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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빛청암의 신라 경주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달빛청암
2012년 새해는 밝았다고 일출의 만끽을 누린지 벌써 어제 같은데 그래도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 우리 우리 설날은 임진년 바로 오늘 아침인 것을
구정 명절인 진짜배기 새해에 영천 큰집 윗대 조상 차례 모시고
비로소 경주 우리 집에 와서 조실하신 부모님 차례를 모시고 나니
약간의 긴장감도 풀리고 피곤도 하지만 아파트 베란다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야말로 사진 촬영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사진 촬영에 취미를 들이고 나서는 이제는 습관적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밤하늘에 북두칠성이 푸르게 빛나고 별들이 쏟아질 때는 저 멀리 감포 앞
문무 대왕릉에서 시뻘겋게 혀를 내밀며 수평선 아래에서 장엄 근엄하게
수면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오메가 현상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새벽 내내 전전반측으로 바닷가로 달려간 일 이 한두 번 아니다.
문무왕릉 앞 바다 쾌청일은 일 년에 한 달도 채 안 되니
그 날을 맞추기는 참으로 힘들다.
오늘따라 영하의 매서운 기온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는 그야말로
사진기 셔터 누르는 순간 온몸에 희열을 전해주기에는 충분하다.
이번달초 쯤 큰맘 먹고 오후 5시에 감은사지에 갔더니 일몰 동,서 탑 촬영 시간이
허무하게 끝나 버려서 씁쓸하게 자리를 떠나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는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지의 쌍탑 일몰 모습이 늘 눈앞에 어른거려서
견딜 수 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왔는데
오늘 큰 아들놈이 보문 경주 월드 눈썰매장에 2시까지 아르바이트 출근 하는데
태워다 주기도 하고 ,명절 피로로 집안에서
조용히 쉬고 싶어 하는 아내 등쌀로 나머지 둘째 아들 그리고 나까지
제발 어디론가 나가 주었으며 하는 분위기다.
하늘과 가정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어디론가 내몰고 있는 분위기다.
늘 준비된 카메라 가방 그리고 삼각대 들고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집밖을 나와 핸들 대를 잡으면 자연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감성의 문이 열리고
신나는 자연의 연주가 시작되는 이 순간은 짱이다.
그저 마~~ 대통령도 부럽지 않는 순간이다 .
습지가 많고 난초의 풀 종류가 많아서 난원(蘭園)이라는 지명에서 나원으로 지명이
변경된 금장리 나원에서 금장교 다리를 통과하는 순간
우측에는 예기청소와 석장동 암각화가 빙긋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어렸을 적에는 애기청소라는 지명으로 알았는데
즉 애기(아기)죽고 청년 죽고 소가 죽어서 애기청소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렇치 만은 아닌 듯 싶다
예기라는 궁녀가 왕을 사모하여 마지막으로 왕 앞에서 파천무를 추고 난 뒤
금장대 밑으로 몸을 던져서 짝사랑의 울분을 마쳤다는
푸르고 맑은(淸) 못(池), 소( 沼)그런 장소인 듯 하다. 그리고
소설 김동리의 무녀도 이야기도 이외 비슷한 맥락을 이루고 있는 듯 하고
70년대 초등시절 금장대 아래 약간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두 군데 있는데
낮은 곳은 자라모가지 가장 높은 곳은 장군바위라고 불렀는데
장군바위에서 다이빙 하거나 뛰어내리면 이날은 골목대장 내지 짱이 되기도 했던 곳으로
잘못 뛰어내려 배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배가 벌겋게 타들어 간곳을 움켜지고 데굴데굴 굴렀던
그런 개구쟁이 놀이터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바로 그 옆에는 높이 1.8m 정도의 암벽에는 BC2000년경의
청동기 시대 인들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면서 신앙의례의 장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청동기시대에는 이곳이 바다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증거로 안강 지역에는 패총이 더러 나오는 모양이다
이렇게 경주 시내에 나서기만 하면 문화재에 얽힌 전설과 설화가
내 가슴속을 파고들어 심금을 울린다.
좀 더 속력을 내서 황성 공원을 가로질러서
여인의 향기가나는(芬 ) 분황사 와 백년 넘게 사찰이 건립된
황룡사지를 우측으로 끼고 보문으로 향하면
보문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위치가 숲머리 지명인데
조선시대에는 분황사에서 이곳까지 5리 정도 되는 나무숲을 조성 했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면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00년 초 진평왕릉 앞 한지벌 즉 보문들 벌판에 새롭게 등장한신사리 지역의
역리원과 지역의 품관(品官)들 즉 토호세력간의 북천 즉 알천의 물줄기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숲머리 단어라는 어원의 그 증거는 건너편 금학산 아래 도로가
옆 바위에 새겨진 알천방제수개기(閼川防提修改記) 에 답사를 해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숲머리에서 분황사 사이 물길을 틔워서 한지들
즉 보문벌판을 거쳐서 박물관 쪽으로 흐르던 물길을 흐르지 못하게 제방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서 영원히 물길을 막는다는 내용과 정당성을 기록해놓았는데
과연 그 당시 보수 세력 승자의 기록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앞으로 알천제방 수개비가 바로 잡는다는 의미가 아닌 알천제방 기적비(記積碑)로 단순히
내용만 기록한다로 바꾸어야 타당 할지도 모를 일이다.
