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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들뢰즈, 차이생성의 존재론
◆ 개체화와 생성
▲ 「쾌락원칙을 넘어서」에 대한 검토 - 생물심리학적 산물
오늘 들어가기 전에 프로이트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정리를 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해 봅시다.
서론적인 얘기를 조금 써 봤는데요,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쾌락원칙을 넘어서 거기서 이야기한
내용을 들뢰즈는 바이오싸이콜로지컬 라이프, 영어로 하면 Biopsycologycal life, 이렇게
영역을 규정하고 있지요. 그죠. 싸이코로지컬한, 심리적인 그 이야기인데 그 얘기가.
그 그것이 인제 생물학적인 백그라운드를 가지고서 이야기되는 그런 게 프로이트의 세계다.
프로이트의 이 논문에서 이야기하는 세계이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그 논문을 몇 번 조금 봤지만 대체적으로 그 전반부와 후반부가 있는데
그 전반부는 반복강박에 대한 이야기죠. 그 반복강박이라고 하는 게 있다. 쾌락원칙에 따르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해소해 나가야 하는데 해소해 나가지 않고 자꾸만 그것을 이렇게 반복하려고하는 어떤 강박적인 그런
면을 가지고 된 얘기가 그 전반부라면 논의의 후반부에서는 그 반복 강박에 대한 어떤 생물학적인 가설을 제시
하죠. 여러 가지 생물학적 가설을 제시하면서 그 생물학적인 가설을 제시하는 그 과정에서 죽음욕동에 대해서
강조를 하게 되지요. 타나토스에 대해서. 그래서 그런 어떤 논문의 전반적인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람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내용은 생물심리학적 삶이라고 할 수 있죠.
▲ 들뢰즈와 개체화의 문제 - 보편자와 개체, 그리고 물질
이 개체화의 문제, 이것은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지요. 인디비쥬에이션(Individuation), 인디비쥬얼(Indivi
dual), 그 인디비쥬얼들이 어떻게 성립하느냐. 개체들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이 문제죠 그죠.
고전적인 철학의 서양의 그 고전적인 철학에서는 이 개체화의 문제라고 하는 게 보편자와 개체 관계로서 받아
들여졌어요. 보편자와 개체의 관계, 유니버셜스, 그러니까 말의 형상은 하나잖아요. 그죠? 말의 형상은 하나입
니다.
말의 형상이 두 개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그 두 개의 형상을 거느리는 진짜 형상이 다시 있어야
되겠죠. 우리가 마치 옛날에 "동양에서 천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 라는 것처럼 이데아도 하나밖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데아는 딱 하나야.
근데 말의 이데아는 하난데 음. 그 말의 이데아라고 하는 걸 우리가 보편자로 보면 이데아라는 거하고 보편자가
똑같지는 않은데 따지고 들어가면 그것도 복잡합니다. 그런데 일단 그걸 하나의 보편자라고 보면 말의 이데아는
하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말들은 굉장히 여럿 아니에요. 그죠. 적토마니 오추마니 유명한 말만 해도 굉장히
많지요.
그러면 어떻게 말의 이데아라는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말이 인디비쥬얼, 인디비쥬얼 호스가 생겨날 수 있을까
개별적인 말들이 이게 개체화의 문제지요. 굉장히 중세철학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개체화의 문제.
만약 이 세상에 개체라는 게 없다면 그게 어떤 세상일까요. 개체라고 하는 게 없다면 비유를 하면 예컨대, 어떤
수학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처럼 되겠지. 수학. 비유컨대 예를 들어서 방정식, 원, 텐서 이런 어떤 수학적 존재
들만 있는 세계에 내가 딱 들어갔다 생각해 보세요. 상상 한번 해 보세요. 그런 세계의, 잘 상상이 안 되지만
어쨌든 그런 세계에 존재만 있는 철수도 영희도 없고 인간의 이데아만 덩그러니 있는 거지. 그런 세계 되겠지.
그게 이데아의 세계.
양태라고 하는 건 개체가 꼭 개체만은 아니지만 어떤 것이 띠고 있는 (우리말로 띤다고 그러는데) 어떤 규정성들
이에요. 규정성. 그게 이제 모드라고 하죠. 양태, 모드. 모드가 변하는 건 뭐라 그래? 모드가 변하는 건.
모디피케이션이지. 모디피케이션.
우리가 일상에서 수정한다고 하지 수정. 수정한다.
어떤 차가 하나 있었어요. 어떤 차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자동차가 녹색이었어요. 근데 녹색 그런데 그 주인이 맘에
안 들어가지고 녹색을 페인트를 다시 해가지고 빨간색으로 칠했어요. 차를. 우리가 영어로 하면 뭐라 그래요?
모디파이(Modify), 모디피케이션(Modification)한거죠, 보통 일상에서는 수정 이렇게 번역하기도 하지요.
모디파이. 그걸 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양태를 바꾼 거죠. 모드를 모디파이, 모드를 바꾼거지. 모디파이.
그래서 우리가 말 난 김에 얘기하면 애들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모드가 있잖아요. 요렇게 하면 로봇 모드가 되고
또 막 하면 자동차모드가 되고. 그것도 모드죠. 모드는 띠는 거야 띤다는 말 참 재밌는 표현인데, 어떤 사물이
띠고 있는 어떤 거지.
어쨌든 간에 약간의 다시 돌아와서 전통 철학자들 고·중세 철학자들에게 주로 문제가 된 것은 보편자와
개체 사이의 관계. 인간의 이데아와 철수 영희의 관계. 말의 이데아와 적토마 오추마 등등과의 관계 그런.
그런데 근대로 오면 조금 얘기가 달라지는데 근대에 오면 개체와 개체 이상의 보편자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개체와 개체 이하 어떤 머티리얼한(material) 존재들. 어떤 물질적인 존재들과 개체 관계가
문제가 돼. 개체 관계가.
그러니까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인디비쥬얼들하고 그 위에 있는 유니버설과의 관계죠. 개체들과 유니버설들과
의 관계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그 중세철학의 가장 유명한 논쟁이 뭡니까. 보편자 논쟁이죠. 보편자 논쟁.
