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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금강경강좌 제22강(1)29분威儀寂靜分(위의적정분)
(2)30분一合理相分(일합이상분)
(1)제29분, 위의가 조용하다[威儀寂靜分,위의적정분]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혹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오다’라고 부른다.”
오고 감이 없는 여래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위의가 적정하다는 뜻입니다. 적정은 고요하다는 뜻이지요. 흔히 불교에서 삼천위의 팔만세행 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율문에 나오는 말로서 수행자에게는 삼천 가지의 행동거지, 좀 더 세분화해서 팔만가지의 미세한 행동거지가 반드시 따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동작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여래는 가고 오고 앉고 눕고 하는 행동거지가 고요하다는 것이지요. 고요하다는 것은 가도 가는 것이 아니요, 와도 오는 것이 아니고, 앉아도 앉는 것이 아니요, 누워도 눕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봐야합니다.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如來가 若來若去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何以故오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일새 故名如來니라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如來가 若來若去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수보리야 약유인이 언여래가 약래약거약좌약와라 하면 시인은 불해아소설의니
세존은 세상에서 아주 존경을 받을 만하신 분, 어르신이라는 뜻입니다. 여래는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지요. 진리에서 오신 분이므로 그 분은 곧 진리. 진리가 그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사실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석가모니처럼 꼭 그렇게 깨달아야만 여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도 진리 그 당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현상적인 입장이 있고 역사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의 나이가 30이 됐든 40이 됐든 50 됐든 이것은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현상이지요. 그런데 밖으로 드러난 것은 모두 천차만별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여래와 동등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천차만별인 역사적인 입장과는 상반되는 내면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선가에서는 본래인이라고 합니다. 또 인간의 궁극적인 입장이라고도 하지요. 바로 여래입니다.
그 여래의 모습을 간다거나 온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는 드러난 모습으로써만 여래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 이렇게 올 수도 있고 갈 수도 있고 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고, 별별 행동을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런 것이 나타날 수가 있지요.
그런데 우리의 궁극적 입장에서 보면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오고 가고 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합니다.
이것을 쉽게 풀어 보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 육신은 이동을 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시간도 걸립니다. 하지만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하는 그 사람 외에 또 뭔가가 있지요. 그 외의 무엇이 있습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제깍 반응도 하고 일체 현상들을 감지해서 반응을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나의 참 얼굴입니다. 그것은 어떤 교통수단 없이 시간도 걸리지 않고 어디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불교 공부하는 불자들은 이런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입니다. 딱 꼬집어 내진 못해도 ‘아 그럼, 당연하지’‘그것이 우리의 주인공이며, 그 때문에 모든 성패를 포함한 온갖 일들을 다 이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압니다.
그 ‘궁국적인 나’가 바로 우리들의 ‘여래’적인 면모입니다.
불교는 눈에 드러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간혹 현상을 이야기 많이 하지요. 하지만 불교는 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사실에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좀더 성숙된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철들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으로 드러난 것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여래를 이해하는 것도 형상으로만 여래를 이해한다면 부처님이 평소에 이야기 하고자 했던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何以故오無所從來며 亦無所去새 故名如來니라
하이고오 무소종래며 역무소거일새 고명여래니라
여래 즉 진리는 무소종래며 역무소거입니다. 어디로부터 온 것도 없는 것이 무소종래입니다. 육신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참나는 어디로부터 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가고 오며 자유자재입니다.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순식간에 수 억년도 오가는 그것이 어디서부터 왔다고 할 수도 없고 어디로 간다고도 할 수가 없지요.
