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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면서 너무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이고 무더위 가운데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교회에 들어올 때도 복도를 딱 들어서는 순간 턱 막히지 않으셨어요? 아무튼 이 무더위가 다음 주는 넘어가야 좀 꺾인다는 그런 소리가 있는데 조금만 더 견디시고 이 과정들 속에서 강건함을 더욱더 우리 모두가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돌아보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1장 1절과 2절을 지금 몇 주 동안 계속 하고 있는 중인데요. 사도행전 1장 1절과 2절은 누가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했던 것들을 압축해 놓은 그런 짧은 문장이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이 땅에서 하신 게 뭐라고요?
행하셨다. 그리고 그다음이 가르치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택하셨다. 그리고 성령으로 명하셨다.
이 내용들을 이렇게 묵상하면서 이게 우리 성도들 우리가 이 말씀 이 문장 하나하나가 주는 교훈들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가는 백성이고 주님의 제자이니까요. 주님이 이 땅 가운데 행하신 것들을 우리도 행하고 주님이 가르치신 것들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받고 우리도 가르치는 삶을 살며 또한 우리는 택함 받은 사도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성령의 명하심을 늘 귀기울이며 그 가운데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가 참 어렵다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나라 말은 이렇게 존댓말과 반말이 같이 사용되거든요. 그래서 손 윗사람에게는 존댓말을 그리고 손 아랫사람들에게는 반말을 이렇게 구분하여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우리 말을 이중 구조를 가진 말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윗사람들에게는 존중 존댓말 그리고 아랫사람들에게는 반말 이중 구조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이 누가 봐도 어른들 앞에서 그 어른들을 존중하고 존댓말을 하는 것 아름다운 예의 문화가 우리나라 가운데 있게 한 하나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이중적인 우리 말이 만들어 놓은 또 여러 가지 잘못된 단점도 있어요. 여러분 유치원 때 아이들을 보면요. 애들이 위아래가 없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위아래가 없잖아요. 그렇죠 애들이 위아래가 없어요. 그때는 뭐 한 살 두 살 차이 그런 것도 별로 상관없고 너 나 우리 이런 이 정도의 수준으로 대화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함께 뛰놀았던 그런 몇 살 차이 나는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딱 들어가는 순간부터 배우기 시작하는 게 뭐예요?
이제 존댓말을 배웁니다. 그러다 보면 상급생들하고의 이 언어가 단절돼요. 왜냐하면 상급생들하고 말하려면 존댓말을 써야 된다라고 하는 게 이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거죠.
근데 여러분 중학교를 들어가면 이제 이게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서 존댓말을 안 썼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이제 생기겠죠. 그렇다고 상급생들은 하급생들에게 존댓말을 씁니까? 상급생은 하급생들에게 하대합니다. 반말 마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하듯이 반말을 하고 그들을 하대하죠. 그리고 학급생들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게 합니다. 불과 12개월도 차이 나지 않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은 심지어 12월생도 있고 1월생이 있으면 며칠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이들이 서로 자기 나이로 인해서 그렇게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1살이라고 하는 나이가요.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기준점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댓말과 반말 이 언어가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닫아놓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라고 하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6년, 중학교 고등학교 6년, 그렇게 12년 동안 우리 아이들은 고작 자기 나이하고 똑같은 또래 아이들하고만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춘기에 집중적으로 아이들이 더 친구 중심의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서로 상급생 하급생이 융화되지 못하고 서로 자기끼리끼리 또래끼리만 어울리는 문화입니다.
근데 이게 대학교에 들어가고 또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면 사회생활을 할 때 그대로 연장돼요. 우리 첫째 아이가 대학교에 들어가든요. 엄마 아빠한테는 되게 편안하게 말을 하거든요. 근데 선배님 선배님 님자를 꼭 붙이더라고요. 선배님들이 뭐 해주셨어요? 선배님들이 막 벌써 대학사에 들어가니 이제 거기에서는 이 사과 구조가 확실하게 더 명확한 거죠. 어쩌면 평생을 같이 가야 될 그룹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더 상하 구조가 더 분명한 겁니다.
