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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푸코, 들뢰즈의 ‘육체’
Body of Descartes, Foucault and Deleuze.
1.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육체
육체(Body)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인간이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철학적 사고의 출발이라면, 철학적 성찰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육체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니체 이전의 철학사에서 그 관심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플라톤은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여, 육체를 변화하고 소멸되는 물질성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육체는 욕망과 질병으로 영혼을 혼탁하게 만드는 악의 거처이기 때문에 철학자는 육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극복함으로써 올바른 진리와 사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철학은 육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소멸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된다. "철학자의 영혼은 신체를 극도로 멸시한다" 는 그의 유명한 말은 그뿐 아니라 철학자들에게서 육체의 의미가 얼마나 무시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말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영혼의 존재로 정의될 수 있고,
영혼의 존재인 인간에게 육체는 비정신적이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실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육체는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본질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거부하고 극복해야 할 질곡이 된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거나 무덤과 다름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사유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상태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의 옷을
걸쳐 입기 전에 이미 본질의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식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마치 추락한 천사의 유배된 삶처럼 육체와 동거하도록 유배된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상의 세계, 본질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의지와 육체와의 접촉을 멀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은 부단히 육체의 물질성을 거부하고 영혼의 순수성을 간직해야 하고, 인간의 지혜란 그러한 노력과 의지를 견지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적 개념은 곧바로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라는 이원론적 개념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서구 철학사에서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논리는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합리주의적 인식론의 토대를 형성했을 만큼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17세기의 데카르트(Descartes)도 육체와 영혼을 이질적이고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파악하면서, 육체란 물질적 · 물체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신만이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와 같은 명제는 어디까지나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려는 철학자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는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행동하는 육체의 모습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순수한 사고의 능력이나 정신의 활동에 의해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과,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고, 또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 '나', 즉 나를 나되게 하는 정신은 신체와 전혀 다른 것이고, 신체보다 인식하기가 더 쉬우며, 설사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1)
이처럼 주체를 결정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사유하고 판단하는 순수한 정신의 행위이다. 육체의 어떤 움직임이나 어떤 감각도 진정한 주체의 모습으로 연결될 수 없다. 오직 사유의 존재를 증명하는 코기토 (Cogito)의 행위만이 육체라는 이질적인 대상과 구별되는 '나' 라 하는 사유하는 존재의 모습을 뚜렸이 보여 준다는 것이다. 사유하는 존재의 모습과 달리 육체의 운동은 단순한 기계 장치의 움직임과 같다.
『방법서설』 5부에 실명된 것처럼 인간의 육체는 기계이지만,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느 기계
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잘 질서 잡혀져 있는" 2)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모든 동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영흔과 이성적 정신은 육체의 기계로부터
독립된 것이며, 육체와 함께 죽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
물론 데카르트가 영혼과 육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자연은 또한 나에게 이러한 고통 · 배고픔 · 목마름 등의 감각을 통하여 마치 뱃사공이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내가 내 신체 속에 깃들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이를테면 혼합되어 있어서 신체와 더불어 일체를 이루고 있음도 가르쳐 준다." 3)
이 말과 관련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이 오직 사고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육체가 상처를 입었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것 이라는 가정을 제시한다.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과연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논리에서 육체는 물체의 본질이며 무수히 분할될 수 있는 연장성을 갖는 실체이지만, 영혼은 분할될 수 없고 비연장적인 사고하는 실체이다. "데카르트의 원리에서 볼 때 어떻게 비연장적인 사고하는 실체가 연장적이며 사고하지 않는 실체 안에 감각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힘든 문제이다. 두 종류의 실체의 속성들은 각각의 실체 내에서 다양한 범주들을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므로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이렇듯 데카르트에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나 상호작용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기대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러한 주제는 철학적으로 규명하기도 어려운 문제가 된다.
