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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584. [역경의 열매] 박종석 (1-20) LG맨으로 30여년, 쉼 없이 즐겁게 일하던 어느날…
TV 이어 스마트폰 업무 맡아 각고의 노력
번아웃으로 어느 순간 몸에 이상 증세
“제가 뭘 잘못했나요” 원망하다 답 찾아
박종석 엔젤식스플러스 대표가 지난달 19일 서울 서초구 엔젤식스 사무실에서 LG이노텍 은퇴 후 자신의 삶과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최근 LG전자가 스마트폰 사업 철수를 발표했을 때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LG전자 스마트폰은 늦둥이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LG에서의 38년을 돌이켜 보니 2019년 LG이노텍 대표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 LG맨으로 살면서 꽤나 즐겁게 일했던 듯싶다.
즐겁게 일하니 성과가 따라왔다. 해외 가전업체들이 장악하던 텔레비전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전 세계 디지털TV 시장을 선도하는 데 일조했다.
텔레비전만 만들던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업무는 스마트폰이었다. 당시 LG전자 스마트폰은 경쟁사에 밀려 고전했다. 퇴근할 때면 가방 안에 경쟁사 스마트폰까지 담아 집으로 갔다. 직접 써보며 고민했다. 후발주자인 만큼 직원들이 쏟아내는 아이디어도 일일이 검토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아 소비자도, 경쟁사도 모르는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를 찾기 위해 임직원들과 불철주야 노력했다. 다행히 몇몇 제품에 대한 시장 반응은 좋았다. 실적도 점차 좋아졌다. 이른 감은 있지만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쉼 없이 일하면서도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평가를 받는 과정이 엔지니어 경영자인 내 적성에 맞았던 듯 싶다.
어느 순간 내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은 진단명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나 역시 몸이 몹시 힘드니 ‘번 아웃’ 증후군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었다. 잠을 잘 수 없었고, 심장이 두근거렸으며 화기가 몸 안에 남아있는 듯 했다. 회사는 그런 나에게 1년간 회복의 시간을 줬다. 언론은 스마트폰 사업이 제자리를 잡아가던 그때 이유도 알리지 않고 떠난 나를 두고 추측과 억측을 쏟아냈다.
휴식의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즐겁게 일했는데도 번 아웃이 왔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뭘 잘못했냐며 하나님께 원망했다. 답을 찾았다. 나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숭배했고 교만했다. 우상은 스마트폰이었다.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믿는 교만도 있었다.
하나님은 ‘나의 시간’ 대신 ‘하나님의 시간’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기적 같은 체험을 통해 한시라도 빨리 업무에 복귀하려고 목사님을 만났고 기도원도 가 봤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휴지에 잉크가 번지듯 성경 말씀이 가슴에 깊이 스며드는 경험을 했다.
회사로 돌아간 나의 마지막 근무지는 LG이노텍이었고 은퇴는 갑자기 찾아왔다. 놀랍게도 일할 때 그렇게 즐거웠던 내가 은퇴한 뒤 더 재미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재미의 차이도 알게 됐다. 지금의 재미는 깨달음이 있는 재미라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알게 된 깨달음의 재미.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약력=1958년 충남 예산 출생. 81년 금성사(현 LG전자) 입사, 99년 디지털TV 연구소장(상무), 2008년 PDP TV 사업부장(부사장), 2010년 MC사업본부장, 2016년 LG이노텍 대표, 2019년~ LG 이노텍 자문 겸 엔젤식스플러스 대표
* [역경의 열매] 박종석 (1) LG맨으로 30여년, 쉼 없이 즐겁게 일하던 어느날…
* [역경의 열매] 박종석 (2) 갑작스런 고교 평준화에 반발… 반대 무릅쓰고 공고로
* [역경의 열매] 박종석 (3) 오디오 사업하던 어머니에게 "직접 만들자" 제안
* [역경의 열매] 박종석 (4) 사업 실패 후 공부로 목표 변경… 장학생으로 과학원 입학
* [역경의 열매] 박종석 (5) '산본 집성촌' 통해 신앙의 삶 시작… 행복했던 시절
* [역경의 열매] 박종석 (6) 갑자기 찾아온 어머니와의 이별… '찐 믿음' 계기 돼
* [역경의 열매] 박종석 (7) '디지털TV의 아버지' 백우현 박사와 TV 사업 선도
* [역경의 열매] 박종석 (8) 디지털TV 상용화까지 10년… 협업이 이뤄낸 쾌거
* [역경의 열매] 박종석 (9) 엔지니어 출신으로 회사 미래 성장 위한 중책 맡아
* [역경의 열매] 박종석 (10) 사업 승승장구 할수록 하나님과 거리는 점점 멀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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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종석 (13)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번아웃'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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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종석 (15) 잘 다니고 있는 회사 그만두라는 목사님 기도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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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종석 (19) 인생 3막, '엔젤식스플러스' 세워 창업자들 도와
* [역경의 열매] 박종석 (20·끝) 더 늦기 전 미래세대·자신 위해 믿음의 씨 뿌려야…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종석 (2) 갑작스런 고교 평준화에 반발… 반대 무릅쓰고 공고로
어릴 때부터 소신 강하고 엔지니어 기질
공고 졸업 후 본고사 없이 서울대 프리패스
한국과학원서 장학금 받으며 LG와 인연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1974년 2월 서울 영등포구 강남중학교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고백하건데 어릴 적부터 신앙의 깊이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와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 전부터 교회를 다니던 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지만 자녀에게 강요하진 않으셨다. 대신 교회에서 심방을 오면 늘 대문을 열었다. 나 역시 집에 온 교회 사람들이 찬송하면 따라 불렀고 같이 기도했다. 그때 기억이 지금 내 신앙의 뿌리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어린 나이임에도 엔지니어 기질만큼은 확실히 드러냈다. 손재주도 있고 만드는 걸 좋아하니 작동이 잘 되는 라디오를 뜯어 재조립하고 부엌에 있는 그릇과 집기들을 조합해 물건을 만들면서 어머니에게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증명하지 않으면 늘 의심했다. 중학생 땐 전도하러 집에 온 고등학생 형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며 증거를 요청했다. 당돌한 중학생 아이의 질문에 당황하던 그 형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봐서 공직의 길에 들어가기를 바라셨다. 엔지니어 기질만큼 강했던 게 자기 소신에 대한 확신이다. 확신은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중대한 결심을 했다. 공업고등학교 입학이었다.
공고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제도와 운에 내 인생을 맡기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중3이던 1973년 7월 정부는 학교 평준화를 하겠다며 시험을 보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입시 제도를 지역별 추첨으로 변경하고 즉시 적용했다. 일명 ‘뺑뺑이’였다. 두 번째 이유는 공고에 들어가 공대에 들어가는 걸 도전해 보고 싶었다.
나의 선택에 부모는 물론 학교도 말렸다. 당시 공고는 대학 진학보다 취업이 우선이었다. 성적이 꽤 괜찮았으니 다들 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용산공고에 입학해 실습교육을 충실히 받으며 입시 준비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됐다. 공고를 포함한 실업계 학생들도 대학에 갈 수 있게 정부가 대입 제도를 바꾼다는 얘기였다. 공고를 졸업했고 내신이 상위 30% 이내면 본고사 없이 예비고사만 보고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대입을 준비하던 터라 내신도, 예비고사 성적도 좋았다. 서울대 공과대학에 원서를 들이밀었더니 덜컥 합격했다.
‘난 재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본고사를 보지 않은 데 대한 미안함, 찜찜함이 공존했다.
대학 졸업할 즈음 찜찜함을 해소할 길을 찾았다. 대입 때 못 봤던 본고사를 대신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진학시험을 봤고 붙었다. 과학원에 들어갈 때는 LG 장학금을 받았다. 이때부터 LG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인간은 영적 존재다. 영에는 정체성, 성격도 포함되는데 나는 인간의 영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스마트폰에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을 깔아도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나 iOS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나의 OS는 책임감인 것 같다.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책임감 말이다. 과학원에 입학하면서 공고 진학 때 결심했던 목표와 도전을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3) 오디오 사업하던 어머니에게 “직접 만들자” 제안
미니 컴포넌트 제작… 시대에 너무 앞서
사업은 망했어도 경영자 마인드 얻어
신앙 옅어졌던 어머니 교회 다시 출석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1학년이던 1977년 어머니의 오디오 사업을 돕기 위해 미니 컴포넌트를 설계, 제작했다. 사진은 그때 만든 제품 중 하나로 박 대표 집에 있다.
