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미국에서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다.
당시 정신과 레지던트였던 다니엘 오퍼와 그의 동료들은 14세 소년 73명을 모집해서 부모에 대한 느낌, 부모의 훈육 방법,
가정 환경, 성 정체성 등에 대해 심도 있게 인터뷰했다.
그리고 34년이 지나 48세가 되던 해에 다시 그들을 불러 모아 10대 시절을 기억하게 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34년 전에 기록한 것과 일치되는 내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여섯 살 때도 아닌 10대의 일인데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고 '찍어서'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10대가 외향적이었다고 회상한 사람은 대부분 14세 때에는 수줍고 내성적이라고 대답했다.
또 부모와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10대에는 부모와 갈등이 많다고 대답했다.
지금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기억 중 대부분은 '진정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독자들이 평생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험이나 너무 달달 외어서 무덤에 들어갈 때도
절대 잊지 못하리라고 치를 떠는 수학 공식도 몇 년만 지나면 기억이 흐릿해져서 언제 배웠는지도 헷갈릴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요즘 퀴즈 쇼를 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맞히는 것이 없다.
여기에 인간사의 희로애락의 본질이 숨어 있다.
인간은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해서 기억하는 능력이 있고, 인간의 뇌는 남겨 놓고 싶은 것만 구미에 맞게
제멋대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 시스템
지금까지 알려진 기억 메커니즘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기억은 입력(registration)되고 저장(retention)되어
인출(recall)되는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
. 키보드―하드 디스크―프린트로 출력되는 컴퓨터의 시스템과 유사하지만, 어느 하나가 망가져도 기억 능력은 작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저장과 인출 과정에 있다.
단기적으로 저장된 내용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도 될 내용과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내용으로 분류한다.
불필요한 기억은 하드 디스크가 모자라니 '삭제하고', 남겨 둘 내용은 하드 디스크에 폴더별로 분류해서 '저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이 폴더를 만드는 방법이 제각각이라는 데 있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편의점에 갔다가 아르바이트 하는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하자.
이 사건을 비가 오는 날마다 벌어지는 사건 폴더에 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만나 반한 여자 폴더에 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소 편의점에 가서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던 일은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 기억에 남지 않지만,
이 일은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사건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감정이 개입된 사건'은 장기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감정이 섞인 기억도 폴더의 종류에 따라 회상할 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몇 년이 지난 후, '비 오는 날 있었던 즐거운 일' 폴더에 넣은 사람은 '비가 오는 날'에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때
이 일을 함께 기억해 낼 것이다.
그러면서 "역시 나는 비가 오는 날 운이 좋은 것 같아"라고 확신하고, 그날 만난 여자의 얼굴보다는 비가 오던 상황이나
우산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더 강화된다.
이에 반해 '우연한 만남'이란 폴더에 넣었던 사람이라면 비가 오는 날과 상관없이 즉석 만남이나 길거리에서 무작정 말 걸기를 시도해서 잘될 때마다 그날의 에피소드를 떠올릴 것이다.
더 나아가 그날 편의점에서 계산하며 아르바이트생과 이야기한 내용까지 기억해 낼지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편의점 CCTV를 돌려 보면 기억은 현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그 아가씨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대화는커녕 쭈뼛거리다가 그냥 나왔을 수도 있다.
이렇듯 뇌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엉뚱한 것을 기억했다가 '사실'이라고 뱉어 내어 사람들을 골탕 먹인다.
그래서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떤 사건의 용의자를 체포한 후 목격자가 지목하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다른 사람들과 용의자를 섞어서 한 줄로 세운 후 유리 건너편에서 목격자에게 용의자를 고르게 하는 것을 라인업(line-up)이라고 하는데, 이때 목격자가 제대로 용의자를 잡아낸다면 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신빙성이다. 목격자가 백인이라면 젊은 남성 흑인을 지목할 확률이 높다.
또한 사건 당일 경찰서에서 묘사한 내용과 신문의 다양한 기사를 읽고 난 다음에 지목하는 용의자의 모습이 다르다.
즉,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할 때는 그사이에 있었던 일, 경험, 획득한 정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법학이나 범죄학에서 연구하고 있다.
기억의 재구성
기억이 다양한 외부 자극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 이유는 조각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이 통째로 저장된다면 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뇌는 효율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키워드 중심으로 적절히 여러 폴더에 분배해 놓았다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끄집어내서 재구성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러다 보니 처음 입력한 시점보다는 기억을 인출해 내는 시점의 감정이나 처지, 판단이 훨씬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한 연결되지 않은 필름 조각을 보고 그사이의 이야기를 전체적인 개연성에 따라 재구성한다.
그러려면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개인의 우화(personal fable)라고 부른다.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현재의 시점에 과거를 끼워 맞추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기억의 왜곡은 현재의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기억의 진실성이야 어떻든, 지금 이 순간 괴로움을 경험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지금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언제나 드라마가 있는 이야기 속에 과거를 늘어놓는다.
시험에서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면, 자신이 영웅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어려운 상황과 친구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공부에 집중했고, 극적으로 도움을 얻어 시험을 잘 본다는 스토리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이에 반해 저조한 성적이 나온다면 당연히 자신이 피해자가 되고,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는 이야기로 줄거리를 전개하며, 과거의 일도 모두 그 결과를 중심으로 늘어놓아 변화시킨다.
이를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이라고 하는데, 이때 일어나는 기억의 변경을 자기중심적 기억 왜곡이라고 한다. 이렇듯, 인간은 현재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이 정말 그러했으리라 굳게 믿는다.
더 나아가 원하는 일을 상상하고 세부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게 되는 상상 팽창(imagination inflation)도 일어난다.
학생들에게 3~5세 때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는 사건을 들려주고, 석 달이 지난 후 다른 연구자들이
어릴 때 길을 잃은 적이 있는 사람을 조사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었던 그룹은 이야기를 듣지 않은 그룹에 비해 많은 학생이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없던 사건도 그럴듯한 상상이 덧붙여지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불완전한 기억은 무의식의 반영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프로이트 역시 실제 있었던 일을 '역사적 사실'로,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서사적 사실'로 구별했다.
그리고 마음의 문제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에는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서사적 사실을 어떻게 구성하며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2012년 4월 15일에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보다는,
그날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고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불완전한 기억은 무의식의 메커니즘에 의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지,
정말 그 일이 일어났는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법적 공방을 벌이지 않는 한, 인생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과학적으로 실험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친구가 뻔한 사실을 잘못 기억한다고 해도 탓하지 말자. 정작 자신의 기억도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
각자 좋은 식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머리가 나쁘거나 누구를 속이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다.
대뇌와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한다면, 완벽함과 절대적 객관성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주관성과 현실로 내려오게 되면서 숨통이 트인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반복적으로 어떤 일을 잘못 기억하거나 왜곡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작동하는 것이다.
바보라고 낙담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이것을 변화의 기회로 생각하자.
[네이버 지식백과] 뇌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2012. 6. 30., 하지현, 신동민)
첫댓글 얼마 전에 집에 있던 사진 첩을 정리했다.
참 놀랍게도 학창 시절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난 사실 고등학교 때 성격도 아주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 와는 달리 고등하교 친구들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정반대여서 깜짝 놀랐다.
기억의 왜곡이 왜 그리 나타난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아쉽게도 연락이 거의 대부분 끊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