육체와 영혼의 연결성을 인정하더라도 결국 육체와 영혼을 분리된 실체로
생각한 데카르트적 사유는 육체와 영혼의 상호 연관성을 명확히 해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 육체와 외부적인 것들과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를 외면하고, 오직 사유하는 자아 중심의 논리로 귀결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부정적 육체관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다음의 논지는 귀 기울여 볼만한다.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구분이 초래한 가장 심각한 결과는 그것이 사회성의 개념, 즉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연관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지구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부정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연관성을 정당화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몸이 배제된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몸을 전혀 보지 못한다. ‘코기토’의 내향성은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의 외향성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5)
인간의 '사유하는 자아'로서의 이성적 능력을 규명하기 위한 데카르트의
인간 중심적 형이상학은 육체를 배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지구와 인간의 상호 공존적 삶의 논리도 배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인들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소유 혹은 착취의 근거가 이러한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실체로 인식되는 한, 인간의 자아 중심주의의 한계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니체에게서 육체의 디오니소스적 가치
니체는 육체의 존재 가치와 육체의 사회적 현상을 고려하지 않은 자아와
이성 중심적 인식론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날카롭고 핵심적인 비판을 가한 철학자이다. 그는 『비극의 탄생』(1872)에서 비극의 개념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두 가지 예술적 충동의 모순적 통일로 이루어진 것임을 규명하였다. 아폴론적인 것의 특징이 현상계의 원리와 질서의 모습으로 예술의 형식을 부여한 것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특징은 맹목적이고 혼란스러운 본능적 충동으로서 삶의 역동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아폴론의 상징은 소크라테스이고, 디오니소스의 상징은 프로메테우스이다. 또한 전자가 오성법칙과 인과율 등 예술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나타내는 삶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니체는 이 두 가지 대립적 요소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조화로운 통일을 거두어 위대한 비극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한편, 아폴론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가 결국 강조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요소이며 이러한 인간의 본능이야말로 세계와 삶의 본질 또는 '힘(權力)에의 의지' 를 구성하는 중심적 논리가 된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에서 새롭게 발견해야 할 중요한 본능적 요소로 부각된다.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자라투스트라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듯이. 기독교 문화와 역사, 형이상학적 인식과 도덕의 전통 속에서 육체의 욕망을 억누르고 금욕적 이상을 내세웠던 흐름과 정면에서 대립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금욕적 이상은 질병의 상태나 다름없고, 삶을 허무주의자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명의 본능적 감각을 중시한 철학자로서
그는 무기력한 체념과 순종에 길들여진 육체의 모습을 뒤흔들어 생명과
권력의 의지를 찬양하고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무겁게 짓눌린 인간의 육체를 해방시키는 일인데. 이런 점에서 그가 찬미하는 춤은 인간에게 우주적인 비상과 무한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해방된 모습을 보여 준다.
니체는 생명의 본능적 요소와 힘의 의지에 가치를 부여하고 선과 악의 가치관이나 사회적 인습의 장벽을 넘어서는 초인의 의지를 주장한다. 관습적 도덕에 묶여 사는 군중들과는 달리, 초인은 도덕의 계율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그는 기존의 인식을 타파하고 대지의 진실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점에서 초인의 육체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니체는 정신을 자아와 이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육체의 가치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잘 언급되어 있듯이 육체야말로
이성이며 육체 속에는 슬기로운 정신의 지혜보다 더 많은 이성이 깃들여있다는 것이다. "나의 육체는 나의 전부이다. 나는 육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파격적인 주장과, 이성의 정신을 육체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외침에는 초인적 가치관이 보인다. 육체 속에는 자연의 본성이 살고 있다. "건강한 육체의 소리를 들어라!" 는 짜라투스트라의 외침은 바로 자연의 본성이 원하는 순수한 욕망의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를 경멸하는 사람들은 위선자이며, 육체를 벗어나야 할 감옥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병자이기도 하다.
니체는 육체의 모멸자들을 공격하고, 육체의 진실을 새롭게 논리화한다.
그는 육체에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육체의 욕망을 옹호하는 한편, 육체의
고행을 찬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순된 논리가 아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른다는 것은 본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나약한 태도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여성의 꿈속에 빠져드는 것보다는 살인자의 손아귀에 붙잡혀 죽는 것이 낫다고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짐승의 본능적 차원으로 추락할 수도 있고, 초인의 차원에 올라설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육체는 얼마든지 양극단에서 추락할 수도 있고 초월할 수도 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놓은 하나의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려 있는 밧줄인 것이다" 6)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짐승의 요소와 초인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은 짐승의 차원으로 몰락하지 않고 심연 위의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기며 초인의 차원으로 상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니체가 힘의 의지가 담긴 육체의 해방과 육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것일 뿐, 육체의 충동에 따라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옹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문명 비판적인 관점에서 도덕과 종교와 학문의 가치들을 뒤집어 보는 성찰과 함께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철학자의 의지를 다양하게 보여 준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육체의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도 새로운 가치 정립의 의도로 서술되어 있다.
