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득락(離苦得樂)ㆍ발고여락(拔苦與樂)>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은 없애고 더불어 즐거움을 준다는 말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樂)을 얻는 것을 말한다.
중생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준다는 발고여락(拔苦與樂)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 낙(樂)이란 욕계 세상의 즐거움이 아니라 궁극적인 행복과 대자유를 말한다.
모든 생명체의 삶은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과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만 진행된다.
바로 "이고득락"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 동물, 곤충, 식물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불교의 목적이란 중생이 고(苦)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것, 일상을 통해서 그 많고 많은 인생사 중에서 일어나는 온갖 장애물들,
온갖 병통들, 온갖 고뇌들, 온갖 번뇌들이 끊임없이 여름날 저 먹구름 일어나듯이 계속 일어나는데,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 해탈하는 길, 그것이 바로 이고득락이다.
불교는 스스로 삶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락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뜻에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가르침이라고도 하고,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해 즐거움을 베푸는 종교라는 뜻에서 발고여락(拔苦與樂)의 가르침이라고도 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그 말처럼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복락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즉, 이고득락(離苦得樂)은 모든 중생이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
고통을 버리고 기쁨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람을 말한다.
모든 중생이 고통과 번뇌 망상 등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진리)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원할 때 흔히 쓰는 말로서,
고통을 버리고 기쁨을 얻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근본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사찰에는 법당 앞이나 일주문 왼쪽에 범종각(梵鐘閣)이 보이는데,
새벽과 저녁 예불에 앞서 종을 친다. 종을 칠 때는 언제나 지옥을 없애는 뜻을 담은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의 종송(鐘誦)」을 한다.
특히 새벽 종송 때는 항상 지옥도ㆍ아귀도ㆍ축생도ㆍ수라방생도(修羅傍生道)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이
"이 종소리 듣고 고통을 여의어 기쁨을 얻을지어다(聞此鐘聲離苦得樂)"고 하는 이고득락의 후렴 진언으로 끝을 맺는다.
※수라방생도(修羅傍生道)---수라(修羅)는 진심(瞋心)을 내어 전쟁을 일삼는 것을 말하고,
방생(傍生)은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며 음식을 다투고 서로 해치는 것을 말한다.
이고득락은 모든 중생이 6개의 지옥, 이 가운데서도 특히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한
지옥도⋅아귀도⋅축생도의 삼악도(三惡道)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외는 중요한 진언이다. 불교의 49재(齋) 의식 가운데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인
영산재(靈山齋) 역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함께 불법을 깨달아 고통이 없는
기쁨의 세계에이르기를 발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중생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준다는
'발고여락(拔苦與樂)'도 같은 뜻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 것,
즉 번뇌 망상이나 인간세상의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樂)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발고여락(拔苦與樂)
역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란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발고여락은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고
낙을 주는 자비(慈悲)을 말한다.
발고는 비(悲)의 덕,
여락은 자(慈)의 덕이다.
괴로움을 완전히 뽑아버려
중생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시는 부처님의 작용,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구체적 실천을 말하며,
중생 개개인에게는 열반이 실현됨을 말한다.
‘발고(拔苦)’는 고통을 뽑아낸다는 뜻이고, ‘여락(餘樂)’이란 여유 있게 즐긴다는 뜻이다.
즉, 자비로써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즉, ‘발고여락’은 ‘자비’의 구체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일을 말한다.
자비(慈悲)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마이트리(maitri ; 자/慈)’와
‘카루나(karun.ā ; 비/悲)’에서 생긴 말이다.
마이트리는 ‘벗’을 뜻하는 ‘미트라’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최고의 우정을 가리킨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정을 지니는 일이 ‘자(慈)’이다.
그리고 카루나는 타인의 슬픔을 동정하는 일이고,
‘비(悲)’는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그 본디의 뜻은 ‘신음’이고 인생의 괴로움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내는 일이다.
벗의 고뇌에 동감하고 고통을 없애주려는 동정심을 ‘비’라고 한다.
즉,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없애주려는 참된 우정을 자비라고 한다.
용수(龍樹)의 <대지도론>에 부처나 보살의 대자(大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 대비(大悲)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뽑아내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자비를 뜻하는데,
여기서부터 자비의 본질이 발고여락(拔苦與樂)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자비는 지혜와 더불어 부처가 갖추고 있는 덕(德)이다. 자비는 빈부나 신분,
지위 등 온갖 차별을 넘어서 전 인류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 평등성이 자비의 큰 특징이다.
