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0일 "올깨끼"와 "늦깨끼"
조실스님 시자는 열여섯 살이요, 주지스님 시자는 열아홉 살이다.
스무 살 미만의 스님은 이들 두 사람 뿐이다.
나이도 어리지만 나이에 비해 체구도 작은 편이어서 꼬마스님들로 통한다.
조실스님 시자가 작은 꼬마요, 주지스님 시자가 큰 꼬마다.
작은 꼬마스님은 다섯살때 날품팔이 양친이 죽자 이웃 불교 신도가 절에 데려다 주어서
절밥을 먹게 되었고, 큰 꼬마스님은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동해안의 낙산보육원 출신이다.
낙산보육원에서 간신히 중학을 마치고 곧장 절밥을 먹었다고 한다. 모두가 고아다.
작은 꼬마는 절밥을 12년 먹었고 큰 꼬마는 4년째 먹는다.
꼬마스님들은 대중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측은해서도 그렇고 가상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꼬마스님들의 사이는 여름 날씨같은 것이어서 변덕이 심하다.
때로는 혀를 서로 물 정도로 다정한 사이인가 하면 때로는 원수 대하듯 한다.
다정(多情)과 앙숙(怏宿)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다.
다정한 사이일 때는 서로 법명 밑에 스님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앙숙지간일 때는
작은 꼬마가 큰 꼬마를 ‘늦깨끼’라고 부르고,
큰 꼬마는 작은 꼬마를 ‘절밥 도둑놈 올깨끼’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성욕의 발동기를 10세 전후로 보았기 때문에 10세 전후에 입산한 스님을
동진출가 또는 ‘올깨끼’라고 부른다. 그 이후에 입산한 스님을 ‘늦깨끼’라고 부른다.
‘올깨끼’는 ‘늦깨끼’에 대해서 항상 자기의 순결무구한 동진(童眞)을 내세우고
관록과 선취득권을 주장하면서 ‘늦깨끼’를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
‘늦깨끼’는 입산 초에는 갓 나온 송아지격이어서 그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면서
‘올깨끼’에게 순종하나, 절밥 밥그릇 수를 더해 가면서 절생활에 익숙하게 되면 저나 내나
견성 못하고 중생으로 머물러 있는 바에야 절밥만 더 손해 보이게 한 것 이외 무엇이 다르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그 때부터는 ‘절밥 도둑놈 올깨끼’라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잘 따지고 보면 서로 서로가 어서 빨리 공부해서 견성하자는 탁마(琢磨)의 소리다.
‘늦깨끼’는 늦게 들어왔으니 어서 공부하라는 의미고, ‘절밥 도둑놈 올깨끼’는 절밥만
오래먹고 공부하지 않아 아직 중생에 머물러 있으니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의미이다.
‘올깨기’는 정신과 육체가 함께 생성과정을 절간에서 겪기 때문에
혼탁한 사회 생활은 전연 백지여서 순진하기도 하고 특히 산술에 어두운 것은 사실이다.
절풍속이 몸에 젖어 있어서 가람수호와 예불헌공에 능숙하고 계율을 무척이나 중요시한다.
그러나 대부분 타의에 의한 입산길이었지 자의에 의한 입산길이 아니어서
뚜렷한 입산동기가 없고 보니, 절생활이 타성화 되었고 자립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늦깨끼’의 입산길은 뚜렷한 동기가 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인생의 패배자나 낙오자들이 자살할 용기마저 없어 찾아가는 곳이 절간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삶들이라 할지라도 절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일단 절 안으로 들어와 절밥을 먹게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오욕칠정이 용납되지 않고 삼부족(三不足)에서 살아야 한다.
피안의 길이 열려져 있지도 않고 열반이 눈 앞에 있지도 않다.
깊이 살펴보지 못하고 겉만 보고 입산을 했다가 실상을 알고 보면,
세상에서 느낀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이 절간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대로 머무느냐 하산하느냐 이다. 대부분 하산하고 만다.
하산을 포기하고 머물기를 결심한 사람은 생사를 걸어놓고 결단에 임한다.
이것이 바로 발심(發心)이라는 것이다.
또 흔히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왜 그 사람이 절로 갔을까,
그렇게 유능하고 유족한 사람이 왜 절로 갔을까, 아까워라 이렇게들 지껄인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절대로 절밖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들어와서 절밥을 먹는다.
