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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세계신문=김용필 편집장 ] "이 책의 대부분은 한국 땅에서 형성된 재한화교의 역사와, 원적은 중국 본토이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성)의 재외국민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루었다. 1992년 한·중외교 수립 이후 한국으로 유입해 온 중국동포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중국인 집단으로 형성된 역사와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아버지와 탕후루 지은이 | 우매령 발행일 | 2016. 6. 10.
출판사 | 종합출판 범우(주) 재한화교 작가의 수필은 화교 사회에 대한 호소이고, 시대와 역사를 알리는 공헌이다. 이 수필들은 중국문화에 대한 향수요, 이념과 정치적으로 얽매여 온 환경에 대한 분노이다
우매령 작가의 수필들은 모두가 중국문화에 대한 향수이며, 이념과 정치적으로 얽매여 온 환경에 대한 분노이다. 하지만 작가는 환경과 현실에 대한 울분과 고독과 분노를 객관화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잘 극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치열한 삶의 아우성이고, ‘삶 그 자체이며 향기’이기도 하다. 또 작가의 이 수필은 화교사회에 대한 호소이고, 시대와 역사를 알리는 공헌이라고 할 것이다. 그녀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원정군으로 왔던 오장경이나 위안스카이의 청군과 함께 형성된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분야에서 역사가가 아닌, 문인으로서 그 시기의 어려움과 성격들을 문학으로서 쓴 작품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은 우매령 작가가 시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근·현대의 한·중관계사나 화교사의 중요한 역사적 공헌이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이나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국적에 대한 표류의 어려움에 대한 고발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한반도와 중국의 이념적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실감시킨다. 유럽연합은 국경과 문화적 차이가 없어져 가는데 반해 그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항의도 크다. 다문화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배달의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국의 민족적 의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해 준다. - 신용철(역사학자, 수필가, 경희대 교수) | |
국내 첫 화교 등단작가 우매령수필집 『아버지와 탕후루』 출간
중앙일보 | 신준봉.권혁재 | 입력 2016.06.27. 01:21 | 수정 2016.06.27. 10:47
그들은 이 땅에서 무려 130년이나 살았다. 우리 현대사의 ‘타자(他者)’를 꼽는다면 1순위에 놓여야 할 화교들 말이다. 많을 때는 10만 명에 이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동안 글 쓰는 문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얘기다.
화교 수필가 우매령(于梅玲·45)씨는 그런 어두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다. 네 살 때 산둥성에서 건너온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2013년 계간지 ‘창작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도 됐다. 현재 국내 화교사회가 인정하는 첫 등단작가란다.
그가 최근 수필집 『아버지와 탕후루』(범우)를 출간했다. 탕후루(糖葫蘆)는 산사나무 열매 등을 꼬치에 꽂은 후 설탕물을 발라 굳힌 중국 북방지역의 간식이다. 말 그대로 손 가는 대로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교로서 느껴야 했던 자신의 어려움과 부모 세대의 기억, 고통을 주로 쓰게 됐다는 얘기다. 탕후루는 생전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간식이라고 한다.
책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짐작할 뿐 자세히는 몰랐던 화교 사회의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국내 화교의 출발점은 1882년 임오군란이다. 일제에 맞선 명성황후가 도움을 요청하자 출병한 청나라 군대와 함께 조선땅을 밟은 40여 명의 군역상인이 최초의 화교다. 당시 청나라 해군제독 오장경(吳長慶)을 기리는 사당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가 한때 ‘원세개(袁世凱) 사당’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서울 동대문 부근에 방치돼 있다시피하다 지금은 연희동 한성화교중·고등학교 뒷산으로 옮겨 신축돼 있다. 한데 오장경을 기리는 기일 제사에는 주한대만대표부 외교관이 배석한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강력한 반공 방침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 있던 화교들에게 일률적으로 대만국적을 준 탓이다.
