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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5 주일말씀/ 에1:9-12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설교 : 정삼지 담임목사
어제가 입춘이었습니다. 이제 곧 봄이 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소용돌이 가운데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미 트럼프 대통령이 반 이민법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지만, 모슬램 국가에는 큰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란에 갔다가 가족과 사촌들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입국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이민법이 피부에 와 닿았고, 몇 개 나라는 어쩌면 도로 돌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에까지 미치게 되면 굉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연방법원에서는 그것을 막아 달라고 해서 ‘반이민 금지법’을 선포했고, 이에 미 대통령은 항소하겠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는 90%이상이 모슬램이니까 국가적으로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있고, 미국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어떤 태풍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2월에 우리나라도 대통령 탄핵 문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2월이 시작되었지만, 아마 개인적으로도 불안한 가운데 맞이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혼란과 혼돈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믿되, 이 두 가지를 꼭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에스더서는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혼란가운데 빠져도, 하나님이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둘째는 섭리입니다.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기둥을 우리 인생에 심어 놓아야 합니다. 확고하고 튼튼하게 심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어떤 책에 보면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다하게 많습니다. ‘왜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는 이 시대에 태어났을까?’ 등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 국가에 일어나는 일, 내 자식들에게 일어나는 일 등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시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의 나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절대섭리입니다. 이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는 영화와 드라마로도 흥미진진하게 만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여인이 주인공이 된 두 책이 있는데, 바로 룻기와 에스더입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B.C. 1,000년여 전 여인이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 여인들이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대단한 주인공들입니다. 차이점은 룻기는 이방 여인이 유대 남자와 결혼을 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메시아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선조가 된 것 입니다. 반면에 에스더서는 유대 여자가 이방 왕과 결혼을 해서 왕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시다시피 왕과 결혼하는 것이 어찌 평범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부모가 없었습니다. 유대인 사촌오빠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결혼한 사람은 이방 국가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메데파사 제국의 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란에서 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까지 127개도를 장악하는 거대한 제국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과 결혼한 여인이 에스더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쌍한 한 여인이 사촌 밑에서 자라다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속에서 한 제국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다가 아니라, 절대 절명의 위기의 때에 자기 민족을 구해내는 큰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 에스더입니다. 페르시아 말로는 에스더요, 영어로는 스타(star)입니다. 어떻게 한 초라한 여인이 별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는 우리를 황홀하게 만듭니다. 정말 볼품없는 한 여자인데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속에서 스타, 왕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 그 배후에는 유대민족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의 2인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절대 권력을 막으시고, 에스더를 통해서 멸망 직전의 유대민족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보면 혼란하고 또 일어난 일을 보면 복잡하지만,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으면, ‘험한 세상에서도 에스더를 세우신 하나님이 우리도 그렇게 하시겠구나.’하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더서가 총 10장으로 이루어졌는데 1장은 서론입니다. 에1:1-4입니다. 4절을 보면, 왕이 여러 날 곧 180일 동안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상자는 127도의 장수들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갈 장군들이 초청되었습니다. 180일은 약 6개월, 일 년의 절반을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하수에로 왕은 대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 전쟁이 그리스와의 전쟁입니다. 아버지 다리우스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아버지가 실패했는데, 그 전쟁이 바로 마라톤 전쟁입니다. 마라톤 평지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아테네(그리스)가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메데파사의 방심과 자만함이 전쟁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아테네가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할 때, 아테네가 승리한 것입니다. 한 장군의 지혜와 전략으로 절대 우세 메데파사를 절대 약세 아테네가 이겨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마라톤 평온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겼으니 빅 뉴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병사가 승전보를 조국에 알리려 42.195km를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습니다. 단숨에 달려온 병사는 승전보를 알린 후, 너무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일화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이것이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하수에로왕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가 1차 전쟁에서 졌고, 이제 곧 자신이 그리스와 2차 전쟁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패배한 것 때문에 한껏 사기가 꺾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수와 각 지방의 장관들과 귀족들을 불러 180일 동안이나 어마어마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장수들이 용기백배 하도록, 이제 우리는 이기고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한 중요한 잔치였습니다. 이제 180일이 끝나고, 마지막 또 7일을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수산궁이라고 하는 이란의 프로폴리스, 지금의 서울 시민들을 다 불러와서 호화롭게 꾸미고 은금으로 된 의자를 배치하고 거기에 와서 마음껏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주가 끝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술잔의 모양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기를 가보면 지금도 기둥이 남아 있습니다. 2,500년 전 왕궁의 기둥과 터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잔치를 했겠습니까. 이제 술이 잔뜩 올라오고, 180일의 잔치를 통해 자신감이 최고조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지 말아야 할 한마디를 왕이 말합니다. 술은 사람을 기분 좋게도 하지만, 술의 끝은 항상 비극과 슬픔입니다. 그래서 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면 그것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왕은 왕후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왕후가 너무 멋있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될 청을 하게 됩니다. 왕의 명령을 왕후가 받아 들였다면 좋았을 텐데, 왕후가 그 절대 왕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그래서 폐위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대단한 기회와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에스더가 왕비가 되어 자기 민족을 살린 것입니다.
