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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약교회 20240414/본문: 에베소서 4:7-12
설교개요
I.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 (7절)
1. 전리품을 나누어 주시는 승천하신 예수님 (8절)
1) 시편 68편과 하나님
시편 68편 7절 출애굽과 광야에서 승리하시는 왕
시편 68편 17절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하도록 하신 하나님
시편 68편 17절, 24절 성소로 행차: 승리하신 왕이 성소에 계심
시편 68편 18절: 성소에서 선물을 받으시고 주시는 승리하신 왕
2) 시편 68편과 예수님
성소에 오르신 하나님-->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승천하신 예수님
승리하신 왕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마지막 원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성소에서 선물을 받으시는 하나님--> 공예배중 은혜를 선물로 나눠주시는 예수님
2. 은혜는 공예배에 주신 말씀 (11절)
3.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7절)
II. 주신 은혜의 목적
1. 성도가 온전해 진다 (12절)
2. 봉사의 일을 위해서 (12절)
1) 디아코니아
사도행전 6장 1-2절/ 사도행전 11장 29절
고린도전서 11장 21절, 33-34절
2) 말씀에 의한, 말씀을 위한 봉사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12절, 16절)
4. 공예배의 말씀과 짝을 이루는 주님의 식탁
나눔 질문
1. 시편 68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하신 왕입니다. 시편 68편은 이를 출애굽, 다윗, 그리고 성소에 오르시는 행차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소에 오르신 하나님은 성소에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선물을 받으시고 또한 전리품을 선물을 나누어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시편 68편의 하나님을 승천하신 예수님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주십니까?
유월절 만찬의 그림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 자신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의 은덕들을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2.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신 은혜는 어떤 뜻입니까? 유월절 만찬에서 주님께서 떡을 나누시는 방법을 통해서 설명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유월절 만찬과는 달리 떡 덩어리 전체를 가지시고 떼어서 일일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원래 떡은 한 덩이였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떡이 떼어져서 각각의 개인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여전히 떡입니다. 그러나 나누어져 각 사람에게 나누어져 주십니다. 나누어진 떡, 비유컨대 이는 은사입니다. 떡으로 보자면 예수님이 떼시기 전 떡도 떡입니다. 떼신 후 떡도 떡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은사 곧, 분량대로 나누어진 선물인 은사도 똑같이 은혜입니다. 다만 은사는 각 사람, 각각에게 나누어져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생명을 주는 떼어진 떡과 같습니다. 한 덩이의 떡에서 나누어진 각기 다른 떼어진 다른 모양의 떡을 각 사람이 먹어서 자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한 덩이 떡에서 나누어진 떡을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각 다른 역할과 모양으로 자신을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3. 봉사 (디아코니아)는 원래 어떤 뜻입니까? 그리고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내용을 말해 봅시다. 나는 어떻게 이 디아코니아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식탁에 각 사람이 가져다 놓은 음식과 돈을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각 사람은 다양한 은혜의 열매들을 주님의 식탁에 가져옵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은혜이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 사람이 받은 다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식탁에 놓인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 나누어지듯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은 자신의 것으로 각 사람에게 분배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워 가십니다.
I.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 (7절)
1. 전리품을 나누어 주시는 승천하신 예수님 (8절)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가진 유월절 만찬에서 떡 온덩이를 취하셔서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덩이에서 나누어진 떡을 제자들 각자가 받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잔을 들어 감사기도 하시고 제자들 각자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이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예수님의 언약의 피입니다. 한 잔에서 나누어 마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새로운 가족, 곧 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잔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7절에 은혜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시편 68편에 따라서 말합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 68: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이 모습은 전쟁을 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7절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광야에서 전진할 때 어떤 무기도 없었지만 법궤를 앞세워 전진할 때 그것은 승리하시는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시 68: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이 노래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돌아올 때 울려퍼진 여인들의 노래였습니다. 사무엘상 18장 7절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7절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는 것은 자신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출애굽과 광야에서 법궤를 앞세워 전진하면서 승리하시는 왕 + 다윗의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자신에게 속한 전쟁을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승리하신 왕 바로 그 왕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68편 17절에서 ‘시내 산 성소’는 광야에서 법궤가 전진하는 것과 성소로 올라가는 것을 겹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법궤가 있는 시내산 성소 혹은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것은 광경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법궤를 앞세워 전진하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편 68편 24절에는 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사실은 주의 백성들이 법궤가 있는 성소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승리한 왕으로 행차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소에 오르는 주의 백성들이 만나는 하나님이 법궤를 앞세워 승리하시며 다윗을 통해서 골리앗에게 승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 문맥에 바울이 인용하는 시편 68편 18절이 들어 있습니다.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성소 곧, 예배의 장소)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승리와 전리품)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시내산 성소에서는 예배하러 하나님의 승리의 행차를 재현하는 백성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신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물을 받으십니다. 사실은 승리하신 여호와, 성소에 올라계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그분의 전리품을 주셔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시편 68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성소에 오르신 하나님을 바울은 10절에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과 광야에서 그리고 다윗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왕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마지막 원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입니다. 성소에서 선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공예배중 은혜를 선물로 나눠주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하늘에 오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2. 은혜는 공예배에 주신 말씀 (11절)
11절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 혹은 예수님께서는 또 한 번 주시는 분입니다. 7절에서 주신다와 짝을 이룹니다. 무엇을 줍니까? 어떤 사람을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전하는 자로, 목사교사로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은 모두 무엇과 연관됩니까?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을 주시는데 모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셨을 때 사도 베드로는 무엇을 했습니까? 설교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는 사건이 모든 하늘에 오른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나열된 사람들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 은혜입니다.
