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1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요한 13,1-15)
"Master, are you going to wash my feet?"
If I, therefore, the master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I have given you a model to follow,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기 전날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신다. 그날 밤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를 칠 때 문설주에 발린 양이나 염소의 피가 구원의 표지가 된다. 그리고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서둘러 먹도록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역사적인 날을 대대로 기억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주님의 최후 만찬을 기억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거룩한 성찬을 거행하고 주님의 죽음을 전하라고 가르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그리고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를 몸소 보여 주시면서 제자들에게도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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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성체성사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십니다. 당시 주인이 외출하고 돌아올 때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발을 씻어 주듯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씩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이제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수난기에 접어들면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당신을 떠나고, 유다는 당신을 팔아넘기고, 으뜸 사도로 세운 베드로도 철저하게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발을 씻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떠나시기 전에 미리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 죽는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내가 발을 씻어 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그 사람의 발을 상상으로라도 씻어 주십시오.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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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말없이 씻어 주십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십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 모릅니다. 어정쩡하게 발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사코 거절하다가 무안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느낌으로 압니다. 스승님께서 베푸시는 마지막 애정임을 직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꾸중이 아니라 감동입니다. 제자들은 훗날 예수님의 모습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발을 씻어 주시는 스승님께 ‘저희도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다짐했던 것입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인 오늘 저녁 미사 때 사제는 성경의 이 모습을 재연합니다. 교우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애정이 빠진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거룩한 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형식이 감동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진심과 애정만이 사람을 움직이고 바꿉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과 표정에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 정신’이 됩니다. 아무리 장엄한 전례일지라도 ‘복음 정신’이 사라지면 은총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총이 없는 곳에는 감동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일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말로 하는 세족례
- 김종성 신부-
발씻김 예식을 하는 날이다. 그런데 성지에 있다 보니 어떤 교우들이 올지, 얼마나 올지 가늠할 수 없어 고민에 빠졌다. 발씻김 예식을 하려면 발을 내어줄?(?) 교우들에게 미리 알려드려야 할 것 아니겠는가?? 늘 해오던 전례인지라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막막했다. 고민 끝에 ‘말로 하는 세족례’?를 하기로 했다. 우선 사제인 내가 교우들?·?사무장님?·?관리장님에게 잘못한 일을 낱낱이 글로 적어 읽었다. 공개 고해성사인 셈이다.
스스로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순례자들한테는 기도가 아니면 뭐하러 성지에 왔느냐고 캐물은 일, 바쁘다는 핑계로 복음묵상 못하고 예전 강론 재탕했던 일,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인해 바쁜 사무장님께 늘 빠르고 완벽한 일처리를 요구했던 일, 워낙 부지런해서 그냥 맡겨드려도 될 관리장님의 일에 신부 노릇 한답시고 얄팍한 경험을 주장했던 일?…. 그다음에는 원장수녀님 순서가 이어졌다. 공동체 수도자들에게 미안했던 일들을 읽어 내려가다가 눈물 때문에 멈추기를 반복하다 겨우 끝내셨다. 오늘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어쭙잖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때를 보여주는 날이다. 눈물이 글을 가릴 정도의 마음으로 말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유명인의 자살이 잇달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자살 문제는 꽤 심각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로, 하루에 3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니 얼마나 심각합니까? 특히 자살이 자기만의 문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주변 6명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보면서 단순히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슬픔으로만 그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책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참새 백 마리가 전깃줄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포수는 참새를 향해 총을 한 방 쐈지요. 그런데 참새 백 마리가 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총 한 방으로 백 마리를 떨어뜨렸을까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요? 아닙니다. 정답은 참새의 이름이 ‘백 마리’라고 하네요. 포수는 숫자 백 마리의 참새를 총 한 방으로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백 마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참새 한 마리를 총 한 방으로 떨어뜨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말이 되죠?
이 문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보면 쉽게 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 마리’라는 숫자에 얽매일 때 문제는 절대로 풀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즉, 주변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그들을 향한 큰 관심을 갖고 다가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2처년 전 예수님을 홀로이 나두었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외면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시지요. 그러나 배신의 쓴 맛과 십자가의 고통을 미리 다 알고 계신 상태에서도 큰 사랑으로 다가서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주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런 사랑을 해야 한다고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사랑이 아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올려다보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는 사랑으로는 주변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이 사랑도 습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며칠 전 제 동창 신부의 집을 찾아갔어요. 이 신부는 본당 안에 사제관이 없어서 주변의 아파트에 살고 있지요. 저는 엘리베이터를 탄 뒤에 동창신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층수의 숫자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떤 자매님이 이 엘리베이터를 탄 것입니다. 조그마한 공간에서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쑥스럽던 지요. 쑥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한 시간이 저녁 6시라는 것이지요. 습관이 되지 않아서 엉뚱한 말을 했던 것이지요. 아마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사랑도 습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습관이 되지 않으면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더 아픔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에 모든 초점을 맞출 때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최고의 사랑을 하기 위해 우리 모두 열심히 노력했으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삼일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돌로 쌓아 올린 성보다 사랑으로 쌓은 성이 더 튼튼하다.(뤄크르크스)
예수님의 손과 유다의 발
-이영훈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느 때와 달리 어두운 표정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지만 예수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유다의 발도 씻어주십니다.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런 유다의 결심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압니다. 그건 바로 ‘가지 마라. 너의 결심과 선택을 다시 생각하고 접어주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에서 애틋하고 간절한 그분의 마음을 느꼈지만, 결국 떠나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뒷모습을 찢어지는 마음으로 바라만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을 떠난 그 발은 그분의 손에 십자가를 드립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과 결심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보다는 세상을 선택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그런 유혹 앞에 항상 고민합니다. 뭔가를 선택하고 결심해야 할 때, 나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분의 손과 마음을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어떠한 유혹도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는 건 다 받아라!
