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인/무지자에게 임하는 재앙(1-7)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실패와 고통의 원인이 우리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과 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고한 고난도 많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고통 당하고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를 촉구할 수도 없습니다. 죄의 결과가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어 임한다면, 그것은 죄로 인한 파국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 실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무서운 이유는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까지 그 악한 영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1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1-7)
위기를 당할 때 친구의 존재는 더 없이 소중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재난을 만난 욥에게 그러한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조언은 욥에게 적절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1) 무의미한 욥의 말(1)
욥기 5장에서는 4장에 비해 엘리바스가 더 직접적으로 독설을 쏟아냅니다. 4장에서 ‘경험’과 ‘환상’을 바탕으로 욥에게 인과응보의 원리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거룩한 자”(1)라는 표현을 써서 설득을 더욱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지지할 사람이 없음을 명확히 합니다.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욥은 “거룩한 자”(천사, 케도쉽) 중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라는 뜻입니다.
(2) 어리석은 욥의 말(2)
엘리바스가 왜 이렇게까지 거칠게 충고합니까?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2). 욥은 분노 중에서 멸망할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 쓰이는 모든 단어는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어휘들입니다. “분노”와 “시기” 같은 감정의 동요는 지혜자의 특질이 될 수 없습니다(잠 6:34; 14:30).
(3) 악인의 결말(3-5)
3절의 정확한 번역을 “내가 씨 뿌리는 한 미련한 자가 갑자기 가문 전체가 저주받은 현장을 보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미련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지혜 없는 자에게 벌어지는 일은 자녀들이 성문에서 짓밟힘을 당하는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고(4), 열심히 농사를 지어 수확을 얻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5).
(4) 고난의 원인(6-7)
이러한 원리는 땅에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6) 하늘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입니다. 욥의 재난은 욥 자신의 죄 때문에 발생했을 뿐 ‘땅’(티끌과 흙)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접속사로 시작하는 7절은 6절의 이유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죄를 지은 인간이 고난 당하는 것은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처럼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시편 50:22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들에게는 구원자가 없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이 ‘지혜’를 엘리바스는 지금 자녀를 모두 잃고 재산을 다 잃은 욥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욥의 자녀들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아무도 구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인 욥이 ‘미련한 자’이고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한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혀의 채찍”입니다. 욥의 고난이 죄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독자는,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 될수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엘리바스의 조언 하나님께로 돌아가라(8-16)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성경 구절을 인용해 가며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고 말하곤 합니다. 상대를 위로하려는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약은 독이 될 뿐입니다. 그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하나님을 의비하라고 권면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그를 의탁해야 합니다.
8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8-16)
엘리바스는 고난 당하는 욥에게, 만약 자신이 욥이라면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일을 의탁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권면은 자신의 존재적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절대적 위로자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이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1) 욥을 설득하는 엘리바스(8)
엘리바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욥을 설득합니다.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위한 엘리바스의 조언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8). 그가 보기에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지와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 조언이라도, 선한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을 뿌린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욥기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비판합니다. 여기서,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묘사하는 장면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9-16).
(2)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9)
엘리비스는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 혹은 기이한 일의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9). 여기 “헤아릴 수 없이 큰 일”과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9)라는 구절은 인간의 이해나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기이한 일”로 번역된 ‘니플라오트’는 “까닭 없이”와 더불어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이자 반성적 지혜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사실 엘리바스가 아니라 욥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입니다(욥 9:10에서 욥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헤아리고 세는 주체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 가둬놓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에 따라서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3) 비를 주시는 하나님(10-11)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중 하나는 비를 내리시고, 밭에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꼐서 척박한 땅에 물을 공급하심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와 애곡하는 자를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자비로운 분입니다. 11절은 기이한 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4)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2-14)
따라서 엘리바스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혜자(“교활한 자”)의 계획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들을 실패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12). “지혜로운 자”와 슬기로운 자(“간교한 자”)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인과응보)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더라도 그 예측한 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13). 규범적 지혜의 이분법에 따르면 낮과 밝음은 좋은 것이고, 밤과 어둠은 나쁜 것으로 그 둘은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데, 이 이분법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자와 의인이라도 대낮에 어둠을 만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14). 14절의 “그들”은 악인들이 아닙니다. 개역개정이 부정적 의미를 담아 번역한 “교활한 자”(12)와 “간교한 자”(13)는 잠언에서는 모두 “슬기로운 자”로 번역되었고 지혜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참조 잠 12:16,23; 13:16; 14:8,15,18; 22:3; 27:12).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는 욥의 “주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도”와 “여호와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병도 주시고 약도 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욥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는 ‘니플라오트’라는 단어를 엘리바스는 전혀 엉뚱하게 인과응보의 원리와 연결시킵니다.
(5) 가난한 자의 희망(15-16)
이제 엘리바스는 욥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로 자처하면서 입을 다물 때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 자에게 임하는 복(17-27)
위기를 당할 때 친구의 존재는 더 없이 소중합니다. 극한 고통에 직면한 친구에게 친구의 위로는 어느 때보다 절실했습니다. 섣부른 단정은 오히려 상대방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섣부른 조언이 오히려 한 사람의 영적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17-27)
17-18절에서는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8; 참조 호 6:1-3). 욥의 고난이 하나님께 받는 “징계”라는 것이 엘리바스의 진단입니다(17). 1-2장의 천상회의를 모르는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진단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표현들은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자와 의인은 “환난”과 “기근”과 “전쟁”과 “멸망”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받게 됩니다(19-22). 징계가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욥을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욥에게 미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욥이 최악의 상황에 있는 것을 망각한 쓸모 없는 위로입니다. 그는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소개하지만, 징계로 여기지 않는 욥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허황된 약속으로 회개 이후에 주어질 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값싼 회개 신학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22-23절은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자에게 임하는 복 중에 ‘야생동물과의 화목’이 있습니다. “들짐승”은 가축의 반대말입니다. 인간의 영역 외부의 존재로서 인간의 통제나 예측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라는 점에서 환난과 기근, 전쟁과 멸망(죽음)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간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이러한 야생동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22) 그들과 “언약”, 즉 평화조약을 맺게 됩니다(23). 야생 세계에 대한 엘리바스의 이해와 하나님의 언설에서 나타난 야생동물에 대한 진술을 나란히 비교해서 읽으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된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집안도 평안하고 부족함도 없게 됩니다(24). 자손의 복(25)과 장수의 복(26) 역시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26절에서는 전능자의 징계를 받고 돌이킨 자에게는 장수의 복이 임하고 마치 곡식단이 제 때에 추수되듯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천수를 다 누린 후에 하나님께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과 고통을 100페센트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안다고 해서, 의롭고 지혜롭다고 해서 이웃을 잘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 당한 이웃 앞에서 말을 아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위로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