화교들의 춘계 여행 때는 반대다. 중국대사관이 참석한다. 중국과 대만 양국이 그렇게 교통정리 했다. 지난 24일 만난 우매령씨는 마침 오전에 오장경 기일 제사를 드린 참이었다. 그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들과 구분해 이전부터 살던 화교를 구화교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구화교에 신화교, 한·중 수교 이후 일자리를 찾아 쏟아져 들어온 중국말 능통한 중국동포(조선족) 사이에 미묘한 오해와 갈등 기류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우매령씨는 외국인 할당을 이용해 서울대 중문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된 후 건설일에 뛰어 들었다. 15년간 동생과 함께 건설 중장비 임대업을 하며 생활해 왔다. “올 하반기 중국으로 건너가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며 서툰 중국어를 가다듬은 다음 중국문학 석·박사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학교를 다닐 때 애국가를 부르는 시간이 되면 따라 불러야 할지 망설였던 화교 소녀가 본격적인 뿌리 찾기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현재 구화교는 한국 정부의 출입국관리소에는 2만 명쯤이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1만 명”이라고 했다. “이재에 밝아 잘 산다는 얘기도 옛말이어서 형편 어려운 사람이 많고 중국이나 대만국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약해 차츰 숫자가 줄고 있다”고 소개했다. “세금은 한국인과 똑같이 내는데도 각종 복지혜택을 받지 못한다.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재한화교 작가의 수필은 화교 사회에 대한 호소이고, 시대와 역사를 알리는 공헌이다.
이 수필들은 중국문화에 대한 향수요, 이념과 정치적으로 얽매여 온 환경에 대한 분노이다
우매령 작가의 수필들은 모두가 중국문화에 대한 향수이며, 이념과 정치적으로 얽매여 온 환경에 대한 분노이다. 하지만 작가는 환경과 현실에 대한 울분과 고독과 분노를 객관화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잘 극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치열한 삶의 아우성이고, ‘삶 그 자체이며 향기’이기도 하다.
또 작가의 이 수필은 화교사회에 대한 호소이고, 시대와 역사를 알리는 공헌이라고 할 것이다. 그녀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원정군으로 왔던 오장경이나 위안스카이의 청군과 함께 형성된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분야에서 역사가가 아닌, 문인으로서 그 시기의 어려움과 성격들을 문학으로서 쓴 작품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은 우매령 작가가 시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근·현대의 한·중관계사나 화교사의 중요한 역사적 공헌이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이나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국적에 대한 표류의 어려움에 대한 고발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한반도와 중국의 이념적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실감시킨다. 유럽연합은 국경과 문화적 차이가 없어져 가는데 반해 그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항의도 크다. 다문화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배달의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국의 민족적 의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해 준다. - 신용철(역사학자, 수필가, 경희대 교수)
| 지은이 우매령 |
화교(華僑) 2세로 1971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부친이 네 살 되던 해(1940年), 그의 모친과 누님을 따라 중국 산동성(山東省)에서 건너 왔으며 이데올로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의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성) 재외국민이 되어 이후 줄곧 한국에서 생활했다. 모친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한인(韓人)으로 해방을 맞아 한국의 고향땅으로 귀국한 분이다. 어려서 신체가 허약한 탓에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라며 다섯 살 무렵부터 모친의 가르침으로 한글을 익혔다. 한국인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했고, 문학과 미술 방면에서 소질을 보였다 한다. 서울대학교 입학이 불허되자 좌절하여 문학적 감각을 상실했고 작가의 꿈도 접었다. 건설장비 임대업에 종사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창작수필을 통해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재한화교(在韓華僑) 역사상 최초의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다. 문학박사 학위를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