대학 시절 나의 시간은 스스로 세운 삶의 목표에 나의 명철을 믿고 책임지는 시간이었다. 이는 믿음의 암흑기를 의미했다. 나는 공부와 사업이라는 다른 목표에 집중하며 살았다. 그 사이 하나님은 내 삶에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고 계셨다.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엔지니어, 경영자 기질을 물려주셨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했고 확신이 있으면 실행에 옮기던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오디오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 전기·전자산업의 중심이던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서 오디오를 구매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팔기만 하니 재미가 없었다. 서울대 공대생이 된 나는 어머니에게 “직접 만들자”고 제안했다. 어머니 역시 내 생각에 공감하며 의기투합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우리 사업체는 스타트업이었고, 나는 설계책임자인 CTO(최고기술경영자)였다. 공간 확보를 위해 오디오와 스피커 등을 하나로 합한 미니 컴포넌트 개념을 설계했다. 그때는 스피커와 오디오, 라디오를 따로 구비해야 했고 방 하나를 채울 정도로 공간을 차지했다. 미니 컴포넌트란 게 없던 시절이라 디자인부터 회로까지 모두 설계했다. 그때 만든 제품 중 하나가 아직도 나의 집에 있다.
지금 생각해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시대를 앞선 제품을 대기업도 아닌 스타트업에서 내놓은 게 문제였다.
사업은 ‘실전’, 말 그대로 전쟁이라는 걸 체감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피를 흘리듯 사업도 실전에서 패하면 돈을 잃는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사업은 패했고 돈을 잃었다. 그럼에도 얻은 게 있었다. 경영자 마인드였다. 사업을 할 때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강한 맷집을 키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덕분에 LG 경영진이 됐을 때도 위기의 순간 포기하지 않았다.
어찌됐건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우리 집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당시 어머니와 장남의 사업을 돕겠다며 공직에서 사퇴한 뒤였다. 어머니가 사업을 접으면서 졸지에 우리 집에선 돈 벌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됐다.
공교롭게도 어머니는 사업 실패 후 잠시 멀어졌던 신앙의 끈을 다시 잡았다. 어머니는 사업을 하면서 교회와 멀어졌다. 사업이 풀리지 않으면 교회 대신 무속신앙에 의지했다. 무속인을 만나 사업의 흥망을 점치기도 했다.
사업이 망하니 교회로 돌아온 건 어쩌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운명일 수도 있겠다. 어머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며 스스로 교만했고 사업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혔음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
이처럼 어머니의 신앙은 회복됐지만 나의 신앙은 말 그대로 암흑기였다. 교회는 나와 거리가 멀었다. 대학 1, 2학년 때는 어머니 사업이 내 삶의 전부였다. 사업이 망한 뒤로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교회에 다니라고 강요하지 않는 대신 묵묵히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믿음이란 상승과 하락이 있는 것 같다. 당시 나의 믿음은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어머니를 통해 그 바닥을 다지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4) 사업 실패 후 공부로 목표 변경… 장학생으로 과학원 입학
금성사 입사 월급 받으며 과학원서 공부
졸업 후 디지털TV 분야 연구원으로 근무
직원 대상 미국유학 첫 수혜자로 선발돼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1991년 5월 어머니의 기도, 아내의 헌신과 LG전자의 지원으로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은 학위수여식을 끝내고 전기공학과 건물 앞에서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찍은 모습.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나의 목표는 공부로 변경됐다. 그렇다고 마냥 공부만 할 순 없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으니 장남인 나도 경제적 보탬이 돼야 했다. 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산학장학생으로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거였다.
당시 정부는 과학인재 양성을 위해 특별법까지 제정해 과학원을 지원했다. 과학원도 경제와 산업 발전 기여라는 설립 취지에 맞게 국비 장학생과 산업체 출신의 산학장학생 제도를 운영했다. 기숙사를 제공했고 산학장학생에겐 소속 회사에서 월급도 줬다. 병역 특별조치로 현역복무는 10주 이내 군사 교육 소집으로 대체됐다.
1981년 2월 대학 졸업과 함께 지금의 LG전자인 금성사에 무난히 입사했다. 한 달 뒤엔 과학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LG전자 월급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 과학원은 교수도, 학생도 치열하게 공부하던 때였다. “과학원 1년차에 코피 한 번 안 쏟으면 과학원생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공부만 하니 돈 쓸 일은 없었고 교회에 갈 시간도 없었다. 월급봉투는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드렸다. 믿음 좋은 과학원 동기의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2년 뒤 과학원을 졸업한 나는 LG전자로 돌아가 당시 서울 구로구 소재 중앙연구소에서 디지털TV 분야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3년간 근무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지키고 나니 또 다시 공부의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LG전자엔 직원 대상의 유학 지원제도가 생겼다. 일명 국제전문인 양성과정이었다. 미래 LG전자의 국제화를 주도할 인재를 회사에서 키우자는 게 목표였다. 인사고과, 내부평가 등을 통해 선발했고 나는 첫 번째 수혜자였다. 86년 8월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 들어갔다.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타지 생활이 외로울 거란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4개월 뒤 아내와 큰 아들이 미국에 올 때까지 외롭지만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공부도 어렵지 않았다. 과학원에서 워낙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던 터라 미국 대학의 교육은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화와 언어도 점차 적응됐다.
특히 유학생을 위한 기혼자 아파트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인종은 다양했지만 타지에서 가족과 함께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그때 한국에서 온 한 유학생과 그의 가족을 만났다. 그 분은 얼굴부터 ‘믿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얼굴에 나타난다면 그 분의 얼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하게 생겼다. 어느 날 그 분이 나를 포함한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제안했다. 내 입에서 “그러시지요, 형님”이란 답이 튀어 나왔다. 성경공부는 자연스럽게 교회 출석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내는 교회에서 한글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큰 아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 사이 둘째 딸이 태어나는 기쁨도 경험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그때 나는 믿음 생활을 한 게 아니었다. 교회 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91년 5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교회 생활을 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5) ‘산본 집성촌’ 통해 신앙의 삶 시작… 행복했던 시절
교회 다니며 아들들 주께 인도한 할머니
여호수아처럼 기도하고 이뤄내신 어머니
어머니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목격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1991년 5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금성사(현 LG전자) 가전연구소의 HDTV 팀장으로 근무했다. 박 대표의 이름표와 달력에 금성사 마크가 선명하다.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위치한 금성사(현 LG전자) 가전연구소의 HDTV 팀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일상을 떠올리면 행복했다. 그때를 나는 ‘산본 집성촌’ 시절이라 말한다. 어머니는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였던 경기도 군포시 산본에 집을 마련하셨다. 나와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본가 근처에 모여 살았다. 집성촌이란 말이 나온 이유다.
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고 우연은 없다고 본다. 지금 내가 신앙의 삶을 사는 것도 우연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산본 집성촌’ 시절을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어머니가 산본으로 이사하며 집 근처 순복음엘림교회로 옮기면서 교회에 출석하시게 됐다. 엘림교회는 매 주일 위성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연결해 예배 드렸다. 아버지는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가슴 깊은 울림을 경험했고 이후 실업인모임에 가입해 봉사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당신의 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는 시골에서 어렵게 교회에 다니셨다.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제사도 드리지 않는 ‘막돼먹은’ 종교라 여겼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는 교회에 다니며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셨다.
아버지는 할머니 영향 반, 어머니 영향 반으로 교회에 가시게 됐다. 나 역시 한국에 와 산본에 살며 부모님과 엘림교회에 출석했다.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유학 시절 미국에서 교회에 다닌다는 내 얘기에 기뻐하셨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머니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이 절로 나왔다.
어머니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도 목격했다. 아들의 고등학교 배정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맏손자가 집과 가까운 학교에 배정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 원치 않은 추첨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섭섭함을 드러내며 투정을 부리셨다. 그리고 끝까지 매달리셨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교육 당국은 기존 추첨을 무효로 하고 재추첨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이뤄졌다.
