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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은혜 위에 은혜
지난번에 우리가 요한복음 1장 시작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아버지의 은혜 위에 은혜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다.
여러분, 김윤동 교수의 진짜 예수를 찾아서 들어보시는지 모르겠다. 연금술이 영지주의까지 관계되어 있다. 사람이 어디까지 생각했냐면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연금술이라고 하면 나는 단순히 금을 넓게 붙이는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금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알려진 바로는 하나의 원소이기 때문에 변형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바꿔도 커먼트로 꿈이래요. 그런데 그걸 만들어 보겠다고까지 시도를 했다.
요한복음은 초대 교회 30년 동안에 영지주의가 직접적으로 판을 치는 그런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연금술이 영지주의하고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쪽으로는 물질적으로 이원론을 연구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이원론을 가지고 연구한 것 같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말은 아주 간단한 말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규화목처럼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말씀을 잘 들으면 차차 규소가 스며들어서 규화목 되듯이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해석했다. 그때는 나도 몰라서 그럴듯하다는 생각했다. 말씀이 들어가면 규화목처럼 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점차적으로 신이 되는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이원론은 금이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데서는 안 통한다. 다른 건 이원론으로 다 설명이 되지만 이 금은 설명이 안 된다. 동양사상에서 음양사상은 태극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음향이 있어서 음향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희랍은 그것이 아니다. 태극은 아예 없고 이원론만 있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와 진행을 했다.
그래서 요한 일서 보면 예수께서 육체로 하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 그리스도 영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영지주의를 밝혀내는 말씀이다.
사람이냐 신이냐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어요. 바울이 떠난 이후에 교회의 사정은 즉시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희랍세계에서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300년 이상을 논쟁했다. 그래서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유럽은 양태론이 되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에서는 삼위일체론이 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흘러와서 정교회 측은 지금도 양태론이고 서방교회 측은 지금도 삼위일체를 증거로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신이냐 인간이냐? 쉬운 말로 하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냐 없냐? 하는 문제다.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걸 들으면서 희랍 신화를 아는 사람들은 창세기를 믿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없이 요한복음을 이해한다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 사람이 하나님이 됐다.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히 갈라지지 않고는 우주 질서가 발효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을 때 하나님은 대답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 상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 인간,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올 수 없는 이 인간이 하나님 아들이란 말이다. 우리가 그 일을 직접 당했습니다.
토론토에서 온 공학 박사 하는 말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만유를 구원할 수 있겠냐? 그건 말이 안 된다는 논리를 한다. 근데 자기도 그것을 잘 모르고 한 말 같다.
공학 박사로 세계 과학자 대회에 나갔던 사람인데 갑자기 애국심이 발동해서 순복음 교회를 다니면서 현대중공업 회장한테 편지를 썼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조국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다. 해서 현대중공업에 연구실을 설치해주고 초청을 했다.
그런데 연구를 해서 학회 같은 대학교에서 발표를 한다. 근데 여기는 기업체고 산업체니까 중역들 앞에서 연구할 것을 설명하고, 중역들이 상업성이 있다는 판단이 서야 통과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 앞에 딱 서면 세계적인 공학박사는 멍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공황신이라고 공황장애다. 두 번이나 그러고 나니까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도로 토론토로 가서 교수도 못 되고 기업체에도 못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를 만나고 난 후에 용기가 나 살아났다. 위대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출세는 못했으나 그런데로 인간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 일을 잊고 한국에서 휩쓸어 놓아서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서울공대도 나오고 다시 토론토대학을 또 시작했다. 거기서 또 학위를 받아서 두 번 받은 셈이죠. 서울공대에서 박사, 토론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서 두 번을 받은 셈이다. 학문적으로 당당하다. 그런 사람이 우리 대구교회에 와서 맘먹고 흔들어 놓았다.
그런 인간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내려올 수 없는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냐?이 문제는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못 된단 말이야. 누가 그것을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난처한 그런 질문이다. 왜 하필이면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가?
이사야 9장을 내놓고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른 종교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사야 9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우리 자신으로선 증거할 길이 없었다.
근데 유태인들의 구약은 엄격히 말하면 모세부터다. 출애굽기, 그들의 역사가 여기부터 시작된다. 모세를 하나님께서 신으로 썼다는 것이 구약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신으로도 쓸 수 있다. 신으로 쓸 수 있다. 출해굽, 광야 40년 모두가 신이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인간이 광야 40년을 길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그 곳 40년을 어떻게 통과했겠는가?
