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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이번에 연재하는 몽펠리에 여행기 "몽펠리에(Montpellier)는 어떻게 가장 살고 싶은 도시가 되었을까?"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한 가지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번 글의 내용 모두가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과 주장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여 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아울러 그릇된 식견에 대한 깨우침이나 지적에 대해서는 언제든 대화를 통해 그릇됨을 수정하고 받아들일 결심 또한 언제든 열려있음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분명히 하고 싶다.
더하여 한 가지 더 사전에 밝혀두고 싶은것은...... 몽펠리에의 역사와 도시의 발전상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을 하려고 하다보니, 잠시 여행을 통해 내가 찍은 몇 장의 사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심각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여 두루 살피던 중에 현지의 '몽펠리에 지중해 여행사(Montpellier Méditerranée Tourisme)'에서 트위터에 올려놓은 한묶음의 사진뭉치를 발견하고는 글의 설명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진들을 여러장 퍼와서 사용하려고 한다. 사전 양해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여행사에 감사드리고, 혹 문제가 제기되거나 이의 신청이 혹시나 오게 된다면 언제든 삭제해 드릴 생각이다. 어떤 상업적 이용 목적이 아닌, 개인적인 여행기이자 몽펠리에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돕기위해 부득이 선택하게된 한 방편일 뿐임을 거듭 사전에 밝혀둔다. 여행사의 사진에는 우측 하단에 <MMT>라고 표시를 남겨두기로 해야겠다. --- 2024.03.14. 피안재.
참된 지식인이란 자신을 있게한 지역사회에 대해서 변함없는 애정을 가지고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지식인이야말로 그 지역사회가 배출한 참 인재라고 하겠다. 그런 인재들의 관심과 애정이 하나 둘 모이면 언젠가 반듯이 그 지역사회를 크게 변모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 사람이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도시 몽펠리에를 여행하면서 나는 그런 모습들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충격을 넘어서 어느 순간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몽펠리에는 어떻게 가장 살고싶은 도시가 되었을까?'
그것은 공인의식을 가진 몇 사람의 공통된 작은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결코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바로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새로운 시대정신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변해야만 한다. 그 변화는 당연히 모두에게 유익한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공인의식(公人義識)을 가진 소중한 민족과 국가의 자산이 되신 분들이여.
몽펠리에(Montpellier)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공부하고 연구해 주시기를......
내가 지금 이야기 하고자하는 공인(公人)에는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제의 의원들 모두가 포함되고, 초급공무원에서 선출직 최고위 공무원까지를 모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교육공무원과 경찰공무원과 군인들도 대단히 중요한 공인이다. 거기에다 공공의 목적을 가진 사회단체의 관계자들도 당연히 공인의 영역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밝혀두고 싶다.
간절히 바라기로 바로 그런 공인(公人)들이 외유(外遊)가 아니라 해외연수로 기꺼이 몽펠리에를 찾아 가 보시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직접 보고 느끼고 깨닫고 그것들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모범사례로 살피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사람의 참된 공인의식과 노력과 헌신으로 충분히 그 지역사회가 바람직한 면으로 변모하고 발전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당신의 관심과 노력이...... 충분히 당신이 살아가는 지역사회를 변화로 이끌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그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몽펠리에는 변화시킨 시대를 앞서간 소수의 공인들(公人) 이야기를 말이다,
참(眞) 공인(公人)되시고자 노력하시는 현직에 계신분들과, 이미 많은 노력을 해오신 선배 분들에게 한없는 존경과 애정을 드리는 마음으로.......... 당신들의 공인의식과 헌신과 희생과 노력을 결코 잊지않겠습니다. 아울러 이런 공인들과 더불어 참된 시민의식을 가지고 기꺼이 관심과 지지 성원과 참여를 마다하지 않는 우리의 주변사람들에게도 성원을 보내드리고자 한다.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젊은 대학도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도시'로 많은 화제를 양산하고 있는 몽펠리에(Montpellier)로부터 또 하나의 부러운 소식이 들여왔다.
우리 부부는 2023년 1월에 남프랑스를 여행중에 몽펠리에에 닷새를 머물렀다. 몽펠리에 선정에서부터 다소 의외의 선택이었던지라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런 결과로 몽펠리에는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관심의 대상으로 변했다. 그래서 나름 공부를 통해 어느정도 충분할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찾아갔다. 결과는 만족을 넘어 엄청난 감동으로 내가슴에 안겨왔다. 하여 여행을 다녀온지 딱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임에도 눈을 감으면 여전히 우리가 몽펠리에 거리를 걷고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고 되살아난다. 결론은....... 많이 그립다. 다시 가고싶다.
그런 이유로 그 이후로 꾸준히 몽펠리에는 나에게 영원히 무한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몽펠리에라는 도시의 변화와 미래가 나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런 몽펠리에에서 참으로 부러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몽펠리에 시 당국은 2023년 12월 24일 0시부터 대중교통 전면 무료 서비스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라는 뉴스였고, 실제로 지금 몽펠리에에서 모든 대중교통은 무료다. 세계적으로 대중교통 무료를 시행하는 소도시들이 있기는 하다. 노인 요양도시나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특화된 아주 소규모의 도시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구 30만을 넘어서는 대도시에서 전면적으로 대중교통 완전 무료를 시행하는 도시는 프랑스에서는 몽펠리에가 유일하다. 내가 살고있는 고향인 충주만 하더라도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를 완전무료로 운행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지금도 시외 오지 지역등 실제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인 지역을 위해 시와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노선을 꾸준히 유지해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 비용과 관리면에서 많은 우려와 어려움을 격고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체 노선을 운행하고 있는 차량을 시가 구입 관리(정비)를 해야하고, 운전기사 급여와 유류비 등 실로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재정지원이 뒤따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대중교통 완전 무료를 시행한다면 노인. 학생. 그리고 저소득층에게 크게 도움이 될것은 분명하다. 그렇게된다면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기꺼이 대중교통을 생활화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누가? 어느 시장 후보가? 어느 시의원이? 그런 재정 충당과 관리를 지속적으로 시행하겠노라고 공약으로 내세울 수 있으며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발표 즉시 낙선의 지름길로 직행하지 않겠는가? 공수표나 남발하는 사기꾼으로 몰려서 말이다. 세금을 더 내라고????
몽펠리에를 대표하는 대중교통은 트램이다. 차량이 운행할 수 없는 역사지구(올드 시티)를 중심으로 온 도심과 인근의 외곽지역을 거의 완벽하게 커버한다. 하여 내가 하는 표현으로 '몽펠리에는 트램 천국이다. 트램 노선도와 모든 노선이 반듯이 통과하는 몽펠리에 기차역 위치만 알고 있다면....... 몽펠리에 여행은 물론 현지 생활도 언제든지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면........ 완전 공짜니까' 말이다. 열 번을 타던, 하루 종일 트램에서 살던, 현지인이던 외국인이던 모두에게 공짜다.
역사지구를 벗어난 외곽의 도심 이곳저곳을 시내버스가 운행하면서 나머지 이동에 대한 불편을 해소해 준다.
몽펠리에는 2020년 9월에 (대중교통 무료)를 시정의 다급한 목표로 삼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을 해왔다. 하여 실제로 2021년에 18세 이하와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이를 실현에 옮겼다. 미셸 델라포스 몽펠리에 시장은 "대중교통 무료 정책을 도입함을써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생태적 전환에 도움이 되는 사회 정의와 진보에 대한 대담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대중교통 무료화의 가장 큰 목적은 자가용 사용을 줄여 대기 오염물질 배출을 억제하는 것이다. 또, 인구를 도심으로 끌어들여 지역 경제를 살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이런 놀랍고 부러운 변화까지 대략 한 40년이 걸렸다.
