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5] 이요한(李耀翰) - 하나님, 나의 하나님 2. 은혜 있는 곳을 찾아
1 1945년 해방이 되자 나의 신앙에 또 하나의 격변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 해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앙을 다시 찾은 기쁨, 한국어, 한반도를 다시 찾은 기쁨에 온통 세상은 들뜬 것만 같았다.
2 그것도 잠시 미 군정이 들어서고, 새로운 정치의 물결이 일자 교회는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으로부터 구호품이 들어 오자 교역자들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지고 정치에 참관하게 되자 성직을 버리기 일쑤였다.
3 교회가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과 타협하게 되자 신앙을 잃고 교회를 잃어버렸던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또 한 번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서도 만주나 고향, 혹은 일본 둥지에서 만났던 교우들이 모여 잘 믿어 보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우리 교회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던 나는 목사들이 벌거벗은 것과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꾸게 됐다.
4 교회가 뭔가 부끄러운 상황에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스쳐 갔다. 또 현 교단에 “하나님의 촛불이 옮겨졌다”라는 몽시와 “한국 주 재림”이라는 글자가 적힌 내용이 호외 신문처럼 보이는 꿈을 꾸게 됐다.
5 막연하나마 내가 걱정을 하니까 이런 몽시가 내리는구나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을 철저히 하려고 더한층 노력했다. 그 후 서울에서 몇 시간 거리 떨어진 어느 교회를 맡아 서울에 거주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6 이 교회와는 남대문교회 장로님을 통해 인연을 맺어 인도자가 빈 얼마 동안 시무한 것이다. 그러면서 남산 청해 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한 학기를 다녔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직접 계시를 통해, 혹은 잘 믿는 성도의 증거를 통해 ‘때’를 알려 주시고 ‘주 재림’을 알려 주셨다.
7 3.8선 때문에 평양의 신앙 열도는 직접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열성 신도들로부터, 평양이 과연 한국의 예루살렘이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분들로부터, 평양에 은혜가 많은 청년 한 분이 있는데 가정에서 집회를 하다가 옥중에 들어가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8 그 청년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에 의해, 그는 남이 알지 못하는 뜻을 아는 분 같고 뭔가 비범한 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말을 하는 분 가운데 옥세현 씨가 있었다. 그분은 당시 40대 중반의 부인이었는데, 남대문교회 교인들을 통해 알게 됐다.
9 이북에서 온 두 명이 가정 집회를 통해 은혜를 주게 되었는데 나도 그런 집회에서 옥세현 씨를 알게 된 것이다. 그때 옥세현 씨가 받들던 그 청년은 한국에 재림주가 오시며, 기성 제단은 사명을 다 못하고 불이 꺼져 바리새 교단과 같다는 주장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10 나도 그 말에 공감이 됐으며, 그래서 목회자들의 방황이 일어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6.25 동란이 일어나자 나는 곧 남쪽으로 피난민 대열에 끼여 내려오다 부산에 도착, 초량교회에 피난민들과 일단 거처를 정했다. 다시 제주도에 들어가 몇 개월 동안 배급 주는 식량으로 지나게 됐다. 제주도에서도 교회에서 머물기도 하고 가정 집회도 가졌다.
11 이미 나는 옥세현 씨 등을 통해 들은 내용도 있고 개인적으로 계시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교회 신도들과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예배 시간에도 참석은 하지만 어느 교인을 만나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교회를 걱정하고 재림의 때를 이야기할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다.
12 마침 이봉운 장로님의 사모님 되시는 분과 쌀 배급을 타 가지고 오다가 쉬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신앙적으로 진지한 내용이 많이 거론됐다. 그래서 하루는 이 장로님 댁을 방문했는데 장로님은 그다지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사모님이 무척 반가워했다.
13 그러나 몇 번 만나서 성경 문제와 신앙 문제를 토론하는 가운데 공감을 갖게 됐다. 이 장로님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주님의 강림이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알게 되자 가족끼리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스럽게 제주도 생활을 한 것 같다. 이 가정은 내가 부산으로 가 얼마 후에 나의 편지를 받고 부산에 도착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