Email : shenwoo123@naver.com
| 차 례 |
서문 5
1장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5월에 떠나는 소풍 15
장미의 향 20
어느 화교華僑의 결혼식 26
메이화梅花 31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36
6월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41
9월의 멋진 날 47
치파오旗袍 51
폭죽 소리 57
2장 꽃샘바람이 불어오면
꽃샘바람이 불어오면 65
만터우饅頭 70
인천 차이나타운 75
짜장면과 옛 추억, 그리고 에피소드 80
추억의 맛, 사는 맛 86
오후의 단상斷想 90
호수공원의 해바라기 94
달콤한 비밀 99
3장 주니핑안祝你平安
대만臺灣, 중화민국이라는 나라 115
빙씬冰心과 옌타이煙台 120
주니핑안祝你平安 125
휴식 같은 바다 130
산산조각 134
생명의 조건 138
속단續斷은 금물 143
어떤 만남 148
월병月餠 153
4장 양귀비꽃 피고 지면
아버지와 탕후루糖葫芦 161
양귀비꽃 지고 나면 168
짜장면의 후예들 174
수인선水仁線 협궤열차狹軌列車 179
수려선水驪線 기찻길과 아까시향 184
왕王서방 연서戀書 190
돌잔치 197
조카에게 주는 선물 203
글쓰기 210
서평(신용철·경희대 명예교수) 215
| 서 문 |
1978년 한국인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등교하던 날이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나에게 중국인이라 말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뭔지 한국이라는 나라가 뭔지 몰랐다. 여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화교라는 신분을 숨기며 살아온 나의 세월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 아픔조차도 아련한 추억처럼 그리움으로 남았다.
사는 건 다소 불편하고 힘이 들었지만, 한국 땅에서 화교로 태어나서 행복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고통의 연속이요, 견디기 힘든 슬픔과 아픔 속에서 인간의 삶은 지속되는 것이니까. 모양새만 다를 뿐 어느 누구의 삶을 들쳐본들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니까.
나는 이제 어딜 가나 화교라고 당당하게 신분을 밝힌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1992년 한·중 외교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화교라 소개하면 “그렇구나!”라고 한국인들이 받아들였는데, 중국동포들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중국에서 돈 벌러 온 조선족으로 착각한다는 거다. 나를 대만에서 건너 온 대만인이라 여기는 한국인과 시비가 붙은 적도 있었다. 내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 가짜 화교인가요? 라고 반문을 하였더니 의아해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사적인 특수한 배경을 지닌 화교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을 기준으로 재한화교의 역사는 130년을 넘어섰다. 수많은 선대의 화교 어르신들이 고향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얼마 남지 않은 화교들은 자식들에게만큼은 한국 국적을 취득시켜 준다고 한다. 한국 땅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이렇듯 또다시 1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다면 재한화교의 후손들은 완전한 한국인으로 동화되어 내가 모르는 옛적에 선조들만이 중국에서 건너온 것일 뿐, 완벽한 한국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역사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이질 듯 다시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대부분은 한국 땅에서 형성된 재한화교의 역사와, 원적은 중국 본토이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성)의 재외국민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루었다. 1992년 한·중외교 수립 이후 한국으로 유입해 온 중국동포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중국인 집단으로 형성된 역사와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또 한 번의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한국 땅에서 화교로 태어나고픈 바람이다.
