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튀링겐 주에 있는 문화도시 바이마르를 둘러보았습니다.
바이마르는 괴테를 중심으로 한 독일 문학의 중심지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도시로, 당시의 문화와 유적들이 고전주의 바이마르(Classical Weimar)란 테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기도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답사한 실러하우스 괴테하우스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는 바이마르에서 괴테,실러, 바그너, 히틀러가 묵었던 300년 된 유서깊은 엘리펀트 호텔에서 숙박하고, 호텔이 있는 광장의 구시청사 지하의 고풍스런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괴테의 집과 실러의 집, 헤르더교회, 성화화가인 크라나흐와 괴테의 아내가 묻혀있는 야곱교회, 괴테극장과 바우하우스 등을 답사하였습니다.
바이마르를 거쳐간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묵고간 1696년에 지어진 엘리펀트호텔. 사진에 보이는 2층 발코니에는 이 호텔을 거쳐간 유명인들의 조각상을 전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우리가 방문했을때는 마르틴루터가 있었습니다. 내년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라 그때까지 쭉 루터를 전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발코니는 단골 투숙객이던 히틀러가 숙박하면서 마르크트광장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호텔 객실이 비좁지만 고풍스러웠고 묵직했던 수동열쇠꾸러미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괴테는 은행잎을 좋아했고, 은행잎은 바이마르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곳곳에 은행잎 장식과 은행잎박물관도 볼수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1815년 괴테가 쓴 은행잎에 관한 시입니다.
바이마르가 <고전주의 바이마르>란 주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표시하는 간판입니다.
실러하우스.
실러는 1787년 그의 나이 30세에 바이마르에 정착하고 45세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의학을 전공하고 군의관으로도 근무했지만 재능을 보인 문학활동을 이어갔고, 평민신분으로 자유로운 이주도 못하며 평생 가난하게 문학활동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귀족인 아내 샤로테와 결혼하며 형편이 나아지고 나중에 귀족작위도 받게 되지만 늘 영주의 도움없이는 살수 없어 작품활동으로 근근히 살아갑니다.
실러의 희곡을 괴테가 연극으로 올리면서 괴테와 친분을 쌓고 문학과 예술적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죽을때까지 이 집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묘쓸돈도 없던 실러에게 영주가 묘자리를 내주었고, 실러 사후에 괴테가 자기 무덤옆으로 실러를 이장해주었다고 합니다.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썼던 실러이기에, 실러의 <환희의 송가>는 프랑스대혁명때도 사용되고, 이를 계기로 실러는 프랑스대혁명의 명예시민으로 위촉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헤르더교회. 작가이자 목사였던 헤르더 동상이 교회앞에 서있습니다.
헤르더교회에는 루터가 이용한 설교대와 성화화가 크라나흐의 아들이 그린 제단화가 유명합니다. 크라나흐의 아들 역시 화가였는데, 그가 그린 성화를 보면, 예수님의 피가 우측의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모습입니다. 우측의 사람들은 예수님 바로 옆부터 순서대로 세례자 요한, 크라나흐, 마르틴루터이며, 예수의 피가 떨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체국.
괴테극장과 그 앞의 괴테와 실러의 동상.
괴테는 이 극장에서 25년 동안 극장장으로 일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1919년 독일을 공화국으로 정하는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된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합니다.
건축대학으로 잘 알려진 바우하우스.
바로 아래 사진은 바우하우스의 설계로 제작된 백화점 건물.
우리가 묵었던 엘리펀트호텔이 있는 마르크트 광장앞에 있던 푸드트럭의 수제숯불소시지. 값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 우리도 간식으로 사먹었습니다. 다들 맛있다고 좋아하셨지요.^^
야곱교회 마당에 있는 묘지들.
야곱교회는 괴테가 15년간 결혼하지 않은채 동거하던 16살 어린 아내와 둘이서만 결혼식을 올린 곳이며, 평민이던 그 아내가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실러도 이곳에 묻혀있다가 나중에 괴테묘 옆으로 이장되었고, 성화화가인 크라나흐의 무덤도 여기에 있습니다.
괴테하우스.
괴테가 세들어 살던 집인데, 영주가 선물로 줘서 괴테 소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집 내부의 유물은 모두 괴테가 쓰던 그대로이며,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괴테를 파우스트 등 유명한 작가로 기억하지만, 괴테는 작가일뿐아니라 정치가이자 과학자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넘쳐나 많은 시도를 했으며 당시 괴테와 또래였던 젊은 영주의 전폭적인 지원과 보호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괴테하우스를 돌아보니 괴테의 열정과 풍부한 아이디어의 흔적이 듬뿍 묻어났습니다.
노년의 괴테의 초상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괴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괴테에 대한 해설을 들으면서 괴테가 색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식당은 밝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노란색 벽지로 꾸몄으며, 예술을 위한 방은 파란색으로 꾸몄다는데 이는 그에게 파란색이 느낌을 주는 색이어서라고 합니다. 어린 멘델스존이 이 괴테의 파란방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괴테의 작업실 색은 녹색이었는데, 녹색은 그에게 집중해서 일할수 있는 색이었다고 합니다.
화려하고 기발했던 괴테지만 자기가 쓰던 개인방 만큼은 작고 소박했다고 합니다. 그는 작고 소박한 방에서 임종을 맞았다고 합니다.
괴테가 사랑한 여인들
위의 사진은 괴테가 결혼한 16살 연하의 아내로 괴테가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그 아래의 여인은 결혼전 괴테가 짝사랑했던 7살 연상의 유부녀로 괴테는 그녀에게 10년동안 1700통의 편지를 썼고, 이 여자와 '영혼의 친척'이라고 말할 정도로 깊이 신뢰하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괴테가 영주의 허락으로 22개월간 떠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면서 끝났다고 합니다.
바이마르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괴테하우스 바로 옆집인 괴테가 즐겨찾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괴테가 자주 먹었다는 메뉴를 우리도 맛보며 유서깊은 바이마르 고전주의 문화탐방을 마무리합니다.
첫댓글 괴테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능력있는 작가이며 정치가였던 같습니다.
괴테가 즐겨먹던 스테이크를 먹어보는 즐거움도 쏠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