초기 불교 경전 <숫다니파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자비의 마음을 미치게 할지어다 라고 했다.
다음은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큰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부자가 살고 있는 집은 크고 넓은 저택이기는 하였으나 오래 되어서
집이 많이 헐었었다. 어느 때, 그 부자가 외출한 사이에 그 집에 불이 났다.그 부자가 외출에서 돌아와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그 집 안에는 여러 철모르는 아들들이 놀고 있었다. 더욱이 아이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뛰노는데
정신이 없었다.아버지는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애써 보았지만, 아이들은 불이 무엇인지 어떤 위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오직 희희낙락 뛰노는 데만 골몰 했다.
아버지는 한 가지 방편을 생각을 하고 아이들이 평소에 희망하던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를 문 밖에 준비했으니,
문 밖으로 나와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좋아하면서 모두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문 밖에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아닌,
더 크고 좋은 흰 소가 끄는 수레(白牛車)가 준비돼 있었다.
이 큰 흰 소가 끄는 수레(白牛車)는 세상에서 잘 볼 수 없는
칠보로 장엄 된 훌륭한 수레였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세상에도
드문 큰 흰 소가 끄는 훌륭한 수레를 선사한 것이다.
아이들은 뜻하지도 않았던 큰 수레를 선물로 받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것이 화택삼거(火宅三車)의 비유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아이들은 중생이다.
이 일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괴로움을 없이 하는 발고(拔苦)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까지 주는 여락(與樂)에 미치고 있음을 설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위험을 구제해주고, 나아가서 즐거움마저 준 것이 이러한 비유이다.
우리의 괴로움을 없이 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근본인 미혹을 제거하는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현세안은(現世安隱)의 즐거움, 곧 현법열반(現法涅槃)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고여락은 불교의 목적이자 목표이며, 열반의 실현을 말하고 있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이나 발고여락(拔苦與樂)은
요익중생(饒益衆生)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요익중생은 ‘널리 모든 중생들에게 행복과 이익을 준다’는 뜻이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는 말이 곧 보살행이요,
자비행이며, 이타행이다. 그래서 특히 <화엄경>에 많이 나온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여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의미)’에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이익(도움)을 주기 위해서다”라고 했고,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의미를 ‘중생제도’ 즉 ‘이타행’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바로 이고득락(離苦得樂) 요익중생(饒益衆生)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체득하고, 그 다음은 괴로움에서 벗어난 뒤 모든 이에게 유익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가 없다면 애초에 수행은 필요가 없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요(饒)’는 넉넉할 요, ‘익(益)’은 더할 익이다. 그래서 중생을 넉넉하게 이익 되게 한다, 남을 이익 되게 하면 나도 저절로 좋아진다는 말로서, 자리이타(自利利他)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즉,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워야 하니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고, 남이 잘 돼야 나도 잘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법, 이러한 진실이 일체중생에게 다 있지만, 중생들을 이 법을 버리고 자기 생각, 분별을 믿기 때문에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분별에 빠져 사는 중생들을 그 분별에서 건져내 주고, 괴로움을 건너게 해 주며,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이익중생(利益衆生), 요익중생(饒益衆生)이다. 이렇듯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법공양이고
보시이다.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나를 이익 되게 하는 것과 같다. 주는 것이 곧 내가 받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나누는 것이 내가 나중에 받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힘들 때 도와주면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이다.이러한 이치가 우주를 운행시키기 때문에 일체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이익 되게 하는 것과 같다. 근원에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니 너를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다.
이 불이법(不二法)의 실천이야말로 참된 공양이다. 둘이 아니기에 이익중생의 공양을 올리지만, 공양하되 공양한 바가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기 되는 것이다.부처님께서 결코 깨달음에만 머무르지 않으시고 평생을 길 위에서 전법을 하신 뜻은 뭇 생명의 요익과 안락, 그리고 평안과 평화를 위함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심각한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사회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투쟁적인 것은 편견과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소아적인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행,
이타적인 삶이 곧
이고득락(離苦得樂)이고,
발고여락(拔苦與樂)이며,
요익중생(饒益衆生)이고,
현법열반(現法涅槃)의 길이다.
※현법열반(現法涅槃)---다음은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M130)>에 나오는 게송이다.
「안온에 도달해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M130)」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 열반은 이 세상을 떠나 저 멀리 피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고, 현세에서 열반을 증득하는 데에 있다. 어떤 사람은
열반을 죽어서 얻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열반은 살아 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획득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는 것, 즉 생천(生天)을 이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이것을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