성소에 올라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들이 받던 그 선물, 전리품은 지금은 공예배에서 우리가 받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말이 뭐 그렇게 대단한 선물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그 능력으로 세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가진 권세와 동등한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최후의 원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는 공예배중에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거인 성경을 순수하게 설교하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공예배중 말씀이 7절에서 말하는 은혜입니다.
3.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7절)
여기서 우리는 7절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각 사람에게, 모든 개인 개인에게 입니다. 11절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교사와 같은 직분만을 말했는데 7절에서는 모든 사람, 각각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양적인 부분보다 우리 각각 모두에게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동일하게 주십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각 사람에게 주어져서 구체적이고 다양한 열매들을 만들어 냅니다. 말씀이라는 은혜가 각 사람에게 주어져서 만들어지는 결과들은 각 사람들이 다양한 것처럼 다양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동일한 말씀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서 받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결코 그들 못지 않은 분수, 범위대로 말씀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4장 7절과 비슷한 구절이 로마서 12장 6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은혜는 우리에게 곧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집니다. 은사도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은사는 내 특기가 아닙니다. 말씀, 곧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을 성령님께서 사용하여서 내 안에 일하실 때 나의 인격을 통해서 감당되는 일입니다. 그 은혜대로 받은 은사는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다만 각각 개인마다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유월절 만찬과는 달리 떡 덩어리 전체를 가지시고 떼어서 일일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원래 떡은 한 덩이였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떡이 떼어져서 각각의 개인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여전히 떡입니다. 그러나 나누어져 각 사람에게 나누어져 주십니다. 나누어진 떡, 비유컨대 이는 은사입니다. 떡으로 보자면 예수님이 떼시기 전 떡도 떡입니다. 떼신 후 떡도 떡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은사 곧, 분량대로 나누어진 선물인 은사도 똑같이 은혜입니다. 다만 은사는 각 사람, 각각에게 나누어져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생명을 주는 떼어진 떡과 같습니다. 한 덩이의 떡에서 나누어진 각기 다른 떼어진 다른 모양의 떡을 각 사람이 먹어서 자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한 덩이 떡에서 나누어진 떡을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각 다른 역할과 모양으로 자신을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은 은혜입니다. 말씀이 나누어져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의 참된 양식이 되고 그 양식으로 힘을 얻어 감당한 일들도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다만 그것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져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나누어진 은혜 혹은 은사입니다.
II. 주신 은혜의 목적
승천하신 예수님은 은혜인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십니다. 하나님 이 주신 선물, 은혜는 우리 편에서 응답과 짝을 이루어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덩이에서 떼어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떡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서 그 사람을 먹이고 살립니다. 말씀을 받아 먹은 사람은 꼭 은혜가 각 사람 안에서 일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결과가 없다면 은혜는 헛된 것입니다.
1. 성도가 온전해 진다 (12절)
우리는 모두 은혜인 말씀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말씀의 열매로서 온전해져야 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이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단순한 약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받은 말씀대로 살지 않은 시간, 공간, 영역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은혜는 반드시 우리 인격을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은혜인 말씀에 의해서 장악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온전해지는 것은 우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쓰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진 우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봉사의 일을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2. 디아코니아의 일을 위해서 (12절)
여기서 봉사는 디아코니아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성찬 식탁 봉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6장 1,2절에 보면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20-21절에 보면 성찬과 관련해서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공예배로 모일 때 성찬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리에서 성찬을 받지만 성경시대의 교회는 나와서 성찬 식탁에 둘러 앉아 성찬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공예배로 모이는 장소에 항상 하나 이상의 성찬 식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탁에 자신들이 재배한 자연의 선물이나 집에 넉넉한 먹을 것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공예배 전에 미리 온 사람들이 식탁에 놓여있는 식물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만찬 시간으로 나누어 먹어 버렸기 때문에 정작 자기 집에 먹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 먹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식탁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주님의 만찬 식탁에 각 사람이 가져 온 것을 같이 먹도록 분배하고 남은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이 일을 감당하던 헬라파 과부들이 부족하여 6명의 헬라인 남자들을 집사로 세워서 이 일을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 식탁에 성도 각자가 가져 온 먹을 것은 주님의 식탁, 주님의 음식과 음료였습니다. 주님의 식탁으로부터 주님이 분배해 주시듯이 나누어주는 것이 디아코니아입니다.
