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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총회 - 그 특권과 의무
(신 23:1-14)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추천할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본문 말씀에 가장 많이 등장
하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강조하시
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호와의 총회(assembly of the Lord)’라
는 표현이 여섯 번이나 반복하며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라는 단어는 성경 전
체를 통해 열세 번 등장하는데 본문에서만 무려 여섯 번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거기 기록된 대로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나 사생자나 모압 사람이나 암몬 사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즉 장
로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로
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총회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
의 모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민권이나 영주권 같은 개념이 없었지만 오
늘날의 용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석을 합니
다. 그러나 이 해석도 언제나 타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
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라”(출12:48). 할례를 받으면 이방인
도 본토인과 같이 시민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총회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총
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혼으로 이루는 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결혼 대상
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
늘 본문은 그런 뉘앙스를 전혀 풍기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여호와의 총회는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의 상황으로 볼
때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의 군사 공동체를 의미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9절), 모인 사
람들이 여호와의 총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전쟁은 보
통 전쟁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 아
닙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영토를 확장하거나 노략물을 차지하거나 국가의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여타의 전
쟁 목적과는 다른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죄악이 극한에 달한 자를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는 목적입니
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극한에 달해서는 안 됩니다. 극한에 달하지 않으면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극한에 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
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죄악이 극한에 달했을 때 하나님의 징벌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둘째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정착해서 전 세계 민족
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야가 오실 지리적, 정신적, 영적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첫째는 징벌의 목적이요, 둘째는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군사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능력이나 잘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물러설 수 없는 신앙, 절대 순종의 신앙
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군사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1. 여호와의 총회에서 제외되는 자
여호와의 총회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여호와의 총회에서 제외되
는 세 가지 부류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낭이 상한자나 신을 베인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1절).
‘신낭이 상했다’는 말은 스스로 돌이나 망치와 같은 도구를 가지고 자기 신낭을 일
부러 깨뜨렸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신을 베었다’는 말은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베었다는 의미입니다.
신낭이 상했거나 신을 베인 자를 오늘날의 용어로 내시, 환관, 혹은 고자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내시나 고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일까요? 아
닙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 집사의 전도로 구원을 받아서 에티
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이사야서에는 “여호
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
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
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라”(사56:4-5) 기록되었습
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이방 종
교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 스스로 신낭을 상하게 하거나 신을 베었기 때문입니다. 이
들은 여호와를 향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총회에
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2절) 사생자(bastard)는 간
통, 근친상간이나 간음을 통해서 낳은 자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생자
는 이방 신전에서 창기노릇을 하는 여인의 자식을 의미합니다.
이방 종교는 모두 농사에 관련된 종교입니다. 하늘에 있는 신들이 비를 내려주어야 농
사가 잘 된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방 종교를 섬기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신들이 연애를 해야 비가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이방 신전에서 하늘의
신들의 연애감정을 자극하는 음란한 행위를 남발했습니다. 따라서 이방 신전에는 언제
나 창기와 미동이 있었습니다. 이 창기가 낳은 자식을 가리켜서 본문은 사생자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이 사생자들은 어려서부터 이방 신전의 창기 노릇을 하는 어머니에 붙
들려 이방 종교에 얽매였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암몬사람과 모압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3절).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후손들입니다. 롯의 후손들이기는 하나 족보가
아주 지저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롯과 그 가족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시
면서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
겼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죽었고,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
령을 어겨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롯과 두 딸은 산으로 피신
했는데, 롯의 두 딸들은 후손을 얻겠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아버지인 롯에게 술을 먹이
고 근친상간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나온 족속들이 바로 모압과 암몬입니다. 암몬과 모
압은 그 족보만 따져봤을 때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다”(4절)고 말합니다. 모세는 소극적
인 이유와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소극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
굽에서 나올 때 모압과 암몬이 떡과 물로 길에서 영접치 않은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
면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친척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무자비했기 때문에 모압과 암몬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
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무자비하기는 에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
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었음이니라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애굽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3대가 지나면 이스라엘
의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독 모압과 암몬 족속만 여호와의 총회
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적극적인 이유가 존재합니다. 바로 메소포타미아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
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2장부터 24장까지
의 이야기가 바로 그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을 물리치
고 승승장구하자 모압 왕 발락이 이를 두려워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용한 점쟁이 발람
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발람은 부귀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
을 저주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막으시고 저주를 축복으로 변하게 하셨습니
다. 그래서 발람은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민24:9) 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으며,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의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
지 못하리로다”라는 시편 1편 5절의 경고는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여
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2. 여호와의 총회의 특권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총회에 주시
는 특권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두 가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자