직장에서는 더 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일반적인 우리는 보통 처음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뭘 물어봐요? 나이를 물어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게 특이한 문화 중에 하나래요 나이를 먼저 물어봐요. 그래서 상대방과 내가 누가 더 높은가를 따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조금 그 사람보다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으면 내가 나는 좀 편안하게 말을 해도 되고 또 나는 그렇지 않으면 존댓말을 써야 되고 근데 이런 수직적인 관계를 만들어 놓는 요인 중 하나가 이중적인 언어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근데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대화를 편안하게 오고 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 백악관의 비서관들이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 비서관들은요 나이하고 상관없이 그리고 대통령이 최고의 대통령이 상관이지 않습니까? 대통령과 또 어떤 직분과 상관없이 그들은 경어와 반말을 구분 없이 사용하면서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안에서 굉장히 다양한 말들이 오고 가고 그리고 의견들이 서로 주고받는 과정들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대통령이 딱 되고 나면 나이가 어리든 많든 대통령을 뭐라고 그러나요? 각하 각하라고 하고요. 그리고 대통령은 일단 제일 높은 자리라고 생각을 하니까 비서관들에게 말을 쉽게 낮추죠.
여러분 이런 관계에서 토론을 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토론에서 편안하게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는 그룹과 이 경어를 써가면서 반말을 써가면서 하는 이 상하 구조에 있는 구조에서의 나누는 대화와 차이가 엄청 많을 겁니다. 기업체도 마찬가지죠. 요즘 그래서 좀 신세대 기업 뭔가 이렇게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그런 기업들은요. 이런 직책을 부르지 않고 옛날 무슨 과장님 무슨 부장님 이런 직책을 불렀잖아요.
근데 지금은 그냥 아예 누구누구님 이렇게 부르는 그런 사업체들도 많대요. 그래서 서로 존칭어를 쓸 수 있도록 여러분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가 원활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가 또 여기에도 포함되어 있다는 그런 결과물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무의식 중에 자식은 내 말을 들어야 할 사람, 내 명령을 따라야 할 사람,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할 사람으로 여기는 그러한 수직적인 관계로 여긴다면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자기의 속을 온전히 내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사회 안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직적인 문화가 굉장히 많습니다.
근데 그것은 우리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이 몸된 교회 안에서도 그 사회적인 이 분위기가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나이에 따라 직분에 따라 여러분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요. 이런 수직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럴 때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우대하는 그런 문화 가운데 서로 진정한 나눔과 사랑의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이제 마지막으로 1장 1절과 2절 말씀을 통해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 이 누가복음 본문에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수신자로 되어 있는 데오빌로에 관해서 이 시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복음도 사도행전도 이 데오빌로라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록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약간 이상한 게 있습니다. 두 군데의 말씀을 이렇게 비교해 보면요. 누가복음에서는 이 데오빌로를 향해서 데오빌로 각하라고 말씀을 해요. 그래서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보면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 각하라는 말을 썼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각하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 각하라는 말이요. 크라티스토스라고 하는 원어를 사용했는데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단어인데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총독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데오빌로를 제외하면 벨릭스라든지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에게만 이 각하라는 말이 사용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이 신약 성경에 쓰여질 당시의 모습은요. 2천 년 전에 이 이스라엘은요. 로마 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철저하게 계급 중심의 사회이고요. 그리고 수직적인 사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은 그 안에 식민지예요. 그러니까 최상위권에 있는 그것도 총독 이상의 그런 직책을 가지고 있는 데오빌로 그 사람은 어쩌면 저 밑에 있는 식민지의 백성 가운데 하나인 누가에게는 이건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유대인인 누가가 누가 복음을 기록할 때 당시에 데어빌로 각하라고 그 존칭을 쓴 이유는 서로 동등한 입장이 아니고 내가 당신을 높여야 하는 입장. 그런 관계로 누가 복음을 수직적인 관계로 기록했다면 사도행전에서는 그렇게 높이 있었던 데오빌로를 이제는 각하라는 존칭 없이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동등한 입장에서 사용하는 그 모습을 오늘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게 된 데오빌로가 이제는 서로 격이 없는 그러한 수평적인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여전히 지금 로마의 고위 관리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과 누가와의 관계가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지금 이게 아주 별것 아닌 미묘한 차이 같지만요.