40년은 긴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가당치 않은 먼 훗날의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거나 포기할 이유는 없다.
시작은 매우 힘겨웠지만....... 공인의 긍지와 사명감을 직시한 소수의 선구자들과 기꺼이 이들에게 협조한 시민의식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자식들에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살만한 도시)라는 공공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로 뭉쳤다. 그들의 생각은 이내 외침이 되었고, 그 외침은 점차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퇴보하던 도시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고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생겨났다. 그런 꾸준한 변화의 노력은 ........ 체류인구 20만 전후로 프랑스 통계상 25위에 머물던 몽펠리에를 꾸준히 인구 유입이 증가하여 90년대에 이르러 통계 순위 8위의 인구 28만의 도시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 21세기에 들어서 세계 인구는 급격하게 급감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프랑스의 모든 도시들도 예외일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고, 남프랑스라고 그다지 다른 여건이 될 수 없겠지만........ 증가율이 다소 무뎌지기는 했지만 2023년 몽펠리에는 거주인구 순위 프랑스 7위로 30만에 육박한 살기좋은 도시로 변모 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신기원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젊은 연령이 이제 36세로 아주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8만 명 이상을 학생들이 차지하는 대학의 도시가 몽펠리에다. 거기에는 직장을 정년 퇴직했거나, 자영업자였어도 노후를 조용하게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어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프랑스 정부의 문화부(Ministère de la Culture)에 속하는 여러 부처 중에 하나인 프랑스지방분권화문화정책부서(Cultural policy of decentralization in France)에 공문이 하달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지방분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랑스 전역에 산재한 문화재를 비롯하여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 발전시키는 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지방문화행정기관으로 자리매김한 레지옹 문화사무국(Direction Régionale des Affaires Culturelles(DRAC))이 프랑스 전역에 설치되었고, 이들을 통한 모든 업무 수행을 위해 레지옹 현대미술기금(Fonds Régionaux d’Art Contemporain (FRAC))이 조성되었으며, 그렇게 조성된 기금으로 지방 분권화 문화정책이 운영되고 있다. 문화부는 바로 그런 제반 업무 전반에 걸쳐 지도와 관리 감독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부의 정책 담당자들에게 그들이 관리 감독해야 하는 지역의 ‘정책 실태 조사’를 외부 용역 업체에 발주하라는 공문이 하달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출생지역과 비교적 인근인 학창시절을 보냈던 몽펠리에에 관한 업무가 내려진 것이다.
이를 좀 쉽게 설명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행정업무 진행절차로 각색을 해보도록 하겠다.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김 아무개 행정관에게 상부의 업무 지시서가 도착했다. 충청북도 충주지역의 중원문화 지역권의 문화재 발굴과 수리와 보존을 위해 투입된 정부 기금의 사용과 절차에 대해 감사를 하고, 또 지방문화행정의 발전을 위한 제도 개선과 정책 수립을 위한 안건을 수집해 상부에 보고하라는 공문이었다. 이는 해마다 의례히 때가되면 또 다시 찾아오는 지극히 뻔한 행정적인 절차 중의 하나였다. 지난 해 퇴임한 전임자는 여기에 대비해 잘 활용하라면서 이 업무를 대신 맡아줄 사설 외래 용역업체의 연락처를 남겨주었을 정도였다. 때가 되면 용역업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공문을 그들에게 전달하면 모든 업무 전반을 용역업체가 성실하게 대신 수행해 준다는 부연 설명까지 있었다. 오래지 않아 ‘중원 문화 지역 감사와 개선책’ 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완성본으로 도착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그냥 상부에 제출하고 나면 모든 업무가 일사천리로 끝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의례 절차였고, 또 그렇게 대충 처리하면 되는 일종의 요식행위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김 아무개 행정관이 충주 근교의 출생으로 충주에서 학교를 다니며 성장했고, 그의 부친이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향토 사학자로 활동해왔다는 사실에 있었다. 덕분에 그 역시 부친을 통해 지방의 문화행정에 대해서 나름 많은 이해를 가지며 살아왔다는데 있었다.
김 아무개는 자료실에 가서 십 수 년 동안 외부 용역업체를 통해 작성된 보고서를 하나하나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보고서 내용이 매년 똑같이 반복되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몹시 허술한 짜집기 보고서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중원문화 현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상부에서 하달된 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는 충청북도 도청에 연락해 중원문화에 조예가 깊은 공무원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그로부터 충주 현지에서 오랫동안 소신을 가지고 중원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실무 담당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렇게 세 사람이 직접 충주에서 만난 것이다. 김 아무개는 자신에게 하달된 정부의 공문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정말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제대로 만들어진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정식 보고서 작성을 전제로 실질적 도움이 될 만한 주변의 전문가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은퇴한 공무원과 대학 교수와 재야의 향토 사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자료를 모으고 토론을 벌였다. 소문이 나자 지역의 건축가와 설비업자와 통계학자와 법률가까지 참여해...... 마침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짜 현장에서 땀과 발로 쓴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김 아무개 행정관은 정부에 해당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해가 바뀌고 회계연도가 달라졌음에도 그 새로운 보고서 내용이 반영된 어떤 시책이나 평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 마리 르네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Marie René Giscard d'Estaing)이 이끄는 우파정권 하에서 대통령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던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문화예술에 대한 동력을 잃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미테랑 총리는 지스카르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자 프랑스 좌파진영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아!!! 그렇게 여러사람이 발로 뛰고 땀흘리며 노력했음에도 다 소용이 없구나. 저들 입장에선 다 그렇고 그런 무용지물일 뿐이구나.'
허탈감과 좌절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배신감까지 피어 올라올 지경이었다.
상실감에 젖은 김 아무개 행정관은 휴가를 신청하고 몽펠리에로 향했다. 적어도 자신을 믿고 한동안 온 정열을 쏟아가며 정부 보고서 작성을 위해 헌신해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만은, 비록 참담한 결과였지만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 아무개 행정관은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간의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했고...... 드러난 결과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 눌렀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참담했던 것이다. 어디선가 탄식을 넘어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까짓 꺼.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손으로 직접 바꾸어 보면 안 될까?’
뜻밖에 튀어나온 이 외침에 모여든 사람들이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리 맨 뒤에서 한 여성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래. 우리들 손으로 직접 철저하게 진단을 마쳤고 치료를 위한 방책도 마련했어. 이제 경험 풍부한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의사만 찾는다면 우리는 병을 고칠 수 있고 보다 낳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뜻과 바램을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실천해 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정치가가 한 명 필요한 것이야. 어차피 우리의 심각한 증세는 정치를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이니까 이제부터 그런 정치가를 찾아보자고. 어딘가에는 반듯이 있을 거야. 우리의 희망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정치가가 있을 거야. 모두 그동안 수고했으니...... 부디 희망을 놓지 말기로 해.’
며칠 뒤, <몽펠리에 문화유산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대표 몇 명이 시의회 건물에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대단히 크고 두껍고 무거운 보고서 사본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2층에 있는 한 시의회 의원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에는 ‘시의원 조지 프레쳐(Georges Frêche)라는 작은 명패가 걸려 있었다.
