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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묵상글 들 ( 연중 12주 화요일-천국길, 십자가의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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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2주 화요일-천국길, 십자가의 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오늘 주님 말씀을 간명하게 얘기하면
천국 길과 천국 문은 좁고, 반대로 지옥 길과 지옥 문은 넓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좁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문이 좁다는 것처럼 경쟁률이 높은,
그러니까 상위 몇 %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까?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 1-4)
그러니까 천국의 길과 문이 좁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 숫자를 제한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길이신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천국 가는 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왜 적은지 묻게 되는데, 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적은 것입니까?
우선 천국 가고 싶은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지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여 천국 가는 것이 싫은 경우 말입니다.
복음의 부자청년처럼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자 울상이 되어서 떠났는데 바로 그런 경우지요.
다음은 천국은 가고자 하지만
가는 길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가기 싫은 경우입니다.
역시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의 길을 가기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지요.
사실 요즘 편의주의가 천국 가는 데 제일 문제입니다.
천국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니 말입니다.
저만 해도 옛날에는 매일 십자가의 길을 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리고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성로신공이라고 하여
성당에 가면 이 성로신공을 하는 분들이 많았었는데
요즘은 저도 그렇고 십자가의 길을 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성로신공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천국 가는 길이라도
십자가의 길을 통해 가는 것은 싫어하는 요즘 추세의 표시입니다.
저는 이것을 편의주의적인 안주라고 달리 부르고 싶습니다.
예나지금이나 불안을 좋아하고 편안함을 싫어할 사람 없겠지만
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고,
조금의 불편도 두려워하고 안정과 편안함에 안주하게 되었지요.
예를 들어 저의 경우 엘리베이터가 생긴 뒤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놓고
매번 선택해야 하는데 전에는 무조건 계단을 선택했지만
요즘 무릎이 안 좋아지면서 핑계를 대고 자꾸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여
점점 편의주의적으로 제가 바뀌어가고 그런만큼 십자가는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십자가를 선택하고, 사랑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나이 먹어 거부할 수 없게끔 십자가가 주어져야지만 어쩔수없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겠지요.
편안함과 안정은 쥐새끼가 뚫어놓은 조그만 구멍이 둑을 무러뜨리듯
사랑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쥐새끼 같은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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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연중 12 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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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6.12-14: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이란 우리가 함부로 쓰거나 망가뜨리면 불경한 짓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범하려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경의 죄를 지은 것이다.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이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내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오로지 미움과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불리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제 다시는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그러한 사랑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하셨고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 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 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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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요약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예수님께서 성경에 담긴 무수한 가르침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단언하시지요.
훗날 예수님은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실 것입니다(마태 22,34-40 참조).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까지 하시지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구체화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타인이 자기를 해치거나 증오하길 바라지 않지요. 본성적으로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것은 선의와 호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기가 받고 싶은 마음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 또 자기가 받고 싶은 대접을 타인에게 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를 때, 남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를 때는, 내가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역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그런데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에 사랑도 서툴고 미숙하지요. 하느라고 했지만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픈 시행착오를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사랑도 자라고 우리도 자라니 실패한 건 아니지만, 과정이 결코 녹록치는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셨듯 사랑은 번번히 배척당하고 공격받고 모욕당합니다. 민족과 인류의 선의를 위해 온 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조롱과 버림받음, 죽음일 가능성이 더 크지요. 그래도 이미 사랑의 좁은 문으로 이어진 비좁은 길에 들어선 이상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길이 더 위험하고 거칠고 외로워질수록 따름의 확신은 더욱 선명해지니까요.
