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법사 구법 여행과 반야심경 가피
서유기(西遊記)는 스님 한 분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거느리고 여행하는 장편소설로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 작품이다. 이 소설의 모태가 된 것은 당나라 현장(600~664) 법사의 구법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庸西域記」이다.
현장법사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한 소설가의 눈에도 예사롭게 비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구법의 어려움을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한 소설가의 신심과 원력 또한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이다.
역경(譯經)의 근본 목적은 경전의 대중화에 있다. 구법 과정의 어려움까지 대중과 함께 공유하고자하는 그 작가 역시 어찌 보살의 화현이 아니겠는가.
중국 역경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현장법사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만큼 현장법사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열세 살 때 낙양 정토사로 출가한 뒤 십오 년 동안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으나 스승들 간의 이설(異說)을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한탄하고 원전(原典)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인도 유학을 결심한다.
당 태종은 위험한 서역 길로 스님을 보낼 수 없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만 스님의 구도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태종 임금도 모르게 일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함께 따라가겠다는 제자 수십 명만 데리고 629년 8월 장도에 올랐다. 출발하면서 절 앞에 있는 소나무를 향하여 비장한 고별시를 남겼다.
내 이제 서쪽 나라 천축으로 가노니
가는 길 험난하여 목숨을 잃거나
천축에 가서 다시는 오지 못할지라도
소나무야, 너만은 천년 만 년 잘 자라다오.
돈황의 국경을 넘고 사막을 지나면서 간신히 계빈국(캐슈미르)에 이르게 되었다. 산 속에서 해는 저물고 안개는 자욱하고 주변에는 짐승 울음소리가 요란하였다. 멀리 불빛이 가물거리는 곳 가보니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그마한 암자였다. 하룻밤 묵어갈까 청하고자 하였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희미한 신음 소리를 따라가 문을 여니 늙고 병든 스님이 혼자 누워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축 가는 길이 바쁘긴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는 것은 사문의 도리가 아닌지라 그대로 눌러 앉아 머물게 되었다. 지극 정성을 들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현장스님이 다시 길을 재촉하려고 하니 그 노장님은 감사의 뜻으로 범어로 된 반야심(般若心經)경을 한 권 주면서 그 내용을 설해 주었다.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이 경을 외우면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환희심(歡喜心)으로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길을 나섰다.
인도 땅에 도착하여 한숨을 돌리고는 갠지스 강 상류를 통과하고 있는데 그 곳의 원주민이 떼거리로 몰려나와 다짜고짜 현장법사를 포승줄로 단단히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현장법사는 어이가 없었지만 까닭이나 알고자하여 그동안 배운 인도말로 떠듬떠듬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물의 신(水神)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라는 답변했다. 그날이 공교롭게도 갠지스 강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사실 죽고 사는 것이야 별것 아니지만 경전도 구하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수장(水葬)된다고 생각하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전생에 지은 업장이 두터워서 따라오던 제자들까지 다 죽게 하고 이제 나까지 죽게 되었으니 다쟁겁의 죄업이 얼마나 두텁기에 이런가?” 하면서 마음 속 깊이 지극 정성으로 참회(懺悔)를 하였다. 그 때 마침 "어려울 때 이 경을 외우라"는 노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현장법사는 반야심경을 크게 소리 내어 세 번 외웠다.
그 순간 하늘에는 새까만 구름이 몰려오고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천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경실색한 주민들은 부랴부랴 스님을 풀어 주고는 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한 짓을 저지른데 대해 머리를 조아리고 백배 사죄하였다.
출처: 원철 스님(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현장스님이 목숨을 걸고 가고자 한 곳은 나란타 대학이다. 그 무렵 나란타 대학은 세계 각지에서 유학 온 수천 명의 학승들이 공부하고 있는 불교학의 총본산이었다. 입학은 구두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학식이 고금에 통달한 자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문이 깊은 사람도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 명은 떨어지는 경쟁률을 자랑하는 명문이었다.
드디어 637년 나란타에 도착하였다. 그 때 그 대학의 실라바드라(戒賢) 학장은 현장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법사가 중국을 떠나던 해에 실라바드라 스님은 중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미륵보살이 꿈에 나타나
"삼년 뒤에 동방에서 한 구도승이 찾아올 것이니 살아남아서 그에게 법을 전하도록 하라.“는 수기를 받고 병이 씻은 듯이 낫는 몽중가피(夢中加被)를 입은 터였다.
현장법사를 보자마자 그가 미륵보살에게 부촉 받은 그 구도승임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십 년 동안 유식학(唯識學)을 가르쳐서 그의 법을 잇게 하였다. 시험도 없이 바로 입학하는 특혜에다가 상수 제자로 특별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신의 구도 열정에 제불보살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이러한 교육과정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인도 전역의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더 배웠을 뿐만 아니라 불교유적을 참배하면서 학자에게 결여되기 쉬운 신심을 더욱 북돋우면서 계속 천축에 머물렀다.
그도 어느새 40대 중반의 원숙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유학의 근본적 동기가 되었던 선지식들 간의 이설(異說)도 원전의 연구를 통하여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제대로 된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일만 남았다. 645년에 범어로 된 경전 육백쉰일곱 부를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오니 대왕까지 마중을 나왔다.
떠날 때는 몰래 도망쳤지만 이건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이제 그는 그 동안 각고 끝에 얻은 법을 대중에게 회향하는 일만 남았다. 태종 임금은 그에게 역경도량을 제공해 주었다. 용이 물을 만난 것이다.
출처 : <월간 해인> 1998년 06월 196호 (인터넷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