- 5월의 어느 날 한국화교 우매령
| 서 평 |
◎ 재한화교 작가의 글쓰기
-우매령 작가의 수필에 대하여-
시처럼 짧고 정형적이거나 소설처럼 길고 픽션이 아닌 수필이란 문학의 장르는 형식과 대상의 제한 없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작가의 주관적 내용이나 또는 사회의 객관적 내용을 쓰면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형식과 대상에 제한이 없다한들 수필에는 엄밀한 절제와 금도가 필요하다. 수필은 작가의 사유와 체험을 객관적으로 내면화하여 도달한 삶의 철학을 표현해야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재한화교인 우매령 작가는 이 책에 실린 35편의 수필에서 한국 출생의 화교로 살면서 한국인이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인도 아닌 이방인처럼 40대 중반까지의 고뇌에 찬 치열한 삶을 진솔하고 흥미롭게 쓰고 있다. 그녀가 학창시절에는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성)이라는 국적을, 1992년 한·중외교 수립 이후에는 대륙의 중국국적을 가져야 하는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작가의 삶은 항상 엉거주춤하게 국적의 변이와 문화의 정체성 및 현실의 환경에 적응하며 소외와 고립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신병으로 고생하느라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고, 전혀 낯선 풍토에서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중장비 임대사업에 종사하면서 치열하고 맹렬하게 15년을 뛰어다녔다. 그래서 작가는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각박한 환경 때문에 그러한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작가는 사업을 접고 중국에 가서 어려서부터의 꿈인 중국문학을 공부하려는 새롭고 모험적인 출발을 시작하려 한다. 작가가 40대 중반까지의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치열하게 살아 온 날들을 이 수필집에 담았다. 작가의 40여년의 삶의 회고(四十自述)이자 미래에 대한 출발과 각오이기도 하다.
주머니속의 송곳(囊中之錐)이란 속담처럼,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작가의 글쓰기 재능을 우리는 이 수필들에서 만난다. 작가의 글쓰기는 단순히 한가한 사람들의 체험담이 결코 아니다. 한 여성화교 작가의 아픔이며 삶에 대한 사랑이고, 시대와 역사에 대한 비평이며 아울러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작은 호소이다.
제1장에서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는 중국의 대학에서 만난 북한 유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에게도 하나의 아픔을 준다. 한국인이 아닌 화교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메이화(梅花)>, <9월의 멋진 날>, <치파오(旗袍)> 등은 중국 문화에 대한 짙은 향수를 보여준다. <어느 화교(華僑)의 결혼식>은 한국인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화교의 변화된 생활과 그에 따른 인생관의 갈등과 입장을 말해준다.
특히 <장미의 향>은,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성화교중·고등학교 뒤의 언덕으로 옮겨진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오장경 사당)에 얽힌 이야기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군에 관한 것으로 한국근대사와 화교사회 형성의 역사를 수필로 쓴 것이다.
제2장에서 <꽃샘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글은 화교 신분을 숨기고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아픔, 그러한 환경 속에서 그녀를 끝까지 이끌어주고 보호해주시던 이종섭 선생님에 대한 서글픈 추억이 더욱 어려운 삶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만터우(饅頭)의 맛, 인천 차이나타운의 역사와 현재, 共和春(공화춘)에서 시작된 짜장면의 역사, 어머니가 싸주던 도시락 반찬에 대한 학교시절의 불만 등이 화교학생으로서의 생각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오후의 단상(斷想)>과 <호수공원의 해바라기>는 사업전선에 뛰어든 그 어려운 과정을 문학적인 감성을 이입하여 드러냈으며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힘든 내용으로 그의 치열한 삶을 잘 보여준다. 사업상의 예를 든 <달콤한 비밀>이라는 장문의 수필은 ‘물건은 제 값 주고 사야지, 세상에 특별히 싼 것은 없다’라는 우리에게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교훈을 준다.
제3장의 <대만(臺灣, 중화민국)이라는 나라>라는 글 속에서의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성(臺灣省)에 대한 작가의 심정은 서글프지만 현실적인 삶을 보여준다. 해방 후 선택의 여지없이 재한화교들의 조국처럼 된 대만은 가보지도 않았고, 중화민국 여권을 사용해보지도 않았으나 애틋한 정을 느낀다. <빙씬(冰心)과 옌타이(煙台)>는 중국 아동문학의 대표 작가인 빙심 여사 기념관을 관람하면서 써 내려간 글이다. ‘왜 하필 옌타이샨(煙台山) 공원에 그러한 기념관을 세웠을까?’라는 화두를 놓고 작가는 많은 생각을 한다.