또한 가는 바도 없으니 역무소거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불교에서 흔히 잘 쓰는 말이 ‘와도 온 것이 없고, 가도 간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불교를 모르고 세속적인 사고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도대체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불교를 조금 이해하신 분은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다.’는 정도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말장난이 아니지요. 그러한 우리들의 입장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입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표현하려는 말이 또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이름을 여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디를 가도 간 것도 아니고 와도 온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여여할 여(如)자 올 래(來)지를 써서 여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여라는 것은 본래 그 모습 그대로의 자리입니다. 여여에서 왔다고 해도 좋고 여여히 왔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 여래라는 말은 부처님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의 궁극적 입장을 제대로 잘 드러낸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2600년 전 석기모니와 우리들이 다 똑같습니다. 달마와 저와 그리고 모든 분들이 여래라는 입장에서 평등하고 더불어 공히 같은 격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위의가 적정하다’‘오고가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이 끊어진 자리다’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2)제22강 일합이상분 제30
一合理相分 第三十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로 碎爲微塵하면
수보리야 약선남자선녀인이 이삼천대천세계로 쇄위미진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多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다 世尊이시여
어의운하오 시미진중이 영위다부아 수보리언하사대 심다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오 若是微塵衆이 實有者댄 佛이 卽不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何오
하이고오 약시미진중이 실유자인댄 불이 즉불설시미진중이니 소이자하오
佛說微塵衆이 卽非微塵衆일새 是名微塵衆이니다
불설미진중이 즉비미진중일새 시명미진중이니다
世尊이시여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가 卽非世界새 是名世界니 何以故오
세존이시여 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가 즉비세계일새 시명세계니 하이고오
若世界가 實有者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가
약세계가 실유자인댄 즉시일합상이니 여래가
설일합상은 즉비일합상일새 시명일합상이니다
說一合相은 卽非一合相일새 是名一合相이니다
설일합상은 즉비일합상일새 시명일합상이니다
須菩提야 一合相者는 卽是不可說이어늘 但凡夫之人이 貪著其事니라
수보리야 일합상자는 즉시불가설이어늘 단범부지인이 탐착기사니라
제30, 하나로 된 이치의 모습[一合理相分,일합이상분]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 대천세계를 부수어 아주 작은 먼지를 만들었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작은 먼지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작은 먼지들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곧 작은 먼지들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먼지들은 곧 작은 먼지들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작은 먼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 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된 모습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로 된 모습이란 곧 하나로 된 모습이 아니고 그 이름이 하나로 된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 하나로 된 모습이란 것은 실은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그 것에 대하여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부분과 전체의 참모습
제30분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이 되겠는데 ‘하나로 통일된 이치의 모습’ 이런 뜻이지요. 일합이라고 하는 말이 ‘하나로 뭉쳐진’‘하나로 통일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미진이라고 하는 가장 작은 먼지에서부터 삼천대천세계라는 가장 큰 것에 대한 실상을 파악해 내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로 碎爲微塵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多不아
수보리야 약선남자선녀인이 이삼천대천세계로 쇄위미진하면 어의운하오
시미진중이 영위다부아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기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지구를 부숴서 작은 먼지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작은 먼지의 숫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하였습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지구라고 보면 되지요. 영위다부아는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언하사대 심다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가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지요. 작은 산, 아니 흙 한 줌을 부숴서 먼지를 만들었다하더라도, 그 숫자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何以故오 若是微塵衆이 實有者인댄 佛이 卽不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何오 佛說微塵衆이 卽非微塵衆일새 是名微塵衆이니다
하이고오 약시미진중이 실유자인댄 불이 즉불설시미진중이니 소이자하오 불설미진중이 즉비미진중일새 시명미진중이니다
그러면서 수보리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먼지의 숫자가 실로 있는 것을 말한다면 부처님이 곧 이 미진의 숫자라고 말하지 아니 했을 것입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이 설하신 미진의 숫자가 곧 미진의 숫자가 아닐새 이 이름이 미진의 숫자입니다.”
앞에서 자주 나온 즉비의 논리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다.’
등등 이 즉비의 논리에 불교의 중요한 용어들을 가져와서 거론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가장 작은 먼지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까짓 먼지 같은 것이야 있다고 해도 괜찮치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먼지 역시 ‘미진이 미진이 아니라 이 이름이 미진이다’라고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그 미진이 살아나는 입장입니다.
이름만 무엇인 것이 세상에 많지요. 어찌보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이름만 무엇입니다. 그냥 그대로 있어주면 좋겠는데 그대로 있어주지 않으니까 세상을 조금 꿰뚫어 아는 사람은 ‘사실은 이름만 무엇이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世尊이시여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가 卽非世界새 是名世界니
세존이시여 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가 즉비세계일새 시명세계니
미진의 자리에 삼천대천세계 라고 하는 낱말만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가 곧 세계가 아닐새 이름을 세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지구라고 하면 되지요.
‘지구가 어떻게 생겼느냐’ 이런 말들을 합니다. 지구는 둥글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통 현상으로써 보는 지구는 누구도 둥글다고 하지 못합니다.
여러가지 경험과 여러 천문학자들이 측정을 해본 결과 지구를 둥글다고 표현하지 눈에 보는 어디에 지구가 둥글게 보입니까? 건물도 높이 솟아있고, 낮은 데는 강도 흐르고 바다도 있고 높은 산도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은 전부이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둥글다고 할 때는 둥글다고 할 만한 조건이 됐을 때만 둥근 것입니다. 심지어 지구도 그런 것입니다.
지구 역시 우리의 입장에서는 덮어놓고 둥글다고 하면 틀리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할 때 사실은 우리에게 문제시 되는 것만을 문제시해야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어차피 우리에게 문제시 되는 것은 눈이 비친 이 현상 그대로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 되는 것도 아닌 것을 계속 문제시 해서 가정을 하지요. 가정은 해놓고 이러할 경우 어떻다, 또 저러할 경우 어떻다 등등 특히 철학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례들이 많습니다.