보편자가 실재하느냐를 둘러싼. 실제 존재하는 건 개체들이다. 라는 걸 우리가 뭐라고 해요? 무슨 론이라고
해요? 유명론, 노미날리즘(nominalism ), 유명론. 왜 노미날리즘이에요?
왜 이걸 보고 노미날리즘이라고 그래? 요런 것들은 그냥 이름일 뿐이니까. 사람. 실제 존재하는 건 철수와
영희지 사람이란 것 자체가 어디 있냐. 이 사람들은 그건 이름이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재한다.” 이거는
뭡니까? 리얼리즘. 근데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하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니까 보통 보편자 실재론 이렇게
부르죠. 보편자 실재론. 이거는 단순한 철학적 관심이 아니라 중세 사회의 존속하고도 연관되는 아주 심각한
문제죠.
이건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얘기하는데. 그런데 근대로 오면 그게 아니라 이거 이하 편의상 머티어리얼
이라고 합시다. 머티리얼이라고. 유니버설과 인디비쥬얼스가 아니라 인디비쥬얼스와 머티리얼스와의 관계가
되죠.
말하자면 우리가 옛날 사람들하고 근대 이후의 사람들이 감수성에서 가장 큰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만일 누가
그렇게 물어보면 뭐 엄청난 대답이 나오겠지요. 뭐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 뭐 운명을 믿는다. 자아를 믿는다.
남녀평등이다 등등 시작해서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 근대 이전 사람들하고 근대 이후 사람들 사이에 존재
하는 그 어떤 감성적이라고 할까 파토스라고 할까 아니면 세계관이라고 할까 차이를 가장 그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마이크로에 대한 감각이에요.
마이크로에 대한. 옛날 사람들한테는 마이크로한 세계라는 게 큰 관심이 없거든. 물론 뭐 원자론도 있었고 뭐
없지는 않죠. 따지고 보면. 기라고하는 것도 어찌 보면 마이크로한 측면도 분명히 내포하고 있고, 그러나 전반적
으로 볼 적에 아주 고도의 사이언스가 발달하기 이전 사람들한테 이 세계의 가장 기본단위는 개체에요.
개체. 철수 영희 사람이든, 적토마 같은 말이든, 어떤 소나무든 개체라는 게 가장 우리 삶에, 우리 인생의 가장
기반이야.
개체라고 하는 게 근본적으로 그리고 작다란 의미도 굉장히 희박하고 작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 생각하는 거는
빈대 모기 뭐 이정도지. 작다 그러는 미물. 흔히 말하는 고전에 등장하는 미물이라는 게 지렁이. 작다 라는 게
그런 거야 옛날사람들한테.
그런데 인제 근대 이후에 사이언스라고 하는 게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어떤 존재론적인 감성적인
파토스의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어떤 마이크로한 세계에 대한 발견. 마이크로한 것에 대한
어떤 감각 그거에요. 기본적으로. 그것이 그 엄청난 의미를 띠고 있죠. 그게 이제 선용되면 아주 과학지식이 발달
했다 얘기할 수 있겠지만 악용될 경우에는 마이크로한 세계가 발견되면 발견될수록 그건 아주 악몽 같은 세계가
되죠.
예를 들어서 나노과학이 지금 나노테크놀로지한다고 난리치고 있는데 나노과학이 발달해가지고 만약에 미래에
100년 후에 상당히 발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하면 나노로봇을 만들어서 뇌에 집어넣는 거지.
나노로봇은 뭔지 알죠? 원자 분자 레벨로 만든 로봇이야 보이지도 않지 그러니까. 그런 놈 만들어서 만약 사람
몸에 주입해서 암세포를 죽이면 그건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 머리에 넣어가지고 뇌세포를 조정하면 그거는 정말
악몽 같은 세상이지요.
나는 그래서 항상 그런 생각 많이 하는데 마이크로한 세계를 발견했을 때가 인간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다.
인간이라는 게 판도라 상자를 열었을 때가 바로 그 현미경 발견해가지고 마이크로한 세계를 볼 때 그 때 인간이
라는 게 판도라 상자를 열었죠. 인류가 멸망하면 틀림없이 그것 때문에 내가 보기에 멸망한다.
마이크로 때문에 얘기가 약간 딴 데로 갔지만 현대에 와서의 인디비쥬얼리티 즉, 개체성에 대한 논의는
이데아인가 이게 아니고, 마이크로한 것과 세포분자원자 소립자 미립자 나노 등등 물질적인, 머티리얼한 것들
가운데서 어떻게 인디비쥬얼들이 만들어지냐 이거죠.
반대로 옛날에는 인간의 이데아에서 어떻게 개개의 인간이 만들어지냐 거고. 이제 그게 아니라 물질, 물질이라는
텀 위에서 어떻게 개체들이 만들어지냐는 거죠 이렇게.
들뢰즈란 이 사람도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이야. 내가 볼 적에는 기본적으로 그 바탕에서 사고를
전개한 사람인데 인디비쥬에이션 이거 굉장히 중요한, 인디비쥬얼들이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라고 하는 거.
인디비쥬에이션의 문제죠 그죠.
아까 우리가 만약에 개체들이 없는 보편자들만 있는 세상을 생각한다고 했을 적에는 어떤 추상적인 수학적
세계가 생성된다했는데 반대로 이런 틀에서 인디비쥬얼들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세상일까요.
물질만 막 출렁이는 세상. 물질만. 공간 속에 아무것도 없고 물질만 마구 출렁이는 세상이죠. 플라즈마(plasma)
같은 그런거죠. 그런 세상이 이제 인디비쥬얼이 없는 세상이지.
인디비쥬얼이라고 하는 것 우리 인간한테는 엄청 중요한 거죠. 인디비쥬얼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은 뭐
주체성도 욕망도 감정도 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지 한마디로 말해서. 개체들 이 세상에 개체들이 있음
으로써 주체성도 있고 자아도 있고 욕망도 있고 자와 타의 구분도 있고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싸움도
있고 전쟁도 있고 개체들이 존재하면서 모든 게 있는 것이죠. 삶이라는 게 있는 거지. 라이프라고 하는 게.
그래서 상당히 이제 중요한 개념이라는 걸 염두에 두시고.