에1:9-12를 보면, 왕후 와스디를 청해서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에 나오게 했습니다. 왜요?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그런데 왕비는 왕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학자들은 두 가지의 견해를 말합니다. 첫째는 이 당시에는 남자들이 술 먹는 곳에는 여자들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이 전통이었는데, 그것을 어기고 왕비를 오라고 했기에 왕비가 거절을 했다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11절을 자세히 보면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왕후의 관을 잘 쓰고 나오라는 뜻으로, 학자들은 왕후의 관만 쓰고 왕 앞에 나오라는 견해로 봅니다. 즉 왕관 외에 아무것도 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비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 제국의 왕비가 그런 모습으로는 장수와 고관과 수산궁의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없어서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의 여성 지도자들은 왕후의 결정이 잘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왕후에서 폐위되었다 할지라도, 그 용기와 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술은 입에 대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까짓 것 한 잔 마시는 것이 어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이런 엉뚱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성과 신앙을 뛰어넘는 일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2017년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술 취하는 것을 쉽고 우습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탕한 것이고, 방탕하다는 것은 무절제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폼도 잡고, 예의도 갖추고, 격을 갖추지만 술이 들어가면 다 풀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엉뚱한 결정들을 하게 되고, 그 결정이 한나라를 바꾸고 한 왕후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술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분이 술에 취해 밤에 집으로 오다가 잘못해서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멍도 들고 다쳤는데, 집에 들어가 이렇게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어서 멍든 곳에 약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였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약과 반창고로 잘 치료하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아내가 “여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요?”하면서 화장실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거울에 약이 발라져 있고,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술이 들어가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케이에프시(KFC) 할아버지 아시죠? 이 분도 술 취하신 분들 때문에 곤욕을 치루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서 걷다 보니 갑자기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부딪쳤는데, 할아버지가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붙잡고 “할아버지 괜찮으세요?”라고 했는데 아무 말이 없자, 당황하여 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자기 방으로 와서 침대에 눕혔습니다. 정신을 잃은 줄 알고 찬물을 붓고 주무르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KFC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잔의 술이 한 왕후를 폐위시키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왕후 와스디의 입장에서 보면, 한 여인으로서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그래서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굽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정말 왕후의 지위와 바꿀 만큼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그 속에 얼마나 큰 자존심과 교만함이 있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싫어하기 시작하면 방향은 자꾸 그 쪽으로 가게 됩니다. “싫어요. 못해요. 안 해요.”, 그러나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좋습니다.”라고 받아들이면 풍성한 열매가 맺혀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시요,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부모 없이 자란 불쌍한 에스더를 등극시켜 왕비가 되게 하고, 한 나라의 왕비로써 자기 민족을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주인공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1장 서론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꼭 기억해야할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인생사에서 하나님이 주관자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 내가 당하는 일 가운데서 삶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갈등은 내가 아는 하나님과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충돌할 때 일어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과연 내가 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되는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요.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오대양의 바닷물과 같다면, 내가 아는 하나님은 한 양동이의 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옆에 앉은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 모르는 게 많잖아요. 내 자식은 또 얼마나 아세요. 맨날 먹고 자고 해도 뭘 압니까? 그래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아는 것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믿는 것입니다. 왜요? 안다고 해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한 번 속아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속는다는 셈치고 믿어보면 거기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속는 것은 어리석지만, 하나님께 속는 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어야할 대상입니다. 신앙은 믿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는 대상이 아니라 믿는 대상입니다. 그 대단했던 어거스틴도 내가 아는 하나님은 오대양의 바닷물 중에 한 양동이의 물에 불과하다 말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바닷물 속에 내려가고 내려가도 끝이 없고, 바다에 빠져도 죽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야 믿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 넓디 넓고 깊으신 하나님, 그분이 창조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주의 끝이 30억 광년입니다. 30억 광년이 지금까지의 현대 과학으로 찾은 우주의 끝입니다. 광년은 1년 동안 빛이 가는 속도입니다. 그것이 30억년을 빛의 속도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 7바퀴 반을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티 우주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그 끝에 30억 광년이 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안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속속들이 개입하신 것이 에스더서입니다. 유대민족을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내신 하나님은 장래 일어날 일을 아셔서 자기 민족이 멸절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신 선민이 한 사람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것을 아시고 한사람을 세웠으니 그가 바로 에스더입니다. 아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2017년 일어날 일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일생을 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내가 어디에 자리를 펼지를 아시고 내가 바다 끝에 가고, 하늘 끝에 가더라도 거기에 계시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알아야 할 대상이지만, 그러나 믿어야할 대상입니다. 알아서 믿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는 대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오늘 예배에 오시면서 머리감고 말리고 오시지요.