-전삼용신부-
보좌 신부를 할 때 대축일 미사 복사 서느라고 고생한 복사들에게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돈을 좀 듬뿍 주었습니다.
다음 날 미사에 그들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그 돈을 다시 내미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자기들끼리 상의하고 다시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호의에 대해 마음이 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염치없이 남의 것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보다야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받지 않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큰 사랑입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어서 나도 아예 받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잘 줄줄도 압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온 사람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건전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줄 사랑도 지니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남의 사랑과 호의를 거절하다보면 어느새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도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당시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는데 주님이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겸손이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보여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께로부터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아시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주셨다면 정말 당신 이름을 제외하고는 하느님으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즉, 사랑 자체인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껜 사랑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아버지로부터 오는 사랑을 거부하시지 않고 모두 받으셨기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의 에너지를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낮아질 힘이 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하신 일을 그대로 되풀이할 것을 명하십니다. 사랑은 낮아짐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모범으로 모든 사람 앞에 낮아지라는 명령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즉, 그의 발을 씻으려하는 예수님의 호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어찌 보면 겸손해보이지만 실상은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조차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셨다면, 성모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셨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주 조금의 거부도 없이 받아들여야 완전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완전히 정화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전해주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너희들은 이미 내가 말한 말씀을 통해서 깨끗해졌다.”(요한 15,3)
말씀은 가장 더러운 부분인 발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든 몸을 정화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발까지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낮아짐과 희생이지만 그 희생은 상대를 깨끗한 성령의 궁전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성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당신의 말씀으로 깨끗하여지기를 원하시고 우리 발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 정화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사랑의 몫도 나누어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정화합시다. 그래야 우리가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때서야 다른 이들에게도 말씀과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은 다 받아야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이에게 사랑이든, 말씀이든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양승국신부-
<그냥, 좋아서!>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야외로 나갔다가 눈요기를 제법 했습니다. 산들바람에도 온 몸을 흩날리며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을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세월 제가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아이들 얼굴들이 꽃잎같이 화사한 얼굴, 어여쁜 얼굴로 하나 하나 다가왔습니다.
저는 살레시오 회원으로 운이 좋았던지 서품 후 언제나 아이들 틈에서 지냈습니다. 많은 아이들을 만났었고, 함께 부대끼며,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기도 하고...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세월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일입니다. 갈수록 가슴 뛰는 일, 흥미진진한 일, 특별한 일은 점점 줄어들고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서글퍼지지요. 좋은 소식, "이거다!" 하는 소식이 줄어드는 대신 부고 소식은 얼마나 자주 듣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제 나도 서서히 나이를 들어가는구나. 왜 이리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기만 한건가?" 하는 마음에 서운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이 먹어가면서 좋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혈기왕성할 때는 아이들이 어찌 그리 밉던지? 싸우기도 엄청 많이 싸웠는데,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아이들이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밉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녀석들이 부모를 잘못 만나서, 시절을 잘못타고 난 이유로 거친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짠해보여서 측은한 마음만 앞섭니다. 그저 하나라도 못해줘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한 명 한 명 개별적으로 만나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한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왜 기분 나쁘게 쳐다봐요?" 하고 빽 소리를 지릅니다. "그냥, 좋아서!" 라고 대답하지요.
오늘 성목요일입니다. 성목요일은 저희 사제들에게 아주 각별한 날입니다. 오전에는 각 교구마다 사제들이 함께 모여 성유축성미사를 거행합니다. 주교님들께서는 근사한 점심도 한 끼 내십니다. 또 저녁 만찬 미사 때는 세족례 예식을 통해서 저희 사제들 삶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자각합니다.
