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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59:15하~16상,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죄악 중에 있는 자기 백성 가운데 중재할 사람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 하반절부터 16절 상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살펴봅니다. 자기 백성 중에 죄악이 가득차고 그리하여 원수들이 그 백성을 탈취하여 백성들이 찢기고 상하고 눌리고 묶여 있는 상황을 봅니다. 죄가 찾아오면 율법의 언약대로 각종 저주가 찾아옵니다. 환경적인 재앙이 찾아옵니다. 대적하는 원수들이 찾아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에 기근이 찾아오고 전염병이 찾아오고 전쟁이 찾아옵니다. 가난과 질병과 고통과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선민 공동체 속에서 보기 원하였던 정의와 공의와 공평과 인애와 진실이 없고 착취와 압제와 거짓만이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이켜 보지 아니하시니 그 대신 어둠과 재앙이 득달처럼 찾아와 그 백성이 흑암 속에 슬피 울고 구원을 간절히 바라지만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긍휼히 여기시고 얼굴을 돌이켜 보아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그 백성에게 향하여 돌리시고 살펴보실 때에 살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자요 때리시다가도 다시 싸매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실 때에 한 가지 충격이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겼다’는 단어 ‘샤맘’이라는 단어는 ‘황폐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이차적으로 우러나온 또 다른 의미가 ‘경악하다, 공포에 질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보았으나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의 한 장면은 ‘피애니스트’라는 영화입니다. 폴란드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이 유태인 학살을 피하여 여기 저기 숨어 다니면서 목숨을 부지하면서 독일의 한 장교를 우연히 황폐한 폐가에서 만나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하여 그 연주에 감동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지켜주고 먹을 것을 가져다 주면서 살아남아 결국 목숨을 건지게 되는 실화를 영화화한 내용입니다. 기억나는 것은 그 주인공이 도망다니는 그 도시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황폐화 된 모습이 영화 표지에서 나오고 영화중에도 나옵니다. 그 장면이 지금도 충격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팔레스타인들이 거주하던 가자 지구에서도 다시 한번 그 피아니스트 영화와 똑 같은 정도의 황폐함이 현실로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전쟁의 끔찍함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놀랐을 때의 공포와 충격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느꼈던 이상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끔찍하여 깜짝 놀라서 공포에 질릴 정도가 된 이유는 바로 그렇게 자기 백성 중에 정의가 없어지고 백성들이 다 찢기고 상하고 망해가는데도 그 중에 진정 그 백성을 건져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그렇게 망가뜨려지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휘몰아쳐서 그 백성들이 다 처참하게 찢겨지고 무너지고 황폐화되었는데도, 그것을 살려낼려는 믿음의 사람이 없다는 점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끔찍한 충격이란은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이쉬’입니다. 이 ‘이쉬’라는 단어는 그냥 어느 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장부를 가리키는 의미로서 여기서 사용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동일한 ‘이쉬’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고난과 도전 앞에 당당하게 맞서는 용사와 지도자를 가리킬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예를 들면 열왕기상 2:1 이하에서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불러 유언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걸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열왕기상 2:1~3)
여기서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라는 문장에서 ‘대장부’는 바로 ‘이쉬’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대장부’, ‘용사’와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너져가는 현실을 두고 이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거룩한 질투심을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려고 용사처럼 일어나는 일꾼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세히 살펴 찾으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 고린도교회가 큰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있고 중심이 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이 다들 약해지고 믿음을 저버리고 뒤로 물러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번 편지를 써 보내며 동역자들을 보내고 자신이 가서 그들을 추스르고 격려하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이 잘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마음으로 쓴 고린도전서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고린도전서 16:13,14 말씀에 보면 이러한 말씀으로 그의 당부를 마무리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여기서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문장을 다시 해석하면, “대장부가 되라 그리고 굳게 서라”는 뜻입니다. 대장부처럼 용기를 가지고 담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도전과 혼란과 유혹과 압력에도 굴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가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많은 도전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물들어가고 배교의 길을 걸어가고 세상에 타협하는 길로 갈지라도 사무엘처럼, 다니엘처럼,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믿음의 장부가 되어서 굳게 서서 뒤로 물러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시대가 무너지는데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찾아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은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5:1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충격적인 슬픔을 겪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나라가 바벨론에 침탈로 무너져가고 있는 그 때에 예루살렘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의와 진실함을 열렬히 찾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을 길 없고 다들 우상을 숭배하고 인간과 세력을 의지하는 자들만이 가득차 있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대장부가 한 사람도 없었단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은 불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믿음의 대장부를 찾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뜨거운 열심을 갖고 거룩한 열정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을 찾으시는데, 그것은 거룩한 중보자입니다. 16절에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중재자’라는 단어는 ‘파가’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서 ‘만나다, 때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히브리어 동사 형태 중에서 ‘히필’이라는 형태로는 ‘중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바로 ‘중재하고, 간절히 간청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어 진노가 임하고 각종 재난으로 무너져가고 있는데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서 그들을 살리려는 중재자가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크게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급속하여 그들을 다 순식간에 진멸하려고 하실 때에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서서 그들을 살려달라고 그들을 망하시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들을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려거든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달라고 중간에서 매달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는 데서 살리시고 그들과 불화하여 함께 가지 않으려고 하셨다가도 다시 그들과 함께 광야에서 동행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곤 하셨습니다.