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직접 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직접 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을 시켜서 일을 했다는 거 아닌가? 분명히 광야 40년의 행적을 보면 모세가 신이나 마찬가지인데, 마지막 죽을 때는 사람으로 죽었다. 건너지 못하고 비스가 산에서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사람에게 무엇이 있는데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 셈이다. 결국은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게 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지었다. 그러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은 사람 손에 맡겨진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밖에는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아주 기본 원칙이란 말이다. 창세기 1장의 원칙이. 하나님이 직접 한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지금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혼자서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없는 하나님의 통치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에 맞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것이 문제 아닌가? 보기에 심히 좋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그 사람을 몰랐다. 어떤 사람을 놓고 심히 좋다 했는가? 심히 좋다고 한 사람이 왜 뛰쳐 나왔는가? 전부 다 아담 한 사람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아담을 “아담아,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찾지 않고,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아 갔다. 그런데 아담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보인 적이 없다.
항상 대신으로 재물을 보인다든지 했지, 스스로 자기 얼굴을 내놓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한 적이 없지 않다. 어찌하든지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 얼굴은 보이지 않게 했다. 성경 연대를 말하면 6000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나무 뒤에 숨어 있으니까 자기 얼굴이 없다. 나무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OOOO 없다. 그것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말씀이 육체화되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말을 인용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나왔다. 하나님은 생명이 되고 사람은 육체가 됐다. 이 말이 되는데, 창세기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면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을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가 그걸 알겠는가? 그래서 이 은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 이 은혜, 우리 모두가 다 사람인데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 은혜, 이 은혜가 은혜 중에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신구약을 통틀어 다 보더라도 단편적인 은혜가 많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근데 이 모든 은혜를 다 합해도 이 은혜만 못하다.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이 아들이다 하는 이 은혜만 못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은혜 중에 은혜다. 그러면 자잘한 은혜는 이 큰 은혜 속에 그냥 다 포함돼 버린다.
낙동강 물이나 섬진강 물이나 도랑물이나 다 바다에 들어가듯이 물은 다 바다로 간다. 바다는 물 중에 물이고 물 위에 물이다. 바다에서 수증기가 되어서 올라갔다가 거의 구름이 돼고, 그 구름은 비가 돼서 내려오니 항상 바다가 근본이 된다. 물은 언제든지 밑으로만 내려간다. 우주의 모든 질서는 전부 이렇게 움직여지고 있다.
지구 생긴 것도 묘하게 적도가 있어서 지글지글 끓는 데가 있고, 북극이 있어서 얼음이 어는 데가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지구라는 땅이 묘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과학의 세계도 참 무식하게 천동설이 지동설 되기까지 20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렇게 연구를 해서 결국은 지동설을 알아냈다. 지동설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이미 있는 걸 몰랐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미 있는 걸 우리가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벌써 정해놨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다른 것을 가지고 자꾸 헤맸던 것이다. 유태교 4000년, 기독교 2000년 그렇게 계산해도 6000년이다. 인류의 출현을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면, 한 몇 만년인지는 모른다. 그 세월 동안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각 민족마다 지역마다 자기들 하나님이 다 있다.
그런데 어떤 민족이나 나라도 하나님을 찾는 수고해서도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이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 그런 부족이 있다고 한다. 1년에 한 사람씩 처녀의 산 가슴에서 심장을 도려내서 자기들 신에게 그것을 바치고 있다고 한다. 지극히 정성을 다하면 신이 응답한다는 뜻이다. 지성을 다하면 감천이라는 사상이 온 인류에 다 퍼져 있다. 결국은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모르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설에 사람들이 고향에 내려갈 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려가야 되는데,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가지고 내려갈지라도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면 귀찮기만 하다. 복음을 가지고 가서 부모님이 행복하게 해드린다면 그것보다 더 은혜가 되는 효도가 될 것이다.
가서 절 좀 하러 오면 노인들에게 피해만 주고 입맛 다시게 하고 일시적인 위로만 되게 하고는 뚝뚝 떠나버린다. 요즘에 그렇게 안하고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온다고 한다. 자네들이 서울에 있으니까 다 내려가느니 부모님 둘이 올라와서 자녀들을 만나는 풍속도로 바꿔지고 있다.
