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은 지난 50여 년 동안 생산자와 조합원의 협동을 바탕으로 친환경 농업과 생명가치를 확산해 왔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고, 안전한 먹을거리의 생산과 이용을 넘어 생명과 공동체를 살리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한살림의 성장은 일반기업의 성장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살림은 물품을 공급하는 사업조직인 동시에 생산자와 조합원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협동조합이며, 사업체를 통해 생명가치와 사회적 전환을 추구하는 결사체이다.
그러나 오늘 한살림이 마주한 상황은 과거의 성장기와 현저히 다르다.
생산자의 고령화와 세대승계의 어려움, 조합원 이용과 참여의 약화, 생산과 소비의 거리 확대, 지역생협과 생산자조직 및 연합조직 사이의 연결 부족, 물류비와 전산비를 비롯한 사업비용의 증가, 기후위기와 지역소멸 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들은 어느 한 조직이나 한 사업의 부진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산, 이용, 조직, 물류, 디지털, 재무, 지역, 생태와 세대의 문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체 생산체계의 힘을 떨어뜨리는 복합위기이다.
이제는 현재의 공급액과 수지가 유지된다고 해서 한살림의 생산력이 유지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생산자의 고령화와 승계단절이 계속된다면 현재의 공급 뒤에서 미래의 생산기반이 약화되고 있을 수 있다. 조합원 수가 유지되어도 실제 이용과 참여, 한살림 가치에 대한 공감이 낮아진다면 조합원 기반 역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 조직의 비용절감이 다른 조직이나 생산자의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면 개별 조직의 효율은 높아져도 전체 한살림의 생산체계는 약해질 수 있다.
성장기에는 조합원 수와 공급액의 증가가 생산기반 확대와 생명운동의 확산에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사업성과를 높이는 일이 곧 한살림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숙기와 복합위기 국면에서는 사업성장과 생명가치의 확대가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공급액이 늘어도 생산자의 실질경영이 악화될 수 있고, 온라인 이용이 늘어도 조합원의 참여와 관계는 약화될 수 있다. 중앙의 통합과 효율화가 비용을 낮추면서 동시에 지역의 자율성과 혁신역량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또한 중앙집중이 거래비용을 높여 비용효율적이 아닐 수도 있고 지역생협의 자율성 취약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살림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존 실적지표를 모아 놓은 성과표가 아니다. 한살림의 생산력이 어디에서 약해지고 있는지, 한 영역의 변화가 다른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무엇을 우선 회복해야 하는지를 정기적으로 살피는 생산체계의 진단도구가 필요하다.
“균형성과표를 개발한다”는 것은 새로운 평가항목을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 한살림이 무엇을 성과로 보고 어떤 상태를 위험으로 판단하며 어디에 사람과 자원을 투입할 것인지를 다시 정하는 “전략적 의사결정”의 작업이다.
2. 기업형 BSC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카플란과 노턴이 1990년대 초에 제안한 기업형 균형성과표는 재무지표만으로 기업을 평가하던 전통적 경영관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기업의 과거 성과를 보여 주는 재무지표뿐 아니라 고객관계, 내부 업무과정, 구성원의 학습과 조직역량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성과와 미래성과의 조건을 균형 있게 관리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균형성과표는 비전과 전략을 구체적인 목표와 지표, 실행과제로 연결하고 조직 전체를 하나의 전략에 정렬하는 관리체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장점은 한살림도 계승할 필요가 있다.
재무와 비재무 상태를 함께 살피고, 이미 발생한 결과와 미래의 조건을 연결하며, 수많은 자료 가운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소수의 핵심지표에 집중하고, 그 변화를 정기적으로 점검하여 전략과 실행을 수정하는 방식은 한살림에도 유용하다. 한살림의 선언과 청사진이 추상적인 가치선언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업과 예산, 조직운영과 연결되기 위해서도 이러한 관리기술은 필요하다.
