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만에 가장 이른 추석을 맞이하고 있다. 더운 추석이라 햅쌀로 제주를 지어 차례상에 올리긴 어렵다. 하지만 여름에 채취하는 연잎을 이용한 귀한 청주를 빚을 수 있게 됐다면 다행일까. 은근한 향미가 으뜸으로 꼽히는 전통 청주 연엽주 말이다.
전통주공방 '우리술사랑방'은 지난 14일 차례주로 연엽주를 빚는 특강을 실시했다. 이어 21일에는 벼누룩 띄우기를 진행했다. 쌀누룩, 밀누룩이 아니라 벼누룩? 도정하기 전의 나락 상태에서 누룩을 만드는 것 또한 좀체 보기 힘들다.
이른 한가위 앞두고 전통주공방을 찾았다
누룩 만들고 고두밥 짓고 덧술 만들고…
기계 힘 안 빌리고 가양주 맥 잇는 사람들
차례상 올릴 마음에 추석이 기다려진단다
요즘 세상에 귀찮음을 마다하지 않고 옛날 방식대로 술을 빚는 사람들이 있다니…. 현장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인공 방식을 일절 쓰지 않고 오로지 우리 재료만 갖고 모두 손으로! 기계도, 인공 감미료로 없었다. 오직 정성으로만 술을 빚는 가양주 마니아들의 내공 또한 만만치 않았다. 누가 가양주 전통의 맥이 끊겼다고 했는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 한가위 차례주와 음복례에 쓰일 제주를 빚고 난 가양주 마니아들의 표정은 한가위 달덩이처럼 밝게 빛났다.
■"술을 빚는 건 정성으로 생명을 키우는 것""뱃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하는 것 같은 감동이었어요!"
연엽주를 빚는 현장에서 만난 이정출(55·부동산 중개사) 씨는 가양주의 매력을 알게된 지 2년째다. 수제 술 빚기에 푹 빠져 지인들 사이에 우리 술 전도사로 통한다. "내 손으로 빚어 나눠 마시는 즐거움은 돈 주고 사 먹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지요!"
그는 자택 아파트에 술항아리를 놓아두고 매일 아침 출근길에 귀를 귀울인다. 그때마다 설레고 두근거린단다. 부글부글 거품이 괴다가 뿅뿅 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게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느껴져서다. "너무 예뻐서 항아리를 쓰다듬고 안아 주고 합니다. 제 마음이 담긴 살아 있는 생명체라서요!"
며느리로서 차례상을 차리면서 지난해 추석 처음으로 가양주를 올렸다. 제주로 올린 단호박 막걸리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상, 아니 작은 충격파를 던졌을 정도다. 음복례를 마친 뒤 남은 술을 두고 시아주버니들끼리 쟁탈전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뿌듯하고 자부심이 생기니 얼마나 좋은가!
올 설에는 소곡주를 빚어 올렸고, 이번 추석 때는 연엽주로 또 한차례 파란을 일으켜 볼 작정이다. 그 생각만 하면 명절 스트레스는커녕 은근히 생기가 돋는다고.
"채주한 직후 맛을 보았을 때 제가 얻은 만족감보다는 함께 나눈 분들의 반응이 항상 더 강렬했어요." 그런 짜릿함과 재미가 술 재고를 바닥나지 않게끔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중년 남성들의 술 빚는 즐거움연엽주를 빚기로 한 날 우리술사랑방에 들어섰더니 우선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흡사 메주처럼 줄줄이 매달린 누룩과 생각보다 비중이 많은 중년 남성 참가자들.
누룩은 연잎을 우린 뜨거운 물에 곡물가루를 섞은 뒤 사각으로 성형해 말린 것이다. 야생 효모가 많은 연잎으로 꽁꽁 감싼 뒤 통기가 좋은 곳에 매달아 뒀다. 금정산성토산주 양조장에서 누룩을 뉘어 놓고 온풍기를 틀어 건조하는 누룩방을 본 적이 있지만 매단 모습은 처음이다. 여름이라는 계절 특성상 그렇다고.
한편 직접 누룩을 띄워 술을 빚는 양조장은 국내 한두 곳밖에 없고, 나머지는 예외 없이 외부에서 구입해서 쓰는 실정이라 전통주로 부르기 민망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전통 누룩이 외면당하는 건 만들고, 말리고, 술 발효에 넣는 과정 모두기 까다롭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취미로 가양주를 만드는 일반인들이 직접 누룩을 띄우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니 대견하고, 반갑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이 끝난 뒤 본격적인 술 담그기 돌입. 잘게 자른 연잎을 섞은 고두밥을 넓게 펴서 식혔다. 이것을 미리 누룩을 이용해 담가 놓은 밑술과 충분히 주물러 섞은 뒤 발효통에 넣었다. 체온이 전달되게끔 꼭 맨손으로 주물러야 한다! 잘 섞인 걸 확인하고는 큼직한 연잎 한 장을 덮어 뚜껑을 닫는 것으로 덧술 작업 마무리. 연잎이 모두 네 단계에 걸쳐 쓰였으니 은근한 연의 향미가 제대로 살아날 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여성 참가자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중년 남성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두밥을 식히고 덧술을 섞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참가자 9명 중 남성이 4명. 모두 다 "너무나 즐거운 취미생활"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공방에서 초중급 16주 과정을 수료한 석병덕(59) 씨는 "회사에서 퇴근한 뒤 고두밥 짓고, 버무리고 하다 보면 새벽 2~3시가 훌쩍 지나간다. 그래도 즐겁다"고 했다. 술을 빚기 시작하면서 좋아하던 낚시 취미까지 버렸다고.
■술 익는 향기와 소리에 마음은 한가위 발효통에 넣은 지 1주일. 진짜 부글부글, 뿅뿅 소리까지 나면서 알코올 층이 형성되는게 확연히 보였다. 이렇게 쉬웠나? 누구나 전통 청주를 담글 수 있는 걸까?
우리술사랑방의 손승희(38) 대표는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비용 부담보다는 시간 투자가 많아서다. 이날 곡물 3㎏을 들여 연엽주를 담그는 데 들인 비용은 3만 원. 문제는 그 전후의 손품과 마음 씀씀이.
이날 연엽주를 담그기 전에 누룩을 띄우고, 연잎을 구해 감싸 말리고, 연잎을 우린 물로 밑술을 담그는 선행 과정은 미리 손 대표가 끝냈다. 이런 과정이 생략된 덕분에 바로 덧술 단계에 돌입해 2시간 만에 이양주(밑술, 덧술을 거치는 방식)를 담근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참 쉽네"라면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하지만 어렵게만 보이는 누룩 띄우기나 밑술, 덧술 과정도 일단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집에서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손 대표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가양주 레시피에는 함정이 있다고 했다. "그대로 따라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경험이 중요해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발효통에 들어간 덧술은 25도를 유지한 채 3주가 지나면 원주에 해당하는 '전내기'(경상도 사투리로 '전배기') 상태가 된다. 채주를 거쳐 맑은 부분을 떠내면 5L의 청주를 얻게 될 예정이다. 냉장 숙성해 두면 맛이 향상되니 시기적으로 추석 차례상과 음복례 때 내면 딱 맞을 듯 싶었다. 귀한 연엽주가 생긴다니 마음이 풍족해졌다. 주변에 나눠줄 수 있다고 소문이라도 내 볼까?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전통주 빚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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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누룩 성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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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누룩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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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고두밥 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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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덧술 만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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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원주 거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