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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저널
KBS저널 3월호를 받고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 글이 ◀방송역사의 살아있는 전설
대한민국 PD 1호 최창봉▶이었습니다. KBS저널 편집장 한지은기지가 최창봉선생님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또 직접 인터부를 통해서 생생한 얘기를 글로 옮겨 놓아, 살아있는 전설을 살아있는 글로 읽었습니다. KBS저널 3월호 전설 특별테마 여러편 중 최창봉선생님에 관한 글 전문을 사진과 함께 올렸습니다.
방송역사의 살아있는 전설 대한민국 PD 1호 최창봉
이 땅에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고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과 열정이 그 네모 상자에 담겼던 것일까. 헤아릴 수 없는 피와 땀, 열정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시작에 최창봉이 있었다. 인생에서 37년을 방송에 쏟아붓고 이제는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 그가 곧 대한민국의 방송이었다.
에디터 : 한지은, 사진 : 정종갑, 춘하추동방송
방송 역사의 살아 있는 전설.
최창봉이라는 사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수식어는 없는 듯하다. 이 수식어에는 개국 전문가, 대한민국 텔레비전 최초 PD였던 최창봉의 젊음과 열정이 담겨 있고, 그가 전설로 회자되는 이유가 숨어 있다. 역사의 크고 작은 진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그는 37년을 묵묵히 방송과 함께했다. 그와 마주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지나 1960년대 KBS TV가 개국하고 동아방송이 탄생하여 사라질 때를 시간 여행하고 있었다. 때로는 대한민국 1호 PD인 열정적인 청년이 거기 있었고, 방송의 독립을 주장하던 중역의 간부가 있었으며, 한 방송사를 이끌었던 수장이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옛이야기를 자상하게 해 주는 어르신이 있었다.
대한민국 첫 TV 개국, 최초의 프로듀서 탄생
“다 옛날 얘기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겠지. 그저 옛날이야기 하듯이 할 테니까 알아서 정리하라고.” 그러고서 시작한 것이 ‘종로 텔레비전’ 얘기였다. 정확히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었던 HLKZ KORCAD-TV에 관한 것이었다. 1956년 5월 12일 첫 전파가 발사되었고 세계에서는 열다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필리핀,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우리나라의 TV 방송이 시작된 때였다. “1956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텔레비전이 생긴다고 하니까 시험을 보게 됐지. 누군가 너는 대학에서 연극도 했으니까 제격이라고 했어. 몇 명이서 같이 시험을 봤다고. 편성, 제작, 아나운서, 카메라 등. 그때 기자는 없었어. 대여섯 명이 합격을 했는데 프로듀서는 나 하나였고, 네 사람이 후보로 발표됐지.”
KORCAD는 KOREAN RCA DISTRIBUTOR의 약자로 당시 미국 전자 회사 RCA의 한국 대리점을 운영하던 황태영과 공동 경영자인 미국인 조셉 밀러가 함께 설립한 방송국이었다. 최창봉은 프로듀서로 합격한 뒤 사장실에서 밀러 사장을 처음 만났다. “대학에서 연극을 했다니까 밀러 사장이 그렇게 좋아해. 무슨 연극을 했냐고 해서 연출했던 얘기를 했더니 “You are the program director.”라며 그 자리에서 구두로 발령을 하더라고.”
그렇게 최창봉의 방송 인생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에 TV 방송국이 처음 생기고, 최초의 프로듀서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고려대 영문학과 시절, 극회 회원으로 연극 활동을 하면서 제1회 전국 대학 연극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한 이력이 있다.
“바로 다음 날부터 개국 준비를 시키는 거야. 외국 서적들을 번역해 공부하면서 준비를 했지. 편성 제작 바이블이라고들 불렀어. 당시 스태프들이 다들 괜찮았어. 아주 유능한 사람들이 많았지.”
최창봉은 잠시 그때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개국 준비를 할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듯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개국 프로그램은 뉴스, 교양 강좌, 스포츠, 퀴즈, 각종 쇼와 코미디 등 다양하게 편성을 했지. 그때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인 <사형수>가 만들어졌어. 미국의 극작가 홀워시 홀의 원작 <용사>를 번역한 것이었지. 50평 스튜디오에서 제작 기획을 했고, 60분 남짓으로 방송이 됐어.” HLKZ에서 그해 6월부터 정규 방송에 들어가, 격일로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씩 방송이 실시되었고, 그 뒤로 방송 시간을 매일 4시간, 주말에는 5시간으로 늘려 나갔다. 그렇게 1년 쯤 지났을 때 최창봉은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세계 24개국에서 모인 방송인 30명이 보스턴 대학이 개설한 SPRC(School of Public Relation & Communication)에서 연수를 받기 위함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미국 텔레비전의 황금시대(Golden Age)였다.
