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자(長椅子)의 비밀
최광희 목사
교회당에 들어오면 여기가 교회당이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비품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 성도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무엇보다 장의자(長椅子)입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16세기까지는 의자가 그렇게 흔한 물건이 아니었고 의자는 왕이나 성직자를 위한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의장(議長)을 나타내는 단어가 체어맨(chairman)일까요? 하여간 수십 년 전의 교회당에는 마루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았고 강단 위에만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일부 기도원을 제외한 모든 교회당에는 성도들이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요즘 새로 짓는 교회 중에는 예배당에 개인용 의자를 설치하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회중석은 장의자가 대세입니다. 목사인 제가 가끔 회중석에 앉아보면 예배당 장의자는 개인 의자보다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이 장의자에는 중요한 의미 혹은 비밀이 있어 보입니다.
장의자는 보통 3인용부터 10인용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장의자가 몇 인용인가 하는 기준은 막상 사람이 앉을 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긴 의자를 한 명이나 두 명이 앉을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이 많으면 조금씩 당겨서 원래 설계된 사람 수 보다 더 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산에서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는 늘 좌석이 부족했기에 예배 도중에 오는 성도를 위해 자리를 조금 좁게 앉아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늦게 온 성도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부교역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회중석 자리 안내에 자신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왜 처음부터 개인의자 대신 장의자를 배치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장의자는 교회의 특징과 닮은 면이 있는 듯합니다. 우선 필요한 인원이 부족할 때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는데 네 명이 필요한데 현재 그 일에 헌신한 사람이 두 명이나 세 명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은 그 일을 그만두거나 포기하지 않지요. 그럴 때는 현재 있는 봉사자가 더 열심히 하고 조금 더 헌신해서 그 일을 해 냅니다. 이것이 교회의 특징입니다. 또 중요한 일을 위해 헌금을 할 때도 자원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더 헌금해서 부족함을 채워 나갑니다. 이것이 장의자의 비밀입니다.
그런가하면 장의자는 4인용에 5인이 앉을 수도 있는 것처럼 사람이 많다고 한 사람을 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끼워 그 사람의 역할을 나눠주어서 함께 섬기므로 교회도 세우고 사람도 세워나갑니다.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함께 일하면서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훈련시키는 것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음식을 먹을 때에 먹어야 하는 사람이 많으면 조금씩 나눠 먹고도 만족해하는 것이 성도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교회에서 성도들은 내 자리를 양보하고, 음식도 양보하고, 부족한 일손과 재원은 내가 좀 더 헌신하고 잉여 인원이 있을 때에도 기회를 나누어 줍니다. 금번에 등불프로젝터를 진행하는 수원소망교회에서는 가고 싶은 교회에 대해 순원이 먼저 의사 표시를 하면 순장은 자기가 가고 싶은 교회가 있어도 그 의사를 입 밖에도 내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양보하는 마음이고 장의자 정신입니다.
또 장의자는 정해진 내 자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누구나 앉았다가 일어나면 언제라도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것이 장의자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어떤 직분과 직책도 내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 직분은 장의자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며 다만 그 일을 맡아 섬기는 담당자만 바뀌는 법입니다. 또 내가 앉았다가도 다른 사람이 오면 옆 자리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책은 꼭 내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회장을 했던 사람이 다음에는 서기를 할 수도 있고 교회에 늦게 등록한 사람이 앞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유연한 자리 이동이 가능한 장의자처럼 각종 직책에 전혀 집착하지 말고 비어 있는 자리, 요청되는 직책을 맡아서 봉사하라고, 장의자는 넌지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에 장의자 대신에 개인의자를 설치하는 경우가 늘고 있듯이 성도의 사고방식도 개인주의화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씁쓸합니다. 내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도 사라지고 둘이 먹을 음식을 서너 명이 나눠먹던 둥근 밥상의 정감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필요에 따라 예배당에 개인 의자를 도입하더라도, 내 것 양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책임지지 않는 개인주의는 경계하여 장의자 정신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