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칼럼 (2025.7. 26)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수출 100억 불 달성과 박정희의 중화학을 재조명하다.
(서론)
박정희 대통령은 60년대에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을 모토로 한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한국을 최후진국에서 개도국의 일원으로 승격시켰다.
수출의 경우 61년 4천만 불에서 시작하여 64년 감격적인 1억 불을 달성하고 67년 3억 불을 달 성한 후 70년에는 10억 불의 고지를 점령하였다.
연평균 41.3%의 경이적인 성장룔이 박정희의 수출 제일주의의 결과였다.
60년대의 공업구조는 후진국형 노동집약적 조립공업이기 때문에 자본집약 기술공업인 중화학으로 상향 구조개편하지 않으면 영원한 후진국으로 남는 것이었다.
인건비로 후진국간에 경쟁해야 하는 체제를 탈피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선진국들과 경쟁하는 중화학 공업구조로 개편해야 했다.
70년대의 선진국은 모두 중화학 국가이고 중화학 국가라야 선진국이 되었다.
중화학의 특징은 자본 집약적이고 기술 집약적이어서 중, 후진국이 섣불리 따라갈 수 없는 데 있었다.
현재의 선진국은 어떤 국가라도 자연 발생적으로 하나씩 둘씩 200년이란 장기간에 걸려 만든 것이지 한국처럼 인위적으로 중화학 정책을 만들어서 선진국이 된 국가는 없다.
오늘날의 한국의 공업구조는 중화학을 펀더멘털 제조공업으로 하여 중화학에서 스핀오프한 미래산업인 방위산업, 원전산업과 항공우주산업등과 더불어 두뇌산업인 AI 산업으로 경쟁하고 있다
한국은 말하자면 지난 50여 년의 기간에 1차에서 3차까지의 산업혁명을 끝내고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5위이내의 공업과 AI 대국이긴 하지만 미래가 위태로롭다. 선진국 간의 경쟁에서 이겨야 선진국으로 살아남는다.
정부는 AI 시대를 선언하고 기획단을 설치하여 특벌 지원법을 제정하고 AI 데이터 센터등 인프라를 구축하며 인재를 마음 놓고 양성할 것을 또다시 주장한다.
필자는 71년부터 79년 10월 대바정희 대통령 서거 시까지 만 8년간을 한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방위산업을 담당하였다.
그 후 중화학과 핵개발과 운전 그리고 중화학과 관련한 연구개발, 기술인력 앙성, 행정수도, 2000년대의 국토구상 등의 프로적트에 관련된 실무를 담당하였다
위로는 대통령 사이에 오원철 경제2 수석비서관과 김정렴 비서실장 두 분 만을 상사로 한 비서관 겸 차관보급 중화학 기획단 부단장이었다.
오늘 중화학 실무자가 기록하는 이 정사를 광복 10주년에 박정희 대통령을 삼가 영웅으로 추대함에 바치는 바이다.
<제1부 중화학 총론편
1.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정책을
선언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80년대 초에 수출 100억 불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불 달성을 목표로 한 중화학 공업화 정책 (이하 중화학이라 말함 )을 선언하셨다.
경제정책이 대통령 선언으로 공포된 것은 중화학을 국가최고 정책으로 취급하여 추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중화학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국운을 걸고 출발한 정책이 된 것이다.
1972년 말 한국의 경제 지표가 수출 16.7억 달러, 1인당 GNP가 318달러 밖에 안 되는 약소 개도국이 수천억 달러가 들어간다는 중화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망발이라고 했다.
정부는 중화학이 발표되기 31년 전인 72년도에 발효한 수출 53억 불 달성을 목표로 하는 정부의 공식적인 3.4차의 81년 목표의 10개년 신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시행 중에 있었다.
중화학 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시행 중인 정부의 10개년 계획을 뒤엎고 중화학을 추진하여 53억 불의 2배인 100억 불을 달성하는 것이었으니 내각은 경악 그대로였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유신 내각마저 정부의 전체 부처의 계획을 종합한 경제기획원 ( EPB 태완선 부총리 ) (총리 김종필)을 비롯한 모든 기관이 "무모하다 그리고 시기상조다 또는 실현성이 없다"는 것 등으로 대통령의 중화학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인조반정이었다.
박정희가 임명한 서강학파의 거두 남덕우 재무가 반대의 선봉장에 섰다.
중화학에서는 정부가 반대할 것으로 예측하고 대통령용 미니 차트와 각의에서 설명용 브리핑 차트를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과 장관이 대결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보고 남재무를 독대로 설득하였다.
박정희 유신내각의 반대에 대하여는 오원철 수석이 청와대 회의실에서 브리핑하여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대통령의 의지가 훌륭하고 확고 부동한 자세에 고개를 숙이고 동참하여 일치단결하는 태세가 갖추어진 것이다.
2. 수출목표 100억 불은 박정희 대통령의 비전을 현실화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에 대하여 굳은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오원철 수석이 중화학 보고 시 대통령이 "세계 역사상 중화학 실례가 있는가?" 하고 물으셨다.
오수석은 일본이 1950년대의 10년 동안에 수출 100억 불 달성역사를 "일본이 중화화학을 한 성공한 실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
드린데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이 했는데 우리가 왜 못해" 하고 결심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선언문을 ☆중화학은 어렵다. 그러나 하기에 따라서는 불가 능한 것이 아니다☆하고 끝을 맺으셨다.
청와대 T/F 팀은 투자금액 추정금액을 수천억불이 아니라 일본의 1/4 선인 100억 불로 추정하면 연간 평균소요가 10억 불이 되므로 한국식 실천이 가능한 중화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화학 정책이란 수출 100억 달러 목표 달성과 공업구조를 중화학으로 상향개편하는 중화학 공업화 목표가 있는 두 개의 목표달성 정책이었다.
수출 100억 불 달성을 하되 중화학을 해서 달성을 하고 중화학을 하되 수출 100억 불을 달성하는 중화학이라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팔 오원철 경제 2 수석을 수장으로 한 기술계 테크노 크라트 팀은 방산이 착수된 71년에서 시작하여 72년도 1년 동안 일본의 중화학 구조를 참고하여 공업개편론 작성을 완료한 것이다.
박정희의 중화학은 한국의 공업구조를 노동집약적 조립공업에서 70년대에는 자본집약적 기술집약적 공업으로 상향 개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선진국이 되는 비전인 수출 100억 불을 포함시켜 이를 중화학의 목표로 확정한 것이다.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면에서도 미럐를 희망적인 70년대를 향하여 대폭적인 성장 (Epoch making growth)을 하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절박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72년도에 착수한 방위 산업이 원자재를 공급하는 철강과 비철금속 그리고 기계공업의 도움이 없어 철벽에 부닥쳤다.
이리하여 박정희의 중화학 정책의 내용과 목표를 명약관화하게 정하고 "관계획 민간 실행"의 원칙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일생과 국운을 걸고 출발한 것이다.
3. 중화학의 모든 목표가 기적적으로 달성되다.
중화학은 착수당시 전내각이 망국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배척당하였지만 결과는 81년에 100억 불 수출목표를 77년에 달성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도 966불로서 1.000불을 달성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실적인가!
81년에는 목표의 2배인 200억 불을 달성하였는바 이것은 정부의 당초의 계획에 의한 53억 불의 4배를 달성한 것을 의미한다.
세계 경제개발 역사상 목표보다 기간적으로 4년 조기에 금액상으로 2배 또는 4배를 달성했다는 실적은 있을 수가 없어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하늘이 한국민에게만 선진국이 되라고 주신 선물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