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因緣果報)는 일반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적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원리와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있는데 착한 사람이 밀면 움직이고 악한 사람이 밀면 안 움직인다는 이런 원리가 아니고, 힘이 가해져야 움직이고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힘을 가하면 움직이게 되고, 선한 사람도 힘을 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자꾸 혼돈하기 때문에 많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놈은 나쁜 짓을 많이 하는데 왜 저렇게 부자로 잘 삽니까? 저 사람은 착하게 사는데 왜 저렇게 가난하게 삽니까? 자꾸 이렇게 권선징악적 원리로 바라보게 됩니다.
연기법이란 어떤 것에 말미암아서(緣) 일어난다, 즉 생긴다(起)는 의미이다. 연기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법칙이다. 서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잡아함 권15)
갑(甲)과을(乙) 유래는 보통 계약서를 작성할 때, 계약 관계에서 주도권을 지닌 쪽을 갑, 그 반대의 사람을 을이라고 표시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보수를 주며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받는 쪽이 갑이고 보수를 받아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쪽이 을에 해당된다.
갑(甲)이 존재에 반드시 을(乙)의 존재가 전제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연기의 이론은 갑이 존재할 수 있는 성질, 즉 자성(自性)을 갑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성립시킨다. 무자성(無自性)이다. 연기이므로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자성은 인도 정통철학의 아트만(atman)이다. 아(我)이다. 이러한 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즉 무아(無我)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로 시작되는, 위에서 언급한 게송은 후세의 학자들이 "연기의 공식"이라고 한다. 연기의 공식에 대한 공간적 고찰에서 우리는 공(空)사상에 대한 이해를, 연기에 대한 시간적 고찰에서 인과(因果)의 법칙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된다.
"이것"이 씨앗이라면, "저것"은 열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因), "저것"을 과(果)라고도 한다.
또는 인을 짓는 의지적 작용을 업(業)이라고 하고, 그래서 생기는 필연적 반응이나 결과를 보(報)라고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은 이렇게 생긴다. 따라서 자신의 업보를 참회하여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야 고통으로부터 근원적인 해방을 얻게 되므로 역대 선지식들은 한결 같이 참회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불교는 인도문화를 기원으로 중국불교를 거쳐 왔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불교인만큼 중교를 이해할 때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간판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좋은 일은 하되 보상을 바라지 마라. 좋은 일을 하는 그것이 곧 이다, 이이런 얘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은 하되 기대하지 말고, 나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되 나쁜 일을 했다면 그 과보를 기꺼이 받으려고 해라.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공덕이면 공덕으로, 그것이 빚이면 빚으로,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빚을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빚이 더 이상 나에게 괴로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인연법을 떠나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인연과보의 원리에 따라 살게 되면 죽고 살고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 그 결과를 계산하게 되는데 그 계산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자꾸 혼돈하기 때문에 많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출처 : 법륜 스님 법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