본질적인 것은 육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길잡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육체는 관찰을 보다 명료하게 해 주는 훨씬 중요한 현상이다.
육체를 믿는 것은 정신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굳건히 확립될 수 있다.7)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정신(아니면 영혼, 아니면 현재의 전문 용어로서
영혼 대신에 사용되는 주관)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소유물, 우리의 가장 확실한 존재, 요컨대 우리들의 자아로서의 육체(Body)를 믿는 편이 옳았던 것이다.… 요컨대 육체를 믿는 것이야말로 당분간은
여전히 정신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강한 신앙일 것이다. 8)
니체는 이처럼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육체를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체를 경멸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논리를 공격한다. 또한 그는
육체에 대한 관념적 논리를 무너뜨리려 할 뿐 아니라 육체에 관한 새로운
사회적 · 정치적 시각을 제시한다. 육체는 이론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 정치적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는 사회성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3. 사르트르와 푸코의 육체
20세기에 접어들어 데카르트적인 정신-육체의 이원론을 비판하며,
정신과 육체의 두 실체는 분리될 수 없고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는 것임
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하이데거, 가브리엘 마르셀,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의 경계선을 제거한 논의를 전개했을 뿐 아니라 육체의
실존적 의미와 감각적 체험을 중요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그의 소설 『구토』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를 표명하며, 인간은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라는 것을 일상적인 체험의 차원에서 규명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은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한 의미를 떠난상태에서 볼 때, 그 자체로서 충족된 즉자적 존재이다.
그 사물들과 접촉하고 있는 인간의 신체를 근본적으로 돌아보면 그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육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가령 신체가 외부적 존재와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때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나 다름없다. 사물의 우연성이나 무상성 등 본래적 모습 앞에서 주인공이
당혹감이나 구토를 느끼는 것처럼, 벌거벗은 육체, 분식하지 않은 육체.
아무것도 나타내 주지 않는 육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이 표현된다.
『존재와 무』(1943)는 존재의 본질을 현상학적으로 탐구한 사르트르의
중요한 저서로서, 여기에 나타난 현상학적 존재론은 무엇보다도 신체와 의식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사르트르에게 신체는 바로 의식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풍경을 바라보거나 어떤 물건을 손에 쥐고 있을 경우 우리의 눈과 손은 망원경이나 지팡이와 같은 도구가 아니고 바로 '나의 신체이고, 나의 의식이고,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과 동일시된 신체는 의식의 신체성이기도 하고, 신체의 의식성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은 자유이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갖고 있지않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한 자유는 물론 책임이 따르는 고통스러운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사랑의 관계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내가 나의 자유를 행사하면서 타인의 자유를 나의 자유 속에 동화시키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속에 희생시키는 것은 마조히즘(masochism)이고, 자신의 욕망을 계속 충족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하고, 그의 존재를 육체 속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 사디즘(sadism)으로 논의된다.
