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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 나는 빨가벗은 채 추위에 살이 빨가니 얼어서 흰 둑길을 걸어간다. 수발의 총성, 나는 그대로 털썩 눈 위에 쓰러진다. 이윽고 붉은 피가 하이얀 눈을 호젓이 물들여 간다.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놈들은 멋쩍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대로 돌아들 간다. 발의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 가며 방 안으로 들어들 갈 테지. 몇 분 후면 그들은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우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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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고 있어! 빨리 나와!”
착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빨리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며 독촉하고 있었다. 한 단 한 단 정신을 가다듬고 감각을 잃은 무릎을 힘껏 괴어 짚으며 기어올랐다. 입구에 다다르자 억센 손아귀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몸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눈 속에 그대로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찬 눈이 얼굴 위에 스치자 정신이 돌아왔다. 일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정확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모든 것은 인제 끝나는 것이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나를 끝맺어야 한다.
그는 눈을 다섯 손가락으로 꽉 움켜 짚고 떨리는 다리를 바로잡아가며 일어섰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정확히 걸음을 옮겼다. 눈은 의지적인 신념으로 차가이 빛나고 있었다.
본부에서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준비 완료 보고와 집행 명령이 뒤이어 떨어졌다.
눈에 함빡 싸인 흰 둑길이다. 오오 이 둑길…… 몇 사람이나 이 둑길을 걸었을 거냐. 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 선 언덕, 흰 눈이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닫는 길이오. 그처럼 가고 싶어 하던 길이니 유감없을 거요. 걸음마다 흰 눈 위에 발자국이 따른다.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히 걸어야 한다. 사수(射手)준비! 총탄 재는 소리가 바람처럼 차갑다. 눈앞엔 흰 눈뿐, 아무것도 없다. 인제 모든 것은 끝난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끝을 맺어야 한다. 끝나는 일 초, 일각까지 나를, 자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B] |
| 걸음걸이는 그의 의지처럼 또한 정확했다. 아무리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걸음걸이가 죽음에 접근하여 가는 마지막 길일지라도 결코 허튼, 불안한, 절망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흰 눈, 그 속을 걷고 있다. 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 선 언덕, 흰 눈이다. 연발하는 총성, 마치 외부 세계의 잡음만 같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흰 속을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정확히 걸어가고 있었다. 눈 속에 부서지는 발자국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난다. 누가 뒤통수서 잡아 일으키는 것 같다. 뒤 허리에 충격을 느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흰 눈이 회색빛으로 흩어지다가 점점 어두워 간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놈들은 멋쩍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부로 돌아들 갈 테지.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 가며 방 안으로 들어들 갈 것이다. 몇 분 후면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누가 죽었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평범한 일인 것이다. 의식이 점점 그로부터 어두워 갔다. 흰 눈 위다. 햇볕이 따스히 눈 위에 부서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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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원, ‘유예’
34. 윗글의 서술상 특징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현재 시제의 간결한 문장을 반복하여 긴박감을 드러내고 있다.
② 말줄임표를 사용하여 인물의 내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③ 따옴표 없이 대화를 인용하여 내면 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④ 사건을 병렬적으로 배치하여 동일 시간에 발생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⑤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교차하여 인물의 심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35. [A]와 [B]에 대한 이해로 적절한 것은?
① [A]의 서술자와 [B]의 서술자는 동일 인물이다.
② [A]는 [B]에서 일어난 사건을 서술자가 회상하고 있다.
③ [A]에서 서술자가 상상한 일이 [B]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④ [A]의 서술자가 한 일이 [B]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⑤ [A]에서 가졌던 서술자의 희망이 [B]에서는 절망으로 바뀌고 있다.
36. <보기>의 ⓐ와 ⓑ를 활용하여 윗글의 나와 인민군에 대해 설명한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보기>
소설 속의 인물은 ⓐ특정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특정한 환경으로는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 등이 있다. 각 인물은 이러한 환경을 자신의 성격과 처지를 바탕으로 인식하며 그에 따라 적절한 ⓑ대응 방식을 나타낸다.
① 나와 인민군은 ⓐ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② 나는 ⓐ를 부정적으로, 인민군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③ 나와 인민군의 갈등은 ⓐ로 인한 것으로, ⓑ로 인해 해소되고 있다.
④ 나는 인민군에 비해 ⓐ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를 보여 주고 있다.