성경엔 두 가지 기도 유형이 있는 듯하다. 여호수아 10장 12~14절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무조건 매달린다. 반대로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면 예수님은 본인이 원하는 걸 기도하면서도 결과는 하나님 뜻대로 하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평소 적극적인 성품대로 여호수아처럼 기도하셨고 여호수아처럼 이뤄내셨다.
그럼에도 내 신앙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성경은 주일 목사님 설교 때나 읽었고 헌금도 주일헌금이면 충분했다. 회사 월급이 오르면서 십일조 내기는 점점 어려워 졌다. 타협점을 찾은 게 선교헌금이었다. 선교헌금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신 조 목사님 말씀을 핑계 삼아 십일조는 거르고 선교헌금만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신앙생활의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건 내 신앙의 씨앗이셨던 어머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6) 갑자기 찾아온 어머니와의 이별… ‘찐 믿음’ 계기 돼
급성폐렴으로 입원 열흘 만에 눈 감아
“나중에 천국서 만납시다” 울부짖으며
어머니 걸었던 믿음의 길 따를 것 약속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02년 3월 돌아가신 어머니의 방에서 성경책을 발견했다. 박 대표의 어머니는 좋아하는 성경구절에 빨간 밑줄을 치며 읽으셨고 손주들에게 받은 편지를 성경에 꽂아 놓으셨다.
노년기를 맞으신 부모님은 주말이면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내려가 주말농사를 지었다. 2002년 3월에도 부모님은 평상시와 같이 예산에 가셨다. 골프장에 있던 나에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보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급성폐렴에 걸려 숨도 못 쉬고 있다고 했다.
서둘러 어머니가 입원한 천안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의료진은 인공호흡기를 달 것인지 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 나에게 병명이 무엇인지 물으셨고 ‘암’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셨다.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열흘 뒤 다시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디지털TV 연구소장이던 나는 광화문에 위치한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열린 디지털TV 전송방식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머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평생 장남인 나를 의지하셨고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나중에 천국에서 같이 만납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 울부짖으며 약속했다. 어머니를 많이 닮아 나도 한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음을 믿는 나는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인과관계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걸었던 믿음의 길을 나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천국 가는 길도 우연은 없으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41장 10절.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읽으셨던 말씀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방에서 발견한 성경책 속 빨간 줄이 처져있던 구절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유달리 죽음에 겁이 많던 어머니는 아마도 평생 이 말씀을 붙들고 사셨던 것 같다. 지금도 종종 나는 “어머니가 그 두려웠던 죽음의 길을 어떻게 가셨을까, 예수님 손을 꼭 붙들고 가셨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 장례를 마친 뒤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장례식장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교회와 성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날 위성으로 연결된 조용기 목사님이 “하나님께 결신하고 싶은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다. 그동안 결신의 기회가 있을 때면 외면하던 나였는데 이 날만큼은 망설임도, 외면도 없었다. 자리에 일어선 채 조 목사님을 따라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입술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니 마음으로 믿게 됐다.
목표가 생기니 믿음이 성장하는 것도 경험했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 아버지를 모시고 교회에 갔다. 장남으로서 매년 추도예배도 인도했다. 성경 공부도 했다. 천국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역경의 열매] 박종석 (7) ‘디지털TV의 아버지’ 백우현 박사와 TV 사업 선도
미국 유학시절 논문으로 만난 백 박사
LG서 어렵게 영입, 사부로 모시게 돼
‘모든 일에 우연은 없다’ 또 한번 경험
박종석(TV 왼쪽) 엔젤식스 대표가 1997년 10월 LG전자 가전연구소에서 디지털TV 개발에 참여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박 대표가 81년 입사한 금성사는 95년 LG전자로 사명을 바꿨다.
어머니는 나에게 ‘믿음의 우산’ 같은 분이었다. 나의 신앙도 믿음의 우산 아래에서 보호받았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컸지만 여전히 영적인 우산으로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계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주일이면 온 가족과 함께 교회에 출석했다. 미국 유학 시절 때 한국 가면 어머니와 교회에 가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사실 1958년생인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LG전자 일원으로 살았다. 깨달음이 있는 재미를 찾기까지 인생 여정을 설명하려면 LG전자 때 경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LG전자에서 나의 전문 분야는 TV였다.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에서 나의 석사논문 주제도 디지털TV였다. 과학원을 다니던 80년대 초반 디지털은 먼 세상 이야기였다. 특히 사람들에게 가장 친밀한 전자기기인 가정용TV를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다는 건 더 어려웠다. 디지털TV는 디지털 신호를 이용해 동영상과 소리를 방송, 수신하는 시스템이다. 아날로그TV보다 화질과 음성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영상 데이터를 디지털로 압축해 국가 자원인 주파수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쉽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이었다. 상업화하기엔 기술적 한계가 많았다. 우선 핵심 기술인 반도체부터 복잡한 영상 데이터를 처리할 만한 수준이 못 됐다.
86년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시절엔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잠시 디지털TV를 잊고 살았다. 박사학위 논문을 끝낸 91년 우연한 기회에 디지털TV를 마주했다. 시간적 여유가 생겨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논문 한 편을 발견했다. 완전디지털(Full Digital) 기술을 활용한 고해상도TV(HDTV)를 세계 최초로 제안한 논문이었다. 그동안 일본과 유럽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한 아날로그HDTV를 첨단 디지털 기술로 무력화시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백우현 박사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금성사(현 LG전자) 가전연구소에서 HDTV를 담당했다. 당시 한국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을 섞은 HDTV 개발에 집중했다.
그런데 백 박사가 제안한 완전디지털 방식이 세계적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나라도 HDTV연구를 미국처럼 완전디지털 방식으로 바꿨다. 전 세계 TV 시장을 석권한 일본은 도쿄올림픽 이후 1960년대부터 아날로그 방식의 HDTV 기술 개발에 나섰다. 일본 기업과 방송사들은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 연구한 터라 완전디지털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국이 고해상도의 디지털TV분야에서 일본을 앞서가기 시작한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회사도 디지털TV의 미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98년 LG전자는 삼고초려 끝에 세계적인 디지털TV 권위자를 최고기술경영자(CTO)로 영입했다. 바로 미국 유학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논문으로 만난 백 박사였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고 우연은 없다’는 개인적 신념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USA투데이는 97년 11월 17일자 커버스토리에서 백 박사를 ‘디지털TV의 아버지’라 칭했다. 이후 나는 사부인 백 박사의 지도를 받으며 LG전자 디지털TV 사업을 이끌어갔다. 한국 언론은 나를 ‘디지털TV의 아들’이라 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8) 디지털TV 상용화까지 10년… 협업이 이뤄낸 쾌거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성경 말씀처럼
누군가를 위해 씨를 뿌리는 자세로 임해
대표 수출 효자상품 돼 신산업에도 도움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LG전자 디지털TV 연구소장이던 2003년 연구원들과 함께 개발한 타임머신TV는 2005년 출시 후 일명 ‘박지성TV’로 불리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국민일보DB
디지털TV 개발은 여러모로 의미 있었다. 무언가를 개발할 때 느껴지는 엔지니어만의 쾌감과 함께 국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사명감이 더해졌다. 일하면서도 신나고 재미있었다.
당시 정부는 LG전자를 비롯한 가전 4사, 한국생산기술연구원(생기원)과 함께 국책사업으로 디지털TV 사업을 지원했다. 디스플레이 등 디지털TV에 들어가는 주변 기술을 개발해 시제품도 만들었다. 1993년 대전 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에선 디지털TV 시제품을 만들어 대중에 공개했다. 98년엔 세계 최초로 디지털TV용 반도체도 개발했다. 이때부터 한국은 전 세계 디지털TV 시장을 선도할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99년엔 디지털TV연구소장으로 승진도 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방송기술인연합회와 시민단체는 97년 미국식(ATSC방식)으로 정해 놓은 디지털TV 전송방식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다. 이미 전송방식을 정하고 모든 준비를 상당히 진행한 2000년에 일어난 일이다. 2004년 미국식을 유지하기로 관련기관 간 합의가 이뤄지기까지 나는 LG전자 대표로 각종 공청회와 회의에 참석했다. 연구원들과 기술개발에만 매진하던 나로선 사람을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지 알게 됐다.
