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미음조(美音鳥)로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불가의 상상의 새다.


# 철감선사(798~868)
속성은 박씨. 휘諱)는 도윤, 법호는 쌍봉雙峰,

한주(漢州-황해도 봉산) 호족 집안으로 원성왕 14년(798)에 출생했다.
도윤道允은 18세에 김제 귀신사에 출가하여 10년 동안 화엄학을 익히고 나서

28세 때인 825년(헌덕왕 17) 사신 행차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서

지주池州 남천 보원( 748∼834년)선사에게 법을 받아 공부를 마친 뒤

문성왕 9년(847) 4월에 50세 나이로 귀국선에 오른다.

귀국 후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다가 문성왕 17년(855) 무렵에 법을 펼칠 도량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살피다가

우연히 지금의 이양면 증리 마을에 있는 중조산을 찾게 되었다.

산수를 살펴보니 용이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기상임을 알고 이곳에 사자산파獅子山派를 창건하여 신라 선문구산의 하나를 이루었으며

뒷날 그의 제자 절중에 의해 영월 흥녕사(현 법흥사)에서도 사자산문을 열게 된다.
도윤은 860년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기슭에 자리한 증심사(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징심사로 기록)를 개창하였으므로

이 사찰에서는 오래 주석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도윤은 경문왕 8년(868) 4월18일에 입적했으며

왕은 철감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 차밭

 ---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대웅전 뒤 왼편으로 이어진 대숲을 감돌아 오솔길로 오르면 야생 차나무가 여기저기 많이 심어져 있다.

 철감선사가 퍼뜨린 텃밭이다

 

 

# 해탈문

절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 호성각

 

# 범종각 

 

 # 감로수와 모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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