세족례 예식은 우리에게 사제직은 다른 무엇에 앞서 봉사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교님은 사제들 앞에 무릎을 꿇을 것, 사제들은 신자들 앞에 허리를 굽힐 것, 저희 같은 살레시안들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접습니다. 그간 당신께서 가장 중요한 직무로 생각하셨던 제자교육을 마무리하십니다. 종강을 하시면서 당신의 가르침을 최종적으로 요약정리하셔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세족례인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 총 정리는 세족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죄 많고 나약하고 가엾은 인류를 위한 섬김과 봉사, 그것이 메시아로서 사명의 본질이었습니다.
오늘 성목요일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또한 교회나 사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직책이 오로지 백성들, 특히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섬김과 봉사, 헌신과 자기증여를 위한 직책임을 다시 한번 크게 자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어떤 가정에서 있었던 훈훈한 일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즐거운 성탄 전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성탄 자정미사를 마친 뒤에 집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누구 손이 제일 예쁘냐는 얘기가 나왔답니다. 며느리와 딸들은 저마다 이 손이 예쁘다 저 손이 예쁘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지요. 결국 모두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는 직접 보고서 투표로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손이 제일 예쁘고 아름다운 손으로 뽑혔을까요?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바로 주름살이 많이 잡힌 어머니의 거친 손이 가장 아름답고 예쁜 손으로 뽑혔었답니다.
제일 예쁘고 아름다운 손은 과연 어떤 손일까요? 맞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가장 많이 한 손이야말로 제일 예쁘고 아름다운 손입니다. 아름다움은 결코 치장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요즘을 보면 너무 화장과 같은 인공적인 아름다움만을 창조하려는 것입니다. 이 인공적인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처럼 가족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모습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만 좋아하지 내가 다른 이웃들에게 보이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즉, 사랑받기만을 원할 뿐 사랑하는 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 아름다운지를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발을 닦아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당신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길지를 알고 계셨지요. 또한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큰 소리 칠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랑을 부어주었던 그 제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벌벌 떨며 숨어 있을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이 결국은 자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인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아름다움을 우리 역시 본받으라고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당신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진정한 아름다움을, 말로만 외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아름다움을 행하라고 당신께서 직접 본보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자주 판단하게 되면, 사랑할 수 없게 된다.(버트런드 러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충격요법>
정녕 피하고 싶은 때, 그러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때를 목전에 둔 성목요일입니다. 만찬석상에 앉아계셨던 예수님, 이제 잠시 후면 떠나가셔야만 하는데, 여러모로 마음이 찹찹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이셨던 제자교육이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서로 사랑하라. 서로 섬겨라. 서로 봉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총무란 중책을 맡았던 유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제자단을 떠나기로,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팔아넘겨 단단히 한 몫 잡기 위해 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제자 베드로 역시 6개월 전부터 마음이 떠나있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제자들도 처지는 비슷했을 것입니다. 무늬만 제자, 말로만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었기에 창피하게도 길을 가면서도 누가 높은지 드러내놓고 싸웠습니다. 어떤 제자의 어머니는 인사 청탁까지도 스스럼없이 해왔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충격요법을 사용하십니다. 식사 중에 갑자기 겉옷을 벗으십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더니 털썩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당시 몸종들의 몫이었던 일,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십니다.
너무나 급작스런 일이고, 너무나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기에, 앉아있던 제자들은 다들 깜짝 놀랍니다. 너무나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이런 죄송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 인간들의 통상적인 사고방식을 일거에 뒤집은, 참으로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소중한 진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 모든 지도자들에게 깊은 자기반성과 내적 성찰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수장들, 학계의 총장님들, 교장님들, 교회 안의 단체장님들, 원장님들, 주임신부님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다시금 자신을 새롭게 쇄신시키고 새 출발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이런 직책과 권한을 부여하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다. 나는 가장 낮은 사람, 나는 가장 부족한 사람, 나는 가장 아래에 서있는 사람, 나는 가장 사람들이 꺼려하는 하찮은 일을 도맡아 할 사람이다.”는 대대적인 의식전환이 필요합니다.