설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제주도나 호텔 등에 잔치 연락을 하면 한 상을 딱 차려준다고 한다. 안할 수 없으니까 경비를 대서 한 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조상 제사를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그런 풍습이 없어지겠지만, 아직은 그런 것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행한 일들이 모두 참 캄캄한 밤에 문고리 잡으려고 돋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장님이 문고리 잡는 것 같다고 하는 말이 그런 말 아니겠는가? 종교 생활이 장님이 문고리를 잡는 생활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래도 어쩌다가 문고리를 잡으니까 되는데, 종교 생활은 문고리 자체가 없고, 잡을 수 없다. 눈도 어둡고 문고리도 없으니 어디 가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지금까지 이 자리에 왔다. 다 은혜가 있어서 왔다. 그런데 이것이 파편이나 마찬가지다. 조각. 이것이 다 합해도 예수께서 우리 길을 열어주신 것만큼 큰 은혜가 없단 말이다. 은혜 위에 은혜 아닌가? 은혜 중에 은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말하는 이 은혜를 말해야지, 내 개인이 받은 은혜를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늘 말씀드렸지만, 공지에서 나와서 판이 바뀌어서 산 사람이다. 역력해요.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모른다. 어제 하나님이 오늘 하나님은 아니다. 모른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이번에도 참 간절한 마음으로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하고 기도했는데 답이 없다. 생각하니까 ‘내가 너한테 다 줬지 않냐? 뭘 또 달라냐?’ 이러는 것 같다. ‘아주 좋지 않냐? 난들 어떻게 하겠냐?’ 그 말 같다. 나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냐고 할 자격이 없다. 없지만은 그래도 섭섭한 데가 있다. 근데 그것이 아니고 은혜 위에 은혜구나. 내가 받을 걸 다 받았구나. 그런 생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더욱더 마지막까지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구나. 참복음, 참은혜, 변할 수 없는 은혜, 영원한 은혜, 더 이상의 없는 은혜를 전해야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우리 지금 처형, 우리 교회 나와서 지난주에 자기가 공식적으로 간증하기로 했다.
근데 대전교회가 교회당을 하나 지은 건 아니지만, 빌딩에 한 층을 샀다고 한다. 한 200 평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반은 세를 주고 지금 반은 교회를 하는 그런 형편이다. 그럴지라도 하여간 자기들에게 건물이 생겨서 축하 집회를 하느라고 못하고, 이번 주에 (처형이) 한번 할 것이다.
처형은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안다. 집사람의 갈등과 고민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참 은혜인 것은 그분이 나를 이해하고 이걸 수용해 주는 것이다. “낙심하지 마라.” 내가 낙심해 가지고 안 될까 봐서 몇 번이고 얘기를 한다. “낙심하지 마라.” 어떻게 채용만 집 식구 중에서 이 복음을 알게 됐다. 이번 주에 무엇이라고 말할지 한 번 들어보길 바란다.
나는 처갓집 사람들 보면 정말 마음으로 미안하고, 내 잘못한 게 너무 많으니까 얼굴을 들 수가 없는 형편인데, 처형이 그렇게 나서서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의 남편은 영대체육학과 교수로 은퇴했다. 사람이 좋아서 우리 교회를 나왔다. 나를 좋아하고 이래가지 왔는데 말씀에는 특별히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자기 부인이 변한 걸 보고 말씀 좀 듣자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이것이 무엇인데 그러냐? 나도 말씀 좀 듣자. 처음으로 그런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너와 네 집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면 자연히 주변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은혜 위에 은혜로라.
은혜 종류도 여러 가지다. 내가 조용기 목사를 보니까 죽을 때까지 파킨슨병으로 완전히 몸이 굳어져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 설교한 것을 들었다. 힘은 없지만, 내용은 여전히 똑같다. 그래서 아 그 사람은 딱 자리에서 예수를 만났구나. 평생 동안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한 사람이구나. 진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거기서 머물렀다는 것이 안타깝다. 더 이상 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평생을 마쳤다 그러기도 참 쉽지 않다.
그런데 단일 교회로서 교인 수도 50만이까 교회로는 한국에 순복음 교회밖에 없답니다. 역사상 한 번. 그러니까 놀라운 교회를 만들어 놨다. 다만 예수를, 병 고치는 데서 만난 예수를 전했다.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아는가에 따라서 그것만큼 밖에는 우리가 전파를 못한다. 아는 자리만큼 밖에 전파 못한다. 대속을 알면 대속.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도 요즘 막막하다. 함께 죽었던 사실 없기 때문에 다 막막하다. 그러니까 바울이 떠난 후로 다른 논쟁의 세상이다. 신이 아니다.
이건 영지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에, 오늘날도 영지주의를 막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이 나왔지만 실제로는 영지주의하고 비슷한 그런 상황이다. 실제로는. 이론상으로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그런 상황이다.