▲ 들뢰즈의 철학적 쟁점 - 생성존재론과 개체화의 장
가끔 가다가 들뢰즈에 대한 개론적인 이야기를 보면 들뢰즈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다. 흐름의 철학이다. 욕망의 철학이다 이렇게 강조하는
게 있는데 사실 그건 조금 포인트를 이렇게 잘 못 맞춘 거죠.
오히려 중요하게 되는 건 이거죠. 왜 만약에 ‘이 세계의 본질이 생성
이라면 흐름이라면 어떻게 그 가운데에서 개체들이, 보편자들이, 집합체들이, 질들이 성립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거죠. 거꾸로.
생성이다 뭐 흐름이다 강조하는데 포인트를 두는 건 싱거운 얘기고. 거꾸로 진짜 중요한 거는 만약에 세상
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완벽한 흐름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가운데에서 왜 철수와 영희나 어떤 말, 어떤 장미
꽃 같은 이런 인디비쥬얼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또 뭡니까 종, 류, 그런 어떤 보편자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또 가족, 마을, 국가, 회사 같은 집합체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또 색깔, 모양 같은 어떤 일정한 어떤 퀄리티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게 오히려 문제의 핵심
이죠.
그런데 결국은 생성과 동일성을 같이 사유해야 되는데 들뢰즈 같은 경우는 들뢰즈만이 아니라 사실은 생성
존재론자들이 공유하는 건데 뭡니까? 동일성들을 전제하고 그 동일성들 간에 관계나 생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많은 철학은 그렇죠? 그죠. 이 세상의 본질은 원자다 아니다 뭐다, 뭐다 얘기하고 한 다음에 그 동일성을
딱 정하는 거지. 그 담에 그런데 요놈도 요렇게, 요렇게 하다보니까 이 세계가 보인다. 그 설명이 아녜요.
근본적으로 생성인데 동일성들이 생성이 된다. 그러니까 어떤 동일성들도 영원하지 않죠.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들뢰즈에 있어서는 영원이나 실체성 같은 것을 대체하는 말이 반복이에요. 반복. 영원하진
않지만 반복하는 거죠.
그래서 핵심은 뭐냐 하면 동일성들의 생성이죠. 동일성들의 생성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게 이제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또 약간
다르긴 하지만
하이데거, 들뢰즈 이런 사람들을... 또 데리다. 죽 잇는 어떤 존재론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죠. 그런 사람들을 같이 보는 게 좋아요.
생성. 그러니까 그 어떤 사유라고 하는 게 어떤 그 계열에 있는 거야.
뭐 예컨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리쾨르 라인을 이루듯이 이쪽도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이렇게 이어지죠. 이런 얘기들이. 죽 이어지는데 이른바 온톨로지 오브 비커밍(ontology of becoming).
생성 존재론의 계열이죠.
그래서 들뢰즈는 이런 계열에서 현재로서는 가장 정교한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어쨌든 인디비쥬에이션, 인디
비쥬얼이 만들어지는 그 개체화. 인디비쥬에이션이 핵심 문제인데. 그러면 개체화의 장이라는 건 뭐냐.
필드 오브 인디비쥬에이션은 어떤 장인데. 그 장은 자체로 흐름인데 어떤 흐름의 장인데 그 장 안에서 개체들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또는 개체라는 말보다 조금 넓게 보면 어떤 개별적 어떤 존재들이 만들어지는 개체화의
장이죠.
그래서 개체화의 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흐름의 장이지만 단지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장안에서
일정한 개체화가 성립하는 그러한 장이다.
이걸 프로이트로 말하면, 프로이트의 맥락에서 이걸 말하면 무슨 얘기냐. 심리, 정신세계는 어떤 흐름이죠.
뭐가 흐름입니까? 우리의 심리적 삶을 채우고 있고 심리적 삶 속에서 흘러가는 것을 프로이트는 ‘리비도’라고
하죠.
그러니까 마치 물리세계가 에너지로 이렇게 차 있고 에너지가 흐르는 것과 똑같이 심리세계는 리비도라는
에너지로 차있는 거죠. 리비도가 차있고 흘러가는 거죠. 그런데 리비도가 무조건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맥락 속에서 그렇게 마름질되어서 개체화가 성립하는 그런 장이다. 이렇게 볼 수 있죠. 프로이트의 비유해서
말하면요.
그 마름질이라는 말 알지요, 마름질. 내가 설명할 때 항상 쓰는 말인데 양복 만드는
사람이 이렇게 천이 있으면 죽 자르잖아요?
죽 잘라서 딱 마름질 해주는 마름질. 그니까 요 어떤 필드에서 요렇게 이게 인디비
쥬에이션이죠. 이게. 다 섞여있는, 막 죽 펼쳐져있는 건데 요놈을 딱 구별 지어서
인디비쥬에이션시키는 거죠. 마름질이라는 우리말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어요.
마름질.
◆ 차이생성과 차이해소
▲ 차이생성의 장
어떤 장이 있는데 하나의 장이 단지 어떤 등질적인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한 장이기만 하다면 거기
어떤 그 장을 채우고 있는 것들이 그냥 호모지니어스하게 아무런 차이가 없이 흐르기만 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개체화가 일어나기는 힘들겠죠. 그럴 거 아니에요. 그죠.
개체화란 어디에선가 극한들, 리미트들이 작동해야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 장이 이렇게 있는데 이 장이
그냥 호모지니어스하게 아무런 질적 차이 없이 그냥 이렇게 존재한다면 딱히 어디서 개체화가 일어날 이유가
없죠.
개체화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내가 이렇게 개체화한다면 요 선이 그어져야 되는 거죠. 그어져야. 어떤 개체가
되려면. 어떠한 개별화든지 간에 그 선이 그어져야 되요. 어딘가에 그 마름질, 리미트가. 바운더리. 리미트가
그어져야 되거든요 어떤 거든지.
그리스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거 들어봤을 거예요. 아페이론. 어떤 리미트가
아직 없는 연속체. 어떤 리미트가 주어지지 않은 컨티뉴. 거기에 리미트가 딱 주어져야지 거기서 어떤 뭐가 딱
나오지요.