그로부터 서너 시간....... 시의원 프레쳐와 보고서 작성 대표들 간에 끝장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아무런 사전 약속도 없었고 토론의 주제도 따로 정해진 것이 없었다. 다만 오가는 대화의 시작이 ’몽펠리에‘였고, 끝날 때까지의 모든 대화의 내용 또한 ’몽펠리에‘였다.
‘답을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보고서 일행이 돌아갔다. 그날 밤이 깊도록 시의원은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몽펠리에 시내 풍경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났음에도 시의원측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보고서 대표단은 다시 시의원 사무실을 찾았다. 어느 때처럼 그날도 시의원은 다소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행을 맞았다.
‘답변이 없으셔서 부득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의원님.’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시는 답은 그날 바로 찾았습니다만........ 대답을 하자니 거기에는 저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벅찬........ 용기가 필요하였기에 이제껏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듭 양해를 구합니다.’
‘저희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과연 그 보고서에서 돌출된 몽펠리에를 위한 개선안의 실현이 가능하겠습니까? 정부가 나서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여론이 저희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궁금합니다. 과연 우리 스스로 그런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의원은 대답을 회피한 채 창밖을 내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의원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아니라고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좀 더 연구를 하면 되니까요?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의원님. 저희가 더 기다릴까요?’
기다림에 지친 보고서 대표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기다려봤자 원하는 답을 오늘 당장 얻을 수는 없겠다 싶어졌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낌새를 눈치 챈 시의원이 대표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분 손으로 직접 몽펠리에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먼저....... 제가 몽펠리에 시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코 중간에 멈추지 않는 지속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그 변화를 직접 챙겨나갈 새로운 시장이 꼭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시대의 풍운아’로 불리던 조지 프레쳐가 몽펠리에 역사의 전면에 제대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랑그독 지방의 가장 험준한 산악지역인 툴루즈 인근에서 프레쳐는 태어났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생활 중에 파리에 유학을 온 주은래 등을 만나면서 모택동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서클 연맹에 가입한다. 31세가 되던 1969년에 이곳 몽펠리에 대학 법학부 교수로 부임하는데, 바로 그 시기에 사회당(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일명 SFIO)에 가입해 회원이 된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평생 동안 급진좌파 사회주의 정치인의 꼬리표가 따라붙게 된다.
모택동주의가 농촌으로 파고들어 세력을 넓혀갔듯이 좌파노선의 프랑스 사회당 또한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전선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프레쳐도 그런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면서 몽펠리에 지방 자치 정부를 통해 정치에 발을 담구기 시작하였는데,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극우정당의 지배구조였는지라 프레쳐에게는 오히려 시련의 시기였다. 몽펠리에 시의회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사회당 소속의 좌파 정치가가 조지 프레쳐였다. 온갖 루머에 시달리고 어느 하나 성과를 이룰 수 없는 극단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꾸준히 사회주의 정책을 내놓았다. 하여 그 당시에도 이미 법학 교수이자 좌파 정치인 조지 프레쳐에 대해서는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칼날 같은 평판 위에서 그는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평가가 극단으로 양분되는..... 거기다가 당시로서는 기득권 세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유일한 좌파 정치인 프레쳐에게 진심으로 몽펠리에를 아끼고 사랑하는 보고서 대표들이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동안 이 부분에 골몰해 보기도 했다.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는 외톨이 좌파 정치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외톨이 좌파는 일단 가진 기득권이 아무것도 없기에 타락하거나 부패하지 않는다. 내줄 것도 없고 청탁을 받을 위치도 아니니까 말이다. 또한 외톨이 생활을 꾸준히 유지하면서도 나름 소용없게만 보이는 의정활동에 열심을 다한다는 말은......... 많은 것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나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꾸준히 매진한다는 의미가 된다.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와 굳은 신념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거기에 부정적인 여론이 늘 따라붙는다는 것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의 정적들이 그를 모함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분명하다.
보고서 대표들이 판단한 프레쳐는........ 신념을 가진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가진 사람. 그리고 부패하지 않은 젊은 정치인 이었다. 사회주의 좌파 성향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검은 고양이거나 흰 고양이가 무슨 상관인가?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최고인 것이다)
조지 프레쳐는 약속했다.
보고서에서 돌출된 개혁을 현실 속에서 꾸준히 지속 가능하게 만들겠으며 몽펠리에의 변화를 자신이 입증해 보이겠노라고. 그 첫걸음으로 다음 선거에서 시장에 출마하겠노라고 말이다.
그의 나이 39세이던 1977년 3월 지방 선거에서 그는 새로운 몽펠리에 시장에 당선되었다.
챠밍여사의 손을 잡고 도심으로 나섰다.
쌓인 여독으로 인하여 아침 산책을 포기하고 숙소에서 쉬었는데 도로에 나서서 파란하늘과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확인하는 순간 언제 몸살기운이 있었느냐는 듯이 생생한 모습으로 해맑게 웃는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물주의 배려에 감사 기도를 살며시 드려본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둘이 여행을 와서 하나가 심하게 아프다고 생각해 보라. 여행이고 뭐고...... 우리는 이미 과거 스페인 여행에서 코르도바 적십자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처지였으니 당연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때는 정말로 응급처치를 하고 나머지 여행을 포기한 채 귀국 비행기에 올라야 하나보다 라고 각오까지 했었다.
‘오늘은 편안하게 컨디션 조절 좀 해가면서 가벼운 산책 정도의 스케줄로 잡아야겠다.’
숙소를 나선 우리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언제나처럼 코미디 광장의 노천 카페였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번 프랑스 여행을 통해 카페문화에 중독이다 싶을 정도로 푹 빠져버린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어제 들렸던 카페와 나란히 위치한 옆집 카페테라스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언제나처럼 카페 알롱제와 크루아상을 주문하면서 뜨거운 물을 다로 정중하게 부탁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웨이터들은 ‘아하! 아메리카노를 찾는 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중에 별도의 커다란 잔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다 내어준다.
아주 이따금 에스페레소에 도전은 해보지만 쉽게 적응이 안 된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대부분의 카페에 아메리카노 커피가 없다. 공항이나 유명 여행지에서나 가끔 메뉴판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둘의 중간에 위치한 것이 카페 알롱제다. 에스페레소 잔의 두 배쯤 되는 크기의 잔에 에스페레소를 담고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어서, 대략 에스페레소를 절반쯤 희석시킨 커피가 알롱제라고 하면 되겠다. 그런데 그 알롱제도 우리에게는 너무 진하고 독하다. 그래서 별도로 뜨거운 물을 부탁해서 알롱제 한 모금을 마시고는 물을 조금 더 붓고, 또 한 모금을 마시고는 또 물을 더 붓고 하는 식으로 마셔가는 것이 그만 우리 스타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알롱제에 물을 더 타가면서 홀짝이고 있는 모습을 본 옆 테이블의 아가씨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는다. ‘촌스럽게 보이는 걸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식전 댓바람부터 길거리에서 밥을 사먹니?’ 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불어로 어떻게 하지? 대신 ‘봉쥬르’ 라고 다소 계면쩍은 모습으로 아침인사를 건네고 있는 나란 인간.........ㅋㅋ
그러자 아가씨도 환하게 웃어 보이며 ‘봉쥬르’ 라고 인사를 건네 온다.
그나저나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카페는 어느새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너네는 출근 서둘러야 하지 않니? 도대체 일은 언제 하는 거니?’ 현지인들을 둘러보면서 저들의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뛰거나 서두는 우리네 출근길 모습이 어디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거 참!!!