예수를 사람이라고 하면 의아해할 사람이 너무 많다. 또 사람이라고 한 사람은 이 사람을 사람이란 게 아니고 그냥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사람이라 자유주의에서는 그렇다. 이 사람이 뭐 잘못된 게 없다. 이 사람이 잘 살면 된다.
예수는 우리의 사표?고 본받을 만한 그런 분이지 신이 아니다. 이 사람은 그래요. 어렸을 때 나도 뭐 부득이 또 당연히 기장교회를 다녔다. 내가 사는 위원회 처음 들어온 교회가 기장 교회니까 한 10살 때 거의 입문하게 됐는데 내가 터주택 하면 쌤이 바른 교회를 모른다. 그건 전혀 모른다. 신학교를 한다고 나와서 보니까 이런 파도 있고 저런 파도 있고 많이 또 뭐 그러니까 예수를 어디서 어디까지 하냐? 얼마만큼 아냐? 하는 것이 우리 사역자들의 운명이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자기가 만난 예수 외에 다른 예수를 전해지겠는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무엇이라고 해놓았다 해도 안 된다. 신학자도 보수주의 신학자든지 자유주의 신학자인지 자기가 만난 예수 이외의 신학은 없다. 자기가 만난 예수 이외의 신학은 없다. 아무리 신학이 크고 넓고 한다 해도 그렇게 느껴졌다.
우리 교회가 지금 균열되었다.. 삼파전, 앞으로 모를 사파전이 나올지도 모른다. 아주 묘하게 돼 있다. 그러니 다른 사상 하나가 들어오니까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온 것도 참 다행이다. 만일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어물어물 섞여서 가다가 다른 것이 되어버렸을 것인데 오히려 기회가 되어서 노선이 딱 정해진 것이다.
타작마당, 타작마당. 나는 처음으로 이번 타작마당을 경험했다. 야, 이것는 타작마당이다. 도리깨질을 하는데 가보면 사정없이 때린다. 콩깍지 채로 사정없이 때리면, 깍지는 벗겨서 나가고 콩은 콩들대로 빠져나온다. 그러면 콩은 주인이 가져가고 깍지는 불에 태운다. 타작마당이 그런 곳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타작마당에서 얻는 것이다. 완전히 타작마당에서 뚜드려 패서 버림받은 사람을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닌가?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사람, 어쩌면 나보다 못한 사람이다. 우리보다 다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바닥은 아니고 적어도 무엇인가 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자신이 자아 어쩌고 아무리 해보았자 자기가 아는 자기 자신 이상은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모른다. 이 예수를 만나고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알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다 한다. 역설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자리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아할 자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맞은 리가 없다. 둘이 가는 길이 영원히 평행선이다. 요한계시록이 말한 대로 하나는 바벨론이고 다른 하나는 새 예루살렘이다. 다 갈라진다.
바벨론이 무너져야 새 예루살렘이 등장한다. 뱀이 용도 됐지만, 그 뱀이 처음 7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다. 그런데 마지막은 힘이 완전히 하늘을 덮을 정도로 붉은 용이 되어서 나올 때 도로 유황불 무저갱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나라가 이루어지니까 그렇다. 이것이 완전 역설 아닌가? 그놈이 OO라고 붉은용이 되었는가? 어린 양이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안에서 어린 양의 나라를 얻어야 비로소 붉은 용이 없어진다.
요한일서는 그 말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못하고 있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못 믿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데,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 아닌가?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찾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고 있다. 다 치우쳐서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그러니까 어린 양의 왕국을 보기 전에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찾아도 참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다.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참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다. 보이지 않으면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어린 양의 나라를 볼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신뢰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닌가?
바르트 대신 나온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개혁해서 길을 만들면 하나님이 미래에 찾아온다. 미래에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이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님이 오는가? 어떤 나라가 오는가? 없다. 그래서 결국 소위 사회복음주의로 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답이 없다. 아무리 가도 답이 없다. 우리 답이신 예수는 은혜 위에 은혜더라. 은혜 위에 은혜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내가 보아도 그렇다고 몇 번 얘기하면 교회 일각에서 “아이고, 그 얘기 또 하네,” 그런다. “그 얘기 또 하네.” 나는 100번 1000번을 말해도 피곤하지 않는데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몇 번 말 듣고 나서 “옛날에 했던 것을 또 얘기하네.” 한다.
