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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목사
얼마전에 제가 가르쳤던 한 자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참으로 딱했습니다.
그 자매의 어머니가 장사를 했는데 너무 어려워 여기 저기 돈을 빌려쓰고 이 자매 이름으로도 남편 몰래 2천만원을 대출 받았다가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 자매의 부모님은 급히 미국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 부모님이 떠나는 날 낮에 이 자매가 저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이 자매의 남편은 그제서야 2천만원 대출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너무 미안한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잘못했다고 무조건 비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남편의 그릇이 나오게 됩니다.
물론 남편은 깨끗하게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것 못하면 부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매는 그 다음부터 더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려워도 부부가 합심만 하면 어떤 상황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에 그 자매가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는데 자매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천국 간 것은 확실하니까 마음은 편해요."
이처럼 진실한 천국 소망은 죽음의 고통까지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가장 소중한 것이고 또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진리를 찾고 진리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폼 나는 무엇을 찾지 않고 반드시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죽을 때는 누구나 진실해 집니다. 그때까지 폼 잡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자존심, 명예심, 욕구 등을 다 버리고 진짜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때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진리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을 때 어떤 모습으로 죽습니까?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저는 이제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죽으면서 "저는 이제 미아리 도사를 믿겠습니다"라고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직도 자기 의지, 자기 주관이 있으니까 미아리 도사를 찾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이니까 한 말씀 드립니다.
평소에는 믿지 않다가 죽을 때 "나는 유교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저는 이제까지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고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사실은 기독교가 참된 구원의 종교임을 강하게 암시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생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사람을 진실하게 만들고 겸허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보는 시야를 가지면 우리는 놀라운 삶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산 자가 죽음을 유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음과 관련해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 1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그 날이 하나님께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이 정말 좋은 날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은 재수 없으니까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긍정적으로 살기 원하고 근심 없이 살기를 원하면 죽는 날이 참으로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신기하게 근심이 사라지는 역사가 생겨납니다.
3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이것은 정말 슬픔과 근심에 빠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초상집에 가서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진지한 모습으로 서게 되면 오히려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의 먹구름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말은 우리의 삶은 처음보다 나중이 나아야 한다는 것을 도전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참으로 시작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작은 거창합니다. 그러나 마무리를 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해 전 기독교 신문에 한국의 제일 큰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문을 닫은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어떤 조그만 개척교회 이름이 <한국의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지하에서 개척하면서 이름은 거창하게 지었다가 1년만에 문을 닫은 것입니다.
그러한 안타까운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끝이 아름다운 삶이 성경의 원리이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삶입니다.
그처럼 시작은 겸손하게 하되, 최선을 다해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내가 왕년에..."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의 땀과 내용이 없으면 자꾸만 그런 말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보다 나중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잔칫집에 자주 가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초상집에 자주 가면 지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준비하게 되고, 내세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삶을 겸허하게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초상집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면 많은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죽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아는 사람 염을 할 때에는 꼭 입회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항상 만져보는데, 그때 말없는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대화가 오고 갑니다.
"선생님!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뛰었습니까?"
그러나 어떤 분과는 정말 기분 좋은 대화가 오고 갑니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당신의 아름다운 삶!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흐뭇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처럼 죽음 자체가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녀교육 중에서도 부모의 아름다운 죽음만큼 소중한 자녀교육은 없습니다.
어떤 교회의 여자 집사님은 묵묵히 아름다운 봉사의 손길을 펼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여자 집사님은 순교자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했다는 사실이 항상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니까 순교자적인 아름다운 삶이 그녀의 삶 속에 완전히 체질화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후의 가르침이자 가장 좋은 가르침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생을 잘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혹시 주변에 누군가 중환자가 있으면 그를 자주 찾아주시고, 초상집에도 최선을 다해서 찾아 주십시오. 그러면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결혼식은 가지 못해도 초상집에는 꼭 가시고, 죽은 사람을 친근한 대상으로 여기고 염할 때에는 꼭 입회하십시오.
어떤 분은 부조가 무서워서 초상집에 안 갑니다.
차라리 한 끼 외식을 안 하면 될 것을 그 돈이 그렇게 아깝단 말입니까?
육신의 조그만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초상집에서 지혜를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안되면 부조 안 하면 되지, 조그만 일 때문에 큰 일을 버립니까?
피곤하기 때문에 못 가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피곤하면 직장에 안 나갑니까?
우리는 덜 중요한 일과 더 중요한 일을 구분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사람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가면서도 숫자나 채우러 가자는 마음으로 가는 분이 있습니다.
마치 숫자 부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조한다는 높은 마음이 아닌 지혜를 얻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초상집에 가야 합니다.