그 피눈물나는 절밥을. 절밖에서는 금지옥엽이지만 절안에서는 ‘늦깨끼’로 불리어지면서
온갖 수모가 던져진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불평과 불만과 반항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어떤 기연에 의해 입산길에 올랐고 절안에 몸이 던져진 것만을 감사히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이미 기연을 포착했을 때 발심이 되어 있었다. 절간에는 열반도 피안도 없으며
인간을 육체적으로 거의 박제화시키려는 고통 뿐이라는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는 피안의 길을 자기 자신이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하면서 즐거이 수고(受苦)할 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발심과 기연(機緣)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법성게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잘 표현해주고 있고,
부처님은 분명히 “나로서도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한다”고 했다.
기연과 발심이 없는 수도 생활은 불가능하고 또 무익하기 때문이다.
발심은 날로 거듭해야 하고 기연은 수시로 더욱 힘차게 붙잡아야 한다.
입산 초기의 혼신적인 구도열이 자꾸 쇠퇴해지는 이유는 발심과 기연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불자는 모름지기 행주좌와(行住座臥)에 있어서 발심을 오른손에,
기연을 왼손에 꼭 붙들어야 할 뿐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늦깨끼’만이 발심과 기연이 있고 ‘올깨끼’에게는 없다는 결론인데,
천하의 ‘올깨끼’ 스님들이 이 ‘늦깨끼’를 잡아 치도곤을 줄까봐 변명 아닌 사실을 써야겠다.
옛날의 ‘올깨끼’ 스님들은 어떻게 발심했는지 현재의 나로서는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요즈음 ‘올깨끼’ 스님들은 대부분 수돗물을 먹은 뒤에야 비로소 발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기야 20대가 발심하는 확률이 제일 많으니 연령탓이기도 하겠지만.
올깨끼 스님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절대로 지옥일 수 없다.
관광객들의 표정에서는 이지러진 것을 볼 수 없고,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을 느껴보지 못하고 다만 경전이나 연상의 스님들의 입을 통해서
인생고해니 사바세계니 업보중생이니 하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반(涅槃), 극락(極樂), 피안(彼岸), 적멸(寂滅)을 동경하고
거기에 미치기(及) 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들어 느껴보기 위해서다.
요즈음 승려교육기관은 불교전문강원이 몇몇 본사(本寺)에 있긴 있지만 내전(內典)인
불경(佛經)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강원을 졸업한 스님들은 외전(外典)을 공부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으로 도회지로 침투한다.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 내에 불교대학이 있고,
마산대학(본래 '해인대학'이던 것이 5.16 쿠데타 이후 매각?되어 '마산대학'으로 개칭되었다가
현재는 '경남대학교'가 됨)과 이리(현 익산) 원광대학이 있어서 다소 외전을 익힐 수 있는
문화가 개방되어 있기는 하지만, 승가 위주의 대학이 아니고 일반 학생 위주의 대학이고 보니
여기 드나드는 스님들은 수적·물적 열세 때문인지, 아니면 신심이 퇴락해서인지
속화(俗化)의 길을 걷기 십중팔구다. 도시의 무슨 학원이다, 강습소다 하는 곳에서도
'올깨끼' 스님들이 때로는 승복, 때로는 속복(俗服)을 걸친 채 드나들면서
외전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몸부림친다.
도시에 진출하여 면학하는 ‘올깨끼’스님들의 학자금이 또한 문제다.
은사스님이나 본사(本寺)의 보조를 받아 기숙사나 등록사찰에서 기거하면서
통학하는 스님들도 있지만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은 영리 위주의 사설 불당에서
‘부전살이(불당을 맡아서 돌보는 일)’나 해주고 몇 푼 얻어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외전이나 도시를 외면하고 '올깨끼' 스님답게 산간에서 청정하게
수도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스님들을 국방부가 그대로 보아 넘겨주지 않는다.
스물 한살만 되면 틀림없이 입대영장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으면
군대에서는 고문관 취급을 받는다. 좋은 의미에서도 받고 불쌍한 의미에서도 받는다.
그 복잡다단하고 음담패설이 상용어로 되어있는 사병생활을 삼년간 마치고, 다시 절간을 찾아
돌아오는 '올깨끼' 스님들은 군진(軍塵)을 털고 위대한 발심과 함께 선방으로 돌아온다.