성삼일을 시작하는 오늘 성목요일,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분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느껴보고 싶으실 것입니다. 좀 더 그분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그 옛날 세족례를 주관하신 예수님처럼 형제들 앞에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일 년에 단 한번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형제적 봉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세족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궂은일은 내가 먼저 다는 각오로 남들보다 먼저 팔을 걷어붙이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에 먼저 뛰어드는 것입니다, 일상의 작은 일, 귀찮은 일, 하찮아 이는 일에도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을 기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향한 삶
- 이정민 신부-
구약 성경의 아비가일은 자신을 아내로 삼기 위해 다윗이 보낸 부하들에게 “이 종은 나리 부하들의 발을 씻어주는 계집종일 뿐”(1사무 25,41)이라고 스스로를 고백합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몸소 집약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 집중교육은 이어지는 성체성사의 제정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오늘 성목요일 전례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발을 씻는 예식을 거행합니다. 상징적인 재현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주님의 명을 듣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또한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례에서 같은 명을 듣습니다. “내가 내 몸을 나누어주듯이 너희도 너희 몸을 서로 나누어주어야 한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말씀은 서로에게 종이 되어주라는 것,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향하지 말고 타인을 향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나부터
- 진병섭 신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종결지었던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교황청 평신도위원회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은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실천입니다. 입으로는 교우들에게 이러해야 합니다, 저러해야 합니다 하면서 정작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그것처럼 창피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론이 어려운 것입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하고 말씀했습니다. 삶 전체가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기에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해야 합니다. 이 모든 말은 일맥상통한 이야기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있기에 앞서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있어 모범이 되어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이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 더없이 좋은 이때 내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어제 외출을 갔다가 손을 닦기 위해서 욕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기 위해 비누를 드는 순간 새 비누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비누가 많이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좋은 비누라고 하는 것은 금방 닳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좋은 비누는 더욱 더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은 물론 몸에 좋은 성분까지도 제공을 해준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더 많이 녹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비누는 사용할 때마다 자기의 몸을 녹여서 작아지지요. 그리고 쓰면 쓸수록 점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더러움을 없애주며, 동시에 좋은 향기를 건네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스스로를 녹지 않는 비누가 있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녹지 않아서 오래 쓸 수 있다고 좋아할까요? 그것은 비누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이 비누의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셔서 보여주신 그 모습은 바로 비누처럼 당신의 몸을 녹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성삼일을 통해서 완전히 자신을 녹이는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모습,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는 모습…….
오늘 주님 만찬 성목요일 예식을 하면서 아마 많은 본당에서 발 씻김 예식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 씻기는 모습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그렇다면 발만 열심히 닦아 주면 될까요? 만나는 사람마다 “발 이리 내놔.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라고 했어.”하면서 발 닦는 사람이 되면 될까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사랑을 실천하는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녹일 수 있는 비누와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만약 비누가 자기를 녹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아낀다면 어떨까요? 물에 녹지 않는 나쁜 비누로 결국은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모든 이에게 선택받는 좋은 비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는 비누처럼 자기를 녹이면서 상대의 옷에 묻은 때를 깨끗이 없애주고, 상대의 몸에 찌든 때를 씻기고 향기를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녹이지 않는 사랑을 하겠다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지금 사랑하십니까?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녹아서 작아지는 비누가 되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이의 발을 닦아 주세요.
사랑, 닦아주는 관계
-김찬선신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모습에서 주인공은 엄마도 아니고 아기도 아닙니다. 엄마와 아기고, 엄마와 아기의 관계입니다. 엄마에게 온통 의지해 있으면서도 평안하고 만족스런 아기의 상태. 자기의 사랑이 아기에게 들어가 생명이 됨을 바라보는 엄마의 흡족한 상태. 이렇게 서로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관계가 있을까요? 자주 하는 얘기지만, 할 수만 있다면 저도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모습이 아기의 코를 닦아주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더러움을 인식도 못하고 닦을 줄도 모르는 아이의 백지상태와 그러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이의 無爲性. 다른 사람의 코라면 더럽다고 하고, 더러우니 닦으라고 할 터인데, 아기의 코는 더러운지도 모르고 생각 없이 코를 닦아주는 有爲의 無爲性. 젖을 먹이는 관계가 생명을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코를 닦아주는 관계는 더러움을 씻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사랑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유다가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고 그리고 유다 뿐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배반할 것임을 알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은 죄를 지었어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죄를 씻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자기가 주님의 발을 닦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도 주님께서 닦아주신다면 발이 아니라 손이나 머리를 닦아주시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러운 발을 씻어주겠다 하십니다. 그리고 발 씻김을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기고 발을 씻어줘야 같이 몫을 나눈다는 말씀입니다. 씻기고 씻어주는 관계 안에서 공동의 몫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공동의 몫이란 사랑의 보상이겠지요.
사랑이란 꼭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을 요청하는 것도 사랑이요, 사랑이 만족스럽도록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용서할 수 있도록 자기의 죄와 더러움을 내보이는 것도 사랑이요, 씻기고 난 뒤의 그 기쁨과 고마움을 표함도 사랑입니다. 실상 우리와 주님의 관계는 죄와 용서의 관계요, 우리와 주님의 사랑은 씻기고 씻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씻김을 거부하는 것은 단절이고,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발 씻음에서 죄인도 사랑하시고 죄인의 사랑도 받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죄인도 사랑 받고 죄인도 사랑할 수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봉사하기
-김종기신부-
20대에 몸이 약해 입원했을 때입니다. 함께 입원했던 환우 중 한 분이 봉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조금이라도 받고 하는 일에는 ‘봉사’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며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왠지 속으로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저도 마음속으로 진정한 봉사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수도자로 생활하는 지금도 순수한 봉사정신으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겠다고 거듭거듭 다짐을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가끔 순수한 봉사정신이 약해진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일한 만큼 철저하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봉사정신을 따라 살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일정한 보수를 받더라도 마음을 다해 봉사하는 자세도 중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세를 일깨워주십니다. 신앙인으로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런 삶을 살기로 노력한다면 세상은 더욱 밝고 아름다우며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리라 믿습니다.