우리 모두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비좁고 험난한 길을 수퍼맨처럼 넉근히 극복하면서 씩씩하게 걷지는 못하지만, 엎치락뒤치락 우왕좌왕 하면서도 따름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갑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은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같은 의미를 원색적인 표현의 다른 단어로 반복하시니 어조가 더 강렬해집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사랑과 진실과 믿음 등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아닐까 합니다. 때론 성소나 소명이기도 하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주님께 지키고픈 신의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개들"과 "돼지들"은 그런 가치들의 소중함을 모를 뿐만 아니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나아가 제 욕망을 위해 하느님의 귀한 보물을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악의 힘을 상징할 겁니다. 슬프게도 그런 힘은 제 민낯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과 사건을 통해 교묘히 존재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순진하고 어설픈 사랑은 때때로 상처 입고 잠시 길을 잃기도 합니다.
제1독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유다마저도 함락시키려 침략한 위기의 순간을 들려줍니다.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2열왕 19,14).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조롱과 협박 가득한 편지를 유다 임금은 주님께 보여 드립니다. 가련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님 발 앞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은 믿음을 지닌 가난한 이의 최선일 겁니다. 사실 산헤립은 유다를 모욕하기 전에 하느님을 모욕한 것이지요. 이제 이 일은 나라 대 나라, 인간 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무도한 산헤립의 일이 되어 버립니다.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2열왕 19,20).
위기의 순간에 비참하고 가난한 처지에서 올린 진솔한 탄식와 애원을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존재이자 진주인 당신 백성을 개들과 돼지들에게 던져 주지 않으시고, 손수 적들을 쳐서 그들을 구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깨진 그릇처럼 쓸모 잃은 죄인이고 부족하다 해도 절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귀한 진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바치고라도 지켜내고 싶은 보물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님도 그런 보물이십니다. 그분 말씀과 가르침, 그분을 따르는 삶이 곧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러니 한껏 사랑을 실천하고 희생과 인내로 좁은 문을 통과해놓고 하릴없이 일순간 개, 돼지들에게 그 귀한 보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도 온 힘을 다해 보물을 지켜내야 합니다.
주님의 귀한 진주요 거룩한 이신 벗님! 우리가 저마다 주님께 허락받아 간직해온 귀한 보물을 잘 간수하고 사랑으로 성장시키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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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어제는 옛날에 하늘에서 여덟 마리 용이 내려 앉았다하여 붙어진 이름인 마산에 있는 팔용산(328m)을 다녀왔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등산하고 걷기에 참 좋았습니다.
특히 어느 한 형제님께서 이산가족의 슬픔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1993년부터 쌓기 시작했다는 '돌탑'과 1930년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상수원인 '봉암수원지'가 저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전해주었습니다.
특히 산 속에 있는 봉암수원지와 수원지 둘레길(2km)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지금껏 만난 저수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둘레길도 최고의 둘레길이었습니다.
도심 속에 위치한 팔용산 기슭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감탄했고, 가까이 사는 마산 시민들과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너에게로 향해 있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너를 기쁘게 하고, 너를 살릴 수 있을까?'에 당신의 전부가 담겨져 있는 마음입니다.
봉암수원지 둘레길을 걸으면서 한용운 시인의 '나의 꿈'이라는 시(詩)를 만났습니다.
마음이 따뜻해 짐을 통해서 너에게로 향해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의 꿈> '한용운'
당신의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의 여름 날에 더위를 못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 밤에 그윽이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너에게로 향해 있는 '나의 꿈'이 꼭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오늘,
감사와 함께 나의 삶의 자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시인의 마음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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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열왕기 19,9ㄴ-11.14-21.31-35ㄱ.36
마태오 7,6.12-14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빼앗아 당신 등에 짊어지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오 복음 7장 13~14절)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은 어떤 것을까? 생각해봅니다.
한적하고 안전한 곳에서, 매일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축복의 장소에 살아가면서,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주어진 시간에 기도하고, 기쁘게 살고...
그리 어려운 길이 아닌 것 같지만, 쉬운 길만도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좁은 문’을 산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가는 것! 매일의 작은 의무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정성껏 이행하는 것!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가장 작은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좁고 가파르고 불편한 길을 불평불만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역시 주님의 모상이며, 주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사랑받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잘 견뎌내는 것!