지혜를 주는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그곳을 찾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3.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며 살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인생의 평가를 결론 짓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이름을 날리고 대단해 보여도 죽을 때 시시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에 평소에는 아주 시시하게 보이는 사람도
죽을 때에는 그의 위대한 모습이 나타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잘 준비하고 죽음을 잘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사람답게 태어났으면 정말 사람답게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우리는 주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성도답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오래 남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현재에 최선의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은 죽을 날짜를 꼽으며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대 명제를 인식하고 현재의 땀을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아름답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대개 미래를 대비하며 현실을 충실하게 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본문 3절에서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하는데 이 웃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된 웃음을 말합니다. 척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척 하는 것이 버릇이 되면 허위의식이 생기고 자꾸 요행수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요행수를 찾으면 반드시 화가 미치고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행운을 바랍니다.
그러나 땀이 없는 행운은 절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 중에는 경품에 당첨되어 부상으로 받은 여행권으로 놀러갔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행운을 얻었다고 했지만 그 행운이 목숨을 재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행운이나 좋은 에피소드를 복으로 여기지 말고
땀과 정성을 투자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2) 사랑과 감동을 주고받으며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속상한 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없어지면 속이 시원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 피하면 더 무서운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회 주셨을 때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명한 <서시>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소중한 것을 생각하면서 사람끼리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노래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소중하고 감동적인 삶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감동입니다.
얼마 전 대학생 1천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제일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자동차, 휴대폰, 애인 등>의 대답이 제일로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가장 받고 싶은 것은 감동이었습니다.
사람은 감동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인데 감동에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는 감동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줄 것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적은 희생으로도 얼마든지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부에 제레미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가난했지만 한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통지서를 받던 날 그는 평생 흘려도 모자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대학 근처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 근처 농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심 식사시간이 되면 말못할 고민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다 도시락을 싸 오는데 그는 도시락을 가지고 올 형편이 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려 하면 그는 헛간 뒤쪽에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왜 점심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속이 좋지 않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리고 헛간 뒤쪽으로 가서 수돗물만 실컷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부 조장이 큰 소리로 벌컥 화를 냈습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내가 돼진 줄 알아! 이렇게 많이 싸 주다니...
누구 내 도시락 좀 먹을 사람 없어!"
제레미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없어서 얻어먹는 것도 아니고 남는 것 먹어주는 것이니까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그래서 그 조장 아저씨의 남은 음식을 먹어 주었습니다.
다음날도 조장 아저씨는 버럭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도대체 정신이 없어! 왜 이렇게 많이 싸주는 거야.
누구 내 도시락 먹어줄 사람 없어!"
제레미는 아무 부담이 없이 그 도시락을 또 먹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제레미는 조장 아저씨의 남은 도시락을 먹어 주었습니다.
한달 후에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그는 농장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기숙사로 돌아가던 날 그는 조장 아저씨 내외분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넓은 농장에서 조장 아저씨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경리 아가씨에게 조장 아저씨와 그 부인께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경리 아가씨가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그 조장 아저씨는 부인이 안 계신데. 그분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여러분!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의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못 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없는 사람들끼리의 조그만 나눔은 더욱 큰 감동이 됩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감동이 없는 것에 대해 다른 어떤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의 형편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감동을 주고받을 때 우리의 이름은 아름다운 이름이 될 것입니다.
3) 주님을 멋있게 증거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흔히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업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우리의 삶의 최고 목적일 터인데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야지 다른 것이 목적이 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돈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돈을 번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식에게 남겨 주는 것이 목적입니까?
얼마나 허무한 목적입니까? 그것은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많이 물려주면 그것은 오히려 자녀를 망치는 길입니다.
사람은 땀과 은혜로 사는 것이지 유산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땀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재물은 언젠가 피눈물을 흘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죽음 준비는 주님을 위한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자로 나서야 합니다.
정말 나서야 합니다. 영어로 커밍 아웃(coming out)을 해야 합니다.
미국에 10월 1일만 되면 큰 행사가 벌어집니다.
우리 나라는 국군의 날이지만 미국은 그 날이 커밍 아웃하는/ 날입니다.
즉 동성애자들이 "나는 동성애자이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시위하고 데모하고 전국적인 행사를 하는 날입니다.
동성애자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예수님 믿는다는 분이 숨기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도 커밍 아웃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커밍 아웃을 안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그렇게 창피하다는 말입니까? 동성애보다 창피합니까?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이제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신령한 시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아름다운 이름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준비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나의 죽는 모습을 통해서 살아왔던 나의 날들이 진실로 확인되고,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죽는 모습을 보고 옷깃을 여미며 내일의 소망을 가지며 살 수 있게 되는 것!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주님 앞에 어엿이 선다면 얼마나 성공적인 삶입니까?
그러므로 항상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죽음을 잘 준비하게 하고, 죽을 때 아름다운 죽음을 주시옵소서."
그 기도는 가장 위대한 기도요, 가장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삶을 잘 준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죽음 후에 주님 앞에 설 그 날을 미리 생각하며 역으로 오늘의 삶을 충실하는 사는 거꾸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은 정말 맛깔 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