몇 할이나 돌아올까.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올깨끼' 스님들은
속진(俗塵)을 씻고 위대한 발심과 함께 돌아온다. 얼마나 돌아올까.
강원을 마치고 책장을 던지고 선방을 향해 돌아오는 '올깨끼' 스님들은 얼마나 될까.
모든 대답은 “극히 소수지요”다.
불교의 윤회설 때문일까. 경제학의 수요·공급의 법칙 때문일까. 공기의 대류 작용원리 때문일까.
남방 소승불교를 닮아가는지 알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해지고 있는 세간과 출세간의 교류현상이다.
우리 상원사 대중은 ‘올깨끼’의 바로미터를 15세로 잡는다면 3할은 ‘올깨끼’고 7할은 ‘늦깨끼’다.
바로미터를 20세로 잡는다면 7할은 ‘올깨끼’고 3할은 ‘늦깨끼’가 된다.
20대 전후에서 발심하는 확률이 많다는 것이 증명된다.
꼬마 스님들이 오후부터 앙숙지간이 되었다. 발단은 걸레 때문이다.
작은 꼬마스님은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생활에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무척 개인적이어서 우직하고 내향성이고 정결하다.
절밥을 일찍부터 먹은 명실상부한 ‘올깨끼’의 생활태도다.
반면에 큰 꼬마스님은 이유가 많고 눈치가 비상하다.
‘적당히’를 요령있게 요리하면서 약육강식에 철저하고 이해타산이 예리하다.
모든 것에 사시(斜視)적이어서 절밥을 4년이나 먹었지만 아직도 보육원 출신의 명분에 투철한 편이다.
작은 꼬마스님이 조실스님 방청소 전용으로 사용하는 걸레는 언제나 깨끗하고 제자리에 놓여있다.
방을 닦고 깨끗이 빨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꼬마스님은 자기 책임인 주지실의 전용걸레가 없다.
주지스님은 출타가 잦아 가끔 청소를 하는데, 그 때마다 이방 저방 걸레를 갖다 쓰고서는
제자리에 두지 않고 기분대로 팽개쳐 버린다. 여러 차례 주의를 받고도 고치지 못한 습성이다.
오늘도 걸레 때문에 입승스님으로부터 호된 책망을 들었다. 작은 꼬마스님의 고자질로 간주했다.
작은 꼬마스님방 전용 걸레를 쓰고 제자리에 갖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승스님의 훈계에서 풀려나온 큰 꼬마스님의 눈초리가 작은 꼬마스님의 눈초리와 마주쳤다.
이 때부터 앙숙지간을 알리는 저기압이 무섭게 깔리기 시작했다.
오후의 뒷방에서다. 저기압은 끝내 먹장구름을 불러온다. 먹장구름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
드디어 번개가 치며 천둥이 울린다. 그리곤 비가 쏟아지게 마련이다.
뒷방에서 이제 막 방선(放禪)한 스님들이 편한 자세로 각자가 아랫도리를 달래면서 잡담이 한창이다.
큰 꼬마스님이 복수의 집념이 가득한 표정으로 누워있는데 작은 꼬마스님이 선반에 있는
자기 바랑(鉢囊: 발낭, 걸망 또는 배낭(背囊)의 변음)을 내리다가 큰 꼬마스님의 발을 건드렸다.
큰 꼬마스님에게는 요행이요, 작은 꼬마스님에게는 불행이었다. 시비가 시작되고
‘늦깨끼’ ‘올깨끼’로 수작하다가 욕설을 주고 받고 마주 앉아 서로 꼬집고 발길질이 오가더니,
드디어 큰 꼬마스님의 일격이 작은 꼬마스님의 면상에 가해지자 작은 꼬마스님이 저돌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박치기로 응수했다. 큰 코와 작은 코에서 선지피가 흘러 옷과 방바닥에
갖가지 수를 놓았다. 대중들에 의해 혈전은 곧 제지되고 꼬마스님들은 입승스님 앞에 꿇어앉아
훈화조의 경책을 들은 다음에 불전(佛前)의 백팔참회(懺悔: 절)로 들어갔다.
9시에 취침을 알리는 인경(引磬: 여기서는 종)소리가 끝나자 탁자 밑의 꼬마스님들 잠자리에서는
오손도손한 얘기소리가 들렸다. 그들 사이는 틀림없이 여름 날씨 같은 것이어서,
날이 바뀌기도 전에 벌써 다정지간(多情之間)이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