라디오 생각하면 되죠. 라디오에서 소리가 ‘지직 지지직’ 연속적으로 가다가 어떤 리미트를 딱 맞추면 그때부터
어떤 소리가 나오죠. 기타도 그냥 줄치면 아무 화음이 없는 그냥 멍청한 소리가 나는 데, 기타를 딱딱 몇 군데
누르면 딱 화음이 나오죠. 그러니까 소리의 필드에서 어떤 화음을 딱 개별화해내는 거죠. 리미트가 페라스에요.
페라스를 주는 거죠.
다시 말해서 어떤 장이 그 장안에서 인디비쥬에이션이 벌어지려고 할 수 있으면, 개체화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장 자체가 어떤 차이들이 디퍼런스(difference)가 생성하는 장이어야 되요. 디퍼런스. 그래야 그 디퍼런스가
생성하는 와중에서 뭔가 개체화가 발생하는 것이지, 디퍼런스가 없는 어떤 호모지니어스한 장이면 아무것도 안
생기겠죠. 그렇죠? 그 장은 디퍼런시에이션, 차이생성의 장이어야 한다. 디퍼런시에이션이라는 말은 아무튼
중요한 말이죠. 마치 니체에서 그 힘의 의지하고 영혼 회귀가 아주 중요하듯. 그 정도 위상을 차지하는 용어죠.
그죠? 들뢰즈 철학에서요.
디퍼런시에이션. 디퍼렌시에이션이죠. 디퍼런스가 아녜요. 들뢰즈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이 아닙니다. 차이생성의
철학이에요. 차이는 오히려 뭐예요? 차이는 차이생성의 결과들이지요. 결과들. 디퍼런시에이션. 차이생성의 어떤
결과들이 그게 차이들이지. 그러니까 디퍼런시에이션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생성의 장에서 어떤 개체들이 이렇게 분화되어 나오죠. 분. 분화. 이 분화할 때 ‘분’자가 아까 우리가
한 어떤 말과 같은 말이냐? 분화. 마름질. 나눌 ‘분’자라는 건데 우리가 아까 한 말로하면 마름질이에요. 마름질.
분화되어 나가는 거죠.
차이가 막 생성하는 과정은 디퍼런티에이션(differentiation)이고 그런 과정에서 어떤 것, 어떤 것이라는 용어가
중요해, 들뢰즈 철학에서. 뭐, 뭐, 뭐, 것. 불완전 명사. '것' 하면 뭡니까? '것' 하면 그건 이미 개별화되는 거죠.
개별화가 안 된 거에 대해서는 것이라고 안 그러죠. 어떤 것 이것, 저것, '-것'이라고 하는 게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에서 이것, 것 이라는 게 성립하는.. 그게 분화에요. 디퍼런시에이션(differenciation)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의
디퍼런시에이션. 발음이 같은, 헷갈리는. 근데 핵심적이고.
▲ 차이생성의 원리 1. 강도(intensity)
요런 과정. 즉 차이생성의 장에서 어떤 개별적 존재들이 분화되어 나오는 그 과정을 지배하는 어떤 두 가지
핵심적인 계열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한테서 핵심적인데. 이게 뭐냐 하면 인텐서티. 강도. 싱귤레러티. 특이성,
특이성이죠. 즉 그 어떤 장이 있는데 그 장이 이제 디퍼런시에이션, 차이생성을 겪습니다. 차이생성을 막 겪어요.
차이생성을 겪는다는 그 표현은 그냥 존재론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고 실제 차이생성을 겪는 그 놈이 뭐냐.
차이생성을 겪을 때 차생하는, 차이생성하는 그 존재를 무엇으로 파악하느냐. 예를 들어서, 어떤 방이 있는데
온도조절을 하잖아요? 온도를 뜨겁다, 차갑다 막 조절하죠. 그렇게 차이생성하는 거죠. 차이생성을 하는 거죠.
또 예컨대 어떤 피스톤이 뭘 미는데 살짝 밀었다 조금 밀었다 한단 말이야. 이렇게. 여기도 뭡니까? 차이생성
하는 거죠. 그러니깐 빛. 예컨대 빛이 전원이 고장이 나서 이렇게 흐렸다 밝았다한다. 이것도 차이생성이죠 그죠.
근데 요렇게 빛이든 어떤 그 열이든 뭐 어떤 충격이든 또 색깔 같은 것. 예컨대 옅다 짙었다 한다는 식으로 그
리듬감. 또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 막 강도를 세게 해서 말할 수 도 있잖아요? 잔잔하게 얘기할 수도 있고.
차이생성 하는데 요렇게 차이생성 하는 요놈을 뭐로 딱 포착해야 되는데 어떤 디그리(degree).
디그리를 통해서 차이를 산출하는 그래서 변해가는 요 놈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 표현하는 방법이
담론마다 다르겠죠.
요컨대 물리학자 같은 경우는 포스, 힘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고. 어떤 심리학자 같으면 욕망이라고 볼
수 도 있는 거고. 그런데 요런 거를 가장 존재론적으로 추상해서 표현한 말이 뭐냐 하면, 인텐서티 라는 말이야.
강도. 인텐서티. 인텐서티의 디그리. 정도죠. 인텐서티 자체가 정도지만.
강도라는 단어는 철학사에서 연원이 긴 말인데 물론 거슬러 가면 플라톤까지 가지요. 그런데 조금 가까운 예로
하면 강도라는 표현이 처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건 칸트부터예요. 왜 등장하냐하면, 경험을 할 적에
퀀터티, 양에 대한 경험은 비교가 아주 정확합니다. 책이 한 권 있어 두 권 있어. 명확하죠? 아주. 키 10센티,
20센티. 10센티, 20센티는 너무했다. 1미터 50, 60, 70. 딱 비교가 되지 양이.
근데 퀄러티라고 하는 건 비교가 엄청 어려워요. 예컨대 내가 어떤 예를 들어서 불빛을 봤는데 세게 올수도 있고
약하게 올수도 있죠. 그죠? 물론 뭐 예컨대 물리학적으로 양적으로 표현할 수도 물론 있겠지. 그건 또 딴 문제고.