'성적 욕망' 도 이러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문제와 더불어 사르트르의
육체의 인식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다. 성적 욕망은 자신의 신체와
타자의 신체가 접촉되기를 바라는 욕망이다. 사르트르는 애무가 성적 욕망을 처음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타인의 육체를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나의 애무에 의해서 내 손가락 밑에서 타자의 육체를 탄생시킨다. 애무란 타자를 육화하는 의식(儀式)의 총체이다."9)
이러한 애무는 타자의 자유를 제한하고 상대의 신체에 부여된 많은 가능성을 박탈해 버린다. 애무하는 자는 타자의 신체를 나의 의식과 자유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신체가 나의 의식과 자유로 가득차게
되면, 그 육체는 매력을 잃어버린다. 자유야말로 육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자유를 상실한 육체는 물체로 전락한다. 이것은 사디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디스트의 목적은 상대편의 의식과 자유와 주체성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것인데, 그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 상대편의 주체성은
소멸되고, 육체는 물체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인간의 실존뿐 아니라 육체적 존재이자 성적 존재인 인간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하였다. 그의 철학에서 신체에 대한 문제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내가 어떻게 경험하고, 다른 사람은 나의 신체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등의 대타 관계에서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사르트르 이후에, 푸코는 『감시와 처벌』(1975)과 『성의 역사』 1권(1976)을 통해 그가 이전에 의존해 왔던 고고학적 방법론을 떠나서
계보학적 방법론의 시각으로 권력과 지식, 권력과 육체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계보학자의 시각은 역사 발전의 고정된 법칙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선입견도 배제하면서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의 흐름 속에 감춰진 지배와 복종의 역학 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육체의 문제는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는데, 푸코가 이런 계보학의 시각으로 육체의 문제를 탐구한 것은 니체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니체를 통해서 인간의 육체나 욕망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해석되고,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육체가 유럽의 역사에서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육체에 대한 사르트르의 실존적 시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인데 푸코는 존재의 자유와 육체의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논리로는, 사회와 권력이 오랜 역사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개인의 육체를 통제하고 조작하고, 영향을 미치게 된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권력의 역사란 결국 개인의 육체를 어떻게 지배하고 공략하고 포위해 왔는지를 규명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푸코가 다각적으로 탐구한 권력의 역사에서 18세기는 매우 중요한 시대
이다. 그러나 푸코에게 18세기의 중요성은 이 시대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계몽 사상과 역사의 진보, 인간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다.
『임상의학의 탄생』과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진료소와 정신병원, 근대적 감옥의 형태는 모두 18세기에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은 외면적으로 이 시대가 환자와 죄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를 보인 시대로 해석될 여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푸코의 관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개인에 대한 권력의 통제 기술과 전략이
근대적인 형태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18세기 이전에는 의학적 치료라는 것이 일종의 종교적인 구원에 필요한
수단이었고, 병원의 기능도 허약하고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복지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8세기의 진료소와 더불어 비로소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가 형성되었고, 환자의 증세와 육체가 전문적인 관찰과 해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점에서는 개선으로 볼 수 있지만. 전염병의 위험이 있는 환자를 격리시킨다거나 그의 혈통과 가계를 조사하고 신체를 해부할 수도 있는 등 임상의학적 번화에서는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력의 적극적 개입과 권력 관계의 작용을 볼 수 있다는 짐에서 부정적이다. 또한 정신병원은 이성 중심적 부르주아 사회의 대변인인 의사가 비이성적 존재인 광인을 사회로부터 제도적으로 격리시켜 감시와 심판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므로, 정신병원의 탄생이 광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적 감옥의 출현은 죄인에게 잔혹한 신체형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권력의 배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다만 권력의 개인에 대한 지배의 전략이 바뀌었을 뿐이다. 푸코는 개인의 육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가 계몽주의 시대에 더 정교하고 기술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과 육체'라는 주제의 한 대담에서 인간에게 "해방의 시대인 18세기를 오히려 통제 장치가 강화된 시대로 묘사한"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권력 관계가 대체로 그렇듯이 우리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을 따르지
않는 여러 복잡한 현상을 바라보게 된다. 개인의 육체에 대한 통제와 의식은 육체에 대한 권력의 투자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즉, 체조와 운동, 근육 강화, 노출, 아름다운 육체의 과시 등 이 모든 것은 권력이 어린아이와 군인의 육체, 건강한 개인의 육체등 모든 육체에 대해 집요하고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을 행사하게 된 결과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육체를 정복하게 되는 이러한 효과가 발휘되고 나면 곧 그에 따르는 육체 요구와 주장도 생기기 마련이다.10)