현재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요. 연약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전달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요. 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은 필요합니다. 그 누군가에게도 이 땅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복음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요. 교회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이 신분 고하에 막론하고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뛰어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평적인 대등한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번 우리가 말씀을 통해 기억하길 원합니다.
데오빌로라고 하는 그 이름의 뜻도 살펴보면요.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라고 하는 말과 그리고 사랑과 친구를 의미하는 휠로스라고 하는 말이 합해져서 이 데오빌로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데오빌로의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 하나님의 친구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한 그리고 모든 사람을 자신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존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입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친구가 됨을 이 데오빌로라고 하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우대받고 또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이 우대받는 그런 세상의 문화가 교회 안에서 있으면 안 돼요.
예전에 제가 경험했던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는요. 정말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한 교회예요. 교회 성도가 천 명이 넘습니다. 교회도 엄청나게 큰 규모로 지었어요.
그런데 교회가 신기하게 생겼어요. 대로를 중심으로 교회가 있는 쪽은 아주 으리으리한 아파트 단지가 있는 그리고 대로를 건너면 예전 구도시가 있는 그런 지역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한 삶을 살고 있고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데 이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바자회를 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이쪽 사람들이 우리는 몸으로 일하는 거 잘 못해 우리는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셨으니까 우리는 돈으로 우리는 일할래 자기들이 돈을 재정적인 거를 감당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그러면 우리는 돈이 없고 우리는 몸이 있으니 우리는 몸으로 하겠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뭔가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런 것도 있구나 은사니까 물질도 은사니까 은사로 섬기고 또 이쪽 분들은 물질은 없고 건강이 있으니 건강으로 섬기고 그런가 보다 그랬는데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깨워지더라고요. 제가 그걸 봤어요. 물론 이쪽 분들이 몸이 아파서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이쪽 분들은 물질이 없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근데 중요한 거는 이제 이게 고정화되기 시작하고 이게 어느 순간 어느 사람들이 눈치를 더 보겠어요? 어느 쪽 부류의 사람들이 조금 약간 뭔가 자괴감을 느끼면서 눈치를 보겠냐고 똑같은 교회 공동체 주체인데 물질을 내지 않고 몸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중에 좀 그런 마음들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쪽 사람들은 뭔가 자기들은 더 큰일을 한 것 같고 근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동일한 일을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내가 더 큰 일을 했어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했으면 처음의 의도는 저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겠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그러면 아름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변질이 일어나니까요. 어그러지더라고요.
여러분 교회는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밖에서 가난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는요. 부유한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그게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도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쓸 때 그때 이렇게 명합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무난하여라.
그리고 베드로 사도도 역시 베드로전서를 보면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무난하여라 이 명령을 내리거든요.
근데 이것도 그 당시의 문화를 좀 이해하면 왜 이 명령을 내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 가운데는요. 상류사회의 인사법은 서로 입을 맞추면서 인사를 하는 게 상류층의 인사법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낮은 사람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그 당시에는 사회 자체가 상하관계가 있다고 그랬으니까요. 저 낮은 사람들 있잖아요. 가난하고 가진 것 없고 종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높은 지체의 사람을 만나면 손등이나 발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 나누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인사법이 교회 안에서 이제 다양한 부류가 모이는 공동체가 됐잖아요. 근데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부유한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는데 가난한 사람하고 만나면 그 밖에서 만나서 인사하는 것처럼 손등 발등에 인사를 하는 그런 인사법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 거 그러니까 베드로와 바울은 이건 잘못된 거라고 지적하면서 지위가 낮은 사람도 격식을 갖추어서 서로 거룩하게 입맞춤하며 인사해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일한 백성이 되었다.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우리는 동등한 인간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비부심과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각자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여러분들 자녀들에게 친구 사귈 때 어떤 친구 사귀라 이렇게 여러분들 조언할 때 있지 않으십니까?