천문학자들은 항상 지구가 둥글다는 표현을 하겠지요.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그것이 크게 문제시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문제되는 것이 없어요.
우리의 눈에는 눈에 비친 이 모습 그대로가 지구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더라도 ‘둥글다고 하는 것이 둥근 것이 아니라 이 이름이 둥근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구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이름을 붙여놓고 보니까 그렇지 그게 굳이 지구라고 할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라고 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전부 우리가 편의상 그렇게 이름을 붙여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 우리가 속을 필요가 없고 이름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何以故오 若世界가 實有者인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가 說一合相은 卽非一合相일새 是名一合相이니다
하이고오 약세계가 실유자인댄 즉시일합상이니
여래가 설일합상은 즉비일합상일새 시명일합상이니다
왜 그런가. 세계가 실로 고정된 모습으로 있는 것이라면 고정된 한덩어리로써 이치를 가지겠는데 여래가 말한 한덩어리의 고정된 모습은 곧 일합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일합상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천문학자의 입장에서는 지구는 둥근 것이고, 보통사람들에게는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이 모습이 지구일 뿐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 고정되게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다운 것이라고 할 것은 있지 않지요. 여기서도 즉비의 논리가 나옵니다. 제가 자주 즉비의 논리를 말하니까 ‘금강경은 그저 즉비 이야기만 하다가 볼 일 다 본다’ 라고 이해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상당히 여러 번 말하는 것은 그만치 그 점에 유의해서 공부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반복 하면 뜻을 추리기도 쉽습니다.
須菩提야 一合相者는 卽是不可說이어늘 但凡夫之人이 貪著其事니라
수보리야 일합상자는 즉시불가설이어늘 단 범부지인이 탐착기사니라
삼천대천세계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있다고 하는 것은 곧 가히 설할 것이 아니거늘 범부가 그 사실을 탐착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합상은 한덩어리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고 즉시불가설은 이야기할 거리가 못된다는 것이지요.
성인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범부는 반대로 어리석고 미혹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실상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부이지요. 범부들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탐착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 만치 그것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천대천세계처럼 큰 것은 큰 것 대로 우리의 머릿속에 와 있고 미진처럼 작은 것은 작은 것 대로 우리의 머리 속에 와 있습니다. 보통 범부의 소견으로는 그 무엇 하나도 도저히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지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부터 별별 것을 다 지워왔습니다. 여기서는 가장 큰 지구도 지워라, 가장 작은 먼지도 지워라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온갖 번뇌망상들, 고집, 주의주장,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은 정말 알량한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옳게 보일 뿐이지 실로 옳은 것도 사실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에 그 고집에서 떠난다면 얼마나 시원하겠어요. 그런 것을 지워버리고 그런 것을 깨뜨려 버린다면 우선 자기 자신이 시원합니다. 자기 자신이 해방감에 충만할 거예요.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도 ‘저 사람이 그런 고집에서 벗어났다. 그런 집착에서 벗어났다’고 아주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화할 필요도 없이 서로 세우고 있던 날은 없어져버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실 지구가 어떻다 먼지가 어떻다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구가 크든 작든 먼지가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인간관계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별의별 잡다한 데 있어서 자기 주견, 자기주의주장, 자기 고집, 자기 소견 그런 것이 있으면 인간 관계가 어렵습니다.
생각[想,상]이 한 번, 두 번 계속 하다 보면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相,상]이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생각 상에서 마음 심자가 떨어진 형상 상(相)자를 쓰지요.
상은 굳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체 중에 간을 생각한다면 간은 부드럽고 물러야 좋은 것인데 그것이 염증이 생긴다든지 하면 굳어져서 고칠 길이 없지요. 경화가 되어 버립니다.
간 경화가 되면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사고도 어떤 사실 한 가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구체화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 나쁘다’ 라고 보기 시작하면 처음엔 조금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중엔 자기 혼자서 그 사람과 아무 상관없이도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구체화 되고 그 생각이 완전히 굳어져 버립니다. 그야말로 간이 경화되어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금강경을 통해서 우리들 마음속 그런 병들을 깨뜨려주고 지워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병을 깨뜨려주고 지워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금강경에는 중생은 어떠냐, 부처는 어떠냐, 성인은 어떠냐, 지구는 어떠냐, 먼지는 어떠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떠냐, 부처님의 설법은 어떠냐 등등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불교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용어들을 전부 가져와서 깨뜨리고 또 깨뜨리고 지우고 지우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일합이상분을 복잡하게 볼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마음속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잘못 인식되어 있는 상념들, 이미 덩어리로써 굳어져 가는 상들을 과감하게 깨뜨리면 됩니다. 금강경을 통해서 그것을 깨뜨린다면 정말 금강경을 공부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22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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