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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료바구니(기독) 원문보기 글쓴이: jung8h
슥 2: 1 계시 Revelation (1) 셋째 환상
제 2 장 : 불 성곽이 되시는 하나님
1. 측량줄을 잡은 사람 ( 2: 1-5 )
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스가랴는 한 사람이 측량줄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의 길이와 너비를 측량하러 가는 광경을 보았다. 예루살렘 성은 전에 파괴되고 황폐했었다(왕하 25: 9-10. 느 1: 3).
그 성은 아직 소수의 사람만 돌아와 사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성은 장차 많은 사람이 거주하므로 성곽 없는 촌락처럼 될 것이다. 그 성에 살려고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성안의 집들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으로 전도된 신약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는 본문의 예언이 신약교회에서 성취되었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차고 넘친다.
요한계시록 7: 9-10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라고 증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의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시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실 것이다. 불성곽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마치 선지자 엘리사 때에 그를 잡으려고 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로부터 선지자 엘리사를 불말과 불병거로 둘러싸 보호하심과 같은(왕하 6: 17) 특별 보호하심이다.
슥 2: 1 계시 Revelation -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
1] 셋째 환상 : 불 성곽이 되시는 하나님
1절에서 13절까지는 세 번째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환상에 약속되고 있는 축복과 회복의 범위는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메시야 시대에까지 확장된다.
두 번째 환상이 대적들의 파멸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 이 환상은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묘사하고 있다.
두 번째 환상이 당대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말하고 있다면, 이 환상은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이 환상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가랴와 척량사, 그리고 해석하는 천사, 그리고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천사이다.
어떤 이들은 이 척량사를 '여호와의 사자'로 해석하기도 한다(Perowne). 그리고 '척량줄'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 재건,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2]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1) 계시 : [그] (apokalupsis) [영] Revelation 묵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열어 보여주시는 일. 즉 감추어져 있고, 덮어져 있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등을 하나님 편에서 밝혀주시는 일이다.
* 롬 16: 25-27 -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인간은 하나님을 보거나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시므로, 사람의 노력으로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그 뜻을 나타내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 히 1: 1-2 -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뜻을 보여주셨다.
* 요 1: 18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다. 말씀과 역사를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돌아가심과 부활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이 분명하여졌다. 따라서 계시로 기독교가 설립되었다.
인간의 깨달음이나 노력에 좌우된 것이 아니다. 계시에 대응하여, 인간 측에서의 신앙도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 고전 12: 3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단 12: 4 -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 계 22: 10 -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 암 3: 7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계 10: 7 -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 마 11: 27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눅 10: 22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계시는 성도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대체로 역사 속에 될 일을 보여준다. 개인적 환상도 있지만 환상 대부분은 이스라엘 공동체, 신앙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지향하는 것들이다.
스가랴서에 나타난 8개의 환상들도 서로 연관된 환상들이다. 각각이 아니다. 하나님은 차분하게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될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어떤 환상을 보여주실 때 갑자기 보여주시면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다.
마치 그분은 친절한 교사처럼 자상하고, 단계적으로 그 눈높이에 따라서 환상(하나님의 계시)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를 보여주신다.
(2) 측량줄(measure, measuring line)
첫 번째 환상에서1장 16절에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화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상태에서 돌아왔다. 이제 내 집이 건축될 것이다. 성전의 건축을 예언하면서 먹줄이 나온다.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이 먹줄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측량줄(measure, measuring line)이다. 따라서 측량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복된 교회를 측량하여 모든 것이 드러나도록 한다.
시편에 2번, 에스겔에 42번, 스가랴에 2번, 계시록에 5번, 합 51번 나온다.
(3) 측량줄을 잡은 사람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실 때 종종 사람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보여주실 때가 있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 가운데서 주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즉 자기의 모습을 사람으로 계시하거나 천사로 계시할 때 삼위 가운데 두 번째 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신다.
붉은 말을 탄 사람, 그 골짜기 가운데 서 있었던 그 사람이 이번에는 측량줄을 잡고 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3] 의미
예루살렘의 영광을 측량줄로 상징하고 있다.
(1) 역사적 해석
이스라엘의 멸망, 회복, 영광에 대하여
* 렘 51: 51 - 외국인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느니라.
* 행 21: 28 –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 복음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인류의 회복
* 막 14: 58 -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3) 예언적 해석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천년 왕국의 완성
* 시 135: 2 -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 계 11: 1-3 –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요한계시록 11장은 두 증인에 관한 장이다.
1-2절은 겔 40-48장을 반영한다. 그러면 두 증인은 누구를 말할까? 두 증인의 정체를 '모세와 엘리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다시 살아서 온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는 하늘을 향하여 비 오지 못하게 한 것은 엘리야이며,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한 것은 모세이므로 두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두 번째로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세 번째 견해는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을 계승한 종말의 종으로 본다. 필자는 이 해석을 따른다. 즉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을 계승한 마지막 대 환란 때 일할 하나님의 종으로 본다.
그러면 왜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을 계승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아야 할까? 그 이유는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의 특징은 회개가 없다.
회개하라는 말이 없다는 것은 최대의 저주다. 성경을 통해서 회개가 없는 것은 말라기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으나 안타깝게도 다시 타락해버렸다. 그래서 크고 두려운 날에 이를 심판할 터인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크고 두려운 날은 언제일까? 모든 주석가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로 본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초림과 재림으로 두 번 오신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큰 무리들을 다 떠나보내고 열두 제자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다고 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자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크고 두려운 날'은 심판의 날이다.
초림 때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했다. 과연 크고 두려운 날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크고 두려운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 같은 종을 다시 보내겠다고 하셨다.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인가? '마지막 때 추수의 종'이냐가 여기서 밝혀진다. 예수님 당시는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일컬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마태복음 11장 14절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가복음 9장 13절에도 '엘리야가 왔으되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바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종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엘리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도 엘리야가 직접 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오는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종, 바로 '두 증인'들이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서 온다는 것은 성경적, 신앙적으로 맞지 않는 얘기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떤 역할을 했나?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 6개월 전에 미리 등장해서 오실 예수님을 예비했다. 황폐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바리새인들 향하여 부르짖으며 예수님을 예비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도록 길을 닦아 놓았으며 예수님을 널리 알렸다. 이렇게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 세례 요한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 두 증인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예비하는 종들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재림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미리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 왕이 행차하는데 왕이 먼저 가서 '나 왕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종들을 보내서 준비시킨다.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데 갑자기 오시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미리 준비시키신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는 신랑이 올 때 신랑의 친구가 먼저 가 있었다. 신랑의 친구가 신부에게 가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나서 재림하실 예수, 성도의 영원한 신랑 되실 예수님을 맞이할 재림을 준비시킨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 45절에 언급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종'이다. 우리가 마지막 때 두 증인과 같은 사명을 감당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