종이로 닦아줘
-서효경 수녀-
지난해 5월 휴가를 내어 소록도에 있는 치매전문노인병동에서 열흘간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자원봉사자는 주로 환자들의 식사 수발과 대소변 치우기, 목욕 봉사와 침대 시트를 갈아주는 일을 한다. 소록도는 처음이지만 예전에 안양 라자로 마을에 봉사를 다닌 경험이 있어 쉽게 일을 해낼 수 있었다. 환자들에게 미음이나 죽을 떠 넣어드릴 때면 흘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수시로 닦아주어야 한다. 기저귀를 갈아줄 때도 으레 닦아드려야 한다. 할머니 한 분은 소변을 본 뒤 늘 “종이로 닦아줘.” 하셨다. “네.” 하고 물티슈로 깨끗이 닦아드리면 할머니는 “아유, 시원하다.”라며 좋아하셨다. 씻어주고 닦아주는 것은 사랑의 기본이다. 봉사자들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도 수없이 환자들을 씻어주고 닦아준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도 환자들의 손을 잡거나 안아주면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갈 때가 된 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모상이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날마다 씻고 닦지만 혼자 힘으로 안 될 때가 있다. 그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 닦아주어야 한다. 서로 끼친 손해를 탕감해 주고 병고와 죄, 상처와 아픔을 씻어주고 닦아주어야 한다. 씻어주고 닦아주는 행위는 사랑의 샘처럼 큰 강이 되어 흐른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모상을 회복하기 위해 수난당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오늘도 찬물에 손을 담가야겠다. 마음이 차갑게 느껴지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어울려야겠다.
- 장재명 신부 -
오늘 주님 만찬 저녁 미사를 시작으로 우리는 긴 사순 시기를 끝내고, 부활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미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거행했던 바로 그 사건을 기념합니다. 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직접 받아 모시는 놀라운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됩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제자들과의 생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아시고, 마지막까지 당신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몸소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복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신 다음, 대야에 물을 부어 손수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정성껏 씻어 주셨습니다.
종들이나 해야 할 일을 스승님께서 직접 하고 계시니, 제자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없이, 그러나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시며 자신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이 받았을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스승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 이후에 있을 일들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 어떤 제자들은 ‘오늘 스승님이 왜 저러시나?’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감동의 침묵을 깨면서 스승님이 발을 씻지 못하게 말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랑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종들이 해야 할 일을 직접 스승님이 하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어주신 다음,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 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이며 스승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듯이, 이제는 서로가 발을 씻어 주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잡혀가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고 나면, 예수님 없이 제자 공동체만 남게 되는데, 그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서로 발을 씻어주는 일, 곧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 스스로를 낮추어 서로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저 말로 가르치셨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난 이후에 그 말씀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이 놀라운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복음서에 그대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가장 훌륭한 스승님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은, 예수님의 새로운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미사 중에 우리에게도 그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우리도 스승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또, 스승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섬김과 봉사의 새 계약인 세족례
-경규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명을 수행하시기 전에 과월절 의식을 겸한 마지막 만찬을 하신다. 만찬에 함께 한 이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12명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예수님을 지극히 공경하며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나 마르타 자매도 이 자리에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12명의 제자들만이 함께 한다. 이 자리는 그만큼 중요한 공적 자리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새 계약을 맺으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12제자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며, 나아가 영적 이스라엘인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와 함께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이며, 이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와 새 계약을 맺으신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로는 오늘 독서에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24-25)라고 전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시작하신다.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제자들을 섬기시어 그들의 발을 씻겨주신다. 발을 씻겨주는 것은 섬김과 봉사가 담긴 사랑의 행위이다. 발을 씻기는 행위 안에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담겨져 있고, 계약의 본질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13,34)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곧 사람들을 섬기며 당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으니 이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또한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하느님은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섬기고 희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지없이 사랑하시기에 그만큼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시길 기뻐하신다. 사랑 안에는 기쁨과 행복이 있고, 사랑은 희생과 봉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봉사하는 줄로 생각하지만, 실상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신다. 사랑 안에는 희생과 봉사가 담겨져 있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봉사는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이며 행복이다. 사랑이 큰 만큼 희생과 봉사 또한 크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며 희생하면서 기뻐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이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14절) 하고 말씀하신다.
즉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서로 섬기며 봉사하고, 그럼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찾도록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섬김과 봉사를 받음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희생과 봉사 안에 기쁨과 행복이 있고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최후만찬을 시작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심으로써 제자들과 맺을 새 계약이 섬김과 봉사의 계약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섬김과 봉사는 결코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종이 해야 하는 일도 아님을 보여주셨다. 섬김과 봉사는 곧 사랑의 표현이며,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새 계명임을 직접 보여주셨다.