하여튼 경험상으로 어떤 퀄러티의 어떤 이런 나한테 오는 퀄러티. 요 차이. 디퍼런스 요거. 예컨대 어떤 빨간색이
있는데 이 빨간색도 물론 같은 빨간색인데 질이 다르면 그건 별게 문제고 녹색으로 가면 그건 또 딴 문제고 딴
문제고 같은 색인데, 빨간색인데 요게 나한테 강도가. 강도 말을 아직 하면 안 되겠지. 요게 세게 올수도 있고
약하게 올 수도 있잖아요? 왜냐하면 양 같으면 그걸 수로 표현할 텐데, 퀄러티같은 경우는 이 게 무엇이냐
말이지. 퀄러티.
그래서 중요하게 등장한 말이 인텐서티, 강도란 얘기지. 강도가 나한테 세졌다 약해졌다 강도가.
칸트에서의 "경험"이라고 하는 건 어떤 거냐 하면, 내가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보고 듣고 만지고 이렇게 지각할
때 누가 날 내 팔을 눌렀는데 이 세기 있죠? 세기. 칸트 같은 경우는 그런 경험 지각상의 인텐서티인데 요게
나중에 요 강도라는 표현이 조금 조금씩 가면서 나중에 그다음에 등장하는 게 베르그송이고, 그다음에 화이트
헤드가 또 강도가 상당히 중요한 어휘로 사용했지요. 화이트헤드가 그리고 그담에 들뢰즈로 오고.
나는 이게 이건 뭐 지금 할 얘긴 아니지만 이 인텐서티란 개념이 나중에 그 우리가 고전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기(氣), 기하고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이때 인텐서티라고하는 거하고 기를 연관시켜 볼 수
있는 기, 우리가 말하는 기. 기가 세다 할 때 그 기. 뭐 짐작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어떻게 연관시킬지.
요 들뢰즈로 죽 가면서, 칸트에서 죽 가면서 이게 심화가 되요.
인텐서티가 심화가 되가지고 화이트헤드나 들뢰즈는 굉장히 존재론적인 개념이에요. 그냥 내 경험할 적에
세다 약하다가 이런 게 아니고, 실제 이 세계 자체를 움직이는 어떤 하나의 프린서플(principle)로
존재론. 온톨로지컬한 프린서플로.
▲ 차이생성의 원리 2. 특이성(singularity)
하여튼 이건 지금 거기까지 갈 건 없고 그러니까 이걸 이제 프로이트적인 맥락으로 약간 바꿔서 얘기하면 뭐냐
하면 리비도도 뭡니까 우리의 정신세계가 리비도의 장이죠 리비도의 흐름의 장인데 리비도라고 하는 게 그냥
평균적으로 똑같은 평으로 흐르면 쾌락 원칙이 필요가 없지. 그잖아요. 그게 아니라 뭐가 자꾸만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냐 이렇게 고놈을 우리가 들뢰즈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 그게 이제 인텐서티의 문제죠 강도의
문제.
그 다음 또 하나는 뭐냐, 특이성의 문제입니다. 특이성의 문제. 특이성 이것도 아주 복잡한데 강도라는 개념하고
특이성 두 개념이 아주 복잡한 개념인데 이걸 자체를 할 시간은 아니고 다른 시간에 할 거고,
어떤 변화의 변곡점이죠. 지금 현재 간단히 이야기하면 예컨대 강도가 세지다가 어느 순간에 내려가기 시작
하면 요런 점들. 싱귤러포인트 이런 거죠. 특이점. 아무런 싱귤러포인트도 없으면 거기서는 별다른 변화가 안
일어나겠죠. 그죠. 싱귤러포인트가 있으므로 그놈이 어떤 매질이 되어가지고 이정표가 되가지고 그 어떤 변화가
반전을 하게 되고 그래서 강도라는 개념하고 특이성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게 상당히 중요한 지금은 그냥 직관적
으로만 이해해 놓으시면 되요.
▲ 존재론에 현실 삶 적용하기
자 그래서 여기까지 하고 우리 책으로 들어갑시다. 서론적인 얘기고.
자, 인제 서론격으로 한 얘기들을 염두에 두면 이해할 수 있겠죠 그죠. 우리 심리적인 삶이라는 건 어떤 개체화의
장을 함축하는데, 이 개체화의 장이라고 하는 거는 강도들 인텐서티의 차이가 일어나는 그런 장이고.
근데 요기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자극이나 흥분이란 단어죠. 프로이트적 맥락에서.
내가 원어를 보니까 원어는 엑시스탄스(15:54) 하나인데 역자가 이렇게 구분시켜 버렸어. 자극 또는 흥분이죠.
흥분량들. 존재론적으로, 일반해서 말해서 강도차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그걸 심리적인 맥락 프로이트 정신
분석학의 맥락으로 좁혀서 말하면 그게 뭡니까. 그게 흥분의 형식을 취하는 거지.
공부하실 때 가장 사유능력을 키우는 중요한 포인트가 이 존재론이라는 거하고, 존재론(온톨로지)하고, 어떤
구체적인 분야들 있잖아요. 구체적인 분야들과의 연관성을 잘 봐야 돼요. 연관성을. 온톨로지라고 하는 거는
어떤 특정한 영역을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여러 영역들을 이렇게 관류하는 말이라면
가로지르는 어떤 원리들을 연구하는 거죠. 온톨로지라고 하는 게. 그니까 온톨로지라는 언어하고 어떤 특정
영역에서의 언어를 이렇게 매치시켜가면서 자유자제로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예를 들어서 존재론에서 ‘무 無’다. 무 이건 아주 전형적인 존재론적 개념이죠. 무라는 건 아주 전형적인 타이
피칼한 존재론적 개념인데, 무의 예를 들어서 물리학적 대응물은 뭘까요? 물리학적 대응물. 예컨대 진공이지
진공.
철학사에서 그 파르메니데스에서 데모크리투스로 넘어가는 걸 생각 해 보세요.
파르메니데스같은 경우는 존재와 무를 둘 다 인정 안하죠? 뭐만 인정합니까? 오로지 존재만 인정하죠.
파르메니데스는. 그렇죠.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의 사고방식에서는 존재만이 아니라 무도 필요하다는 거죠.
동시에 존재와 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얘기를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철학자이기 때문에 자연철학적 버전으로
말하는 거죠.