생방송 시대이기도 했으며, 버라이어티나 퀴즈 쇼 같은 프로그램들이 모두 그때 개발되었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텔레비전에 뛰어들어 TV 프로그램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시리즈들이 대량 생산되던 시절, 그는 NBC, CBS, ABC 등 미국 텔레비전 현장을 견학하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천재 프로듀서들이 만드는 전설적인 프로그램들의 현장을 보고 왔지. <Playhouse 90> 등의 리허설에서 연출자랑 같이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제작 분위기에 젖기도 했고. 또 <Steve Allan Show>, <$64000 Question>과 같은 버라이어티나 퀴즈 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작진과 함께 밤을 새면서 다 봤지. 다 처음 보는 것이니 신기하기도 했고. 그런 행운이 없었어.”
그렇게 값진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오니 HLKZ의 경영주가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장기영 사장을 “아주 의욕적이고, 능력 있는 분”이라고 얘기했다. 경영자가 바뀌고 미국의 프로그램들 포맷을 도입해 방송은 나날이 자리 잡아 갔다. 그러나 3년 만에 원인 불명의 화재로 HLKZ는 사라지고 만다.“1950년대 미국 텔레비전을 현장에서 봤다는 게 나한테는 많은 도움이 됐지. 그런 걸 써먹지도 못하고 불이 나서 참 아쉬워. 그게 종로 텔레비전 얘기야.”
문화방송과 KBS TV의 개국을 지휘하다
종로 텔레비전 방송국 화재 후 최창봉은 2년간 공보부 방송문화 연구실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1961년부터 서울문화방송 개국 업무를 맡게 된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민간 상업방송이 탄생된 것이었다. 10월 개국을 목표로 그는 각 분야의 인재들을 스카우트해 방송 요원을 구성하고 PD, 아나운서, 탤런트, 성우, 기자 등 신입들을 채용했다. “불철주야로 MBC 개국 준비를 하고 있는데, 5.16이 일어났어. 인사동 합숙 여관에서 새벽에 총소리를 들었지. 라디오에서 군사혁명을 알리는 소리가 나왔던 게 새벽 5시였다고. 그때부터 채용은 물론 강습회 같은 것도 일일이 계엄 사령부의 집회 허가를 받아야 했어.”
개국을 눈앞에 두고 모든 준비를 진두지휘하던 최창봉은 뜻밖에 오재경 공보부 장관의 전화를 받는다. 오 장관은 국영방송의 개국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했다. “문화방송 개국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바로 KBS TV 개국 준비에 들어갔지.”
1961년 9월 하순. 그는 결국 KBS TV의 개국 업무를 맡기로 하고 다시 개국 준비에 들어갔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연내로 개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최소 1년은 필요하다고 보고를 했으나 당국의 계획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5년 전 HLKZ가 개국할 당시와는 상황도 크게 달랐다. 당시 15개국에 불과했던 TV방송 보유 국가가 1961년에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70여 개국으로 늘어나 있었다.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시작해도 앞선 나라들의 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3개월 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개국 준비 요원들이 모두 처음 모인 것이 1961년 10월 20일경이었어. 모두 종로 텔레비전에서 텔레비전 제작을 경험한 이들이었지. 화재 이후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개국 준비를 하게 된 거야.”
11월 중순, 그는 텔레비전 방송 요원들을 공개 모집했다. 프로듀서 부문에 1,800여 명이 응모할 정도로 새로운 매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았다. 그때 합격한 이들 중에 홍두표(전 KBS사장), 이남섭(연속극 <여로> 연출자) 등이 있었다. 1961년 12월 31일. 드디어 KBS TV가 개국했다. 그날 KBS 제1스튜디오는 긴장과 흥분에 휩싸였다고 한다. 아직 시멘트벽이 마르지 않은 가운데 박정희 의장의 신년 인사가 개국식을 알렸고, 넓은 무대에 80명의 풀 오케스트라, 대형 국악 연주단 등이 배치됐다. 당시 일본 NHK 특파원은 그때의 대형 쇼에 연신 감탄했다고 한다.
“연내 방송이 나간 것에 다들 만족해하고 기뻐했지. 그러나 내 마음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개국을 했으니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그렇게 KBS TV가 탄생되고, 그 후로 그는 미국에서 보았던 프로그램들의 포맷으로 여러 기획을 시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KBS TV는 공보부 산하로 행정조직 체제를 갖추면서 방송국의 분위기는 하루하루 달라져 갔다.
“방송을 실제로 기획하고 제작하는 스태프들은 대부분 임시직인 상황이었지. 방송 전문화가 턱없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했어. 그때 방송 전문인들에게 맡겼으면 방송 발전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지.” 결국, 일등 개국 공신이었던 최창봉은 1962년 3월 사표를 내고 만다.