그것이 구원과 생명의 좁은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생명과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좁고, 불편한지, 그래서 그리로 찾아드는 자들이 작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살짝 걱정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죄가 하늘을 찌르고, 구원받기에 합당치 않으며, 구원 받을 자격조차 없지만,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와 부당함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빼앗아 당신 등에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은총 역시 보편적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구원의 보편성이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주실 것이며 덮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따라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100퍼센트 구원입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입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솔직히 날이 갈수록 공동생활이 힘들어집니다.
남아있는 길이 지나온 길보다 훨씬 험난하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 형제들을 직면하기도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공동체를 다른 무엇에 앞서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깊이 사랑하며, 이웃과 더불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화의 길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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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열왕기 19,9ㄴ-11.14-21.31-35ㄱ.36
마태오 7,6.12-14
지금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코로나가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저도 영성관을 운영하는 어쩌면 소상공인으로서 얼마나 많으신 분들이 힘들어하실지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병으로 주시는 ‘시대적 징표’를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코로나는 어쩌면 더 큰 재앙의 작은 징조일 뿐일 것입니다.
저는 어쨌거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원인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발생했다고 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누군가를 아프게 하며 산 이들이 끝까지 평안을 누린 예는 없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 퇴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기나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규칙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이 사랑의 법과는 반대되는 ‘경쟁’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돈이면 남의 마음을 당연히 아프게 해도 된다는 의식이 우리들 안에 참으로 많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유학 가서 공부할 때 맥줏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우리가 서빙하는 분들을 예의 없게 대해서입니다.
“어이, 아저씨. 맥주 한 잔 더!”
이런 식으로 몇 번 시켰더니 주인이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술을 팔지 않겠습니다.
저희 식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여러분은 이 집에서 술을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좀 다릅니다.
돈이 좀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된다고 믿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어떤 신자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창피함을 느낍니다.
서빙하는 분들을 너무 막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누구의 부모님이고 자녀일 수 있는데 반말로 소리 지르고 나무랍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이 가게에서 떠들고 사람들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데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제가 냉면 배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남자들의 대부분은 저를 “어이, 철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돈 내고 내가 냉면을 먹으면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왜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잘 압니다.
그 이유는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나라가 잘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라는 목표가 뚜렷합니다.
그러나 경쟁 속에는 타인을 이겨 아프게 해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는지 느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평생을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만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둑질은 처음 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해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지우개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처음 훔친 것은 지우개 하나였습니다.
그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서로 협동을 해서 과자도 훔치고 과일 서리도 많이 하였습니다.
점점 안 걸리면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는
조금씩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사회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직 그 물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념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의 법과 종교도 이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황금률’도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경쟁주의 교육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면, 이젠 함께 공존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BS 어떤 다큐에서 보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나눠 타라고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각자가 한 바퀴 돌면 다른 아이들에게 그것을 양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먼저 차지한 아이가 지칠 때까지 타며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즐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에서 재밌게 살려면 그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이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도 아플 것이라는 ‘황금률’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도 경쟁이 조금씩은 줄어드는 추세이나, 아직은 경쟁주의가 지배적입니다.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크게 나아질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대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을 배우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안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두렵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황금률’을 체득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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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송영진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황금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성사, 또는 성사를 통해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은총에 감사드리기는커녕
성사와 은총을 모독하고, 교회를 박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사도 8,18-19).”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사도 8,20).
<만일에 성사에 관한 일을(은총을) 돈을 받고 파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개들에게 준다는 말을 세례받기 전의
생활로(미신을 믿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베드 2,20-21).”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만일에 세례받기 전의 생활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이 받은 ‘거룩함’을
개들에게 주는 것과 같고, 거룩해진 자신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이고,
계명들과 율법들의 기본정신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무거나’ 받기를 희망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아무거나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순서’에 초점을 맞추어서,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그대로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받기를 바란다면, 너희가 먼저 그대로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그 은총을 누리면서,
그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이고,
자신이 이미 받은 그 은총을 남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받아서 누리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남에게 다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바라는 생활이고,
그것을 바란다면 이웃에게 먼저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마태 6,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의 뜻은, “넓든지 좁든지 간에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로는 가지 말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로만 가라.”입니다.