그렇게 개발한 디지털TV는 결국 우리나라 수출 효자 상품이 됐다. 또 디지털TV 기술은 이후 LCDTV, 올레드TV 등 신산업에도 도움을 줬다. 디지털TV를 개발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경험했다. 회사는 디지털TV 상용화까지 10년이 넘도록 기다려줬고, 백우현 박사를 비롯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관련 지식을 공유했다. 정부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 4:37)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은 따로 있다. 후배 세대를 위해 씨를 뿌리는 건 선배의 당연한 책임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하루, 하루 씨를 뿌리는 자세로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전송방식 논쟁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시장에 판매할 제품을 만들다 보니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디지털TV에 PC 기술을 접목해 화면을 자유자재로 녹화하고 지나간 화면도 다시 찾아볼 수 있는 획기적인 TV를 생각했다. 2005년 ‘박지성TV’로 유명세를 떨친 타임머신TV다. 박지성의 경기를 생중계로 보던 아빠와 아들이 박지성의 슛이 골대 어느 쪽으로 들어갈지 내기를 하기 위해 잠깐 화면을 중단시키는 내용의 TV광고 덕에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에서도 LG전자의 타임머신TV는 큰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연구원으로 성과를 냈지만 새로운 길도 모색했다. 인사철만 되면 희망하는 업무로 ‘경영’을 적어냈다. 이미 대학생 시절 어머니와 오디오 사업을 하며 경영자 마인드를 구축했다. 디지털TV를 개발하면서 정부와 소통하는 방식도 습득했고 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조직을 운용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그리고 연구원으로만 일하던 나에게 2004년 새로운 길이 열렸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9) 엔지니어 출신으로 회사 미래 성장 위한 중책 맡아
회사의 파격적 인사에 도전의식 발동
이과 인재 섞어 팀 구성 미래 먹거리 찾아
PDP TV 사업 맡아선 1년 만에 흑자 전환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LG전자 PDP TV 사업부장이던 2007년 11월 경북의 구미사업장에서 구성원들과 사업 아이디어 내용을 점검하고 있다.
2004년 1월 LG전자는 파격 인사를 냈다. 파격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그동안 문과 쪽 사람들로 채워졌던 LG전자 전략기획팀장에 뼛속까지 엔지니어인 나를 발령 냈으니 말이다.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은 LG전자는 기술 중심의 회사인 만큼 기술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전략을 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사 직후 김 부회장은 나에게 미래 성장전략을 짜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디지털TV만 만들다 매출 수십조 하는 회사의 성장전략을 짜려니 막막하면서도 도전의식이 발동됐다.
우선 전략기획팀 구성부터 변화를 줬다. 문과 출신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곳에 이과와 문과의 비중을 절반씩 맞추기로 했다. 전사적으로 공고를 냈다.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전략을 짜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과 인재들이 지원해 ‘하이브리드’ 팀을 꾸렸다.
팀원들과 똘똘 뭉쳐 미래 먹거리를 찾았다. LG경제연구원도 우릴 도왔다.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방법이 나올 때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특히 전략기획팀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건 부품사업 전략이다. 당시 김 부회장은 부품에 주목했다. 요즘 뜨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부품 사업을 키우려면 LG전자처럼 그 부품을 사용하는 세트메이커의 인식 전환부터 필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트메이커는 가격, 기술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 있는 부품을 선호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첨단 부품의 경우 처음부터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니 경쟁력 없는 부품을 세트메이커는 사용하지 않고, 세트메이커가 사용하지 않으니 부품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기 위한 전략을 마련했다. 세트메이커의 지원을 받아 부품사가 경쟁력을 확보해 간다는 전략이었다. 결과는 좋았다. 특히 경쟁력을 갖추게 된 카메라 모듈 사업은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에 큰 도움을 줬고 LG이노텍의 주력사업이 됐다.
전략기획팀에 이어 2007년 또 다시 새로운 길이 열렸다. PDP TV 사업부장(부사장) 발령이었다. 당시 시장에선 액정 디스플레이를 쓰는 LCD TV를 선호했다. 플라즈마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PDP TV는 점차 소비자의 외면을 받던 시기였다. 회사는 타임머신TV 같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성적이 좋지 않은 PDP TV를 살리라는 임무를 줬다. 당시 PDP TV는 회사에서 이익을 까먹는 골칫덩이였다.
경북에 있는 LG전자 구미사업장으로 갔다. 연구소장 출신이 사업 책임을 맡는다는 게 LG전자 안에서 흔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후배들을 생각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내야 했다.
PDP에는 두 개의 사업부가 있다. 세트를 담당하는 PDP TV 사업부와 TV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디스플레이 모듈을 담당하는 PDP 모듈 사업부다. 나는 PDP TV 사업부를 맡았고 1년 뒤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매출을 늘리고 비용을 줄였기에 가능했다. 말은 쉽지만 실행은 쉽지 않았다.
전 구성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중도 포기는 없었다. 말 그대로 ‘생각의 맷집’이 필요한 시기였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0) 사업 승승장구 할수록 하나님과 거리는 점점 멀어져
화면 테두리 얇게 만든 PDP TV 큰 호평
능력 인정 받아 MC사업본부장으로 발령
회사일 비중 커지며 교회 거르는 날 잦아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LG전자 PDP TV 사업부장이던 2009년 1월 경북의 구미사업장에서 열린 PDP사업부 신년모임에서 직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매를 견디어 내는 힘이나 정도’. 맷집의 사전적 의미다.
권투 선수가 체력을 키워 맷집을 향상시키듯 기업과 사업을 하는 사람이 ‘생각의 맷집’을 키우려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PDP TV 사업부장이 된 후 나는 구성원들과 ‘생각의 맷집’을 키우며 흑자전환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우선 매출을 올려야 했다. 당시엔 신모델 경쟁이 치열했다. 제품력을 강화해 시장에서 더 많은 선택을 받아야 했다. 화질 등 TV의 기본 성능을 개선하는 동시에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
비용도 줄였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료비를 신기술과 아이디어로 줄여 나갔다. 전 구성원이 뭉치니 가능했다.
주변의 도움도 받았다. 사업 규모가 커진 LCD TV 사업부는 기꺼이 PDP 쪽 인력을 받아줬다. 비용은 자연스럽게 절감됐다.
내가 맡은 PDP TV 사업부는 흑자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적자인 PDP 모듈 사업부가 마음에 걸렸다. 절반의 성공처럼 느껴졌다. 두 사업부를 함께 경영하자고 회사에 제안했고 2009년 하나로 합치니 흑자 도전은 더 수월해 졌다.
세트를 담당하는 TV 사업부와 모듈 사업부가 한 팀으로 일하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더 많이 나왔다. 전략기획팀에 있을 때 세트와 부품이 함께 부품사업전략을 구축한 것과 유사했다. 구성원들과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재미있게 실행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TV화면 테두리인 베젤을 얇게 한 것이다. TV를 볼 때 소비자는 화면을 보지 테두리는 안 본다. 테두리는 화면을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다.
모듈팀은 베젤이 얇은 신모듈을 개발했고 이를 이용해 디자인팀과 세트팀이 2009년 날씬한 PDP TV를 만들었다. 이듬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출시한 LG전자 PDP TV의 베젤은 해외 경쟁사 제품들보다 월등히 얇았고 예상대로 시장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이에 따라 PDP 모듈을 포함한 PDP TV 전체 사업은 흑자로 전환했다.
PDP TV 사업은 잘 됐지만 신앙생활은 쉽지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구미에서 근무한 데다 아버지는 신장병으로 교회에 가지 못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나도 교회를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와의 약속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으나 회사일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예배는 소원해졌다.
결정적으로 교회와 멀어지게 된 건 2010년 인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회사는 PDP TV로 나의 경영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했고 MC사업본부장으로 발령을 냈다. 바로 스마트폰 사업 부서였다.