경주부윤 연안 이공이 쓴 “알천제방수개비
1993년 발견.
보문 숲머리를 지나서 우측으로 막 지나면 명활산성의 입구 표지판이 반가이 맞이한다.
경주에 살면서 지나치면서 보기는 많이 했지만 정작 그 안으로 들어가서
답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된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카리스마와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비담의 난이 일어난 그 장소이기도하다
당시 보수귀족의 대표였던 비담 그리고 새로운 신흥세력 김춘추와 김유신의 세력 대결에서
최초로 방패연이 사용되기도 했던 전쟁사를 머릿속에 기억하면서
포곡식 산성이 아닌 퇴뫼식 산성의 성격을 띤 그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석성을 쌓았던 돌무더기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가시나무 사이를 헤치고
다소 정리된 성곽위에서 저 멀리 바라보이는 보문 호를 바라보면
시원한 호수 바람을 가슴에 담아보면 좋은곳이기도하다.
명활산성 표지판을 막 지나서 보문 호를 우측으로 감아서 돌면
보문호수 풍경 너머로 바라보이는 유명호텔은 늘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관광객들이 경주에 와서 돈을 쓰고 나면 저녁에는 온라인 송금해서 타 지역으로다 빠지는
경제형편이니 왠지 늘 씁쓸하다.
기껏해야 맷돌 순두부찌개 ,빵이나 팔아야하니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관광객 쓰레기 뒷 치닥꺼리나 하는 형국이니 더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보문호수 가장자리 얼어붙은 물가와 물안개 자욱한 물보라 내음 그리고
물오리들의 합창은 다소나마 위안을 준다.
복원된 명활산성 전경
산성을 걷다보면 특이한 모습은 없고 석성을 쌓은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발견된다
석성돌 위에 올라서면
어느새 명물로 자리잡은 열기구 풍선이 그래도 인상적이다
구절장양 보문 호를 지나서 경주월드 눈썰매장 입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위해
맏아이를 내려주지만 마음이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
이제부터는 고1에 입학하는 둘째 아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역사 여행만 하는 시간이다
지나온 길을 더듬으며 향기 나는 (芬)분황사의 창건왕은 누구이며 ,
그리고 황룡사의 9층 목탑과 모전탑, 석탑의 재료비교 앞으로 답사하게 될
감은사지의 역사적 배경과 추령재 밑 추원사에서 시작되어서
불령봉표 고개로 이어져 용연폭포 기림사로 이어지는 신문 왕릉의 순례길
행차의 배경 및 최근 복원 길 등에 대해서 그리고 만파식적의 전해진 유래 및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해설을 해주니 제법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보문 호를 지나서 덕동 호에 이르면 신라천년 왕조 서라벌을 그렇게 괴롭혔던
알천 즉 북천내의 그 원류인 이곳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불교의 최고봉이신
원효 대성사께서 주지로 계셨던 곳으로 고선사 터이며 그 탑은 아직도 경주국립박물관
야외박물관 뒤뜰에 웅장하고 힘차게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경주에서 유일하게 수몰민이 발생한곳이기도 하다
지천명 나이가 넘은 나의 고등 동기들 중에는 덕동초교 출신 동기가 있는데
서로 간에 동창애는 유달리 깊고 끈끈하다.
덕동호를 크게 아우르고 있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이 바로 동대봉산(東大封山)으로
요즈음 이 산은 봄날이 한창 일 때면 두릅이 많이 생산되어서 두릅 순 이 채 오르기도 전에
사라지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모 산악회에서 나도 두릅 번개산행을 여러 번 갔지만
이 산의 역사적 사실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동대봉산의 봉(封: 봉할 봉)자는 입산금지(入山禁止)의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능 제사를 지내기위해서 향과 숯을 채취 하기위해서 이 글자를 사용 했는데
그 당시 근처 함월산에는 불령봉표, 시령봉표의 표지 석을 세웠으며
그리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 시켰는데 이 지역을 향탄촌(香炭村)으로 지정하여
면민에게는 잡역을 면제 시켜주었는데 이것을 중간에서 농간하는 탐관오리들이
하도 많아서 이것을 해결 해주어서 고맙다는 선정비(善政碑)가 있는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때려 죽일 놈은 항상 있는 모양이다.
연경묘 향탄산 계하 불령봉표
신라 천년 향기를 품고 뿜어내는 토함산 자락이 동해로 계곡을 형성할 즈음
장항리에서 장항리 석탑을 만나게 되고 그 골짜기를 메우고 달리는 물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대종천(大鐘川)이다.