이후에 모압 평지에 머무를 때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로부터 유혹을 받아서 광야에서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에게 가서 절하고 우상 숭배 의식에 동반하는 음란 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여 이스라엘의 수령들을 목매어 달고 바알브올에가 가담한 자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염병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다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수치심도 없이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인 시므리라는 사람이 미디안 족장의 딸인 고스비를 진중에까지 데리고 들어와 자기 장막으로 회중 앞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회중 중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창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 남녀의 배를 꿰뚫어 죽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죽으니 놀랍게도 염병이 순식간에 멈추었습니다. 이미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지만 만약 비느하스가 거룩한 질투심으로 악을 징벌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염병은 계속 번져서 수만 명이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 아들 비느하스를 축복하면서,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비느하스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자가 있을 때에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2:30,31 말씀에서도 이러한 중재자가 필요한 것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무섭게 진군해오는 무서운 적군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적군이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오는데도 하나님의 백성의 성읍에는 적들의 침공을 알리는 영적인 파수꾼이 없고 다 잠들어 있으며 성은 여기 저기 무너져서 그 무너진 데로 파죽지세로 들어오면 성 안에 있는 자들은 영낙없이 칼날에 죽고 집들은 불타고 성전도 왕궁도 다 불타 없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중에도 그 무너진 성벽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진노의 군대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중재자가 혹시라도 있는가 찾아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찾아도 찾아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없어서 결국 그들 위에 자기의 분노를 쏟아 불로 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중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고 그의 질투심을 누그러뜨리며 하나님께서 심판 대신에 긍휼과 자비를 그 백성에게 베푸시도록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의 일꾼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중에 그러한 중재자, 믿음의 대장부가 없을 때 큰 충격을 받고 슬퍼하며 그의 진노가 사그러지지 않고 불타 올라 그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난을 결국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 시대의 위기를 보면서 여전히 남의 일로만 보지 맙시다. 아무런 위기감 없이 나 혼자만 평안을 누리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 상태로 머물러 있지 맙시다. 나라가 위기감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점점 안팎의 공격이 임하고 사회 전반에 도덕적 부패가 심화되어 마치 동성애가 점점 퍼져가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과 같이 음란하고 마약이 술집마다 조직적으로 판매되고 있고 마약 중독자들이 일반 직장인, 학생, 주부, 외국인 노동자 등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전쟁의 위기감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나라 전반에 대한 위기감을 해소하기보다는 정권을 얻고 지키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신앙인들이 나몰라 하면서 나만 평안하면 된다고 안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진실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 중보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피를 나눈 저 북한의 군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장에 가서 드론 공격으로 매일 수백 명이 죽는 일이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모스서 6장에 보면 이르기를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아모스 6:3~7)
이 말씀과 같이 안일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심각한 시험이 있고 나라에는 타락과 배교의 기운이 깊어지고 나라는 큰 위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 믿음의 대장부와 간절한 중보자를 찾고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찾으시는 교회가 됩시다. 눈물로 기도하며 거룩한 열심을 품고 이 시대의 악이 물러가도록 간구합시다. 어떤 배교의 유혹 속에서도 믿음에 깨어 있어 대장부가 되어 신앙의 자리에서 앞으로 전진해갑시다. 끝까지 매달려 그 백성을 살렸던 모세,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중보자들이 됩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보시고 이 시대의 위기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