신앙생활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만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3-5).”
여기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라는 말은,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이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세속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세속의 일’은 세속의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일’을 세속의 방식으로 한다면,
그 일은 ‘세속의 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좁은 문’에 관한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혼난 일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베드로 사도가 어떤 사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말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신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것을
말렸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막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뜻하고,
‘사람의 일’은 몸의 편안함만 찾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의 끝에 죽음과 멸망이 있다면,
길이 아무리 넓고 편해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길의 끝에 구원과 생명이 있다면,
길이 아무리 좁고 험해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신앙인이 걸어가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난의 가시밭길인 것은 아니고,
가다보면 편안한 구간도 만나고 힘든 구간도 만나는데,
힘든 구간은 피하고 편안한 구간만 찾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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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10년 전쯤에 칠레에서 광산이 무너진 일이 있었습니다.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미터에 있는 약 15평의 대피소에 갇혔는데, 남은 식량은 열 명이 이틀 먹으면 없어질 분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69일 만에 33명의 광부가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살아난 광부들은 이 기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 보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자기만 배고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고프고, 자기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두렵고, 자기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고통스럽다는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장자는 연륜으로, 유머가 있는 사람들은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33명 모두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세상은 어쩌면 15평 남짓의 대피소와 같은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어려움과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또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나’만 살아 보겠다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이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내’가 어렵고, 두렵고, 걱정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좁고, 그 길이 비좁은 이유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타인을 향하여 마음을 건네는 길입니다.
그런 길이야말로 거룩하고 진주처럼 고귀합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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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이영근 신부님.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세속정신과 이방종교들과 함께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이러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의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을 모든 덕의 어머니’(64,19)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닙니다. 또한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이해타산의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두철미한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곧 사랑을 타인에게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 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네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은 문이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길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들어가는 문이기에 많은 이들이 선뜻 들어서지 않는 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생명의 문이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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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새벽을 열며.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빠다킹 신부님.
자신이 사는 자리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남들과 비교를 통해 자신의 어렵고 힘듦을 하소연하기에 급급합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삶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 대한 만족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멋지고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지금을 바라볼 때입니다.
언젠가 외국에 나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 자리가 창가라서 창밖을 볼 수가 있었지요. 구름 위를 비행할 때에는 너무나 멋졌습니다. 매일 볼 수 있는 구름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지요. 그리고 착륙할 때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 역시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이 새로운 시점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했습니다. 잘 짜인 도로도 하나의 선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자리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의 시점과 매우 다릅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생각하고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참 행복의 길로 안내해줍니다.
이 새로운 시각을 위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란다면”이라는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남에게 먼저 해 줄 때, 우리 역시 원하는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함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물론 좁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만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직 몸은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아주 비좁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한 실천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키울 수 있도록 철저히 노력해야 합니다. 좁은 문이라고 해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이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각에 항상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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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지혜의 명작이며 최고의 인생 기술이다(앙리 아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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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온갖 소음, 온갖 정보, 온갖 데이터.