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보상의 방법입니다. 욕을 많이 먹어도 먹은 만큼 복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16장에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쫓길 때에 사울 집안의 시
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계속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의 심복들이 시므
이를 해하고자 할 때 다윗은 심복들을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혹시 여호
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
라”(삼하 16:12). 다윗은 사람의 저주를 하나님께서 복으로 바꾸어주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보상의 법칙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
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
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고 말씀하셨습니
다.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이 저주하고 욕할지라도 오
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
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
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총회는 복이 와도 복이
요, 저주가 와도 복으로 바뀌는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두 번째 방법은 섭리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저주
와 고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고통이 도리어 축복의 첩경이 되
어버린 경우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시기로 그만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후에 가뭄으
로 인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나 “형들이 내게 고난과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것이 복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족들을 모두 살리게 하
셨다”고 고백합니다. 저주 받고 고통 받아서 ‘나는 망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후
에 보니 그것이 더 큰 축복의 첩경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섭리적인 방법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서에도 이런 섭리의 방법이 잘 드러납니다.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인
하만은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모르드개가 속한 유대민족을 모두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대인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지만 시간이 흐르자 도리어 하만과 그의
열 아들과 유대인의 대적 칠만 오천명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인 에스더
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었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 가는 인물이 되
었습니다. 저주가 도리어 축복이 되는 섭리의 기록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혹시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면 도리
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고난이 도리어 큰 복이 된다는 사
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방법입니다. 저주와 핍박이 도리어 영적으로는 복음의 진보와 성도
의 성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겪은 후, 흩어져
서 더 빨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가끔 고난이 와야 기도하지 않습
니까? 잘 먹고 잘 살면 새벽기도하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조금 어려운 일이 닥
치면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옵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아무래도 피상적으
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몸이 병들고 연약해지면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
이다”(시119:71)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이유 없는 저주와 고난
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도리어 그것을 통해 영혼이 겸손해지고 정화되어 하나님을 가까
이 할 수 있는 큰 축복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바로 여호와
의 총회가 누리는 첫 번째 특권입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누리는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중에 행하시는 것입
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
에 행하심이라”(14절).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의 빽빽한 구름 가운데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 가운데 특별히 임재하십니다. 진 가운데 임하셔서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일하십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운행
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로 구원하시고, 둘째
로 대적을 우리 손에 붙이십니다. ‘구원하신다’는 것은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
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
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
이 지키셨도다”(신32:1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를, 하나님의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지난주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눈이 충혈 되어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노안이 와서 수
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눈이 노화되면 수축력이 떨어져서 눈 뒤에 있는 망막이 찢어
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수술을 해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한 기관입니까? 먼지 하나만 날아와도 순간적으로 눈꺼풀이 덮이면서 보
호 받아야 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 거하시며 하나님
의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스가랴서에도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총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거하시며 특별한 승리를 주십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전쟁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하
나님께서 대적을 우리의 손에 붙이시기 때문입니다. 군사력만 가지고 봤을 때는 열등
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
문이었습니다.
3. 여호와의 총회의 의무
그러나 여호와의 총회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의무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 의무는 한
마디로 ‘정결함’,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진을 거룩히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찌라”(9
절)고 말씀합니다. 첫째로 도덕적인 정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도덕적인 불결함이 있다면 모두 자복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심령의 거룩
함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의식적인 정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
거든 진 밖으로 나가고 진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
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10-11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몽설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인 불결함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불결함이 오게 됩니
다. 레위기 15장 16절에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
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위생적인 청결함입니다.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
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11-12절)고 기록되었습니다. 화장실을 진 안에 만들
지 말고, 진 밖에 만들며 용변을 볼 때에도 반드시 삽을 가지고 가서 용변물 위에 흙
을 덮어 묻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위생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
습니다.
중세 천년의 역사를 교회사에서는 ‘목욕 없는 천년’이라고 말합니다. 중세 사람들
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집을 지을 때도 짐승하고 사람이 한 곳에서 살
도록 건축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가장 유행한 병이 페스트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전쟁보다도 이 페스트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한 번 유행하면 인구
의 절반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 작품 중에 죽음
에 대한 그림이 많고 중세의 신학이 내세론을 발전시킨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
다. 연옥 이론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
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위생규례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결국 이 모든 규례는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명
기나 레위기 전체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으로도, 육신적으로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
표입니다.
결 론
여러분은 혹시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도, 도덕적으로
도, 육신적으로도 거룩하고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어려울 때일수록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교회에 승리를 주시며 온갖 고난을 모두 축복으로 변화시키십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의 교회가 흑암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불결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털어 놓으시고 예수의 보혈로 씻음 받
아 정결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마음껏 행하시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