그러나 기업형 BSC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기업형 BSC에서 고객만족, 업무개선과 학습은 궁극적으로 수익성과 기업가치의 증대로 수렴한다. 이 구조를 한살림에 그대로 옮기면 생산자와 조합원의 관계, 지역공동체, 교육과 활동, 생태와 세대재생산이 사업성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배치될 위험이 있다. 문제는 BSC라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 도구 안에 내장된 최종 목적과 경영관, 세계관이다. 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
한살림에서 사업과 재무의 건전성은 매우 중요하지만 최종 목적은 아니다. 재무는 생명가치와 생산체계의 지속 및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다. 수지와 현금흐름이 불안정하면 생산자 지원, 물류와 공동인프라, 사람과 미래세대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재무성과를 높이기 위해 생산자의 부담을 늘리거나 지역의 활동과 조합원의 참여를 축소한다면 한살림의 생산력은 오히려 약화된다. 그러므로 재무는 최상위 목표가 아니라 생산체계를 떠받치는 필수 기반으로 위치시켜야 한다.
기업형 BSC의 고객 관점도 달라져야 한다. 한살림의 조합원은 물품을 구매하는 고객에 그치지 않는다. 조합원은 출자자이며 공동소유자이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주체이며, 생산자와 함께 생명가치를 만들어 가는 공동생산자이다. 내부 프로세스 관점 역시 한 조직의 업무효율을 넘어 생산자, 지역생협, 생산자조직, 사업연합과 연합회가 하나의 생산체계로 연결되고 협동하는 상태를 살펴야 한다. 학습과 성장도 실무자의 직무역량만이 아니라 생산자, 활동조합원, 임원과 실무자의 세대재생산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전환능력까지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한살림 생산체계 균형성과표는 기업형 BSC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살림의 존재목적에 맞게 바꾸는 작업이다. 기업형 BSC의 실용성은 계승하되, 재무성과가 아니라 생명가치와 생산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중심에 두고, 평가와 경쟁이 아니라 진단과 협력을 위해 사용하는 새로운 생산력 관리체계로 재구성해야 한다.
3. 한살림의 생산력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한살림 생산체계 균형성과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한살림의 생산력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생산함수는 노동과 자본 같은 생산요소가 결합하여 산출을 만들어 내는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한살림의 생산력은 노동과 물적 자본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생명가치와 협동의 목적, 생산자와 조합원 사이에 축적된 신뢰, 조직과 지역의 관계, 농지와 물류 및 디지털 기반, 경영과 기술의 역량, 생산자와 활동주체의 세대재생산 등의 생산요소들이 함께 작용한다.
제1생산함수는 한살림의 생산력이 가치, 관계, 물적 기반, 조직과 기술, 세대재생산 등의 결합으로 형성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가치는 한살림이 왜 생산하고 사업하며 협동하는지를 결정한다. 관계는 생산자와 조합원, 지역과 중앙, 조직과 조직 사이에 축적된 신뢰와 약속이다. 물적 기반에는 (유기농)농지, 생산시설, 물류시설, 자금, 공동자산과 디지털 기반이 포함된다. 조직과 기술은 좋은 뜻(생명가치)을 실제 생산과 공급, 의사결정과 문제해결로 연결하는 능력이다. 세대재생산은 생산자와 조합원 활동가, 임원(이사)과 실무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능력이다.
이 요소들은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해서 생산력이 되지 않는다. 생산자가 조합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관계자산이 어떻게 신뢰와 안정적인 이용을 만들어 내는지, 조직역량이 생산자와 소비자와 활동가, 실무자들의 재생산을 어떻게 돕는지, 생명가치가 이용과 참여 및 공동행동으로 어떻게 전환되는지가 중요하다.
생산요소를 생산력을 만들어 내는 요소로 정의하는 순간 이미 요소 사이의 관계와 작동원리가 함께 전제된다. 생산요소의 정의 안에 생산체계의 논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이 한살림 생산력론의 중요한 특징이다. 생산력론은 요소의 목록을 제시하는 이론이 아니다. 무엇이 생산력인가를 정의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야 생산력이 ‘생성’되고 ‘유지’되며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한다. 따라서 생산체계론은 생산력론과 분리된 별개의 이론이라기보다 생산력론의 ‘작동원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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