오늘 주님만찬 미사 중에 2,000년 전에 주님께서 행하셨던 세족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봉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우리 모두도 주님처럼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고,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자...........◆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문호영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신비 중에서 그 정점인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3일의 첫날인 성목요일입니다. 오늘 밤에 우리는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거행하셨던 최후만찬을 기념하게 됩니다.
참으로 사랑이 지극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2천년 전 오늘, 당신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영원히 보여주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사랑의 속죄 제물로 우리에게 내놓으시고, 세상 마칠 때까지 그것을 기념하고 재현하도록 성체성사와 신품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포콜라레 설립자 키아라 루빅은 성체성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땅 위에 오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삼위로부터 땅 위 생활의 그 같은 결단을 감행한 후 그의 생활이 지극히 비상했음에도 단지 33년간만 이 땅 위에 머물지 않고, 그의 결정적 사랑의 순간, 곧 희생과 영광, 죽음과 부활의 순간 안에 대대로 남을 수 있으며, 특히 땅 위 곳곳에 현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니, 이는 사랑의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땅 위에 남았다. 그는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성체를 발명했다. 이는 그의 사랑이 극단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지내고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참으로 그 안에 깊이 담겨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 희생, 자기 봉헌, 완전한 그분의 사랑을 보고, 깨치려고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종이나 하는 발 씻어주는 행위를 하심으로써 다시 한번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을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김유철 신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3,14). 예수님이 살던 이스라엘 땅은 먼지가 많았고, 특히 위생에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통풍이 잘되는 구멍 뚫린 슬리퍼 같은 신발을 주로 신고 생활하였습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에는 집안에 먼지나 비위생적인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꼭 손발을 씻을 것을 율법으로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이중에서도 발은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것으로 수시로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종을 데리고 있던 사람들은 손은 본인이 씻고, 발은 종이 씻도록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종이나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을 관장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고 발을 씻어주십니다. 지극한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녀답게 머리 숙여 발을 닦아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극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곧 부자요, 아까움과 부족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나누는 매 순간 순간이 감사할 뿐입니다.
베드로처럼
-이홍일 신부-
베드로는 거절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살아가면서 가끔은 거절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인간적으로 내게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가 그러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절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사제로 바라보고, 나는 인간으로서 나를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사제로서의 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관심과 사랑이 가끔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사제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큰 짐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그 사실을 거부하고 싶어한다.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 한 베드로처럼.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싫더라도 그분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삶은 때로는 일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할 수 없는 그분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신앙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사랑의 불꽃
-김훈일 신부-
평소에 남을 사랑하는 삶에 집중했던 사람은 마지막 彭??더욱 간절히 사랑할 거리를 찾고, 평소에 탐욕스럽게 산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탐욕의 눈망울을 굴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만약 살 날이 하루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게 될 것 같습니까? 어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만약 3일밖에 살 수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계획을 말했습니다. “저는 작년에 싸워 멀어진 친구에게 사과를 하겠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여행을 가겠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겠습니다” 등등. 그때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실천하세요.” 우리의 삶은 매일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당신의 참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몸소 허리에 띠를 두르고 발을 씻겨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랑을 불꽃처럼 타 올려 사랑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실천합시다. 가장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사랑합시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양승국신부-
<성 목요일에 체험하는 은혜 한 가지>
또 다시 성목요일입니다. 오늘은 저희 사제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사제들의 생일’과도 비슷합니다. 오전에는 교구 내 모든 사제들이 주교님을 중심으로 주교좌성당에 모입니다. 성유축성미사를 봉헌하지요.
미사 중에 사제들은 서품식 때 발했던 독신서약과 순명서약을 다시 한 번 갱신합니다. 주님의 사제로 새롭게 태어났던 그 은혜로운 기억을 되살립니다.
더불어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이 수행했던 사제직분을 돌아봅니다. 부족함을 주님께 용서청하며 다시금 자신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주교님들께서는 사제들의 생일을 맞아 한 턱 내십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치러야할 또 다른 큰 행사가 남아있습니다. 주님 만찬 저녁 미사입니다. 사제들은 미사 가운데 세족례를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발을 씻어주셨음을 기억하며 사제들 역시 신자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세족례를 거행할 때 마다 제 개인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는 은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자들의 발에 물을 부을 때 마다 저는 이천년 전 한없이 겸손했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보는 느낌을 갖습니다. 신자들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줄 때 마다 부족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제게 전해져오곤 합니다.
또 다시 성목요일을 기다리며 사제직의 본질을 생각합니다. 사제직은 결국 봉사직이라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사제직은 올라가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데 의의가 있음을 상기하겠습니다. 은총의 성목요일, 다시 한 번 봉사하는 사목자, 내려가는 사목자, 겸손한 사목자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모든 사목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참 사목자 한분이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지난해 10월,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철저한 나눔과 봉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각막과 신장, 간장, 심 판막과 연골 등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떠나가셨습니다.