‘출근을 해야 하는 저들도 저렇게 느긋하고 편안하게 있는데...... 까짓! 가진 거라곤 시간과 배짱뿐인 우리가 서둘게 뭐가 있어? 여기 카페도 분위기 끝내주잖아?’
커피가 있는 카페테라스에다가 따사로운 햇살만 있다면......... 일단은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프랑스 여행을 계속하면서 우리가 새롭게 우리 스스로에게 정의내린 결론이다. 여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우리는 프랑스식 카페문화에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고 달콤한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였다. 우리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매우 이색적인 풍경이 코미디 광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광장을 오가며 트램 역으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들 사이로 전투복에 완전무장을 갖추고 검은 선글라스를 멋지게 쓴 한 무리의 군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각개전투 대형으로 흩어졌지만 일정한 대열을 유지하면서 마치 군중들 속을 수색하듯이 코미디 광장을 두루두루 살피며 지나가고 있었다.
자동차가 없는 몽펠리에 역사지구의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군인들이라는 이야기를 앞 여행기에서 이미 올린 바가 있었다. 경찰 순찰차도 이 지역엔 들어오지 않는다. 트램을 제외하면 오로지 보행자들만의 공간인 것이다. 비상시엔 소방차나 앰블런스는 들어온다. 경찰 순찰도 오로지 도보나 자전거 아니면 소형 오토바이로 이루어진다. ‘살기 좋은 도시’ ‘젊은 도시’ ‘대학 도시’로 몽펠리에가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노숙인. 부랑자. 아프리카 난민들이 몽펠리에로 몰려들까 치안에 대한 염려가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
몽펠리에 시당국은 도시의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만큼이나 치안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시가 성장하고 변모하여 살기가 좋아지는 만큼, 대신 일정한 양보나 제재나 희생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직접 시민들을 상대로 설득하고 호소했다. 결과로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부랑자나 주거부정 난민들이 함부로 아무데나 차지하고 치안을 불안케 하는 사태에 대하여 매우 강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조례를 통과시켜 주었다. 하여 차량이 없는 지역으로 선포된 역사지구의 치안확보를 위하여 경찰력을 대신해 무장한 군인들이 시간대별로 꾸준히 순찰을 도는 것을 허락했다. 군인들의 능력과 관할 범위는 경찰력을 훨씬 능가한다. 딱 보면 안다. 경찰은 수갑을 먼저 꺼내들지만...... 군인은 총구로 진압을 하고 여의치 않으면 실탄을 장전하는 소리를 언제든지 낼 수 있는 특별한 집단이다. 경찰에게 대들 듯이 군인에게 함부로 대들다가는......... 형사범에서 언제든 테러리스트로 처우가 달라질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풍경은 이스탄불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현지인 그 누구도 이런 풍경을 낯설게 여기지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저들에겐 지극히 보편타당한 일상일 뿐이기 때문이리라.
여기 이토록 드넓은 코미디 광장이 마냥 아름답고 한없이 평화로운 것은 몽펠리에 시민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잘 녹아있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이해와 약속과 배려와 준법정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코미디 광장 곳곳을 잘 살펴보라.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몽펠리에 도심 전역의 풍경을 되 집어보라. 길거리에 노점상이 없다. 구걸하는 사람도 없고 부랑자로 보이는 무리도 보이지 않고 노숙자를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프랑스 전역에서 노숙자 부랑자들이 최고의 성지로 노리는 목표지역으로 몽펠리에가 첫손가락으로 꼽히지만....... 몽펠리에 시정부와 시민들은 이들을 절대로 허용할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몽펠리에가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배경에는 치안확보를 통해 부랑자와 노숙자와 무연고 난민을 허락지 않는 정책을 시종일관 강력하게 고수하고 있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어느새 훌쩍 한 시간 반 정도가 여기 카페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카페테라스를 나서 광장의 북쪽 경계까지 다가갔다. 시칠리아나 몰타에서 보았던 해안 초소 같은 라임스톤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몽펠리에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다는 몽펠리에 관광 안내소다. 이곳에서는 몽펠리에 관광지도와 대중교통 노선도를 얻을 수가 있다. 더불어 인근의 남프랑스 여행안내도 받을 수 있는 낯선 이방인 여행자들에게는 꼭 필요하고 무척이나 고마운 장소이다.
하지만 나름 사전 준비를 철저히 마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었다. 한번쯤 찾아가 볼까 생각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해안마을인 세테(Sete)의 여행 지도를 하나 얻어서 나왔다. 코미디 여행 안내소는 라임스톤의 외관 건물 자체가 아름다울 뿐만이 아니라, 실내 또한 아주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다. 담당자들이 환한 미소로 반겨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있는데...... 오랜 우리의 여행이력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길은 양편으로 나뉜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까?’
‘어떻게 나누어지는데?’
‘왼쪽으로 보이는 플라타너스 숲길로 향하면 저만치 왼쪽에 유명한 파브르 미술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몽펠리에 도시 재개발의 상징적인 공공시설 단지인 안티고네(Antigone) 지역이 되는데 그 출발지점에 현대적인 초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어. 아마도 몽펠리에 전체지역 모든 상권의 핵심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더라고. 얼핏 파리나 뉴욕이나 런던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길 것이라고 하더군. 몽펠리에를 혁신적으로 재개발한 프레쳐 시장이 신도시를 건설하기에 앞서서 대도시에나 있을법한 현대식 초대형 쇼핑몰을 먼저 미끼 상품처럼 보여줌으로서, 새로 건설되는 몽펠리에에는 이런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구나 언제든지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깊은 의도를 가지고 먼저 건설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그럼 오늘은 쇼핑몰부터 가볼래. 여기서 또 미술관을 가면 몸살 기운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 오늘은 그냥 터덜터덜 걸으면서 쉬는 여행을 하고 싶어.’
마님의 하명이 떨어졌다. 마당쇠야 앞서서 쇼핑몰로 가는 길을 열어라!!!!
조지 프레쳐 시장은 몽펠리에의 미래를 위해 원대한 큰 그림을 그렸다. 보고서 내용을 기반으로 거기에다 더 많은 시민들의 생각과 의견을 청취하고 수렴했다. 몽펠리에 전역을 샅샅이 뒤지고 흩고 다니면서 차근차근 마스터 플랜의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끊임없이 토론을 이어나갔다. 부분적 정책이나 계획이 수립될 때마다 그 지역이나 해당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반대 의견을 청취하고 새로운 수정안을 창출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 나갔다. 그런 연후에 부분적으로 수렴된 프로그램을 하나로 총 규합하여 ‘몽펠리에 미래 비전’을 완성했다.
이렇게 완성된 비전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언제쯤이 되어서 비로소 완성될지 아무도 예측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일단은 천문학적이 소요 비용이 당면한 첫 번째 과제였고, 그 비전을 실행해 줄 각 분야의 전문가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간도 부족했고 인력도 부족했고 돈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족했다. 과연 이 원대한 계획이 성공이 아니라 과연 끝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가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었다.
‘시작은 여러분이 했고, 지속적 진행을 약속한 제가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몽펠리에의 미래 비전은 확정되었고, 우리 모두의 열정으로 반듯이 성공할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산재한 많은 문제들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각자의 맡은바 역할에 준해서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제가 앞장서서 이 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가겠습니다.’
요기쯤 까지 사진을 찍고있었을 때......... 정복을 입은 보안요원 두 명이 다가왔다.
'여기 쇼핑몰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 장소입니다.'
헐!!!!!
