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그것이알고싶다.
1.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 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 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작사가 논란으로 작사가 없이 불려져 온 애국가.
1897년 대한제국말기 황실에서 조선국 개국 축원행사때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무궁화"란 작곡리듬에
작사만 편곡하여 다른 곡으로도 불리워졌다고 한다.
애국충성가, 황실가 등의 작곡노래가 퍼져 가사만 편곡해서 널리 불리워졌다.
작사도 한자로 된 노래를 고쳐서 순한글로 표현하여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그중의 하나로 현재의 애국가도 한자로 된 "애국충성가"를 풀어 언문으로 개사한 다음 불리워진것이다.
그후 작곡리듬이 조선왕실에서 인정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이 부른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찬미가 역시 외국 노래리듬에 맞춰 불렀는데,
이노래는 조선왕실을 거부하며 만든 노래였다.
사의찬미에서도 알 수가 있듯이 외국 노래리듬에 맞춰 애국가를 부른것은
일본 유학파들이 대개 불러왔다.
애국충성가, 황실가는 1907년 정미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하고
만주로 이주한 대한독립단 등에서 불리워진 노래이다.
대한독립단은 박장호(朴長浩)를 도총재(사령관)로 하여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군사부장 전덕원(全德元), 참모부장 조병준(趙秉準),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서무 김일(金一), 고문 안병찬(安秉瓚)등이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반대하고 조선왕조에 충성을 다하려는 복벽적인 성격을 띤 위정척사계열이었다.
또한 의병전쟁 당시 게릴라전법의 경험을 살려 3~4명을 1대로 한 결사편의대(決死便衣隊)로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경과 친일파를 숙청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지방조직으로는 전덕원, 김승학(金承學), 백의범(白義範) 등이 평안도와 황해도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 유일우(劉一優)등은 만주 지안현(집안현) 창바이현(장백현=백두현)등지에서 활약했다.
그후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여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었다가, 1920년12월 한족회(韓族會), 청년단연합회(靑年團聯合會)와 합류하여
임시정부산하의 광복군사령부에 통합되었다.
기원독립단은 조선왕조 충성세력이고, 민국독립단은 상해임시정부를 따르는 계파들이었다.
기원독립단은 와해되고 민국독립단이 한족회, 청년단연합회 등과 연합하여
상해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사령부로 들어가게 된다.
즉, 광복군사령부에 통합되었어도
노래 작사, 작곡리듬만은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던것이다.
애국가 작곡리듬은 대한제국 말기 배재학당에서 불렀던 노래가 분명하다.
이 작곡리듬을 안익태가 듣고 편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국가 작곡가는 대한제국 황실 또는 배재학당이고 안익태는 편곡한것이다.
애국가 작사곡은 한문으로 작사된 것을 언문으로 풀어 여러곳에서 불리워졌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애국가를 누가 개사한 것이냐는 것이다.
애국가 1절을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단서가 있다.
백두산을 주변으로 독립운동을 하거나 최소한 애국가 작사가는 북한출신이거나
이곳에 연고를 두었거나 자주 왕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작사한 것이 분명하다.
윤치호는 아산출신으로 관련이 전혀없다.
안창호는 평북 강서군출신으로 관련이 많다.
백두산물이 말랐는지 안말랐는지는 가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시대였다.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말은 백두산 천지물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말이다.
천지물이 마르고 닳도록 독립운동을 해서 쟁취하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가물때와 장마때에 천지물이 어느 정도까지 차는지 애국가 작사자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더 큰 의미로 두만강줄기의 물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말까지 의미를 함축해주는 말이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가사내용이다.
2절을 보면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면 전형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문투로 지어진 노래가사를 언문으로 풀어내어 개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것이다.
남산은 황실을 나타내고 소나무는 굳은 절개를 나타내며 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철갑은 굳은 의지로 충성을 다바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들어가 있는 말이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에 충성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관련이 없다.
한문투로 된 노래를 임시정부에 있었던 도산 안창호가 현재의 애국가로
개사하여 편곡한것이 아닌가 한다.
한 나라의 민족주의를 파괴하려면 애국가를 건드려
마치 매국노가 지었다고 하면 민족주의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윤치호 작사논란은 무시해도 된다고 본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한문가사로 불리워졌던 노래를 언문으로 풀어낸 노래가
애국가이기 때문에 작사가, 작곡가는 이미 답이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독립단이 조선왕실을 되살리려고 애국충성가에서 이어져 내려온 노래를
황실가로 만들어 한문투로 불렀고,
상해임시정부 산하로 흡수되어 들어가서도 부르던 것을
안창호가 매끄럽게 노래 가사를 편곡[개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중요한 단서 하나가 또 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다.
삼천리 전국방방곡곡을 다 품으려면 대한제국 황실밖에 없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서도 알 수가 있듯이,
대한사람은 대한제국의 사람을 압축한 말이고 곧 대한제국 황실을 뜻하는 말이다.
그당시 황실을 대표하지 않은 일반관료나 지식인이 지었다면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이 되므로 대한제국 황실을 위해
황실측을 위한 노래를 지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작사가는 대한제국 황실 또는 배제학당이고, 편곡[개사]은 안창호, 대한독립단 박장호등....
작곡가는 대한제국 황실 또는 배제학당이며 작곡 편곡은 안익태라고
정의할 수가 있겠다.
윤치호는 돌아선 것에 미련이 남으니
노랫말을 적어 보관해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1945년 신문에 애국가 작사가를 자기 이름으로 낸 것 또한
친일파로 몰려 죽음을 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고려, 조선에서 영웅하나만 나오면
어떻게든지 그영웅에 빌붙어 자기합리화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근현대라고 그렇지 않았겠는가?
매국노가 그당시 노랫말을 적어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사람이 작사작곡했다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대한독립단이 위정척사계열이었기 때문에, 노래가 이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에 유행했던 애국충성가, 황실가, 그리고 배제학당에서 유행했던 무궁화노래가
만주의 대한독립단으로 이어져 광복군으로까지 계승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P/S
만약 자기 수대/몇십대조가 그당시 유행했던 시나 노랫말 가사를 적어가지고 보관해놓고 있다가
후대에 작자미상이 되었을때 행적논란에서 벗어나고자
그 시 또는 노래의 작자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허용된다면
조선, 고려대의 작자미상은 먹는 넘이 임자겠다.
아니 그러한가?
그런자들에게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다.
삼장사시다.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위 마주앉은 세장사들은
一杯笑指長江水 한잔술로 웃으며 남강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남강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波不渴兮魂不死 강물이 마르지 않는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임진왜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전통을 제대로 지켜오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가 그대로 남아 후손들에게 과거를 찾아갈 단서를 남겨놓은 시다.
김성일은 섬진강, 경호강, 낙동강줄기에서 이어지는 남강물을 장강(長江)으로 표현하였다.
장강은 양자강(양쯔강)을 말하는데 양자강의 전신을 장강이라고 불렀고,
장강의 전신은 낙수였다.
얼핏보면 김성일이 남강물을 양자강물처럼 쉬지않고 흘러간다는 의미로
말한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겠지만,
엄연히 낙동강은 과거 장강이었고, 양자강에서 온것이기 때문에
조상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지를 알 수가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지명과 언어는 거짓말을 하지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지명이나 언어를 바꾸려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가장 오래 남는것이 언어와 지명이다.
그래서 현재의 주소바꾸기는 실패한 정책의 전형이다.
물론 주소를 혼란케하여 개인정보노출을 막아줄 수 있을지언정
효과가 없는 정책이었음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역사를 가장 빨리 지우는 방법은 지명을 바꿔버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