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164. 세칭 동방교의 경화록
[표지]
[필사체 본문]
[필사체의 본문 내용]
還國인 韓國땅 平壤 上需里(上壽里)에 1914年 正月 13日 오후 7時 정각에 하늘에서 타원형의 큰 불빛으로 증거세워 創造主 이시며 審判主 主 誕生 하셨다.
7代 先祖 350年前부터 佛敎道人으로서 지독히 하늘을 공경 하던中 하늘로서 指示가 있어 7代 後孫으로 하늘의 企業을 이을者가 나시리라 하신 指示를 받으시어 先祖님 들은 夫婦合房을 피하시며 오직 子孫을 이으시려 하실때만 심산의 벽계수에서 목욕제계하시고 合房하여 獨子로만 繼續 내려 오셨다.
先祖님들의 功績을 살펴보면 宗敎에서 善한일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하늘의 뜻인고로 佛敎나 儒敎 어느것이든지 장려하셨고 큰 사찰(절) 建築과 道路확장 다리놓기 貧民구재등을 통하여 先祖님들의 財産을 아끼지않고 적선과 自善社業을 하셨다.
즉 太古寺(高祖父가 중건) 연화사(高祖母님께서 연꽃을 보시고) 月精寺(증조부께서 중건) 유점사(증조부가 중건) 가은사(증조모님)
백련사, 백양사등 숱한 寺院을 전액 혹은 보조하시며 중축 하셨다.
또한 흉년이나 기근이 들면 全財産을 털어서 수많은 아사자를 살려내고 歷史上 길이 빛나는 의창재도는 그 한가지의 대표적 예이다.
또 옛날부터 어려운 가난한 아이들中에서 天才들을 골라 뽑아서 儒敎의 鄕校를 일으키시었고 또 各地方의 방방곡곡에 서원을 두어 인재를 養成해서 國家의 큰 일꾼을 길러 내기도 했다.
그러나 先祖님 들은 自身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항상 뿌리와 같이 歷事하셔 모든 善行의 根本을 이루셨다.
盧家系의 獨子를 이으신 石奉어른에 이르셔 3 아드님과 한분 따님을 두셨으니 존암은 차례로 君淸 子淸 芝淸 어르신이고 따님은 天主敎에 入敎하셔 세례명으로 盧헤리나라 命名 하시였다.
君淸 어른 時代에 이르러 平壤을 中心한 개화의 봉화가 올랐을때 선봉이 역할을 담당하시여 수많은 人才를 배출시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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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은 세칭 동방교의 어느 신도가 베껴쓴, 소위 경화록이라고 주장하는 필사본 내용의 일부다. 타이핑 된 본문은 위 필사본의 행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인데 한문과 철자의 오류, 맞지 않는 문법등이 보이고 있으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아마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필사본인듯 한데 필자가 보았던 경화록의 진본은 이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異端의 追憶 #108, 동방교의 경화록(慶和錄)에 대하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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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의 무슨 대단한 경전이나 되는것 처럼 알려져 있고 그것이 무슨 비밀경전인양 여기는 세간의 소문과 현존 좁은길(동방교)의 성민들을 위하여 그 실체를 알 수 있도록 '이단의 추억' 중에서 여러군데에 흩어져 있는 경화록(慶和錄)에 관련된 기록들을 한군데 모았다.
경화록이라는것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무슨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활자화된 경전이 아니다. 그냥 대학노트에 노광공의 설교나 잡설들을 사주(四柱)목사인 정재덕 요나단목사와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기록한 것인데, 기록한 사람만 알 수 있을 정도의 메모형태 필기로 적어놓은 것이다.
주로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초창기부터 기록한것을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대학노트로 여러권에 달한다. 어떤날은 이 노트를 가지고 와서 경화록이라고 뒤적거리며 설교하고 어떤날은 저 노트를 가지고 와서 경화록이라고 뒤적거리며 설교하고 경화록 몇권(자기가 기록한 노트의 몇권째라는 뜻)에 이런 예언말씀이 있는데 정확하게 들어맞았다고 큰소리를 치면 신도들은 아멘! 아멘!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그런 정도였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무슨 경전인양 전해지고 있는것이다. 기록한 사람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메모를 이제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졌으니 대학노트 경화록의 해석은 난감할 것이다.
(異端의 追憶 #108, 경화록에 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