그러니까 우리 은혜는 얘기해 봤자 얼마 못 간다. 그 은혜를 지극히 공감한다해도 몇 사람이 되지 않는다. 몇 사람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 목회의 범위가 아주 좁아져 버린 것이다. 나에게 국한되어 버린다. ‘나를 제외하시고 성령께 나타나서 감화 감동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도 목회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는 그 교회 목회자의 한계에 달렸다.
순복음교회는 정직하다. 조용기 목사는 자기 입장에 충실했으니까 그것밖에 없었는데도 사람이 구름떼처럼 모였다. 맨 마지막까지, 자기가 받은 은혜대로 마지막까지 입장에 충실하다. 그래서 원로 목사 되고 말할 자리 없으면 그 목사들은 완전히 힘이 빠져서 노인당에 모일 수밖에 없고, 거기서 모이면 불평불만밖에 더 있겠는가. 알고보면 비참하다. 영원히 할 말이 없는 목회를 한 것이다. 그것이 한계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제 이 예수를 전할 경우에는 내 한계가 아니다. 내 한계를 벗어나, 내가 없어도 되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데 만나면 갈수록 하나가 되는 비밀이다. 만일 이 복음을 만일 몰랐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노상해서 그냥 죽었을 것이다. 객사했을 것이다. 나는 대구교회에서 신화적 인물이 되고 교회는 딴 길로 갔을 것이다.
누가 나보고 “이 목사님은 기독교의 신화적 인물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른 길로 갈 겁니다.” 하고 예리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소위 2PM 사람들이 120명 넘어갔어요. 그들은 “200명 차면 본당으로 올라가자.” 고 하는 것이 그들들에게 아주 큰 희망이 되고 있다. 200명 넘어 자기들이 올라간다고 하면 누가 막겠는가?
그래서 나온 말이 그 말이지 않는가? 목사님 명예는 지켜드리고 그럼 신화적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자기들끼리 이미 축제를 벌렸다. 또 어떤 사람은 나를 생각한다고 “목사님 50년 사역에 금이 가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벌써 김칫국을 다 마셔버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MZ세대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다. MZ 아이들이 터져 나오지 않았으면 나는 벌써 밀려났을 것이다. 아니 자기들이 200명이서 차 가지고 본당에 올라오면 내가 거기 있겠는가? 못 있는다. 나는 밀려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내 소원은 방송할 수 있는 방 하나만 있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유투브를 통해서 세계를 향해 방송하자. 지금 유튜브는 세계 공용어 6개 언어 가운데 한국어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영어로 듣고 싶으면 영어로, 불어로 듣고 싶으면 불어로 들을 수가 있다 한다. 동시 통용을 다 해주니까 영어를 못해도 영어로 방송할 수가 있다. 불어를 못해도 불어로 방송할 수가 있다.
그런 시대가 돌아왔기 때문에 방송을 듣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아는 언어로 바로 들을 수 있다. 그렇게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밀려나거든 유투브 하세요. 간단하다.
나는 밀리고 밀려서 대구까지 내려왔습니다. 사실은 나는 자원해서 대구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밀리면 밀리는대로 더 좋아진다. 만일 CCC에서 나를 밀어내지 않았으면 나 역시 CCC 간사하다 끝나고 더 이상 없다. 밀어내 줘서 지금 이런 자리까지 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시는 바 되면 어디에 가 있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만 되면 어디가 있어도 하나님이 쓸 수가 있다.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냐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함께 쓰여질 수 있냐 이것이 문제지, 다른 것은 문제가 하나도 없다.
교회 형편을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그리스도가 확실해야 교회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핵심이 빠져버리면 교회를 할 수 있겠는가? 핵심이 빠진 교회는 구락부다. 자기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구락부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 일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더 강화된다. 그 일이 생길 때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더 확실해진다. 상황이 다르니까 나를 좌절시키거나 할 수가 없다.
어제, 지난 주에 했던 2PM 모임을 들어보니까 장관이다. 별말을 다하고 그렇다. 자기들은 거의 정상적이라 하고 그래야 되지 않냐고 한다. 아무도 없는 게 맞고,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 것이 맞고, 배신은 인간의 이성에 맞아야 되고, 하여튼 어딜 가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니 어디를 가도 풍파밖에 일어날 것이 없다.