그 때 존재가 뭐예요? 존재론 데모크리토스의 존재론, 원자죠. 원자 있는 것 이렇게 있는 거지, 있는 것.
그런데 데모크리토스가 파르메니데스에게 도전하는 것은 뭡니까? 존재만 가지곤 안 된다. 무도 있어야 한다.
무가 여기서 무가 뭡니까?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무는 뭐에요? 진공 보이드 허공이죠 허공. 원자가 이렇게
있으면 원자가 움직일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공간이 이렇게. 그래야 가서 원자가 부딪힐 거고 부딪쳐야
뭔가가 만들어진다는 거지 그러니까 무라는 개념에 대한 물리학적 버전이 뭐냐 하면 보이드에요, 보이드 진공.
무에 대한 생물학적 버전은 뭘까요? 죽음이지 죽음. 그 담에 무에 대한 심리학적 버전은 뭘까요 심리학적 버전.
우리가 말하는 허무 허무한 거지. 마음속에 마음이 텅 빈거지. 내 마음이 텅 비었어. 이런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서양 사람들은 무를 엄청 무서워했지요. 동양철학자들은 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하죠. 서양철학자들은 무를
엄청 무서워해요. 그림으로 어떻게 합니까?
서양회화는 절대 여백이 있으면 안 돼.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건. 현대는 물론 다르지만. 서양그림에서
여백 있는 거 봤어요? 고전적인 그림에서. 그건 완성이 안 된 그림이지 뭐. 동양 그림은 뭐야 동양 그림은 동양
그림은 선 몇 개잖아, 그냥 난초 몇 개 딱 그림 그리고.
그러니까 이 무라고 하는 온톨로지라고 하는 이걸 가지고로 다 꿸 수 있어야 해. 물리학 심리학 예술 다 꿰어야
해. 이게 존재론적인 사유를 하는 거야 존재론적인 사유를 .
존재론이라는거는 그것이 풍부한 내용으로 채워질 경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학문이지만 풍부한 내용으로
채우지 않을 경우에는 추상적인 어휘의 나열이 되는 거죠. 존재론이라는 건 모 아니면 도에요. 그런 내가 얘기
했던 풍부한 내용에 의해 채워진 존재론은 정말 대단한 거고 그런 내용으로 안 채워진 채 강단 철학에서 하는
것처럼 맨날 추상적인 어휘만 가지고 그냥 개념, 개념적 장난만 치는 진짜 따분한 게 존재론이지.
그래서 공부를 한다는 건 뭐냐 하면 나랑 같이 공부를 해서 존재론이라는 걸 알아야 돼. 존재론이라는 걸 터득을
하면 자기가 무얼 하든지 간에 그 뭐가 좀 보이는 거야 자기가 꿸 수가 있거든요. 상당히 저런 거를 염두에 두고
잘 봐야 돼 이런 개념들을. 인텐서티 이러면 굉장히 막연하죠. 인텐서티 되게 막연하잖아, 추상적이고.
고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안 돼 이걸 적용해봐야 돼.
인텐서티 그러면 인텐서티. 그걸 내 마음에도 적용해 보고 예컨대 어떤 사회의 인텐서티가 강해진다 이게 무슨
뜻일까. 예컨대. 과연 사회의 인텐서티가 강해진다. 뭘 뜻할까 사유해 봐야 해. 자기가 계속해서. 그 열 뜨겁다.
인텐서티 뜨겁다는 게 뭘까 물론 감각으론 다 알지 알지만 개념적으로는 뜨겁다라는 게 예컨대 뭘까 계속 생각
해 봐야 된다 이거지.
▲ 프로이트 버전의 강도와 특이성
얘기가 약간 빙 돌았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 얘길 했냐하면, 인텐서티라하고 하는 개념의 프로이트적
버전이 흥분인거죠. 인텐서티라는 추상적 원리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버전이 뭐냐 하면 흥분, 익사이텐션.
이 차이의 해소과정.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해소과정은 쾌락이라고 불린다. 전에 우리 얘기했죠. 지난
시간에 프로이트에서 쾌락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흥분양이 감소하는 거죠. 흥분양이 증가하면 괴롭죠.
지난시간에도 얘기했지만 프로이트는 의사거든요. 의사. 관점이 굉장히 의사의 관점이야. 예를 들어 낭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흥분양이 증가하는 게 멋진 인생이지. 예를 들어 패션이라는 말 있죠. 빠시옹.
옛날에는 나쁜 말이었어요. 그게. 인간을 힘들게 만들고 사람을 휘둘리게 만드는 건데 19세기 로만티시즘으로
가면 패션이 좋은 말이 돼. 좋은 말. 특히 그 프랑스인들이 그 패션이란 말을 되게 좋아하지. 빠시옹. 아주 좋아
하지. 아마 에디프 파이프 이런 여자가 노래 부르면 그거보고 빠시옹이 막 넘친다. 그러고.
이제 똑같은 말도 문화적인 백그라운드가 달라지면 그 뉘앙스가 확 달라지는데, 그 흥분이라는 것도 예컨대
로맨티시즘적인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한테는 그건 나쁜 건 아니지. 프로이트는 의사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이퀼리브리엄 유지하는 게 좋은 거야. 이 사람한테는. 뭔가 이렇게 이퀼리브리엄을 벗어나서 흥분이
되면 그건 나쁜 거야. 예를 들어서 배가 고프다거나 어떤 성적으로 이성에 대해서 뜨거운 열정을 느낀다거나
또는 잠이 쏟아진다거나 이게 전부 다 흥분이지. 프로이트한테는 흥분이야. 전부 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낮춰야지 흥분을 해소해야 할 거 아냐. 그게 쾌락이라는 거지. 프로이트는.
◆ 쾌락의 원리
▲ 이드 - 차이의 유동성에서 쾌락의 원리까지
그러니까 차이들이 어떤 유동적으로 막 할당되고 어떤 데는 차이가 강하고 어떤 데는 약하고 이런 게 그런 또는
국소적인, 국소적이란 단어가 왜 들어갔냐 하면 이게 우리가 전 시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쾌락이
국소적으로 해소되는 게 아니라 전체가 다 해소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요? 그건 죽은 거지. 그냥 아무 뭐가 없는
거야.