여행자인데 미처 알지 못했노라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을 삭제 할까요?' 라고 액션을 취하며 영어로 물으니 태연하게 웃어보인다. 아마도 '거기까진 봐줄 수 있어요' 라고 하는 듯 하다. 얼른 카메라를 갈무리해서 배낭에 넣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본의아니게 가끔 격는 일이다.
‘여기가 혹시 파리 샹젤리제 거리가 아닐까?’
누구라도 한번쯤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것만 같다. 몽펠리에의 코미디 광장에서 발걸음을 옮겨 폴리고네 쇼핑몰(Centre Commercial Le Polygone)에 발길을 들여놓는 순간 문득 그런 느낌을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작은 파리가 아니라 그냥 파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느 지역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쇼핑몰 입구 주변으로 몽펠리에 도시 재개발 시작과 함께 지어진 역사성을 가진 호텔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
더군다나 쇼핑몰 입구 2층의 테라스가 스타벅스 매장이다. '스타벅스에는 아메리카노 커피가 당연히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어코 올라가보니 정말로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하니 어쩌겠어? 반가운 마음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서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몽펠리에 도심을 바라보면서 멍을 때렸는데........ 쬐금. 잠시 동안만 이었다. 하필 스타벅스 카페테라스가 응달이라......... 추웠기 때문에.......
프레쳐 시장은 몽펠리에를 세 개의 각기 다른 권역으로 나누어 개발을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권역이 바로 이곳 코미디 광장 주변이었다. 법률과 조례에 따르고 필요하면 개정하면서 역사지구를 하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정책을 폈다. 함부로 증개축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역사지구 안쪽으로 차량 진입을 최대한 절제하는 시행령을 만들었다. 정확한 실태조사를 거쳐 여러 등급과 단계로 나뉘어 땜빵질식 부분 수리가 아니라 완벽한 보존과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적극적 보완책을 지시했다. 하지만 역시나 역사지구는 낡고 오래된 도시라 당장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지역이었다. 프레쳐는 역사지구 전체를 재조명하고 보완하면서 동시에 코미디 광장 인근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분수대를 수리하고 광장 주변의 건물들을 파리 못지않은 현대식 외관으로 정비해 나갔다. 광장 인근의 호텔과 숙박업소를 현대적 개선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관리해 나갔다. 다시 여행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의 숫자가 눈에 뛸 정도로 늘어갔으며 내부 시설의 개량이 뒤따랐다. 노천에 설치되는 카페테라스를 일정한 규정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허락해 코미디 광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코미디 광장의 정비만으론 점차 새롭게 유입되고 늘어가는 여행자들의 수요를 충당하기 힘들어 졌다. 아울러 여행자 숫자가 늘어 수입이 다소 늘어난다 해도, 낙후될 대로 낙후되었던 현지인들의 생활문화가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코미디 광장의 정비가 어느 정도 완성의 기미를 보이자 이 열정으로 가득 찬 좌파정치인은 광장 끝에 방치된, 오랜 세월동안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되다가 군대가 철수 이동하면서 생긴 쓰레기장으로 변모한 공터의 재개발을 서둘렀다. 군대 막사의 위병소 건물을 지금의 관광 안내소로 만들고, 폐허로 변한 나머지 모든 건물의 잔해를 제거했다. 이 위병소 건물에서 시작해 정남쪽 방향으로 1km를 내려가면 몽펠리에 도심의 외곽을 흘러내려가는 레즈 하천(Lez)를 만나게 된다. 이 너른 숲 지역이 모두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오랜 세월동안 프랑스 남부를 수호하던 주력 육군이 주둔했던 지역이었다. 프레쳐는 이 군대 막사지역이었던 녹지가 몽펠리에 재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절대녹지로 확정했다.
하지만 도시의 운영과 유지에는 공공의 목적만으론 모두 달성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문화생활과 소비생활 역시 인간이 삶을 지속하고 싶은 목적 중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쳐는 군대 막사 지역에 건설할 공공시설 안티고네(Antigone) 프로젝트에 앞서서, 코미디 광장과 연결된 안티고네 지역의 입구에 해당하는 장소에 몽펠리에 현지인들의 생활문화를 바꿔줄 초대형 쇼핑몰과 한계에 부닥친 광장 주변의 숙박시설을 보완해 줄 호텔들을 동시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몽펠리에는 무섭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의 생활 또한 몰라보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거주인구 순위 25위였던 몽펠리에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확인해 보니 13위의 순위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몽펠리에(Montpellier)의 시작은 지중해 연안의 작은 어촌마을 마겔로네(Villeneuve-lès-Maguelon)에서 출발했다. Maguelone라는 이름의 어원은 페르시아어 "margaritis"에서 나왔는데 이는 ‘진주’를 가리키며, 다시 거기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marguerite"(데이지)는 ‘보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마겔로네는 해안을 따라 길게 습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진 특이한 지형으로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수로가 엉켜있는 형국이다. 이 습지에서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굴양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여 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마겔로네는 작은 해안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스페인 지역(리베리아 반도)을 차지한 이슬람의 후기 우마이야 왕조가 유럽의 본토를 점령하기 위하여 과거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 북상했다. 유럽 기독교의 위기였다. 프랑크 왕국 메르빙거 왕조의 재상인 샤를 마르텔이 과감히 나서서 놀랍게 대승을 거둠으로써 유럽의 봉건 왕조와 기독교를 지켜냈다. 스페인에서 쫓겨나 아프리카로 쫓겨난 이슬람 세력의 일부가 해적으로 둔갑하여 한 때 지중해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해적들의 주목표는 유럽의 해안도시들 이었다. 유럽의 영주들은 그 해적들이 소도시를 점령 주둔하면서 영역을 점차 확대함은 물론 쫓겨난 이슬람 세력의 재침공을 위한 교두보로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샤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이 카를링거 왕조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고, 다시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가 황제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카를링거 왕은 군비를 갖추어 요새화 되지 못한 지중해 연안의 소도시들을 해적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파괴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이때 마겔로네 역시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겔로네 어촌의 주민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해야만 했다. 실타래처럼 펼쳐있는 습지대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오니 하천이 흐르는 주위로 작은 돌무더기로 언덕이 나타났고, 주변으로 개간이 가능한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돌무더기 언덕을 중심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몽펠리에인 것이다. 그 바위산을 중심으로 온 들판에 염색 재료로 쓰이는 식물(woad)의 샛노란 꽃이 가득 넘쳐나듯 넘실거렸다고 한다. 몽펠리에 이름의 ‘Mont’는 ‘산’을 가리키는 낱말인데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Woad Mountain’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아주 작은 돌멩이 언덕을 그냥 지기들 식으로 ‘산’으로 인정하고 부르기 시작했나 보다.
몽펠리에는 건물 옥상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스페인과의 국경인 피레네 산맥이 보인다. 그리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저만치 넘실거리는 검푸른 지중해가 보인다. 몽펠리에 역사지구에서 바닷가까지 대략 7km 정도인 지척인 것이다.
어촌 마을은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한참 내륙인 몽펠리에도 이주하였지만, 새로운 이주지역의 가장 남쪽 끝자락에 둥지를 튼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를 터전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달구지를 끌고 바다로 가서 육지에 끌어올려 숨겨둔 배를 꺼내 바다에 띄우고 고기잡이를 했으며, 모래 언덕 너머의 습지에서 굴양식을 계속했다.
하여, 처음부터 몽펠리에 남쪽의 어부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이름을 아예 마리안느 항구 지역((Port Marianne) 이라고 불러왔다.
