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자의 모습
마 18:1-4
예수님의 제자들도 큰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서로 ‘누가 큰 가’를 다투었습니다. 서열의식이 굉장했습니다.
제자들 각자 자기가 서열이 제일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자가 되고 싶어서 제자로 나선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를 통해서 노골적으로 큰 자리 로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마음먹고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마18: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기 ‘그때에’란 어떤 때를 가르치는가?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해서 주님께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성전세만 내주셨지요? 이런 것이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새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주님의 의중을 물었던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누가 더 크냐’로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마18:2,3)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당황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던 때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돼서 팔리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던 때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다. 그래야 큰 은혜를 받는다.
배움의 본이다. 어린이는 항상 물으며 배우기를 사모한다. 이처럼 하나님 알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리고 열심의 본이다. 어린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 이처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델로 한 어린이를 저희 가운데 불러 세우셨습니다.
모델(model)이란 본보기가 되는 대상이나 모범 혹은 완성된 작품의 대표적인 보기를 모델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본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본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본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어린이입니다.
첫째 ; 겸손의 본입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4절)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마음)을 낮추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높이는 욕심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겸손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신앙 덕목이다(신8:2; 대하 7:14).
그래서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이 겸손했지만 모범을 보이신 가장 대표적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사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어린이가 왜 겸손할까요? 어린이는 나라는 자아가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습니다.
(사7:16)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그랬듯 자아형성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개성 자기스타일 자기취향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해지는지 모릅니다. 이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그 사랑은 한결같고 다 같이 예수 믿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풍족히 받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아의 차이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겸손하고 진실할지 모르나 깨뜨려야 할 자아가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 기도의 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11:25)
데레사 수녀는 기도의 여정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이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로 ‘구송 기도(口誦 祈禱)’라고 하였다.
구송 기도는 말 그대로 입으로 읊으며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교회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일정한 기도문을 만들어 기회 될 때마다 그 기도문을 읊으며 드리도록 하는 기도는 모두 이 기도에 속합니다.
데레사 수녀는 잘 드린 구송 기도야말로 수준 높은 기도가 될뿐더러 영혼을 높은 경지로 인도해주는 최상의 기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지닌 기질, 교육 정도, 영혼의 성숙 정도에 따라 각자에게 더 잘 맞는 기도 방법을 활용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갖도록 권했습니다.
구송기도는 무학, 문맹이라도 누구든지 쉽게 기도를 통해 높은 하나님의 영의 세계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린이들은 무지할까요? 놀랍게도 어린아이들은 날마다 배우길 원합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너무 물어서 어른들이 대답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 인생의 상당 부분을 그 때 배우는 것입니다. 나무라다 물음이 그치는 순간부터 아이의 지적 성장은 멈추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들은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를 갈망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교회생활 잘하고 있는데 뭘 그러냐 하며 종교적 형식으로 만족할 뿐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7:6)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달랐습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기도의 교훈입니다.
셋째 : 열심과 섬김의 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눅18:17)
“받들지”의 받들다는 동사 '데코마이'로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손에 쥐다', '인정하다', '공인하다'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마샬(Marshall)은 '받들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다'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쉴라터(Schlatter)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이의 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받들다. 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하였다.
이는 어린이는 의심하지 않고 순수하게 믿고 또한 그에 따른 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케익을 들고 케익을 줄테니 운동장을 1바퀴 돌아오라고 하면 그 아이는 케익을 얻기 위해 열심히 운동장을 돌아옵니다.
무엇이든지 열심을 다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또한 어린아이의 특징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하루 종일 가만있지 못하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밖에 나아가 뒤어 놀려고 합니다. 그러다 감기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특성입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는 천국을 향한 열심과 열정이 있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어린아이만큼 움직이지 못하고 열심도 약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섬김도 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