은혜인 말씀을 받은 자들은 누구나 주님의 식탁으로부터 주님의 선물을 분배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선 말씀으로 온전해진 사람들은 각 사람이 그 은혜의 열매들을 주님의 식탁에 가지고 나옵니다. 직접적으로 물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9절에는 디아코니아가 헌금입니다. 성경시대 교회는 주님의 식탁에 먹을 것만이 아니라 돈이나 돈이 되는 물질을 올려놓았고 주님의 식탁에 드려진 헌금을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에 구제로 보냈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은 말씀이라는 은혜를 받은 각 사람의 구체적인 열매입니다. 돈이 많다고 헌금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 음식, 돈을 주님의 식탁에 가져와 올려 놓는 것은 분명히 각 사람에게 떼어져 나누어진 은혜의 결과, 은사입니다.
각 사람이 가져 오지만 주님의 식탁에 놓이는 순간 주님의 음식이 됩니다. 주님의 음식인 헌금은 다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집니다. 그것이 디아코니아입니다. 디아코니아가 가능한 것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이 분량대로 주어진 것을 따라 주님의 식탁에 먹을 것, 헌금을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가져온 헌금은 주님의 식탁에서 나누어져서 성도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디아코니아는 말씀이 주님으로부터 각 사람에게 은혜와 은사로 나누어지는 것을 눈에 보이게 보여줍니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서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재현합니다.
디아코니아를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먹을 것, 헌금이나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다른 것을 가져옵니다. 시간, 마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나 태도등을 주님의 식탁에 각 사람이 가져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은혜인 말씀을 받은 자들안에서 성령님께서 만들어 주신 온전함입니다. 자기 시간이 있다고 그것을 주님의 식탁에 가져 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말씀을 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죽을 것 같고 자신이 담당해야 할 직분이 너무나 무겁지만 그런 중에도 시간, 마음, 땀, 발품, 물질, 가르치는 것, 위로를 주님의 식탁에 가져 올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말씀으로 주신 은혜라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각각 다 다르고 다양하지만 은혜인 말씀을 받은 산물들을 먼저 주님의 식탁에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주님의 식탁에 모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들이 교회 안에서 디아코니아됩니다. 내가 다른 형제를 위해 시간을 내고 물질로 돕고 마음으로 위하고 위하여 기도합니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인 말씀을 성령께서 사용해서 주님의 식탁에 올려드린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주님의 식탁에서 다시 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디아코니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종합하면 우리가 받은 말씀이라는 은혜를, 우리 삶의 전체를 우리 각 사람은 주님의 식탁에 가져옵니다. 그것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께서 디아코니아 해주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은혜입니다. 은혜인 말씀의 결과이고 말씀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나누어지는 것을 다시 재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안에서 말씀을 위한 봉사가 멈추지 않도록 기도하고 말씀의 봉사자를 위한 주님의 식탁에서 디아코니아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12절, 16절)
이렇게 주님의 식탁에 가져온 우리의 모든 것들이 각자에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니, 은혜는 그리고 은혜의 결과인 우리의 온전함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쓰여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은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식탁에 내가 가져다 놓은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디아코니아 되어서 다시 각 성도들에게 나눠져 성도를 세울 때 비로소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4. 공예배의 말씀과 짝을 이루는 주님의 식탁
우리 주님은 승천하셔서 우리를 축복하시면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한 덩이에서 떼셔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셔서 먹어 살도록 하십니다. 이 일은 공예배의 설교와 성찬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주신 말씀 때문에 점점 온전하여 지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 사람 안에서 은혜의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 결과물을 주님의 식탁에 올려 놓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 사람 모두가 다릅니다. 다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식탁에 은혜를 가지고 와서 올려놓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 주님의 식탁에 은혜의 결과를 올려 놓을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 나는 물질을 올려 놓을 수 없다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 마음, 음성, 나의 따뜻한 미소, 그를 위한 기도등 수없이 많은 다른 것들 중에 하나도 올려놓을 수 없다?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반드시 우리 안에 온전함, 곧 은혜의 결과, 차이를 만들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식탁에 올려놓은 은혜와 은사는 주님의 소유, 주님의 식탁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것을 주님의 식탁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믿기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식탁에 놓여진 주님의 것, 주님의 은혜의 결과를 디아코니아 하셔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말씀과 성찬에서 주님 자신의 몸이 찢어져 우리 각 사람을 위한 양식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몸과 피를 먹음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는 원리를 다시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재현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식탁에서 각 사람에게 은혜가 나누어질 때 그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세우십니다. 관악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찬, 공예배중의 은혜가 더 풍성하길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이 분배하시는 은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디아코니아도 더 다양하고 왕성하고 활발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직분이고 우리의 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