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이 몇 개 떨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돌보아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참새도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더욱더 큰 관심을 두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합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그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두 손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게도 일하시고, 많은 경우에는 보이지 않게 일하십니다. 모세를 찾아 오셨을 때, 하나님은 보이게 모세를 부르시며 찾아오셨습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 그느 사실 인생을 포기했습니다. 왜요. 모세는 40세부터 80세까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보냈습니다. 그깟 양치는 것으로 갑부와 부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인생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시내산 가는 길에 가시떨기나무가 타는 불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며 보이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분명하게 나타나셨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도 일하십니다. 출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흥왕하자 바로가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막바지에는 히브리 민족이 아들을 낳을 때는 산파들에게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하나님이 두려워 아이들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살렸고, 왕에게는 “히브리 여인들은 힘이 세서 우리가 가기 전에 벌써 다 낳아 버렸습니다.”라고하며 이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태어난 지 3개월즈음 되자, 더 이상 울음소리를 감출 수가 없어 그 어머니가 누이와 함께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에 강변 갈대밭에 두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파도 한 번치면 끝날 것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끝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공주가 목욕을 하러 그곳에 옵니다. 갈대밭에 갈대상자 하나가 눈에 안 띌 수도 있고, 눈에 띄어도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 갈대상자에 시선이 가겠습니까. 그러나 시선이 가도록 하신 하나님, 그 때에 목욕하러 그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때 그곳에 하필 공주가 와서 관심을 갖고 뚜껑을 열어보니 히브리 남자아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마음에 애끓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긍휼한 마음이 든 거예요. ‘이 어린 아이를 내가 키워야겠다.’라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와서 “젖을 먹일 히브리 여인을 소개해 드릴까요.”할 때, 공주의 마음이 감동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시면 내 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우연한 만남에 악수 한 번하고 명함 교환했는데, 그것이 역사를 바꿀 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요 절대섭리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어머니 품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 사고와 신앙을 듣고 자라나서 하나님의 단어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져 민족의 해방을 가져오는 모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둠가운데 있을 때, 빛 되신 하나님은 내게 없었다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왜 내가 어둠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 어디 계셨습니까? 내가 주의 음성을 듣기를 원할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가 믿든 믿지 않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모든 것 안에는 내 인생사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내 인생의 실수와 내 인생의 실패, 내가 잘한 것 못한 것 등등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보이게도 일하시고 보이지 않게도 일하시되, 항상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일하시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제자교회를 위하여 좋은 일을 만드시고 이미 만들어 놓으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앞길을 이미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반대자가 극성을 부릴수록 더 그렇습니다.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은 유대민족을 멸절시키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은 아각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아각은 아말렉의 후손이고,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입니다. 그 에서의 사무친 원한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가는 길을 막았던 사람들이 바로 에서의 후손 아말렉 족속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간청하기를, 우리는 여기를 통과하려는 것일 뿐 당신들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니, 단지 지나가게만 해 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하루 종일 모세의 팔을 붙잡아 올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막은 아말렉족속을 괴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은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송아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양 새끼라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때의 일을 추억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시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때 일을 기억하시고 없애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좋은 것을 취하고 다 멸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의 왕위를 폐위시키셨습니다.
그 아말렉의 후손 하만이 이제는 절대 권력의 2인자가 되어 이스라엘 유대 민족을 다 죽이겠다고 큰 소리 내는 것이었습니다. 대적의 극성이 심할수록 하나님은 더 크게 준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에스더를 준비해서,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던 장대에 하만이 달리는 기가 막힌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자신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던 그 장대에 자신과 10명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통쾌한 승리의 역사가 에스더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패역한 시대요, 대적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37:5-6). 무섭고 캄캄하고 절망스러운 밤일지라도, 내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는 여호와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올 한해 또 2월 한 달, 우리 주님이 이루셨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하나님은 위기의 자기 백성을 위해 에스더를 준비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분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 명령하십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하십시오. 하나님이 왜 안하십니까?”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할 때까지 나는 안할 것이다. 네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내가 일할 것이다. 네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내가 할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하십니다. 세상과 자신을 보면 하나님이 어디계신지 알기 어렵습니다.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으면 앞길이 열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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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인생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요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혼란과 혼돈의 시대에 에스더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믿으며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제자 교회에서 반드시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