(왼쪽) 1970년 11월 19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기념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오른쪽) 1991년 11월, MBC 문화방송 사장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 내방.
개국 전문가, 신화를 만들다
1963년 개국한 동아방송의 개국 중심에도 최창봉이 있었다.KBS를 나온 뒤 그는 동아방송 개국에 참여해 개국 전반을 진두지휘했다. 한국에서 처음 DJ 스튜디오가 만들어졌고, 뉴스 앵커의 시초인 뉴스 진행자도 그때 만들어졌다.
“뉴스 포맷이 새로웠지. 읽는 뉴스에서 보도하는 뉴스로 바뀌었어. 아나운서 대신 편집 책임까지 맡는 앵커가 출현하게 됐고.”
최창봉의 동아방송 시절에서 ‘앵무새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앵무새>는 5분간 방송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이었는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방송이었다.
“그 프로그램으로 감옥에 갔다 왔지. 서대문 교도소에서 40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무죄가 확정되기까지는 5년이 넘게 걸렸다고.”그 후 1971년 그는 8년간 일했던 동아방송을 그만두고 KBS로 돌아오게 된다. 개국해 놓고 떠난 지 꼭 10년 만이었다.
“TV 조정실 모니터가 10년 전 삐딱한 위치 그대로 있더란 말이지. 먼지가 수북이 쌓여서 말이야. 스튜디오에는 카메라 케이블이 여기저기 어지럽혀 있고, 사람들이 그걸 맘대로 밟고 다니더라고. 그날로 아주 호통을 쳤지. 중계차 하나가 없었어. 그때까지도 많은 방송 부문 직원들이 임시직으로 대우를 못 받고 있는 실정이었지.”
그는 다시 돌아온 KBS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해 KBS 공사화 문제가 처음으로 공론화한 것을 기회로 특단의 개혁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을 펼쳤다. 그는 업무 보고에서 여러 의원들에게 방송국원들의 불안정한 업무 상황 때문에 파생되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박정희 대통령의 “KBS 공사화에 나는 이의가 없소.”라는 전언을 받고 KBS는 공사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KBS에 돌아와 처음 한 프로그램 개편은 그해 10월부터 진행되었다. 먼저 보도 부분을 개편했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출연하는 <정당 토론회>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편성했다. 지금의 토론 프로그램의 전신이었다. 민영방송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드라마로 <춘향전>과 같은 ‘한국 고전 시리즈’를 시작했고, 교양물을 오락 시간대에 편성했다. 그리고 <여로>와 <꽃피는 팔도강산> 등이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어 국민 방송으로서의 KBS 이미지가 착실하게 확립돼 갔다.
우리들의 전설
<한국의 방송인>(2002)에서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박명진 교수는 ‘나의 PD 시절, 우리들의 전설’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고 최창봉에 대해 표현했다. 그리고 ‘젊은 PD들은 최 선생을 거의 영웅처럼 받들어 모셨던 것 같다. 한 조직의 장에 대해 그 구성원들이 그렇게 한결같은 애정과 존경을 가졌던 조직을 나는 그 후로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다.’고 하였다.
“작년에 ABU 회장으로 KBS 김인규 사장이 선출되었는데,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야. 개국할 때와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을 이뤄낸 거지. 앞으로 나날이 발전하려면 급히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에 빨리 대응을 해야지.”그는 ‘모든 일에 팀워크가 잘 이루어져야 하며, 도자기를 뜨거운 가마 속에서 며칠씩 구워야만 명기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방송국 분위기도 늘 창조적인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어야 좋은 방송이 나온다.’고 저서 <방송과 나>에 밝힌 바 있다. 그 생각이 지금도 변함 없는지 궁금했다.
“프로그램은 집단 창작이란 말이야. 뜨거워야 되지. 열기가 있고, 실패도 있고, 환희도 있어야 재미난 거지. 좋은 방송은 한두 마디로 얘기가 안 돼. 결과 하나만으로 좋은 방송을 논할 수는 없어. 방송은 예술에 가깝기 때문에 실천 과정에서 평가가 돼야지 방정식처럼 말로 할 수 없다는 결론이야. 다만 우리나라에 방송 편성 비평에 대한 것이 없다는 게 아쉬워.”
선진국의 수준 높은 방송 비평에 대한 얘기가 한동안 이어졌다.지면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는 지금도 방송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방송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한국 방송의 더 나은 발전을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37년간 제 몸 안의 에너지를 방송 하나에 다 태우고 전설로 남은 최창봉. 살아 있는 전설에 대한 경외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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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방송역사 살아있는전설 최창봉 회장님 출판기념회 http://blog.daum.net/jc21th/17780349
연속극 여로, 그시절의 KBS 중앙방송국장 최창봉선생님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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