조지 프레쳐 몽펠리에 시장은 도시를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항구에서 시작하여 몽펠리에를 관통하는 고속철도 기차역까지의 광활하면서도 황량한 텅 비어있는 지역을 통 털어 마리안느 항구지구로 정하고 개발 3단계 목표로 삼았다.
몽펠리에 도심의 외곽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Lez)에서 시작하여 포트 마리나에 이르는 도심 주변에 산재하며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는 등의 소규모 농업지역이 주로 분포해 있는 너른 구역의 동쪽인 캉바세레 일대와 남쪽인 오디세움 일대를 합쳐서 통 털어 오디세움(Odysseum) 지구로 정하고 개발 2단계 목표로 삼았다.
몽펠리에의 역사적인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미래지향적인 광광사업의 발전을 모색하며 대대적인 역사지구 정화사업을 벌였다. 코미디 광장 재정비. 숙박업소 개량 사업. 현대식 카페 문화 정착과 확장. 현지인 생활 개선을 목표로 한 현대적 초대형 쇼핑몰 착공 등이 역사지구에 해당되며 개발 1단계 목표 사업이었다.
그렇게 건설되는 역사지구(과거)와 레즈 강 건너에 건설될 신도시 오디세움(미래) 사이에 놓인 약 1KM의 녹지에 고대 그리스 건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간의 통로 안티고네(Antegone)를 만들어 서로 연결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몽펠리에의 찬란한 역사문화유산이 안티고네를 통해 신도시에서 새로운 미래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하나의 완성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살기 좋은 도시에 긍정적인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조지 프레쳐 시장은 자신의 첫 번째 임기가 아직 채 남아있을 때 이미 개발 1단계 목표를 막바지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모든 공사 현장을 직접 쫓아다니며 진두지휘를 했다. 자신의 임기 중에 이룩한 업적의 성과를 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이나 평가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시작에 앞서서 처음 다짐한 보고서 대표들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번 몽펠리에 도시 대개발의 초석을 다지는 시점에서 아직은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그가 그 자신에게 스스로 약속한 소임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기꺼이 물려줄 수 있는 사람 살기에 적합하고 바람직한 도시건설’이라는 개치프레이즈에 모두 담겨있었다.
‘잘 정비되고 외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풍요로운 부자도시’가 최종의 목표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추진하는 ‘사람살기 좋고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도시 몽펠리에’ 개발에는 다음과 같은 그가 추구하고자하는 본질적인 생각과 기본 이념이 깊게 깔려있었던 것이다.
“자연을 향해 언제든 무한이 열려있는 친환경적인 생태도시”, 그것이 프레쳐가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미래의 몽펠리에 모습이었다.
양(量)은 늘 질(質)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개발은 늘 소수자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유익함과 편리함의 크기 만큼 여러가지 불합리와 부작용을 낳는다.
역동적인 도시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보다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주고 편리성을 제공해 주지만 그것들은 거기에 투자되는 비용과 희생만큼 절대적으로 효율적이라거나 지속해야할 무한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이 개발을 통해서만 늘 나아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생태학적인 자연환경과 사회적인 인간의 삶이 나름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꾸준히 유지될 수 있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도시가 몽펠리에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하여, 1단계 2단계 3단계의 개발 이면에는 그런 친환경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꾸준히 골고루 배어들게 추진하고 있었다.
도시를 매력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드는 노력만큼 초록이 자라나는 녹색의 도시를 지향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도시 개발에 도시계획이나 건축 뿐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예술와 식물 생태학 등을 추가로 과감하게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개발에는 이미 그곳에 존재했던 자연이 개발의 동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겸허하게 예우를 갖추어야 한다.’ 라고 모든 현장을 누비며 역설했다. 그렇게 예우를 받은 물과 공기와 다양한 식물과 생물들이 앞으로 그곳에 거주할 인간에게 보다 낳은 양질의 환경을 보답처럼 제공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몽펠리에는 차츰 그렇게 변해갔다.
길이는 900미터이고, 36 헥타르에 이르는 드넓은 면적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페르시아 신전의 형태를 빌어 오아시스를 형상화한 모습의 긴 회랑이었으며, 그곳에 들어서는 모든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현재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신고전주의 건물로 가득 채울 계획이었다. 조지 프레쳐 시장은 취임 즉시 몽펠리에 재개발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코미디 광장의 정비와 쇼핑몰 건설이 막바지에 이르자마자 과거(역사지구)와 미래(신도시)의 연결고리가 될 안티고네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건설 계획에 따르자면, 안티고네 건설과 동시에 착공할 레즈 강 건너 신도시 개발의 시작점이 될 시청의 건설을 마치고 주변 지역의 재개발까지 애초 예정하는 시간은 50년이 걸리는 대단위 장기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안티고네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결정되자마자 프레쳐 시장은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스페인의 건축가 보필(Ricardo Bofill)과 그의 건축디자인 사무실을 끌어들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 지역에 주둔하던 군대의 조프르 막사 부지가 군부대의 이전으로 비워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티고네 프로젝트가 전면적인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온통 떠들썩해졌다. 온 유럽이...... 아니 전 세계가 몽펠리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희대의 풍운아이자 급진 좌파정치인으로 당장 벌어지고 있는 몽펠리에 사태의 중심에 서있는 조지 프레쳐 시장에 대해서 온갖 루머가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몽펠리에 재개발은 당시까지 프랑스 역사상 단일프로젝트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역사였던 것이다.
천문학적인 비용, 당장 해결해야 할 법률적 문제와 정부 시책과의 조절 내지는 해결, 건설에 필요한 전문 인력, 건축 자재 수급과 인부 수급 등의 건설 인프라 부족, 거기에다 5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는 당장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통 불합리 내지는 불가능이라는 현실적 진단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몽펠리에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전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나서서 국가 차원에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해도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대공사를 도시 순위 20위권에서 겨우 벗어난 몽펠리에 자체적으로 이런 거대 프로젝트에 도전하겠다고 나섰으니....... 이젠 프랑스정부차원에서도 언젠가 벌어질 뻔한 파국에 대해서 전혀 모른 체 할 수만도 없는 국가적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된 것이다.
‘프레쳐가 미친 것 아니야? 시장의 임기가 겨우 5년이란 걸 벌써 까먹은 모양이야?’
‘그런 꼴통을 뽑아서 일을 맡긴 몽펠리에 시민 모두가 미친 거지.’
‘프레쳐가 시민들을 꼬여 종신 시장을 보장받기라도 했나? 5년짜리 시장이 연임을 한다 해도 겨우 10년인데......... 공사는 20년이라면서?’
‘출근은 시장실로 하는데 업무는 대통령 결재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미친 거지.’
‘어차피 부도는 정해 진거지만, 임기 5년 안에 자신의 건축 기념비를 많이 세우고 싶었나보지.’
‘몽펠리에 폭망으로 프랑스 전체가 세금을 더 내는 게 아닌지 몰라? 국가 차원에서 뜯어 말려야 하는것 아니야?’
‘프랑스 건축가도 널려있는데, 비싼 스페인 건축가를 데려다 쓴다고?’
조지 프레쳐 시장은 세상의 모든 시선이 지금 몽펠리에로 쏠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온갖 소문과 루머가 나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상은 모든 매스컴과 취재 기자들을 초청했다. 정공법을 택했던 것이다.