고려시대 몽고군사가 서라벌을 화마의 소굴로 만들고도 황룡사의 대종이 탐이 나서
육로로 운반을 하지 못하자 이곳 대종천을 이용하여 배로 운반 하려 하였다니
그 당시에는 이곳 대종천은 제법 배가 뜰 정도로 수심이 깊었던 모양이다
. 하지만 그들의 의도대로 운송하지 못하고 동해 앞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다고 하며
요즈음도 파도가 잔잔할 때 들린다고 하니 그 전설은 아직도 유효한가보다
유년시절 많이 들어 보았던 에밀레종의 가슴 아픈 사연 다음 가는 전설이기도 하다.
감은사지 도착하기 전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날 무렵
어느덧 감은사지 동편 서편 탑이 우뚝 솟아서 나를 응시하듯이 반가이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자태는 눈이 번뜩 뜨이는 순간이기도하다.
바닷바람을 마주해서 그런지 겨울바람은 칼바람처럼 차창 밖을 스치며 울고 지나간다.
감은사 주차장 차안에서 쌍탑을 보면서 둘째아이에게 스마트폰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감은사지 탑의 차이점을 비교 설명해주고
호국용이 되어서 드나들던 곳으로 추정되는 입구와 금당의 섬돌 밑바닥이
왜 공중으로 떠있게 되었는지, 지붕돌(옥개석)의 변천과 층급받침 개수
차이점의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사진기를 주면서 이 부분을 한번 촬영 해보라고 시키니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신나서 이리저리 다닌다.
그리고 촬영해 와서 보여주면서 난리통 이다.
감은사 용당리 지역은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용의 얼굴 형상을 띄고 있는데 이 지역은
기(氣)가 모자라는 부분으로 용 이빨의 형태인 동 서 탑을 세움으로서 모자라기운을
보충하게 된다는 비보사상(裨補思想)이 적용 되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동해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의 은혜를 감사하기위해 지었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창건을 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만파식적 편에는 신문왕은 감은사에 9일간 머물면서
검은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어서 돌아가는 길 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도 하늘님은 블루코발트 아니 고려청자색으로 뿜어내서
하얀 가스 기운 하나 없는 그런 하늘색이다.
동 서 탑의 상륜부(相輪部) 노반(露盤 )은 을씨년스럽게 네모지게
천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그 중심 위로 검은 쇠꼬챙이
찰주(刹柱)는 천년전의 잃어버린 상륜부의 자식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를그리워하듯이
천년의 아픔을 간직한 듯 넋을 잃은듯 우뚝 솟아 있는 것 같다.
동 서 탑은 작년에 보수해서인지 더욱 더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
눈이 부시게 빛나게 장엄하게 서있다.
흥분된 가슴을 안고 야트막한 뒷동산 연대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푸른 나뭇잎이 얼굴을 내미는 신록의 계절에오면 시야가 다소 가리지만
겨울에 오니 저 건너편 용당천 아래 흐르는 우산 혹은 형제산으로 불리는 곳까지
전경이 잘 보일뿐만 아니라 서탑의 탑 그림자가 제법 길게 늘어져서
운치 있게 금당 앞뜰을 장식한다.
둘째아아와 나는 서로 독사진 기념 촬영도 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는
전체 가람의 아름다움과 배치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해는 석양의 노을빛을 발하면서 서쪽 형제산 어깨위에 내려앉을 기세이다.
바삐 발걸음을 아래로 옮겨서 동탑 뒤편에서 바라보면
서탑도 비스듬히 동시에 보이는 지점인 안내 표지판
옆에 촬영 포인트를 잡고 삼각대를 설치하고 해넘이를 기다린다.
어미 잃은 탑 그림자
서기 682년 임오년 5월 검은 옥대와 만파식적을 받기위해서
신문왕은 이곳에 머물면서 형제산 용당천에서 감은사 이곳까지
동해 바닷물이 가득차서 넘실거리던 그 당시 석양의 붉은 기운이
바다 위를 붉게 물들인 다음 여세를 몰아서 감은사 12m 동 서 탑의
지붕돌과 층급 받침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면서 넘어가는 장면을 보고
감탄했었을 신문왕과 문무백관들의 행렬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름을 무어라 형언할 수 가 없다.
맹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카메라와 나 그리고 황금빛으로 샤워하는
동 서 탑의 노을이 뒤엉켜서 물아일체가 되어버려서인지 시간과 추위를 잊은 지 오래다
역사와 자연의 삼매경에 빠지니 정말로
감동의 물결과 인생의 청량감이 교차하는 듯하다.
감은사여! 감은사 탑이여!
신라인의 호국정신을
간직한 당신을 목 놓아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영원히 사랑 합니다.
이제 탑 그림자도 사라지고
석양의 노을이 내 가슴을 영원히 물들이는 순간
아쉬움의 발길을 서서히 돌린다.
임진년 새해 부자지간 함께한 문화유산 답사 및 일몰 촬영은
자식에게는 신라 문화유산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에 비로소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그리고 덤으로 일몰의 아름다움을 촬영하는 새해 선물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새해 선물이 있으리오.
첫댓글 세세한 해설과 함께
석양에 비친 감은사지가
황홀하기 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