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이름으로
네델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1800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1858년)가 이루어졌지만,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제국의 포옹이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19세기에 더 끈끈해졌다.
주식회사는 더 이상 민간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사장과 대주주들은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권력의 끈을 조종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뒷배를 바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 비평가들이 빈정댔듯이,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군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중독자가 되었고,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쇠약해졋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의원과 각료들이 마약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감 과잉이던 중국은
증기선 대구경 대포, 로켓, 신속발사 소총 같은 영국의 신무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중국은 영국 마약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경찰이 마약 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은 홍콩의 초차(租借)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한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었다.
이집트 역시 영국 자본주의의 힘을 벗아날 수 없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들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 다른 사업들에 자금을 기개 위해서 였다.
이집트의 빚은 점점 더 많아졋고, 유럽인 채권자들은 이집트 내정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다.
1881년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외국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일반적으로 선언햇다.
이것이 불쾌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년 후 나일강에 육국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
(보호령으로 유지된 기간은 명목상 1914~1922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계속 군대를 주둔 시키며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집트를 핵심 전략 기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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