가난한 시골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삶 자체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주고 떠나가신 목사님의 삶과 죽음은 성목요일을 지내는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다음은 전생수 목사님이 남기신 유언입니다. 오늘 하루 제 삶의 이정표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다른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
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
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
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전생수, ‘더 얻을 것도 더 누릴 것도 없는 삶’, kmc 참조)
-서공석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당신 생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들은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이 처형당하여 돌아가시자, 실망한 제자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어느 시기가 지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모여듭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최후만찬에서 그들에게 분부하신 대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분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들은 그 식사 중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너희를 위한 내 몸’,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의 잔’ 이라는 말씀을 반복하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회고하면서 새롭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복음서들 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남겼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내다보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계속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잘못 한 이를’ 보아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베푸신 하느님, 용서하신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면, 우리의 처신이 보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다.”(6,38).
예수님은 유대교 문화권에서 돌출 행위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유대교 실세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고,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에게 지우고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셨습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탐한다고도 비난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생각에 열중하고 심취하셨습니다. 당신 한 몸 대우받고 존경받는 일이 그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층은 율법과 제물 봉헌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명예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떼 같이”(마르 6,34) 짓눌려 산다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믿으셨습니다.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섬기는 사람으로 자처하셨고, 사랑하셨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행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예수님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셔서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실천되게 하는 성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이 최후만찬 이야기를 하는 그 자리에 이 이야기를 갖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미 알려져 있었고, 성찬은 교회 안에 이미 널리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만찬에서 있었던 일을 새삼 길게 보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찬이 먹고 마시는 허례허식이 되지 않도록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발 씻은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를 통하여 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는 일이었고, 예수님은 최후만찬에서 그 생명이 하는 일을 요약하여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은 그 생명이 하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섬김을 위해 내어주신 예수님의 몸이었고, 섬김을 위해 쏟으신 예수님의 피였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예수님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분과 같은 생명을 살기로 약속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발을 씻는 종과 같이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일이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은 명예롭게 군림하는 데에 있지 않고, 스스로 비천한 자가 되어 섬기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높고 강하고 군림하기를 즐겨하는 우리들입니다. 인간이 상상하는 하느님도 지극히 높으시고, 엄하게 심판하시는 강자입니다. 하느님은 군림하지도 지배하지도 않으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 하느님의 연민과 사랑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말은 연민과 사랑을 벗어나서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강자는 상대를 억누르고 부셔버립니다. 강자는 사람을 성장하게 하지도 않고 감동시키지도 않습니다.
성찬은 초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힘도 남을 압도하는 영광도 주지 않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힘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합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과 섬김은 비록 보잘것없어도, 예수님이 하신 섬김과 사랑을 역사 안에 연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역사 현장에 살아 계시고 일하시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최후만찬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별의 식사였지만, 우리의 연민과 사랑과 섬김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약속하는 식사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완성하는 나눔과 섬김 - 손성문 신부-
오늘은 주님 만찬 성목요일입니다. 우리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활 3년 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사명을 맡기기에 아직 제자들은 못 미더운 데다가 하나는 배반까지 계획하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뜻이니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으로 당신의 뜻을 제자들에게 전해줄지 고민하신 주님은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사랑과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식사 도중 제자들 앞에서 발을 씻겨주는 종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말로만 혹은 하는 척만 해선 아무도 따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스승이 어떻게 제자에게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힐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섬김의 자세였습니다. 스승이 아니라 종으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스승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수난예고 때 주님을 나무랐던 베드로는 이번에도 스승을 말립니다. ‘당신은 영광 받으실 분인데 그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는 지는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길 기대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낮은 자세로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수난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겐 ‘소 귀에 경 읽기’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요즘에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건 그때만큼 거북스럽진 않습니다. 드러나는 계급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에게도 웃으면서 정성껏 발을 씻어줄 수 있을까요? 눈도 마주치기 싫겠지요. 정말 어렵겠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요구요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겸손을 실천하신 주님은 또 하나, 제자들에게 나눔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뭐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이런저런 조건을 단다면 그건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장사나 마찬가지지요. 주님은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랑스런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십니다. 살과 피는 곧 생명을 뜻합니다. 즉, 당신의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만큼 스승과 제자를, 우리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례를 계속해서 거행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음식에 따라 변합니다. 흙에서 온 사람은 흙에서 난 음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음식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서 음식을 정성껏 고르듯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성체를 모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을 모실 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기운을 얻고, 참 생명에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날까지 이 성찬의 신비에 끊임없이 참여하여 깊은 사랑의 나눔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발을 씻어주는 스승처럼... -정호신부-