몽펠리에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그것을 이루고픈 비전이 담긴 ‘몽펠리에 재개발 프로젝트’ 전체에 대하여 설명회를 개최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애초 시작이 지속이 가능한 장기 프로젝트였던 만큼 시급한 것은 자신이 발로 뛰어서 정부와 협상도 하고 개선도 해나갈 것이며, 장기 프로젝트인 만큼 계속적으로 발생되고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언제든지 열린 채널을 통해 시민과 언론을 통해 교감하고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굳건한 소신을 거듭 피력했다. 아울러 몽펠리에가 이런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나면 이런 사례가 다른 모든 도시들이나 다른 국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침은 물론, 이제가지의 모든 자료와 경험을 기꺼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만큼 모든 인류와 지구가 점점 심각하게 환경문제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으로 심각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반듯이 닥칠 문제이고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해야만 인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몽펠리에 재개발의 핵심에는 이런 환경문제라는 다가올 대재앙에 앞서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과 공존을 함께 모색해서 기꺼이 오래오래 더불어 살아가는 친환경적인 새로운 개념의 생태도시 건설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몽펠리에는 결단코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는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을 더욱 경주해 나갈 것이라고 목청껏 외쳤던 것이다.
몽펠리에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몽펠리에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가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헛소리 그만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시장은 재개발의 속도를 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당면한 시책과 자료를 가지고 정부 창구를 두드렸다. 아무리 몽펠리에 시민의 뜻이 하나로 모여졌다 해도, 어디까지나 몽펠리에는 거대 프랑스 정부에 속한 일개 작은 지자체였기 때문이다.
시장이 계속해서 찾아가도 정부의 창구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모두가 그를...... 몽펠리에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질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프레쳐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그를 알고 믿기에 몽펠리에가 처음부터 그를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는 프랑스 내에서도 먹히지 않는 자신의 신념과 몽펠리에의 비전을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닥칠 온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일이라고 역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몽펠리에 비전이 암울한 인류의 미래를 보존하기 위한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듭거듭 역설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암울했다. 쇼핑센터 완공 말미부터 이미 바닥난 재정과 전문 인력 부족과 자재 수급이 차질을 빚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절망적이었음에도........좌절과 포기를 모르는 신념의 급진좌파 정치인은 리카르도 보필로 하여금 안티고네 공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불을 보듯이 중단이 뻔한 공사를 개시한 것이다. 정부는 포기와 수습을 종용했다. 프레쳐는 머지않아 벌어질 몽펠리에 신도시 지역의 마스터 플랜을 공개하면서 그 이후로 벌어질 개발 이익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계획된 청사진에 의해서 예정 개발지역의 용지(땅)를 선 분양 하는 방식으로 매각하여 개발 비용으로 우선 충당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조차 외면하는 지역 개발의 청사진만 믿고 선 도매로 땅을 구입할 사람들은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 불확실해 보이는 지자체의 청사진만 보고 엄청난 돈을 들여서 부동산을 구입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혹시나 국가가 이행 보증을 해준다면 모를까.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걸 운이라고 해야 하나?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프랑스 정부조차도 외면하고 포기한 몽펠리에 사태를 심도 있게 지켜보던 전혀 엉뚱한 지역의 사람들이 있었다.
안티고네 게이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게 바로 신고전주의 건축이구나!’ 하는 감동이다.
입구 양편으로 벼룩시장이 열려있다. 파브르 미술관 포풀러 숲길 공원에 열리는 상설 벼룩시장의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주로 고서적과 기념 수공예품이 가판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판매되고 있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이색적 풍경이다.
벼룩시장의 안쪽으로 너른 광장의 중앙에 아무런 설치 조형물 없이 땅속에서 솟아나는 분수(Fontaine Poseidon)가 신화속의 이야기처럼 놓여있다. 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삥 둘러치듯 봄. 여름. 가을 농산물 시장(The farmer's market Antigone)이 열린다. 몽펠리에 인근의 현지인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꽃과 야채와 과일을 파는 여행자와 현지인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시장이 겨울을 제외하고 매일 열리는 것이다. 특히, 일요일 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산책을 겸해서 간단하게 시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명소 시장이라 하겠다. 안티고네의 건설 계획 당시부터 이곳은 현지인과 인근의 농촌을 연결하는 농산물 재래시장으로 이미 그 역할이 결정되었었다.
그런데 말이다. 전통 재래시장 치고 이렇게 멋진 건축물들이 병풍처럼 포근하게 에워싸듯 안아주고 안쪽으로 시원하고 상쾌함을 제공해주는 멋진 분수를 가진 재래시장이 여기 말고 또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로마의 신성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드넓은 사원 마당에서 고대의 전통적인 그야말로 로컬 자체의 그런 시장이 만들어졌고 아침마다 열린 것이다.
이 멋진 광장의 실제 이름은 놈브르 도르 광장(Place du Nombre d'Or)이다. 굳이 번안을 한다면 ‘황금비율 광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흔히들 ‘황금비율(Golden Ratio Square)’ 하면 우선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치’ ‘수학’ 등 왠지 이유도 없이 꺼려지거나 회피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나 유럽인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여 현지인들은 이 광장을 ‘황금비율 광장’이라 부르기 보다는 ‘로마 광장’으로 부른다.
아무튼 안티고네 건설의 책임을 맡은 리카르도 보필(Ricardo Bofill)은 이 광장의 건설 전반에 걸쳐 전체 부분과 모든 요소에 철저하게 황금 비율을 대비시키고 르네상스 이후로 크게 개선되고 발전한 기하학적 원리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설계 단계에서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건축 유산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라는 사명감에서였다. 하여 분수대를 중심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크기와 높이는 물론 정면으로 돌출되는 처마 장식과 반대편의 정면 배치 거리까지....... 이 공간에 들어서는 모든 조형물의 수평과 수직에 일일이 모두 황금비율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둘러보자면....... 라임스톤의 정교한 지붕 사이로 파란 하늘이 올려다 보이고, 더하여 함께 느껴지는 거대한 곡선의 미와 웅장함으로 다가오는 원근감에 거부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새삼...... 신선한 충격처럼 슬며시 다가오는 ‘황금비율(Golden Ratio Square)’이란 느낌이 상큼하고도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황금비율이 뭐지?’
보통 우리는 미적(美的)으로 가장 완벽한 비율을 '황금비율'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시선으로 대상 물체를 보았을 때 가장 균형 잡혀 있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비율을 말하는 것인데, 보통 '1:1.618'을 황금비율이라고 정의한다.
황금비율의 근원을 찾아가자면 한참이나....... 그리고 또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97?)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보고 모든 세상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특히 정오각형의 각 꼭짓점을 대각선으로 연결해서 만든 별 모양에서 이상적인 '황금비율'을 발견했다. 정오각형의 한 변의 길이와 대각선 길이의 비율, 정오각형의 대각선이 교차하는 선분의 비율이 모두 1:1.618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것을 황금비율의 기준으로 삼았다.
르네상스 이후로 화가이자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속 여인의 얼굴 자체가 황금비율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여인의 얼굴 가로의 길이를 1이라고 하면 세로의 길이는 약 1.6, 턱에서 코끝까지의 길이를 1이라고 하면 그 코끝에서 눈썹까지의 길이는 약 1.6, 코의 너비를 1이라고 하면 입의 길이는 약 1.6, 인중의 길이를 1이라고 하면 입에서 턱까지의 길이가 약 1.6이라는 수치가 입증되었다. 결국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여인의 얼굴은 사전에 온통 황금비 계산을 철저히 한 후에 그려졌다는 결론이 된다.
