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칼빈에 비해서 율법의 기능을 덜 구분하고 성화에 대해서 덜 강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코 율법폐기론을 주장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도 율법의 긍정적 기능을 갈3:24에 근거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율법의 참된 기능은, 내게 죄에 대해 알려 주어 나를 낮아지게 함으로써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이 이신칭의에 대해 초등교사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구분선 아래에서 읽고 율법에 대해 곡해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고 종합적 이해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그리스도께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에게 선행을 요구하는 또 다른 율법수여자가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자 구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의 힘을 느낄 때 이런 사실을 이해하거나 믿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하나님의 온갖 계명을 어겼으므로 악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을 당할 죄책이 있다. 만약 하나님이 몇 년 동안, 아니 최소한 몇 달이라도 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이제부터 삶을 고치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 이것은 율법의 고유의 기능을 악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이런 괴로움에 압도된다. 온 율법을 반드시 이루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압도된다. 여기서 은혜와 용서를 공로를 통해 얻도록 마련된 여러 종파와 많은 의식들이 나온다. 이런 것들을 고안해 낸 자는, 율법이 자기들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새 율법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또는 율법을 폐하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수여하시는 분인 그리스도께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율법의 참된 기능은, 내게 죄에 대해 알려 주어 나를 낮아지게 함으로써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다.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붙드는 확신이다(롬 10:4). 어떻게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가? 그리스도는 옛 율법을 폐하고 우리에게 새 율법을 주시지 않는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하는 일에 따라 진노를 발하는 심판자 역할을 하시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는 의롭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걸고 고소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르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다.
그런데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바울은 여기서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을 자에 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분은 율법에 관해 추론하려면 율법이 역사하는 대상 즉 죄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율법은 죄인들을 의롭게 하지 않는다. 죄인들의 눈앞에 죄를 두고 그들을 낙심시키며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한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지옥을 비롯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참된 기능이다. 여기서 요점은, 죄인들은 율법이 자기들의 죄를 알려 주어 자기들을 낮춤으로써 자기들을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고소하고 괴롭힘으로써 자기들을 구주와 보혜사이신 그리스도께 이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온 세상은 죄로 크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죄가 드러나려면 율법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의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 pp.319~320.
첫댓글 좋은 해설입니다. 다만 루터의 율법 이해는 다른 성경구절, 다른 책에 쓴 것과 합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개역한글 시절에는 초등교사가 몽학선생으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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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갈3:24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 율법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몽학선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 )는 '아이를 돌보는자', '어린아이에게 시중드는 자'라는 의미로 원래 6세에서 16세까지의 아이들을 돌보는 노예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몽학 선생은 가정 교사로서 가정의 예법(禮法)을 가르치기도 하며 아이가 학교에 오고 갈 때에 길을 인도하는 노예로 이해 되기도 하였다. 몽학 선생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교사'(* ,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보다 낮은지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몽학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
갈3:24를 잘 이해하여 혹시라도 율법폐기론이나 율법무용론으로 빠지면 안 됩니다. 초등교사의 역할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노베 네, 명심하겠습니다.
몽학선생에 대해 잘 알려주어 좋네요.
몽학 선생
고대 헬라나 로마인들의 가정에 16세 이하의 소년들을 위하여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던 노예를 가리킨다. 그 당시 16세면 통례적으로 성숙된 나이로 인정 받았다. 이들은 그 가정의 남아들이 학교나 체육 연습 학교로 갈 때 데리고 다녔으며, 그들의 행동을 지도하면서 그들이 성인으로서 바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육자와는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갈3:24에서 바울은 율법을 몽학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 즉 믿음 안에서 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역할을 율법이 하였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에서부터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율법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그러나 5:14에서는 율법을 포용하는 태도로 다루고 있다).
고전4:15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스스로를 아버지에 비겼으며, 다른 지도자들, 이를테면 아볼로나 고린도 교회에 의하여 존경을 받던 은사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하여서는 몽학 선생과 같은 단어를 채용하여 지칭하고 있다.
출처: <GODpia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은사 운동의 지도자에 대해서 몽학선생을 썼다면 긍정적 평가는 아니었네요. 현대에도 미신과 신비주의가 판을 치는데요.
이 설명도 유용하고 좋습니다.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초등교사로서의 역할 인정은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명확히 쓰여 있기도 하고요.
네, 공감합니다.
성경구절 내용에 더 설명을 추가한 것 뿐인 것 같은데 내용이 너무나 깊고 감동적입니다.
루터의 주석 내용이 쉽고 이해하기 좋게 핵심을 찔러주네요!!
네, 그래요.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