MC사업본부는 PDP TV 사업보다 일하는 사람도, 하는 일도, 매출도, 책임도 10배쯤 됐다. 이미 경쟁사들이 시장을 장악했고 소비자들도 경쟁사 제품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후발주자인 LG전자로선 소비자 인식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업무강도도 높았다. TV는 1년에 한 번 정도 신모델이 나오지만 스마트폰은 여러 차례 신형 모델을 출시해야 했다. 소비자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와 아이디어도 끊임없이 쏟아내야 했다.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 사이 하나님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1) 적자 내던 모바일 사업 맡아… 잠언 읽으며 지혜 구해
미래 밝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업
제품력 개선·비용 절감에 역량 총동원
소프트웨어 보강하며 디자인·성능 개선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2010년 LG전자 MC사업본부장 발령을 받은 뒤 촬영한 프로필 사진이다. 이 사진은 2019년 박 대표가 은퇴할 때까지 사용됐다.
2010년 MC사업본부장 발령을 받고 첫 출근하던 날. 나의 하루는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시작됐다. 부담감에 밤새 뒤척였다. 출근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문득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성경 전체를 읽기 힘들면 잠언만은 꼭 읽으라고 하셨다. ‘내 아들아’로 이어지는 잠언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를 통해 말씀하시는 듯 했다. MC사업본부 초기 나는 잠언을 읽고 출근했다.
출근하며 머리에 떠오른 건 응급실이었다. 사업이 적자를 낸다는 건 피를 흘린다는 뜻이다. MC사업본부는 피를 흘리며 응급실에 왔다. 경영자는 응급실 의사였다. 출혈을 막고 잘못된 부분은 치료하며 괴사된 곳은 도려내야 게 내 역할이었다.
일에 있어 냉철한 성격이었던 나는 MC사업본부에선 더 냉철해져야 했다.
응급실에 투입되자마자 업의 본질부터 고민했다. 직전에 있던 PDP 사업부는 장치산업이었다. 장치란 투자를 언제,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성패를 갈랐다. 반대로 MC사업본부엔 장치는 없고 사람만 있었다. 업의 본질은 인적자원이었다. 사람의 지혜를 꺼내는 데 집중해야 했다.
LG전자에서 PDP와 MC는 업의 본질만큼 다른 게 또 있었다. PDP 사업부에서 내 역할은 출혈을 최소화하며 연착륙시키는 것이었다. PDP는 이미 시장에서 LCD에 밀리던 때였다.
MC사업은 달랐다. 미래가 밝았고 회사 내 다른 부문과 연관 관계도 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MC사업본부는 스마트폰을 하늘로 비상시켜야 했다.
업의 본질은 달라도 사업의 방향과 흐름은 동일했다. 제품력은 개선하고 비용은 절감하는 것이다. 당장 불요불급한 비용을 줄이면서 제품력 강화에 전사 역량을 총동원했다.
우선 소프트웨어를 보강했다. 당시엔 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드물었고 외부에서 가르쳐 주는 곳도 없었다.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그룹 내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이 나서서 도와줬다.
하드웨어도 강화했다. LG디스플레이와 협업해 HD, 풀HD, 쿼드HD 등 고화질 디스플레이를 선도했다. 다음은 카메라였다. LG이노텍과 함께 손떨림방지(OIS) 기능을 업계 최초로 도입하는 등 해상도와 화질을 개선했다.
디자인도 신경 썼다. 모든 하드웨어는 디자인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LG는 이미 초콜릿폰, 샤인폰 등으로 디자인을 선도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좋은 디자인을 구현하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디자이너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종종 기구팀은 힘들다고 했다. 연구소에서 실무자들이 웬만한 조정을 했지만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은 내 몫이었다. 수시로 열리는 회의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각자 일리 있는 주장을 펼쳤다.
어느 길을 선택하건 리스크가 있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기대를 극대화하기 위해 본부장을 포함한 참석자 전원이 생각의 맷집을 동원해 좋은 대안을 내야 했다.
사무실 곳곳에 그림 하나를 걸었다. 황새에게 잡아먹히는 중에도 황새의 목을 조르는 개구리 그림이다. 그 옆에 쓰인 문구 ‘Never 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말라)’.
나를 비롯해 구성원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시기였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2) 신선한 아이디어로 스마트폰 사업 궤도에 올려
카메라 성능 좋지 않았던 초기 제품들
경쟁 상품과 화질 비교하며 연구 개발
G시리즈 선보이며 재기의 발판 마련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LG전자 MC사업본부장 시절 구성원들과 함께 만든 스마트폰 등을 ‘브레인 칠드런’이라 부른다. 박 대표의 집에는 그때 만든 옵티머스뷰, 옵티머스G, G2, G3 등 브레인 칠드런이 아직도 있다.
생각의 맷집과 함께 아이디어에 근육을 키우는 것도 필요했다. 구성원들에게 ‘왜’를 반복하게 했다. 어떤 문제건 해결책은 있지만 해결 방안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왜’를 반복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
카메라 성능 개선에 관한 예화를 소개한다. LG전자의 초기 스마트폰은 카메라 성능에 대한 시장 평가가 썩 좋지 않았다. 빠른 시간에 카메라 성능을 개선시켜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카메라는 소비자가 스마트폰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능 중 하나였다. 개발 중인 LG전자 스마트폰과 당시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타사 스마트폰을 손바닥에 나란히 올려 사진을 찍었다.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화질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사진을 주말에 많이 찍으면서 연구원은 월요일부터 고생이 많았다. 함께 노력하니 어느 새 LG전자 스마트폰의 카메라 화질은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처음 시도하는 제품은 소비자 생각이 어디로 갈지 몰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가령 2011년 나온 옵티머스뷰는 남성 재킷의 안주머니를 생각해 4대 3 비율의 디스플레이를 채택했다. 타깃 소비자는 남성인데 출시하고 보니 큰 화면을 선호하는 여성들이 더 많이 선택했다.
MC사업본부에 속한 수천 명의 직원들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냈다. 본부장인 내 역할은 고객 관점에서 직원의 아이디어를 필터링하는 것이었다. 필터링 원칙은 간단했다. 소비자를 편하게 하면 됐다. 개발자는 더 많이 노력해야 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클릭 여러 번 할 것을 한 번으로 끝내게 만들어야 했다. 퇴근할 때 내 가방엔 항상 여러 대의 스마트폰이 함께 있었다. 집에서도 실험했다.
2012년쯤 새로운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일명 ‘10인 위원회’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시장을 주도하자며 시작했다. MC사업본부 내 상품기획팀, 연구소는 물론 LG전자 디자인센터의 MC담당까지 책임자급 아이디어 고수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오찬을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10명의 인재들은 무림의 고수가 합을 겨루듯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확장, 발전시켰다. 두 번 터치해 화면을 껐다 켜는 ‘노크온앤오프’ 기능도 그때 나온 아이디어 중 하나다.
아이디어가 쌓이는 동안 스마트폰도 속속 출시됐다. 2012년 9월 일명 ‘회장님 폰’이라 불리던 옵티머스G를 선보이며 G시리즈를 시작했다. 뒤이어 나온 옵티머스 G프로는 옵티머스G의 디자인 부분과 풀HD 디스플레이를 장착했다. LG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다시 한 번 재기의 발판 위에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제품들이다. 2013년 G2를 발표했고 2014년엔 G3를 내놓으면서 흑자도 냈다.
나는 그렇게 나온 스마트폰이나 특허를 ‘브레인 칠드런’이라 부른다. MC사업본부 구성원들이 머리로 낳은 자식이란 뜻이다. 자식들이 시장에서 인정받으니 신이 났다. 특히 2014년은 나에게 엔지니어로, 경영자로 뿌듯한 해였다. 이른 감은 있지만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까지 하며 신나게 일했다. 그 사이 내 몸은 망가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3)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번아웃’이라뇨”
원인 모를 어지럼증과 불면증에 주님 원망
고통받는 중에도 십자가만 보면 편안해져
하나님이 영을 통해 보호하고 계심 깨달아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14년 LG전자 MC사업본부장 때 번아웃이 오면서 심신의 고통을 느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피라미드 구조로 그렸다.