국소란 말이 그래서 나온 거죠. "국소적인 해소들이 (어떤 총체를 이룬다면 이 총체가 프로이트가 이드라고
불렀던 거) 적어도 이드의 첫 번째 층에 해당한다." 다음 페이지 마지막 줄 보세요. 이드의 두 번째 층이란 단어
나오죠, 그죠? 맨 마지막 줄에. 요걸 연계시켜 봐야 됩니다.
이드라고 하는 거 이사람 여러분 다 아시겠죠 그죠? 이드, 에고, 수퍼에고. 다 알고 있는데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라고 하는 것. 이드라고 하는 것을 들뢰즈는 두 층으로 나눠보는 거죠. 첫 번째 층이 뭐예요? 리비도
라고 하는 것의 어떤 차이 생성 강도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고 어떤데서 그것이 해소가 되고 이런
유동적인 장. 그것이 이드라고 하는 장의 첫 번째 층이다. 첫 번째 레이어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드라고 하는 게 무조건 어떤 프로이트 이드 그러면, 무슨 완전히 어떤 카오스. 우리가 어떤 통제할
수없는 어떤 프라이머티브한 원초적인 그런 것. 이런 걸 뜻하는 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드라는 건 그렇게
막연한 게 아니라 그것은 움직이는 장소의 부사.
쾌락이라고 하는 게 어떤 흥분양의 국소적인 해소 이죠. 그죠? 그런데 쾌락이라는 이 단어의 개념이 프로이트
에게서 단지 과정.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흥분의 국소적인 해소라고 하는 그것만 가리키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우리 심리현상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 프린서플. 원칙의 자리의 올라설 수 있는가. 쾌락이라고 하는 게.
어떤 개별적인 과정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런 과정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로까지 어떻게 격상이
되는가. 쾌락이라는 개념이.
쾌락이 쾌락을 낳는다. 어떤 쾌락이 또 다른 쾌락을 낳고 어떤 장이 개체의 장이 있는데 쾌락과 쾌락이 서로
연결되면서 쾌락을 낳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까지 원리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데 쾌락원칙을 넘어서,
제가 지난주에 얘기하면서 넘어서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잖아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고 했는데 넘어서가
뭔지 헛갈린다. 이제 그런 말을 했었던 게 그런 문제에 대한 들뢰즈의 그 답이 여기 나오는데…
쾌락원칙을 넘어선다는 게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쾌락원칙의 바깥에는 뭐가 있다 라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에 실제적으로 원칙이 될 수 있는 그냥 어떠한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심리
현상을 지배하는 어떤 원칙이 될 수 있는 그런 조건들에 대한 규정들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이 말 가지고서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거에 대한 충분한 답은 아니에요.
뒤에 더 나올 것 같은데 하여튼 들뢰즈가 보기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고 할 적에 이 넘어서라는 것이라는 건
쾌락원칙의 지배를 안받는 게 있다. 예외가 있다. 쾌락원칙의 바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쾌락이라고 하는
걸 원리로 만들어 주는 원칙의 레벨로 만들어 주는 어떤 규정들, 조건들에 대한 얘기이다.
그럼 프로이드의 답변에 따르면 그것은 뭐냐, 자유로운 차이로서의 흥분은 이때 자유롭다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의미죠 그죠? 통제가 안 되는 거지. 자유는 자유로서의 흥분은 말하자면 집중이 일어나고 묶이고 결박되어야
하며, 그 결과 흥분이 체계적으로 체계적이라는 말이 중요하죠. 체계적으로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
그니까 프로이트가 쓰는 말 중에 아주 중요한 용어가 카텍시스(Cathexis)라는 말이죠. 카텍시스. 리비도 집중,
리비도 집중. 영어로는 investment라고 해요. 보통 인베스터먼트란 말이 경제학에서 말하면 투자지 투자
리비도를 집중하는 거지.
그니까 그냥 경험적으로 그냥 그때그때 여기저기에서 쾌락이 해소되는 그 선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리비도가 이렇게 어떤 일정하게 묶이고 체계화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흥분이 흥분이라고
하는 게 그냥 단순한 의미에서 여기저기 해소되는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
체계적으로, 체계적이란 단어에 방점을 찍어야 되겠죠.
그러니까 흥분의 해소. 그 개별적인 해소가 아니라 카텍시스를 통해서 리비도를 집중함으로써 어딘가에 흥분이
벌어지면 거기다 집중하고 여기에 흥분하면 거기에 집중하고 이런 식으로 집중함으로써 흥분이 아주 체계적
으로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흥분이라고 하는 게.
이런 묶기 또는 리비도 집중을 통해서. 이 때 집중이라고 하는 것, 집중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앞에서 1, 2, 3 절
에서 공부한 개념으로는 이게 뭐에 해당하는 걸까요. 수축 이죠, 수축. 종합 그거에요. contraction. 그니까 앞
에서 했던 시간의 세 가지 조합, 그 문제의식 그 맥락이 이어지는 거예요. 이쪽으로 묶기, 집중 이런 말은 결국은
앞의 걸로 말하면 신서시즈죠. 종합 컨트랙션. 수축을 통해서 비로소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
으로라는 말도 방점을 찍어야죠. 그죠? "체계적으로 일반적으로 되는 것은 쾌락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이
택하는 원리적인 가치이다."
그러니까 그냥 어떤 여기저기에서 해소가 일어나는 경험적 현상들 그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리비도라는 놈이
적절하게 집중함으로써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흥분을 체계적으로 해소시켜 나가는 맥락이 될 적에 그 때에
비로소 쾌락이라는 말은 그냥 어떤 특정한 그 해소를 가리키는 거라기보다는 해소 일반 그렇게 해소시켜
나가는 기능 전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럴 때 쾌락이라고 하는 건 어떤 원리적인 가치로 이행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분산적인 해소의 상황에서 어떤
통합의 국면으로 통합적 해소의 국면으로 어떤 체계적인 해소의 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통합의 국면은
이를 통해서 이드의 두 번째 층 이드라는 게 강도가 흥분이 막 왔다 갔다 하고 여기저기서 해소가 발생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해소가 리비도 집중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이렇게 일괄적으로 잘 진행이 되는 그런 어떤 오거나
이제이션되는 첫 번째 단계가 구성이 된다.