친구들 만날 때 야 너보다 공부 못하는 애들 만나라. 야 우리보다 형편 안 좋은 사람들 만나라. 야 너보다 더 놀러 다니는 아이를 만나라.
이런 부모가 있을까요? 대부분 부모들은 더 너보다 좀 나은 사람들을 만나라. 아마 그런 조언들을 할 거예요. 행여 수준 미달이라고 여겨지는 친구를 사귈지라도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면 가차 없이 뭐라고 하죠?
야 너 저 친구 만나다가 너 너 이상해져라고 나무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다고요? 형편없는 죄인인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전적으로 순종하여서 우리 같은 죄인과 친구 되어 주셨습니다. 수준 미달의 친구들도 그래 친구니까 존귀하게 여기고 그 아이들하고 잘 지내라고 가르치는 인격적인 부모도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 수준 미달의 친구와 앞으로 너 동력자로 살아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아들과 교제하게 하셨다라는 교제한다는 말을 사용했잖아요. 이 교제라는 말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썼는데요.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동역자를 뜻하는 코이노노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됐습니다. 그러니까 교제한다는 말은 서로 동역자로서의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단순히 교제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관계, 친구의 관계를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당연히 수직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창조주와 피조물인데요. 근데 이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어줬어요. 우리를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또 여기에 있습니다. 나와 같이 부족한 자, 나와 같이 연약한 사람을 하나님은 동등한 관계로 여기시고 나를 세워주셨다. 동역자로 삼아주신 그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힘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 옆에 있는 우리 동력자들과의 관계도 이와 동일한 관계를 우리는 맺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우리 이 사회 가운데 있는 이 수직적인 문화를 우리가 깨뜨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온전히 이루어야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요. 이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까 언어적인 걸로만 이야기드렸지만 또 군대 문화도 우리나라의 굉장히 큰 문화 중에 하나거든요. 그러니까 수직적인 문화예요. 계급이 위아래를 나누지 않습니까?
근데 이런 문화가 교회 안에 직분이 계급이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기는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분을 봉사의 직분이라고 분명히 표현을 하는데 중요한 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때 성도보다 집사가 더 높고 집사보다 안수집사 권사님이 더 높고 그보다 장로가 더 높고 그보다 목회자가 더 높고 이런 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막 인식화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이 또 그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건 계급 제도의 덫에 빠져버린 우리의 모습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제도 안에 살았던 우리나라가 또 군대 문화가 가득해 있는 이 나라 가운데 이 기독교가 변질되는 그런 모습들이 분명히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우리가 임직식을 앞두고 있는데요. 임직은 교회 안에 직분자를 세우는 그 과정 속에서 계급을 높여주는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고하고 애쓰셨으니까 더 높은 계급을 가지고 이제 교회 안에서 활동하십시오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귀한 직분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또 더욱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일에 더 힘써보자라는 차원에서의 직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수직적이고 계급화된 인간관계 안에서는 참된 사랑이나 봉사가 불가능합니다. 그거는 지시하고요.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는 그런 관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을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고 또 동역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요 나이에 따라서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나는 어른이야가 아니고요. 내가 직분이 내가 있으니까 내가 어른이야가 아니고요.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그 초대교회에 계급을 의식하지 않고 노예와도 거룩한 입맞춤을 하며 인사 나눴던 초대교회의 사람들처럼 우리 교회가 우리 안에 있는 각자의 계급장을 내려놓고 정말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그래서 우리 장년들이 다음 세대를 바라볼 때도 그렇게 한 영혼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더 발견하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데오빌로는요 복음을 받을 때 당시에 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는 그 각하라고 하는 계급장이 이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누가와 더불어 사도행전의 막을 여는 그런 참된 교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새로운 데오빌로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세상 가운데 여러 가지 형태의 계급장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들을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내려놓고 우리 안에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세워지지 않도록 그리고 더욱더 서로 이 시대에 데오빌러와 같이 더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함께 동등한 입장을 만드는 그런 우리 교회 안의 문화가 일어나서 정말 우리 교회에는 그 누구와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우리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