2014년 4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피곤하고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쉴 여유가 없었다. 주요 전략 회의가 있었다. 이전에도 있었던 증상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회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지러웠다. 난생 처음 동네 병원에서 ‘링거’라는 걸 맞아봤다. 효과는 없었다. 다음날에도 아침 일찍 골프장을 찾았다. 업무상 골프 라운딩이었다. 어지럼증이 다시 나타났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회의에선 꾸역꾸역 버텼다.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더니 기운이 떨어졌다. 결국 회의 도중 나와야 했다.
급히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체온도, 혈당도, 혈압도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수시로 가슴이 뛰고 온 몸이 뜨거웠다. 밤이면 누군가가 “왜 자고 있냐”며 날 깨우는 듯 했다.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심리적으로도 불안과 절망감이 들었다.
그렇게 어려운 중에도 조금은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내 몸에 느껴지는, 실체는 없는 이 고통스러운 증상이 내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내 생각이 평화로우면 몸도 평화로웠다. 하지만 사건·사고 뉴스 같은 외부 자극에 내 몸은 민감하게 반응했고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율신경계 이상이었다. 자율신경계에는 흥분과 긴장을 부추기는 교감신경과 이를 억제하는 부교감신경이 있다. 보통 낮에는 교감신경이 활성화돼 일을 하고 밤에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돼 잠을 잘 수 있다. 나는 교감신경을 극대화시키며 일하고 있었다. 내가 보살펴야 할 직원과 그 가족을 생각하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이기겠다는 승부사 기질까지 발동했다. 교감신경은 어느 새 밤, 낮을 가리지 않고 활성화됐다. 그게 ‘번아웃’으로 나타난 거다.
열심히 일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만 열심히 일했던 건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MC사업본부장으로 있으면서 잠언을 읽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를 드리려고 했다. 열심히 살았고 이제 좀 살만해 졌는데 번 아웃이 오는 건 너무하지 않나. 어머니가 손자의 고등학교 배정을 위해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셨던 것처럼 나도 투정 부렸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셨다. 신기하게 십자가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 졌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과 싸우면서 나는 내 속에 일어나는 이 신기한 현상을 피라미드 구조로 그렸다. 피라미드는 맨 위 영으로 시작해 마음, 생각, 뇌, 신경계, 몸으로 이뤄진다.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나의 영과 연결되며 나의 영은 내 안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십자가를 볼 때 내 마음이 편해진 것도 성령이 내 영을 움직여서다. 편안한 마음은 편안한 생각을 하도록 하고 뇌의 편안한 부위도 활성화시킨다. 이는 내 신경계의 부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 가슴이 뛰거나 열이 오르는 느낌을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내 몸과 마음 속 다양한 요소들의 연결 관계가 피라미드처럼 눈으로 들어오니 하나님이 영을 통해 나를 보호하시고 피할 길을 명확히 보여주신다는 걸 알게 됐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어느 순간 감사와 사랑으로 바뀌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4) 예수님이 안아주신다는 느낌에 펑펑 눈물이…
김장환 목사 소개로 만난 극동방송 사목
기도 후 안아주는데 하나님 사랑 전해져
회사도 배려 믿음·체력 보강 시간 갖게 돼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14년 번아웃으로 주저앉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안을 찾았다. 왼쪽 사진은 번아웃 증상이 나타난 2014년, 오른쪽은 2016년 평안을 찾은 뒤 촬영한 모습.
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다. 나는 이 영을 이해가 아닌 경험으로 알게 됐다.
아내는 친구에게 번아웃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내 이야기를 했다. 아내의 친구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원천안디옥교회에 가 볼 것을 권유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다. 그 교회 김장환 목사가 누군지도 몰랐다. 교회 3층 복도에 걸린 사진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서울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통역하는 김 목사가 흑백 사진 속에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어머니와 함께 TV에서 김 목사의 열정을 봤다.
김 목사는 LG 사장이 왔다며 반갑게 맞아 주셨고 다른 방문자들처럼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다. 그때 내 영을 통해 마음을 울리는 한 마디 명령이 들렸다. “너 이 목사님 붙들어라.”
명령에 순종하며 목사님께 “전 그냥 사장이 아닙니다. 몹시 아픈 사장이니 내 마음을 치유해 주세요”라며 매달렸다.
경험 많은 김 목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며 극동방송 중보기도팀을 소개해 줬다. 며칠 뒤, 극동방송 기도실에서 만난 당시 사목 강창헌 목사는 나를 위해 기도한 뒤 안아줬다. 예수님이 안아주신다는 마음이 들었고 하나님 사랑이 전해졌다. 티슈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펑펑 울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니 두려움이 없어졌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요한일서 4장 18절 말씀이 나에게도 이뤄졌다. 피라미드 맨 꼭대기 성령님과 나의 영, 둘의 만남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깨달았지만 회복의 시간은 더뎠다. 4월에 시작된 번아웃은 10월까지 계속됐다. 조급한 마음이 슬슬 올라왔다. 하나님에게 스마트폰 사업이 급하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묵묵부답이셨다.
급한 마음에 하나님과 담판을 짓겠다며 경기도 가평 필그림기도원에 아내와 함께 갔다. 여호수아처럼, 어머니처럼 하나님께 매달릴 작정이었지만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기도는 입에서 맴돌기만 했다. 기도방에 들어가 10분을 채우지 못했다. 기도 대신 밤 9시 예배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날 예배의 설교 말씀은 베드로후서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의 시간이 나의 시간과 다르니 조급해 말고 기다리라는 걸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알려주셨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 붙인 글이 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자’. 그리곤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가기로 했다.
회사도 2014년 겨울 인사에서 나를 배려했다. 치열한 현업 대신 최고기술고문(CTA)으로 활동하도록 했다. 2015년 믿음과 체력을 보강할 시간을 갖게 됐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세력에 쫓기다 번아웃됐을 때 기력을 회복(왕상 19:5)한 방식대로 나도 잘 먹고, 잘 쉬고, 하나님과 목사님, 성도들의 사랑을 받으며 평안을 찾았다. 교회에 가면 내가 가장 부러워한 게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 천사 같은 얼굴. 나의 얼굴도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히면서 그렇게 부러워하던 교회 사람들 얼굴처럼 바뀌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5) 잘 다니고 있는 회사 그만두라는 목사님 기도에 “아멘”
가족 위해 기도해 주시던 김장환 목사
갑자기 “LG 그만두고 주님 위해 일…”
주님이 주신 달란트 주님 일에 사용키로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19년 38년간 근무한 LG에서 퇴직하고 아내와 인생 3막을 설계하기 위해 한 달 일정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박 대표가 유타주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 속 ‘진리가 주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2016년 회사는 나에게 LG이노텍 대표라는 또 다른 중책을 맡겼다. LG이노텍 상황도 응급은 아니었지만 녹록지 않았다.
전자제품 속 부품을 만드는 회사라 속도감 있게 경영하던 MC사업본부와 달리 무게감 있는 경영이 필요했다.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답게 성장 기반을 다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떠나도 회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힘썼다. 일할 때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회의할 땐 두 손을 포갠 채 구성원의 말을 들었다. 길게 날숨을 뱉기도 했다. 스스로 터득한 번아웃 예방법이다. 날숨과 손의 온기는 부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됐다.
2018년 가을 원천안디옥교회에서 주일예배가 열리기 전 우리 가족은 김장환 목사님을 만났다.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던 목사님은 갑자기 “LG를 그만두고 하나님 위해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LG이노텍 경영자로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라는 목사님 기도에 나는 무언가에 끌리 듯 ‘아멘’으로 화답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목사님은 그날의 이 특별하고 이상한 기도를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의 지혜나 생각이 개입됐다면 나올 수 없는 기도요, 대답이었다. 나는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는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듯 LG이노텍 대표로 부임한 지 3년 만에 나는 38년간 인연을 맺어온 LG에서 은퇴했다. 아니 퇴직했다. 세상은 은퇴라 하지만 나는 퇴직이라 말한다. 은퇴는 인생의 마지막 때에나 온다. 나보다 스물 네 살 위인 김장환 목사님에게 배웠다.
그렇다고 무 자르듯 LG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퇴직하고 일주일 뒤 아직 현직에 있는 LG사장들과 골프를 치고 헤어졌다. 공허함과 함께 위축된 나를 발견했다.
예수님의 꾸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LG사장이 뭐길래 위축되냐. 내가 그런 모습을 보려고 십자가에 못 박혔냐.”