어쨌거나 결론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황금비율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안정감과 균형감을 실제로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여튼 황금비율은 그렇다 치고........ 안티고네 안쪽으로 길게 펼쳐지는 보행자 전용 도로를 따라 시선을 돌려보면 저만치 끝자락에....... 레즈 강 건너편의 몽펠리에 시청 건물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짙푸른 숲과 라임스톤의 육중한 건축물이 신비하고도 아름답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열려진 긴 회랑을 펼쳐내고 있으며, 그 회랑을 통해서 몽펠리에의 과거(역사지구)와 미래(신도시)가 서로 연결되고 소통이 원활해진 것이다.
정말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공간이 바로 안티고네(Antigone)라고 말해주고 싶다.
황금비율 광장에서 좀 더 안쪽으로 향하면 양쪽으로 가로수가 가득 늘어선 숲길 회랑이 나온다. 이 공간에도 미히에네르 광장이라는 이름이 엄연히 붙어있기는 하지만, 도보 산책용이나 자전거 타기에 딱 좋아 보이는 이 공간은 그저 황금비율 광장에서 다음 명소인 테살리아 광장 사이를 연결하는 나무숲길 정도로만 인식하는 듯 보인다. 어디에서도 딱히 미히에네르 라는 명칭을 따로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살리아 광장((Place de Thessaly)에 이르면 그런 생각과 느낌은 금방 달라지고 만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어느 신전이나 광장에 서 있는 놀라운 감동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안티고네 단지 중에서 가장 현대적 대중문화 공간에 가까운 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몽펠리에 사회복지 기관들이 상주해 있고, 우체국이 있고, 시립 도서관과 고등학교와 대중적인 빌라단지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 미용실과 대형 슈퍼와 안경점과 빵집에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물론 문구점 등 여느 동네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지지만,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높은 위용의 건축물들은 한껏 그리스 신전건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멋진 광장의 중앙에는 호수에서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듯한 반신을 노출한 흉상들이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참으로 멋진 풍광이었으련만...... 아쉽게도 계절 탓인지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이곳은 한마디로 휴식의 공간이라 부를 만 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공간이면 그곳이 어디든 삼삼오로 사람들이 모여앉아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다. 광장을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이곳엔 현지인이던 여행자이던 노인이던 어린이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무한의 자유로운 여유가 허락되는 그런 마냥 열려진 공간인 것이다.
이 광장의 이름이 테살리아(Place de Thessaly)다. 왜 테살리아라 붙였을까? 테살리아는 그리스 중부의 동쪽 해안에 걸쳐있는 지역이다. 그리스 지역 원주민 문화라 할 수 있는 크레타 문명의 활동영역이었다. 그리고 테살리아에는 많은 여행자들이 그리스를 찾아가면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산토리니의 이야 마을 다음쯤으로 많이 찾아가는 메테오라의 수도원이 위치해 있는 이름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혹, 테살리아의 어느 산벼랑에 걸터앉아 발아래로 저만치 메테오라 수도원을 건네다 보면서 지난날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자취를 떠올려 보라는 의미일까?
우리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계단에 다른 사람들처럼 대충 걸터앉아서 테살리아 광장의 깊은 맛과 정취에 취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시간과 배짱뿐이라니까?’
‘가장 살기 좋다는 몽펠리에에서 길거리에 좀 드러눕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배~~~~~째~~~~~~~'
그리고 이런 장소에 이런 분위기라면 잠시라도.......... 고대 그리스엔 도리아 문화가 있었지? 하지만 외래 유입문화라고 해야지 그리스 토속 문화라고 볼 수는 없잖아? 이오니아 문화 역시도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란말야. 코린트 역시 그렇게 보자면 그리스 외부유입 문화들이 섞이다가 우연히 태어난 외부 유입문화 라고 해야 할꺼야. 고대 그리스의 전통 토속 문화라면 크레타 문명이 오리지널이라 해야지. 미노스 문명이 그 뿌리역활을 한 것이고......... 언제고 그리스를 꼭 가기는 가야 할텐데....... 도대체 언제?
다시 발걸음을 돌려 조금 더 들어가면 안티고네 지역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유럽광장(Place de l' Europe)이 다가온다. 이곳은 ‘광장’이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정원’이라거나 아니면, ‘유럽 잔디밭’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른 잔디밭이 인상적이다.
아니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너른 잔디밭을 둘러싸고 있는 아치형의 건축물을 보는 순간 저마다 ‘저건 학익진(鶴翼陣)?’ 이라고 반듯이 누군가 그렇게 외쳤을 것만 같다. 사실이 그렇다. 언제 어떤 곳을 가던지 작은 조형물 정도야 언제든 ‘아치’라고 해야 하겠지만, 대자연이 만들어 놓은 다른 차원의 타원형이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조형물을 보게 되면.......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학익진(鶴翼陣)’ 이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왜? 나도 한국인이니까..........
언제든 누구든 이곳 잔디밭에 드러누워 다사로운 햇살을 맘껏 누릴 수 있고, 인근에 들어서 있는 많은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테라스에서 커피와 식사와 휴식을 맘껏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이 광장의 중앙엔 루브르 박물관 계단에 전시중인 고대 그리스 조각품 <사모트라케의 날개달린 승리의 여신상> 사본이 똑같은 실물 크기로 제작되어 놓여 져 있다. 일전에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 털어 딱 그 자리에 오로지 하나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제공된 특별한 공간으로는 바로 저 <니케의 여신상>이 전시되어있는 루브르의 계단 전시를 특별하게 꼽은 적이 있었다.
딱 그만큼........ 이렇게 푸르게 한없이 열린 공간에 전시된 조각상과 루브르에 전시된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너무도 다른 별개의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굳이 어느 전시가 인상적인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누군가 무엇이 얼마만큼 다르냐고 물어온다면......... ‘장식’과 ‘전시’의 차이 정도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기 유럽광장은 안티고네의 끝을 가리킨다.
몽펠리에의 과거(역사지구)를 벗어나 시간의 회랑(안티고네)를 가로질러 이곳에 이르면 저만치 몽펠리에의 미래(시청을 시작으로 하는 신도시)가 새롭게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유럽광장의 끝자락에 있는 작은 전망대 너머로 커다랗게 현대적 위용을 맘껏 뽐내는 몽펠리에 시청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얼핏, 그 작은 전망대가 여기 시간의 통로를 지나 미래의 상징인 시청사로 향하는 사다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곳의 지형을 아는 사람에게는 다리, 혹은 사다리겠지만..... 지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안티고네와 시청이 잔디밭을 경계로 하나로 붙어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럴 때는 전망대가 정문으로 안내하는 하나의 작은 통로가 될 것이다.
하니만 아니다. 안티고네와 시청사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지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두 지역의 사이에는 강 보다는 작고, 하천 보다는 조금 큰 물줄기가 가로막고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레즈(Lez) 하천이 가로막고 있다. 건축가는 아마도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슬쩍 착시현상을 일으키도록 부러 그렇게 설계를 했었나 보다.
이제 다음 이야기에서는 몽펠리에 개발의 3단계 (오디세움과 포트 마리안느) 이야기로 다 시작하도록 해야겠다.
안티고네 시작 단계에서 재정난을 비롯해 여러 난관에 봉착한 몽펠리에 시민들과 조지 프레쳐 시장은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프랑스 정부까지 외면하고 나선 마당에, 과연....... 몽펠리에와 프레쳐 시장을 구원해 주려고 등장한 전혀 뜻밖의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틀림없이 모두가 놀라게 될 것이다.
--- 다음 이야기에서 (몽펠리에는 어떻게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되었는가? 2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