예전에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등의 유명한 대답이 있는가 하면 각자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겠노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처지에 계십니다. 그런데 내일이 돌아가실 날인데, 멀쩡한 몸과 마음으로 생사람이 죽는데, 죽는 당사자는 너무나 태연합니다. 지금부터 하는 일은 모두가 죽기 위한 준비일텐데... 죽는다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과 마지막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녁식사가 고작입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아니 당시로는 바로 그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하십니다. 눈물도 흐를 만 하지만 예수님만이 현실로 알고 계시기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적힌 대로라면 그분은 너무 태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그리고 그 식사의 자리에서 당신은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신 일 하나를 하십니다. 그것은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지금껏 열심히 당신을 따라나선 사람들, 그 중에 틈만 나면 서로의 높고 낮음을 말하며 다툰 못난 제자들, 사실 스승과 닮은 제자라곤 찾아 볼 수조차 없지만 그럼에도 스승은 그런 못난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발을 씻음은 종이 주인이 들어오는 길에 해야 할 일입니다. 남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자체가 수치스런 일인데, 이 스승은 제자들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데 스스로 종의 처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상징적인 행동이라 말할 수 있지만 2천년 전 현실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이 스승이 마지막 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준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스승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모두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생애의 마지막에 유언으로 하신 말씀이요, 행동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은 주님, 혹은 스승님이라고 한다면 그 주님은 말을 따라야 하는 주인을 말하고, 스승은 본받아야 할 가르침을 주는 사람을 말하니 그분을 주님, 스승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스스로든, 아니면 복종하는 마음으로든 그 스승과 주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스승이며 주님이 제자들이며 종과 같은 이에게 발을 씻어주는 것이었으니 이제 제자들이 할 일은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날에 행하는 발을 씻는 예식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당신 몸과 피의 성체성사를 다른 의미로 나타내는 행동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는 스승의 마음이 그 성체와 성혈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주님께서 내 발을 씻어 주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성체를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목숨을 거는 스승. 그 뒤를 따름은 바로 내가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주님 만찬 저녁미사 † 사랑의 세족례 - 제자들의 발을 씻김 † -박상대 신부-
오늘 성목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주님의 최후만찬미사로서 교회는 예수부활대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파스카 성삼일(Triduum Paschalis)'에 들어간다. 파스카 성삼일은 부활대축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것은 수난과 죽음 없이는 부활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과 부활대축일'을 일년 전례력을 통틀어 기념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의 신비들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성대하고 뜻깊은 축제로 거행한다. 오늘 주님 만찬 저녁미사에서 특이한 사항은 요한복음의 모범을 따라 세족례를 행하는 것과 영성체후 기도가 끝나고 성체를 옮겨 따로 모시고, 제단을 벗기고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다.
오늘 미사에서 봉독되는 말씀들을 보자. 교회는 주님만찬미사에서 전통적으로 제1독서로는 과월절과 무교절 축제의 기원을 밝히는 출애굽기(출애 12,1-8.11-14)를 봉독하고, 제2독서로는 성체성사 제정기사를 담은 고린토 1서(1고린 11,23-26)를 봉독하고, 복음으로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 중에 세족예식을 담은 요한복음(요한13,1-15)을 봉독한다.
우리는 이미 어제 복음을 통하여 요한복음이 최후의 만찬을 공관복음과는 다른 시점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점을 숙지하였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무교절 첫날에 준비시켜, 과월절이 시작된 후의 시점에 행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또 성체성사 제정기사를 함께 보도하고 있다.(마태 26,17-29; 마르 14,12-25; 루가 22,7-23) 사도 바울로의 고린토 1서 말씀도 공관복음에 준한다.(1고린 11,23-26) 그러나 요한복음은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요한 13,1) 만찬을 행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더욱이 성체성사 제정기사를 빼고 이 자리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례'를 보도하고 있다.(요한 13,4-15) 이렇게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 기술된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최후만찬의 날짜에 대하여는 성서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다.
공관복음사가들의 의도는 분명히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있다. 이들 축제의 의미를 한데 묶어 예수께서 세우시는 신약의 성체성사를 '누룩 없는 빵'과 '어린양의 피'에 연결짓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무교절과 동시에 시작되는 과월절 첫날 시작 직전에 과월절 만찬을 준비하게 하셨고,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만찬을 하시는 중에 자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담아 새로운 계약을 세우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성체성사이며, 십자가 죽음으로 내어놓게 될 자신의 목숨(살과 피)을 담은 구원의 성사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과월절 만찬 위에 신약의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이로써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성체성사 제정을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세운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식을 통하여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4-15)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지상명령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을 세상과 제자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요한복음은 6장, 빵의 기적과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여 예수님의 성체성사 제정을 간접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둘 다를 얻은 셈이 된다.
약 2000년 전 오늘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이 우리 앞에 실제로 드러난다. 오늘의 만찬미사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인 바로 우리들이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그때와 똑같이 그분은 우리에게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주시며, 그분의 살과 피는 그분의 모든 것, 즉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성체성사로서 인류를 위한 구원의 성사요 사랑의 성사인 것이다.
성사(聖事)의 신비로움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도록 이루어 주셨다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 신비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에게 나의 몸까지 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되어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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