예수님에게 호되게 혼나니 오히려 어깨가 가벼워지고 자유함을 느꼈다.
은퇴 6개월 후인 2019년 5월엔 한달 일정으로 워크숍을 떠났다. 워크숍 주제는 ‘인생 3막, 어떻게 살까’였고, 장소는 미국이었다. 워크숍 참석자는 나와 아내 단 두 명이었다.
나는 두 아이의 결혼식에서 부모를 떠나 둘이 합해 한 몸을 이루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그들이 떠나니 남은 건 우리 부부뿐이었다. 퇴직하고 아내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 잘 지내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해졌다.
100세 시대, 우리의 인생 여정을 설계하기로 했다. 방향은 확실했다. 하나님께 가는 일, 하나님 시키는 일만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심각한 워크숍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주 LA에서 렌트한 자동차에 골프백 두 개와 짐을 싣고 네바다주를 지나 애리조나주, 콜로라도주, 와이오밍주와 몬태나주에 걸쳐있는 옐로우스톤으로 이동하며 놀고 생각하며 즐겁게 남은 인생을 설계했다.
그리고 인생 3막에서 사용할 옵션도 설정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 일에 사용하기로 했다. 하나는 38년간 LG에서 터득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는’ 달란트고, 다른 하나는 ‘번아웃’의 경험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6) ‘번아웃’으로 깨달은 하나님 사랑… 교육 봉사로 갚아
건강 되찾고 교회서 봉사하고 싶어 기도
평소 하고 싶었던 새 신자 교육 맡게 돼
번아웃 시절 경험 토대로 실감 나게 강의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2019년 11월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에서 장로장립 예배를 드린 뒤 가족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인생 3막에서 선택한 옵션 중 하나인 ‘번아웃’의 경험은 봉사로 연결됐다.
번아웃에서 벗어났을 당시 교회에서 하고 싶은 게 생겼다. 봉사였다. 처음 교회를 다닐 때 많은 분들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도들은 나를 웃는 얼굴로 대해 주셨고 기도해 주셨다. 교회 뿐 만이 아니었다. 회사 등 또 다른 나의 생활 반경에도 하나님은 내 주변을 믿는 사람들로 채워주셨다.
사랑에 빚진 자였던 나는 조금이나마 그 빚을 갚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새 신자 교육을 맡으면 번아웃 시절 하나님이 알려주신 믿음의 길을 잘 설명해줄 것 같았지만 내 입으로 교육 봉사를 하겠다고 교회에 말하지는 못했다.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자칫 교만으로 비춰질까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기도에 즉각 응답하셨다. 주중 기도를 드리고 주일에 교회에 갔더니 새 신자 교육 담당 장로님이 나를 콕 찍어 새 신자 교육을 부탁했다. 나는 웃으며 승낙했고 하나님도 같이 웃으시는 듯 했다. 집사인 나는 이렇게 교회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됐다.
아내와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내가 장로가 되는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육을 받고 시험을 봐야 했다. 장로가 되면 교육 프로그램 중 요한복음도 맡아야 했다. 이미 나는 요한복음서의 매력에 빠져있었다. 다른 복음서의 주된 내용이 예수님 행적에 대한 기록이라면 요한복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 가르침이 풍부했다.
요한복음의 영적 가르침을 번아웃 시절 내가 겪은 내면세계의 경험을 통해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요한복음에 대한 강의와 책은 세상에 넘치게 많다. 나는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성경 지식도 깊지 못했다. 다만 번아웃 시절 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성경 말씀이 가슴에 꽂히던 때였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자 했고 하나님은 생각의 힘을 허락하셨다. 묵상하고 성경을 읽으면 영적 깨달음을 주셨다.
교육은 하나님과 예수님, 나에 대한 정체성을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사랑을 당장 가슴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머리로 이해하는 시간도 갖는다.
나는 사랑의 요체로 자유와 책임을 꼽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유를 주셨고 구원의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 직접 예수님으로 오셨다. 구원의 방법은 간단하다. 믿음이다. 문제는 우리가 마음대로 못하는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의심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를 극복하고 마음으로 믿는 방법을 알려 주셨으니 바로 순종과 행함이다.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못하지만 순종과 행함은 우리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무장했어도 죄, 죽음, 두려움은 바이러스처럼 우리 주위를 맴돈다. 이를 극복하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내가 그랬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니 안아주셨다. 바로 용서하셨고 뒤끝없이 잊으셨다.(이사야 43:25)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찾아왔다. 감사가 넘치고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됐다. 드디어 나는 거듭나게 됐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7) 하나님과 나의 정체성 다시 생각하게 한 요한복음
첫 구절 “말씀은 곧 하나님…” 이해 못 하다
TV 사극서 ‘어명’이 곧 ‘임금’임을 깨닫고
나를 지으신 주님 통해 ‘나’를 이해하게 돼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지난 1월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 주일예배에서 대표기도하고 있다.
지면을 빌려 짧게나마 요한복음의 매력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내가 본 요한복음은 간결하고 멋지기까지 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다. 마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1항의 선언과도 같다. 처음 이 말씀을 대했을 때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니” “말씀은 하나님의 일부 아닌가” “하나님을 격하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TV에서 사극을 봤다. 어명을 받으라 하니 신하는 임금이 자신 앞에 없는데도 임금이 계신 듯 절하고 명을 받는다. 내가 LG이노텍 사장으로 있을 때 공장을 지은 게 떠올랐다. 나는 “공장을 지읍시다”라는 말만 했을 뿐인데 나중에 공장이 지어졌다. 사장이라는 정체성은 말과 그 속에 담긴 권위에 있다. 어명이 임금이듯 내가 한 말은 사장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하나님이 말씀이고 말씀이 하나님이신 게 이해됐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또 다른 정체성이었다. 나는 영에 대한 이야기를 피라미드 구조로 이야기했었다.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영은 마음과 생각, 몸을 움직이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하는 최고경영자 같은 존재였다. 나의 영은 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 존재인데 하나님도 영이라고 하시니 영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궁금해졌다. 묵상하던 중 한자인 ‘靈(영)’을 통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靈은 비 우(雨), 입 구(口), 장인 공(工), 사람 인(人)으로 구성돼 있다. 한자 사전의 세부설명을 보면 雨는 하늘, 口에는 말씀이라는 뜻도 있다. 工은 만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세 개의 口는 말씀이 세 분, 삼위 하나님이 생각났다. 두 개의 人은 같은 위치에 나란히 있으니 영적으로 동등하게 창조된 남녀로 해석됐다.
한자인 靈이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씀을 묘사하는 듯 보였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흙으로 육신을 지으시기 이전 태초에 인간의 ‘영’을 먼저 창조하시는 말씀으로 느껴졌다.
성경엔 영과 관련된 말씀이 많이 나온다. 분명 존재하지만 인간은 볼 수 없는 영역에 하나님이 영으로 계신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나의 영은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랑하며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됐다.
내 몸, 내 마음, 심지어 내 영에서 ‘내’, 즉 나는 누구일까. 많은 철학자들도 알고자 했던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나에 대해 알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의 밖에서 봐야 전체를 알 수 있고 전체를 봐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나를 떠나 볼 수 없다. 지금 내가 나에 대해 보는 건 부분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나를 모르지만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통해서다. 그걸 요한복음이 알려줬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8) 번아웃 후 성경 완독…“성경은 인간에게 보낸 러브레터”
인간을 너무 사랑해 끝까지 바른길 인도
최후의 방법으로 예수님 통해 직접 오셔
주님 존재에 감사할 줄 아는 며느리 맞아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20년부터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의 교육프로그램인 요한복음반에서 강의하고 있다. 강의 첫날엔 자신의 번아웃 경험을 간증하며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감사로 마무리한다. 사진은 첫 강의의 슬라이드 마지막 부분.
요한복음에는 성경 말씀 중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구절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돋보이는 말씀이다.