요즘 세상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침묵을 두려워합니다.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면 남들 눈에 멍청하게 비칠까 봐 두려워하고, 무엇인가를 놓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온갖 거짓 뉴스가 판을 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진리를 쫓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거짓 뉴스, 가짜 뉴스에 쉽게 넘어가고 맙니다. 내 삶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어도 여기에서 벗어나는데 자유롭지 못합니다.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것을 알기보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참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침묵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보 시대일수록 모든 정보를 취하는 노력보다 진짜 정보를 알아챌 수 있는 지혜로운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침묵 중에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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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처음 카메라를 가진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필름을 사용하였습니다. 필름 중에 유명한 것은 코닥 필름이었습니다. 필름이 다 감기면 사진기에서 꺼내 사진관에 갖다 주었습니다. 소풍가서 찍기도 했고, 성당 예술제에서 찍기도 했고, 여름 신앙학교에서 찍기도 했습니다. 통이 넓은 나팔바지를 입고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 뒤로 1998년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구했습니다. 메모리카드가 있었고, 그것을 컴퓨터에 연결해서 저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파일을 보내면 인화된 사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발명한 회사는 필름회사인 코닥이었다고 합니다. 코닥이 인화는 필름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렸다면 지금도 유명한 회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닥은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이 발명한 디지털 카메라의 힘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눈이 먼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귀가 먼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본인이 눈이 멀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본인이 듣지 못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바꾸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고정관념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환자들의 고통과 의료진의 헌신과 희생입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경제상황입니다. 경제는 생산, 유통, 소비가 순환되어야 합니다. 이동이 제한되고, 국경이 폐쇄되는 상황에서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로 인해 소비가 급감하였습니다. 특히 여행, 식당, 항공, 공연과 같은 분야는 소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감염병의 확산 우려 때문입니다. 소비와 유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생산 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일거리는 줄어들고, 실업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정부는 새로운 길은 가고 있습니다. 전 국민에게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3개월 안에 소비하는 조건이며, 재래시장과 소상공인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역화폐와 선불카드로 지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소비가 촉진되면 유통이 활발해지고, 유통이 활발해지면 생산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조조정을 늦출 수 있고, 실업자도 줄일 수 있고, 경제상황도 개선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기에 전 국민에게 소득지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생각과 고정관념을 바꾸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역사를 보존하고,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규정입니다. 이런 율법과 예언서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유법과 예언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처럼 이웃과 벽을 쌓기도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를 단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기도 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대해서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가 있습니다. 펌프에는 언제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습니다. 지하의 물을 얻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엄청난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규정과 단절이 아닙니다. 소통과 관계의 개선입니다. 내가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넓은 문을 좋아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바벨탑에서 풍요로운 세상을 만날 것 같았습니다. 그 넓은 문을 통해서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지구온난화, 기상이변, 새로운 전염병이 들어왔습니다. 공전의 그늘에는 난민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희생, 나눔, 양보의 문입니다. 연대와 협력의 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를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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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
-생명의 곡선길-
10일전, “신부님, 저 오늘 휴가 떠납니다!” 인사를 마치고 꽃처럼 환한 모습으로 휴가를 떠났던 수사님이 어김없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어제 귀원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모두가 인생 휴가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 휴가가 끝나고 죽음이 임박했어도, 돌아갈 집이, 귀가할 집이 마땅치 않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는지요.
어제 참 좋은 분이 4월 강론집을 교정하여 제본해다 줬습니다. 무려 수십년동안 매월 작업해다주는 한결같이 성실한 분이십니다. 강론집 ‘구원의 여정’이란 제목도, 밝고 환한 표지의 그림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무의미한 여정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입니다. 인생 휴가 후회없이 잘 끝내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는 구원의 여정, 귀가 여정입니다.
또 어제 참 좋은 시를 발견하고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좋은 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그대로 구원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이 시 덕분에 복음을 중심으로 한 강론의 뼈대가 떠올랐습니다. 주저없이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분별의 지혜와 사랑, 기도와 시와 유머-’로 정했습니다. ‘구부러진 길(이준관)’이란 시입니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볕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사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긴 고향집 같은 시입니다. 말그대로 힘들고 험한 좁은 문들의 여정을 잘 통과한 분들의 모습이 바로 구부러진 길 같은 모습입니다. 제 어렸을 때만 해도 온통 구부러진 곡선의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산도 곡선이고 초가 지붕도 곡선이고 길도 곡선이고 내천도 곡선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도 말도 대부분 부드럽고 인정 많은 곡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곡선은 사라지고 직선들 가득한 참 단조롭고 삭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연은 곡선을 만들었지만 사람은 직선을 만들었습니다. 좀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 곡선길입니다. 똑바로 난 직선길보다 굽이굽이 오솔길은 얼마나 깊고 아늑한 지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좁은 문들을 잘 통과했을 때 바로 아버지의 집에 닿는 구부러진 곡선길, 구원의 인생길입니다.