⑤ 나의 ⓑ에 대해 인민군은 나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37. <보기>를 바탕으로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기>
이 작품의 제목인 ‘유예’는 ‘일을 결행하는 데 날짜나 시간을 미룸. 또는 그런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겨울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주인공의 모습과 사형을 집행하는 일을 일상적인 일처럼 여기고 있는 인민군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①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유예된 시간이 ‘한 시간’임을 알 수 있군.
② ‘눈은 의지적인 신념으로 차가이 빛나고 있었다.’에서 전쟁의 비극성을 알리고자 하는 주인공의 의지를 볼 수 있군.
③ ‘눈에 함빡 싸인 흰 둑길’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제시해 준다고 볼 수 있군.
④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볼 수 있군.
⑤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피’는 놈들의 행동에서 사형 집행을 일상적인 일로 여기는 인민군의 모습을 볼 수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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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7] 오상원, 「유예」
https://www.youtube.com/watch?v=WT1GMIOd9l8
http://blog.naver.com/ongsimjang/220307668762
http://blog.naver.com/acupofcaffe/220693607114
http://9594jh.blog.me/220122216411
해제 이 작품은 전쟁에 참여하여 인민군의 포로가 된 소대장을 주인공으로 하여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 죽음이 한 시간 후로 유예된 상태에 있는 주인공의 의식 세계와 독백을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교차하는 특이한 시점으로 그려 내고 있다. 전쟁 속에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부끄럽고 무서운 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무감각하고 사소한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전쟁이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살시키는 비극적 행위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주제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살하는 전쟁의 비극성
전체 줄거리 소대장인 ‘나’는 소대원들과 적진에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후퇴하면서 모든 부하들을 잃고 홀로 남하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마을에서 아군이 북한군에게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적의 사수에게 총을 쏘았다가 붙잡히게 된다. ‘나’는 한 시간 후로 유예된 죽음을 앞두고 움(막)에서 전쟁이 야기하는 인간 존재의 몰가치성에 대해 생각한다. 적은 끊임없이 ‘나’를 회유하지만 ‘나’는 전향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34 서술상의 특징 파악 ④
정답이 정답인 이유 ▶▶
이 글은 한 시간 후에 죽음을 맞이하도록 되어 있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서술하고 있다. 내면에서 떠올리는 일이 실제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진행되는 사건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은 아니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①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주로 현재형 시제의 간결한 문장을 반복하여 긴박감을 드러내고 있다.
② 작가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드러내기 위해 말줄임표를 활용하고 있다.
③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닫는 길이오. 그처럼 가고 싶어 하던 길이니 유감없을 거요.’라는 병사의 말을 따옴표 없이 인용하고 있다.
⑤ 주로 3인칭으로 서술하면서 몇몇 부분에서 1인칭으로 서술하여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35 사건의 인과성 이해 ③
정답이 정답인 이유 ▶▶
[A]는 서술자가 한 시간 후에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상상하고 있는 장면이고 [B]는 [A]에서 상상한 일이 실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이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① [A]의 서술자는 ‘나’(1인칭 서술자)이고 [B]의 서술자는 작품 밖의 3인칭 서술자이므로 [A]와 [B]의 서술자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
② [A]에서 ‘나’가 생각한 일이 [B]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므로 [A]가 [B]의 회상이라는 진술은 적절하지 않다.
④ [A]의 서술자가 한 일이 [B]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⑤ [A]의 서술자는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
36 인물과 환경에 대한 이해 ⑤
정답이 정답인 이유 ▶▶
인민군의 포로가 된 ‘나’는 인민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나’의 대응 방식에 대해 인민군은 ‘나’가 인민군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① 이 글에서 ‘나’와 ‘인민군’ 모두 전쟁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지 않다.
② 이 글에서 ‘인민군’이 전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없다.
③ 이 글에서 ‘나’와 ‘인민군’의 갈등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것으로 그러한 갈등이 전쟁을 발발하게 하였으며, 서로의 대응 방식으로 인해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④ 이 글에서 ‘나’가 전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대응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37 자료를 활용한 작품 이해 ②
정답이 정답인 이유 ▶▶
‘눈은 의지적인 신념으로 차가이 빛나고 있었다.’는 것은 주인공이 죽음에 임하는 담담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 속에서도 인간적 의지를 지키고자 하는 모습으로, 이 부분에서 주인공이 전쟁의 비극성을 알리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①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에서 끝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주인공에게 유예된 시간이 한 시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③ ‘눈에 함빡 싸인 흰 둑길’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길의 모습으로 ‘흰 눈’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④ 주인공이 죽음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반복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⑤ 주인공을 죽인 인민군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늘 하던 행동을 하는 모습은 전쟁 중에는 사람을 죽이는 사형마저도 일상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