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국무부 로버트슨 차관보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① 정전협정 체결 이전이 아니라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 장기 경제 원조 보장 및 제1차분 2억 달러 원조 제공, 그리고 정전협정 체결 즉시
약 950만 달러에 해당하는 식량 지원
③ 정전협정 체결 이후 개최되는 정치회의에서 90일이 경과해도 실질적인 성과가 없을 경우,
한·미 양국은 정치회의에서 철수하고 나라의 통일을 위한 미래의행동에 관해 논의
④ 한국군 육군 병력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며, 해군과 공군도 적정한 수준으로 증대
⑤ 정치회의 개최에 앞서 한·미 양국의 공동 목표에 관한 제반사항을 다룰 고위급회의 개최
이 성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했다.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다시 열린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기회가 무산된다고
하여 휴전에 반대했다. 그는 정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정전이 이루어지면 국군의 작전권을 회수해서 단독으로 국군을 북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휴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미 대사관에 난입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진짜 속내는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휴전 후 미군이
한국은 또다시 소련과 중공의 후원을 받는 북한의 침략 위험 아래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5월 초, 주한 미국 대사 브릭스Ellis O. Briggs는 이승만의 상호방위조약 요구에 반대할
여지가 없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 군부에서도 정전협정 체결 후의 군사·경제적 보장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왔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정전협정 체결을 방해하는 이승만 정부
대신 군정을 실시하는 '상비Everready 작전계획까지 세웠으나, 결국 상호안보동
(mutual security pact) 체결 쪽으로 선회했다.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까지 구사하면서 미국을 압박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6월 24일부터 7월 12일까지 19일 동안이나 한국에 체류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매일 만났다. 결국 이 대통령과 로버트슨은 미국 측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확약'과 한국 측의 '정전협정 지지'를 담은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이 내한해서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假)조인되었다.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이 조약은 당신과 당신의
나라에 대한 마땅한 존경의 표시다. 이 조약은 여기서 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
고 치하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문,"새우와 고래" 간의 동맹조약이었다. 조약에는
북대서양조약과 달리 한국 피침 시 미국이 즉각 자동 개입한다는조항이 없으나, 미군의 한국
주둔을 명기함으로써 한국주둔 미군의 자동 참전을 사실상 보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8월 9일 대국민담화에서 이 조약으로 “우리의 후손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누릴 것"
이라 말했는데, 이후의 역사는 그의 말대로 되었다.
- 강규형, 김용삼, 남정욱, 정경희, 주익종 공저, ‘6ㆍ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