좁은 문들의 구부러진 곡선길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과연 좁은 문들 잘 통과해온 굽이굽이 구부러진 구원의 곡선길인지 때로 멈춰 숨을 고르며 내 삶의 뒤안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굳이 좁은 문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내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좁은 문은 없습니다. 사람 숫자 만큼의 좁은 문입니다. 각자 통과해 나가야 할 고유의 좁은 문들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도반들의 위로와 격려, 도움은 필수입니다.
좁은 문 하나를 통과하면 또 하나의 좁은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이 흡사 인생 장애물경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흡사 날마다 첩첩산중의 산을 넘는 느낌입니다. 며칠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삶이다
하루하루가 통과해 나가야할 좁은 문이다
하루하루가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最前方의 삶이다
어찌하랴 주님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니”
누구나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좁은 문들의 여정입니다. 피하면 더 작은 좁은 문이 기다립니다. 우리 나라의 처지를 봐도 얼마나 좁은 문들의 연속인지요.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작금의 상황은 말그대로 인내와 지혜를 다해 통과해가야할 좁은 문입니다.
어떻게 좁은 문들을 지혜롭게 잘 통과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바로 분별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
다 이해심 많은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배은망덕의 사람도 있고, 적반하장의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선의를 곡해하여 듣는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며 고도의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좋은 것이라 하여 아무에게나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려 다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조심성스럽게 분별의 지혜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차별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차별은 죄이지만 분별은 지혜입니다. 이런 분별의 지혜는 겸손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래야 좁은 문들의 통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황금률입니다. 황금률만 잘 지켜도 좁은 문들이 통과에 역시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황금률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무나 평범자명한 진리이지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기에 너무 잘 잊고 지내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이대로만 하면 좁은 문들의 통과는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말그대로 분별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예수님보다 10살 더 많았던 랍비 힐렐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한 냉소자가 그에게 한발로 서있는 동안 온율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했습니다. 힐렐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거이 율법 전부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얼마나 단순명쾌한 답변인지요. 예수님과는 똑같은 황금률의 진리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이대로만 산다면 좁은 문들의 통과는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다음에 기도 특히 성서의 시편과 시, 그리고 유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을 보세요. 아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는 말그대로 절망적 좁은 문의 상황입니다. 바로 여기서 히즈키야는 간절한 기도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마침내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려주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일과표에 따라 평생, 끊임없이, 매일, 한결같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는 물론 매일미사가 좁은 문들의 통과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아니 믿는 이들 역시 이런 규칙적 항구한 수행은 좁은 문들의 통과를 위해 꼭 권하고 싶습니다. 하여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분따라, 감정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일과표의 궤도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시와 유머도 큰 도움이 됩니다. 시중의 시는 성서의 시편이지만 좋은 시나 노래도 좁은 문들의 통과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유머러스한 제 자작시를 들어 보십시오. 무와 배추가 한창 왕성하게 자라나는 채소밭을 보며 쓴 시입니다. 좁은 문들 통과의 고달픈 삶중에도 미소 짓게 하는 유머같은 시입니다.
“웬 아침부터 육체미 대회가
잘 가꿔진 무밭 나란히 도열한 무들
옆으로 늘어진 무잎들 다 벗어버리고
저마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무 사나이들
근육질 알통의 팔뚝같기도 하고 쭉벋은 종아리같기도 하다
옆에서 넋놓고 바라보는 배추 처자들
얼마동안은 계속될 육체미대회 아침 산책때 마다 봐야겠다”-2007년
예수님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생명의 문, 생명의 길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실천해갈 때 예수님을 닮아 좁은 문들의 통과도 수월해질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물론 도반들과 함께 하는 굽이굽이 좁은 문들의 통과여정의 구원의 곡선길입니다. 밖으로야 좁은 문들의 연속같지만 내적으로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미 롭고 향기로운 생명의 곡선길이 될 것입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을 통해 날로 둥글게 익어 원숙해지는 둥근 삶, 둥근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좁은 문들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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