나는 번아웃 후 처음으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성경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낸 러브레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고스란히 지신다는 그런 사랑의 스토리 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자유를 남용해 죄의 길을 걷는 인간을 달래기도, 혼내기도 하면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셨다. 선지자를 통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하셨다. 그래도 안 되니 인간의 몸으로 직접 오셨다. 예수님이다.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최후의 카드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여전히 인간들은 마음대로다.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하나님 당신이 직접 나서도 안 되니 심판밖에 더 있을까. 그 말씀이 바로 뒤 18절에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인간들은 예수님 오신 이유를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했다. 사랑, 영생 같은 좋은 말만 좋아하니 16, 17절까지만 좋아했다. 18절은 애써 외면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분명히 건넸다. 구원의 조건도 명확히 알려주셨다. 로마서 10장 9절 말씀처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어쩌면 마음으로 믿는 게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최고경영자인 내 영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위인 마음을 움직이면 쉽게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번아웃 전까지 마음으로 믿는 게 힘들었다. 다행히 번아웃 때 십자가를 통해 성령님의 위로를 경험했고 말씀을 순종과 행함으로 실천하면서 마음으로 믿음이 굳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가끔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을 포위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위로는 영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아래로는 생각을 동원해 말씀 읽기, 찬송, 묵상 등 성경에서 알려주신 믿음 강화법을 순종하며 실행해야 한다. 영의 세계를 하나님께 맡기는 동시에 내 생각으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우리 며느리가 바로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사례다.
결혼 전 며느리는 어려울 때 감사거리 100개를 일기장에 적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어 봤다고 한다. 시시콜콜한 감사거리도 있었지만 백 번째 맨 마지막 감사로 적은 게 “하나님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복을 많이 주셔서 드리는 조건적 감사가 아닌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 감사라고 했다.
요한복음 강의 첫날 나는 번아웃 경험을 요약해 간증한다. 공교롭게 간증 슬라이드의 맨 마지막이 “하나님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이다. 번아웃 경험을 거치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니 감사에 대한 이유나 조건이 없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의 일치. 우리 며느리는 하나님이 중매해 주셨음을 믿는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19) 인생 3막, ‘엔젤식스플러스’ 세워 창업자들 도와
은퇴한 LG 최고경영자들 6인 의기투합
창업 아이디어 가져오는 이들 지원키로
내 경험 통한 하나님 존재 알려주기도
6명의 전직 LG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은 긍휼의 마음으로 벤처 창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2019년 엔젤식스플러스를 설립했다. 박종석 대표도 그 중 한명이다. 왼쪽부터 유진녕 전 LG화학 사장, 박진수 전 LG화학 부회장, 신문범 전 LG전자·LG스포츠 사장, 박종석 전 LG이노텍 사장, 김종립 전 지투알 사장과 이우종 전 LG전자 사장. 강민석 선임기자
인생 3막의 옵션 중 하나가 번아웃을 통한 교회봉사였다면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는’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옵션이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돕기로 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걸 실현시킨 게 바로 엔젤식스플러스였다.
앞서 고백했듯 하나님은 교회가 아닌 곳에서도 늘 믿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2019년 은퇴 후 LG에서 제공하는 사무실에 갔더니 같은 층에 박진수 전 LG화학 부회장, 유진녕 전 LG화학 사장, 이우종 전 LG전자 사장과 신문범 전 LG전자·LG스포츠 사장이 있었다. 아래층엔 김종립 지투알 전 사장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5명이 교회에 다녔다. 신 전 대표는 중고등학생 시절 미션스쿨을 다녔다.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식구 중 아픈 사람이 있으면 서로 기도해 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격려했다.
그러다 나와 신 대표가 “심심하다. 우리 뭐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그게 엔젤식스의 시작이었다. 시니어 창업협회를 통해 사전 조사도 했다. 직접 창업하는 것보다 창업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이들을 키워주는 게 보람 있겠다 싶었다.
회사 이름은 이우종 대표가 제안했다. 벤처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지원해 주는 엔젤투자의 엔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천사 같은 회사 등 다양한 의미가 담겼다. 만장일치 통과였다.
운영은 합리적으로 했다.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갖췄다. 공동대표로 하면 결제할 때 6명의 도장이 필요하지만 각자 대표이사로 하면 한 명의 도장만 있으면 됐다. 서로를 믿기에 가능했다.
다만 의사결정은 무조건 만장일치제로 했다. 다들 오랜 세월 내공이 쌓인 만큼 각자의 경험을 존중했다. 반대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 봤다. 대화를 통해 만장일치로 결과를 도출하기로 했다.
나에겐 엔젤식스를 통한 개인적 목적도 있었다. 어느 때보다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문제를 보는 눈’을 키워주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LG전자에서 스마트폰 사업을 이끌던 시절 구성원들에게 ‘왜’를 반복하게 했다. ‘왜’를 반복해야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어서다. 문제 안에 해결책이 있고, 해결책이 없는 문제는 없다는 점도 알려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겪은 인생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외면하거나 믿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신을 알려주고자 했다.
하나님은 혁신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얼마나 혁신적이신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혁신의 정점은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점이다. 이렇게만 보면 혁신이란 게 어렵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게 혁신이다. 그 기저에는 문제의 발견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를 안고 살면서도 그 문제를 인식하지 않는다. 일부 사람만 문제를 인식해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창업이나 취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혁신의 정신을 갖고 대담하게 문제를 풀도록 돕는 게 나의 역할이 아닐까.
지금 나는 LG가 맺어준 귀한 인연이자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인생 3막의 삶을 살고 있다.
***[역경의 열매] 박종석 (20·끝) 더 늦기 전 미래세대·자신 위해 믿음의 씨 뿌려야…
힘들 때마다 내 삶에 들어오신 주님 보며
나와 동행하심을 느끼고 믿음의 눈 생겨
내면의 내가 변해야 내 주위 모든 것 변해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알게 된 뒤 교회와 가정, 일터에서 미래세대를 위해 믿음의 씨앗을 뿌리겠다고 고백했다. 사진은 박 대표가 주일예배를 드린 뒤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
인생 3막을 살고 있는 나에게 ‘역경의열매’ 제안이 왔을 때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에 선뜻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누시려 하시는 구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니 하나님은 내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개입하셨다. 어릴 때 심방오신 분들과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때나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휴대폰을 만들다 번아웃 됐을 때나 김장환 목사님을 만났을 때, 퇴임 직후 마음이 위축될 때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막막할 때…. 하나님은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엄하게, 어떤 때는 은근히, 어떤 때는 번개처럼 내 삶에 들어오셨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느끼면서 믿음의 눈이 생겼다. 그림 하나가 있다. 그 속에 젊은 여성은 어느 순간 노파로 보인다. 반대로 노파로 보이다가 젊은 여성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1930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윈 보링이 소개해 유명한 ‘보링의 인물’이다. 세상도 그렇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계속 하나님이 보인다. 산책길에 만난 꽃, 시냇물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인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상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는데 사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내가 변해야 한다.
물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가끔씩 세상을 바꿔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변하면 그 효과는 깊은 영양분처럼 두고두고 내 인생 전체를 유익하게 한다.
나도 그랬다. 번아웃 초기 빨리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매달린 건 보이는 나, 즉 세상의 일부인 나를 변화시켜 달라는 요구였다. 그때 하나님은 기다리라는 말씀을 주시고 시간을 거치면서 내면의 나를 변화시키셨다. 이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변화시키셨다. 영원까지 나를 돌보셔야 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사람도 미래 지향적이다. 하나님은 회개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예수님도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다. 과거는 어쩔 수 없고 현재는 빠르게 지나간다. 미래만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다.
우리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미래세대를 위해 지금 꾸준히 씨를 뿌려야 한다. 그 과정 중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그랬듯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믿는 교만함을 경계해야 한다.
미래세대와 함께 자신을 위해서도 씨를 뿌려야 한다. 앞서 설명했던 피라미드를 생각해 보자. 나이를 먹으며 몸은 늙는다. 몸 위의 생각은 원숙해지기는 하지만 몸보다는 젊다. 여전히 의욕이 있고 변화의지도 있다. 그렇다면 몸과 생각 위의 마음은 어떨까. 마음은 어렸을 때와 다를 게 없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그러면 마음 위 나의 최고경영자인 영은 어떠한가. 시간을 초월해 영원하다.
영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창조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증거가 된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 지금 믿음의 씨를 뿌리고 영원한 천국 열매를 거두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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