대구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이 참 특이한 일이다. 꿈에도 생각 안 했던 일이다. 근데 결과를 보니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타작을 해야 되니까 타작마당이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잘못해서 큰일 날 뻔하고 그냥 우물우물 지나갈 뻔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안 이상 어물어물 지나갈 수 없다. 확실하게 가야 된다. 죽을 때까지 할 말이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우리 삽시다. 죽을 때까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한 사람으로 살면 된다.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버릴 거고,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면 또 들어다 쓸 것이 아닌가? 온 세상이 다 버린 예수를 우리가 찾아서 쓰고 있잖은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거니까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 천지는 없어지기 전에는 내 말은 일점 일획이라도 결코 변할 수 없다. 절대로 변할 수 없다.
설날 설교합시다. 설날 신년 축하해 봅시다. 이거 오늘 아니면 이런 말 나오겠는가? 허봉도 목사님, 참 어려운 길을 시작하는데 하나님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겠다.
교회가 안 되면 목회자들은 좌절하기 쉽다. 교회가 잘 되면 다 잘 된 거 같고, 교회가 안 되면 좌절한단 말이다. 교회 안 돼도 좌절을 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가 먼저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먼저니까 그렇다.
바르트가 교회 교회 하다가 마지막에 구속의 말씀을 완성하려고 다 준비해 놓았다가 못 하고 말았다 한다. 천주교에 갔다 와보고는 못하고 말았다 한다. 왜냐하면 천주교에 가보니 자기가 꿈꾸던 교회가 거기 있는 것이다. 세상과 완전하게 차단하고 있으면서도 잘 지내고, 카톨릭 교회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자기는 여태까지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겠는가?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거의 불가능하다.
나에게 6개월 동안 강당을 맡긴 감리교 목사는 마지막 설교에서 그랬다. 자기는 6개월 동안 교육받은 것으로 방법을 다 써봤다. 예배는 어떤 방식으로 하고 세상에 맞추어서 해야 될 그런 프로그램으로 해봤는데 결국 교회는 변화가 안 되더라 한다. 교회가 변화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교회는 변화가 안 되더라 하는 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교회가 변화되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는가? 교회가 변화돼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어떻게 변해야 세상을 변화시키겠어요? 다른 길이 없다. 보수주의가 된다고 되겠는가? 자유주의가 된다고 되겠는가?
예수, 자기도 다 버린 예수, 그 예수가 다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 밖에는 길이 없다. 우리를 통해서 그분이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는 그분에게도 감사한 사람이 된다. 또 우리는 그분을 살려내기만 한다면 내가 사는 것이 된다. 나도 살고 예수도 살면 어른으로부터 아이들까지 다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천주교가 내세우는 것이 교회의 보편성이다. 천주교는 보편적 교회다 사실은 보편적 교회가 아닌데 자기는 우주적인 교회니까 보편적 교회라고 한다. 그런데 이 복음 안에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누구라도 참여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이것이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카톨릭적인 교회라고 볼 수 있으니까 세상과 충돌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우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세상은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어서 서로 싸우지만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다. 관심 가질 일이 없고 건수가 없다. 우리를 보면 목걸이가 안 된다. 세상의 목걸이가 안 된다.
그 누가 와서 나보고 무엇이라고 한다면, 아이고 제발 당신이 좀 가져가라 하고 싶다. 제발 당신이 좀 가져가라고 하고 싶다. 안 가져가면 쓰레기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해라 하겠다. 제발 좀 당신이 가져가서 청소 좀 해달라고... 안 그렇겠는가? 누가 무엇이라고 하거든 당신이 가져가면 좋겠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자기는 절대로 못 가져간다 할 것이다. 내가 왜 그걸 가져가냐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 몫이다. 아무도 안 가져간다. 세상이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관심도 없다. 하나님도 모른다 했는데 세상이 안다고 하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을 때 하나님도 모른다 했는데, 세상이 어떻게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제주교회에서 이영일 형제가 확 바꿔졌다. 완전히 바꿔졌다. 어제 장시간 통화를 했다. 이영일 형제가 이번에 잘못했으면 죽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뒤로 확 넘어졌는데 죽는데까지 되지 않아 살아났다. 또 거기에다 보이스피싱을 당해 가지고 있는 돈 다 줘버렸다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 되어 버렸다. 장시간 얘기하는데 끝이 없다. 참 묘하다. 제주교회도 이제 조용해지게 생겼다. 제주교회가 둘로 갈라져 있는데, 이영일 형제가 돌아와 버리면 갈라질 일도 없다.
참 묘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은혜를 주신 사람이 은혜 위에 은혜다. 은혜 위에 은혜. 은혜 위에 은혜로라. 더 이상의 은혜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완전 결정판이 되었다. 더 이상의 은혜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이 은혜를 감사하고 전파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 들어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