유학시절에 중국인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주니핑안(祝你平安)>과 <월병(月餠)>이라는 작품 속에서도 아버지의 고향인 중국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휴식 같은 바다>는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하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면 중국 산동성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를 찾는다하니 역시나 중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제4장의 <양귀비꽃 피고지면>과 다수의 글 속에서도 작가는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하다. 아버지와 함께 중국을 처음 여행하면서 느끼던 감격과, 양귀비꽃을 바라보면서 중국의 근대사를 뒤 흔든 아편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꽃에 마음이 흔들림은 작가의 순수함을 말해준다. <짜장면의 후예들>이라는 글의 내용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한·중관계의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음식으로서의 짜장면이 한국인들에게도 그렇고, 한국화교들에게도 삶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거다.
수인선(水仁線)과 수려선(水驪線)의 협궤열차(狹軌列車) 기차 길에 얽힌 이야기는 가슴을 뭉쿨하게 한다. 이미 우리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것으로 작가에게도 커다란 느낌을 주었던 모양이다. <왕(王) 서방 연서(戀書)>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비하하면서 부르던 노래로 화교들의 한국 내 위치를 흥미 깊게 표현해주고 있다. <돌잔치>와 <조카에게 주는 선물>을 읽다보면 작가가 아무리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땅에서 살았어도 문화적으로 매우 우월한 중국인에 대한 긍지를 스스로 잃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글은 마음속의 도(道), 즉 사상을 싣는다고 한다. 16세기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로서 문인인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위대한 작품은 분함이 북받쳐 쓰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분이 일어나지 않고 쓰는 글은 병이 나지 않았는데도 신음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강력한 느낌이 일어나서 억누를 수 없거나, 혹은 그 정이 너무 격해서 말을 부드럽게 할 수가 없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내 마음속에서 이것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강력한 마음속의 욕구가 있어야 작품을 쓴다는 것이다.
사실 우매령 작가의 수필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분함이 절실한 에너지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녀의 수필들은 모두가 중국문화에 대한 향수이며, 이념과 정치적으로 얽매여 온 환경에 대한 분노이다. 하지만 작가는 환경과 현실에 대한 울분과 고독과 분노를 객관화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잘 극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치열한 삶의 아우성이고, ‘삶 그 자체이며 향기’이기도 하다.
또 작가의 이 수필은 화교사회에 대한 호소이고, 시대와 역사를 알리는 공헌이라고 할 것이다. 그녀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원정군으로 왔던 오장경(吳長慶)이나 원세개(袁世凱)의 청군과 함께 형성된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분야에서 역사가가 아닌, 문인으로서 그 시기의 어려움과 성격들을 문학으로서 쓴 작품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은 우매령 작가가 시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근·현대의 한·중관계사나 화교사의 중요한 역사적 공헌이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이나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국적에 대한 표류의 어려움에 대한 고발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한반도와 중국의 이념적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실감시킨다. 유럽연합은 국경과 문화적 차이가 없어져 가는데 반해 그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항의도 크다. 다문화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배달의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국의 민족적 의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해 준다.
‘나는 화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라며 요란한 폭죽 소리를 중국스러운 중국으로 표현한 것이나, 중화민국 여권을 사용해 본적이 없어도 대만도 나의 조국이라며, 작가는 중국과 중국문화를 사랑한다. 세상을 달리한 아버지와 이방인의 아내로 고생하며 다섯 자녀를 키운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한국의 어려운 생활에서 도와 준 이종섭 선생님을 비롯한 작가의 길로 이끈 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만은 변함이 없었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이 글쓰기를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또다시 글쓰기 작업에 도전 하니 이젠 상에 대한 애착도 없고, 멋지게 잘 써야겠다는 압박감이 없어 마음만은 편안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스스럼없이 써내려 한다. 여전히 글쓰기는 어렵고 힘든 작업이지만 이번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노력은 결과를 속이지 않는다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 라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글을 쓰려는 작가의 순수하고 진솔한 동기와 확고한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다.
- 신용철(역사학자, 수필가,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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