▲ 프로이트와 들뢰즈 - 정신분석학과 존재론의 담론 층위
그러니까 아까 내가 존재론 얘기하고 정신분석학 얘기했는데 최근의 인제 우리 지식계에 나타난 하나의 그 갈래
라고 그럴까 동향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라깡주의와 들뢰즈주의의 충돌이에요. 지금 현재 라깡을 이어받고
있는 게 지젝이지요. 지젝하고 그 사람 또 거꾸로 가면 헤겔을 갖고 오거든. 헤겔, 라깡, 지젝 이 라인 하고 들뢰즈
이 라인의 유명한 충돌인데 그게 우리한테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데 우리나라에. 이걸 생각할 적에 항상 생각할건 뭐냐 하면 담론들의 층이
다르다는 걸 아주 섬세하게 봐야 해요. 존재론하고 정신분석학은 서로 다른 층에 있는 담론들이에요. 다른 층
에서 이렇게. 같이 갖다 붙이는 거는 아주 혼란스러운 논의가 되는 거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논의가 되는 거지.
담론이라고 하는 게 아주 구체적임 담론이 있고 추상적인 담론이 있어요. 층위가 여러 층위가 이렇게
있고. 가장 구체적인 담론은 문학하고 역사죠. 문학은 이제 픽션이니까 잠깐 빼고 역사지. 역사라는 건 뭐예요?
역사라는 건 누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카이자르가 언제 B.C. 몇 년에, 공화정말기 몇 년에, 어디를,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게 어디 있어 제일 구체적인 거지. 역사라는 게. 특정한 계층, 어떤 고유명사를 가진
날씨 장소 사건. 역사라는 게 가장 구체적인 거야.
그리고 이제 조금 추상적이 되면 사회과학도 있고 자연과학도 있고 존재론도 있고, 있는데 존재론이라는 건 어떤
영역을 다루는 어떤 과학이 아니거든. 사이언스가 아니거든. 그냥 어떤 프린서플들을 검토하는 일종의 활동이
에요. 존재론이라는 그런 어떤 특정분과가 있는 게 아니지. 존재론이야 뭐 물리학자가 존재론 할 수 도 있는
거고 심리학자가 존재론 할 수도 있고 화가가 존재론 할 수 도 있는 거예요.
존재론이란 무슨 개별적인 담론은 없지. 이 사람들은 그냥 존재론적인 어떤 사유가 있는 거예요. 그냥 사유가.
존재론이란 건 아까도 얘기했지. ‘무(無)’같은 거 얘기했잖아. 심리학자도 무를 얘기할 수 있고 뭐 물리학자들 다
얘기할 수 있어. 그런 것 들은 아주 추상적으로 엡스트랙트하게 얘기하는 게 좁은 의미의 존재론자들이지.
좁은 의미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하는 건 일단 어떤 특정한 영역을 다루는 거란 말이야. 그렇게 막연한 얘기가 아니라 인간
심리를 정신분석학이라고 특정한 어떤 영역을 다루는 담론이죠. 그러니까 이건 존재론과 정신분석학을 갖다
이렇게 부딪히는 건 마치 뭐라 그럴까. 예술과 분자생물학? 짝이 안 맞잖아. 이게. 뭐 과학과 미래파 예컨대 뭐
무슨 얘기야 이게 지금 뭐가 안 맞잖아. 이게 짝이 안 맞아. 예를 들어서 정신분석학과 현상학. 이러면 말이 돼.
그러면 그럼 말이 돼. 정신분석학과 맑시즘. 아 그건 말이 돼. 근데 존재론과 정신분석학은 짝이 안 맞아. 이게
뭐 짝을 맞혀놓고 싸워야 될 거 아냐.
그래서 라깡이냐, 들뢰즈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건 다른 문제고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거는 누가 맞느냐 이런
거는 얘기해보면 되겠지. 그게 아니라 항상 여러분들이 담론을 볼 때에 그 담론의 성격이 뭐냐를 잘 봐야 돼.
담론의 성격이 뭐고, 어떤 층위에서 요게 요렇게, 요렇게 더 구체적이냐 요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요거를 그 층에
요렇게 맞춰서 해야 돼. 그래야 뭐가 의미 있는 논쟁이 되고 뭐가 손에 남는 뭐가 되는 것이지, 짝도 안 맞는 걸
혼란스럽게 앞뒤도 안 맞게 얘기하는 건 그건 뭐 아무것도 없는 얘기가 되는 거죠.
최근에 그런 문제의식이 있는데 아무 접점도 없고 뭐 반론도 없고 서로 그냥 괜히 감정만 상하는 거지.
이런 대목도 여러분이 잘 보세요. 열심히 보면 들뢰즈란 사람이 프로이트라는 어떤 구체적인, 프로이트의 사유는
아주 구체적인 거거든요. 프로이트는 의사 아냐? 의사고 임상. 실제 사람을 두고 임상을 하는 사람이고 그죠?
물론 이 사람 프로이트 말년에 가면 그 사상가로서의 프로이트 약간 딴 얘기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누구 특정한
개인을 붙들고 씨름하는 의사란 말이야. 이 사람이.
근데 이 사람이 그 얘기를 자기 맥락으로 바꿔버리는 거야. 이렇게 읽어보면 자기의 어떤 층위를 자기의 맥락과
층위로 삭 다 바꿔서 얘기하는 거지. 그런 걸 유심히 봐야 합니다. 잘 봐야 해. 왜곡도 있을 수 있고, 그런 과정
에서 원래의 맥락하고 상당히 비튼 그런 경우도 있고. 특히 대가라는 사람일수록 더 그래요.
그러니까 평범한 학자는 훨씬 덜 그래. 평범한 학자는 그냥 그 사람을 그대로 해 주는 데 이른바 거장이라는
사람들은 다 자기 걸로 만들거든 전부 다. 다 자기거로 만들어. 더 잘 만들어서 오히려 그런 걸 잘 봐야 되는 거지.
이 사람은 프로이트를 요렇게 요리하고 있구나. 요기서 싹 비틀고 있구나. 이런 걸 잘 봐야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