푸코는 18세기가 바로 육체를 지배하려는 권력의 요구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시대임을 말하는 한편, 육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가 일방적인 것만이 아님을 주장한다. 물론 개인의 육체는 권력의 작용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저항의 형태는 기껏해야 결혼전의 동거 생활이나 낙태의 자유에 대한 주장, 성적 쾌락의 유혹에 빠지는 일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육체의 저항은 근본적인 저항이 아니라 표면적인 저항일 뿐이다. 육체의 저항 앞에서 권력의 효과는 단절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면서 육체를 관통하기 마련이다. 푸코는 국가 기구와 대중의 관계가 육체를 매개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영혼과 의식과 관념성을 위해 육체의
현실의 중요성을 부정하였을 것이라는 일반화된 명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권력의 행사만큼 물질적이고, 물리적이며, 육체적인 것은 없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데 필요하고 충분한 육체의 투자 형태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권력에 의한 육체의 투자를 육중하고, 거대하고, 지속적이고, 세밀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주택단지, 아파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규율 체계가 그런 형태일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사람들은 그처럼 막강한 권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권력 체계로서가 아니라. 산업사회의 권력이 훨씬 이완된 육체 위의 군림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성(sexuality)에 대한 통제가 완화될 수도 있고, 그것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11)
육체에 대한 권력의 전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말하고, 또한 권력의
행사가 '물리적'이고, '물질적'이며, 또한 '육체적'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이 답변에서 우리는 육체야말로 권력의 문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주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육체, 군인들의 튼튼한 육체, 건강한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육체, 그 육체 위에 권력의 전략은 다양하게 행사되고 구체적으로 새겨진다. 식이요법에 의해서건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서건,
사람들이 '보기 좋은 몸매'를 가꾸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권력은 어느새 그들의 육체를 관통해 점령하고 있다. 권력은 억압적으로
군림하지만 않고, 모습을 감춘 채 부드럽고 생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육체의 문제가 첨예하게 논의되어 있는 『감시와 처벌』은
감옥과 학문뿐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제도들, 즉 병원, 공장, 학교, 군대 등이 어떤 상관관계로 연결되어있으며, 규율과 체제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광범위한 자료로 규명한다. 결국 근대적사회의 질서는 육체에 대한 제도적 훈련과 규율이 권력의 기술과 접목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감시와 처벌』의 주제는 그러므로 육체를 규율의 틀 속에 길들이고 순응
시키는 권력의 기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권력자의 육체가 위압적으로 군림하던 고전주의 시대에 죄인의 육체가 끔찍한 고문과 신체형의 대상이었다면, 근대에 접어들면서 권력자의 육체는 점점 위압적 모습이 감춰지고, 죄인의 육체를 다루는 기술도 끔찍한 폭력성으로부터 부드럽고 정교한 속박의 방법으로 전환하게 된다.
육체는 여러 가지 훈련과 속박을 받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확산된 권력의 형태와 조직의 요구에 길들여지고 수동적이 된다.
‘강제권’, '통제' '예속화', '분할 점령 방식(quadrillage)', '금지 조항' 등은
육체에 대한 권력의 부정적 방법이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 주는 규율의 다양한 예들이다. 사회는 이러한 규율의 메커니즘을 토대로 질서를 이루고 가동된다. 육체는 규율의 메커니즘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규율은 복종하고 훈련된 육체들을 만들어 낸다."12) 규율은 모든 육체를 비개성적으로 만들고 동질화하고 규율화한다.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한 실습 행위로부터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르치는 글쓰기의 정서법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자세와 기본적 훈련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적인 육체는 기계적인 육체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육체는 수동적인 순응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육체의 관계에서는 권력이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검열하고,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힘을 생산적으로 만들고 해방의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생산적 기능에 따라 육체는 능숙해지고,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유효한 것이 된다. 육체는 기계적인 것에서 유기적인 것으로,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육체는 힘은 육체의 속박에 따른 예속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어떤 긍정적 경제의 틀 속에서 가동하는 것이다.
권력은 유용성의 경제적 측면에서 육체의 힘을 증가시키는 한편,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측면에서 육체의 힘을 감소시킨다.
푸코는 이러한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규율의 확립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조건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개인으로 하여금 규율을 지키게 만드는 공간을 여러 독립적 단위로 분할하여 개인을 관리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모든 분할 체제로서, 수도원이나 학교, 공장 같은 기관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개인의 활동을 통제하는 모든 규율의 수단으로,일과 시간표나 군대의 제식훈련 같은 것을 이용하는 일이다.
셋째는 육채에 시간의 의미를 부과하여 육체의 의미를 분할하도록 훈련시키고, 넷째는 개인이 명령에 따라 부과된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하도록 개인의 힘을 최대한 통합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규율 체계와 감시의 모델이 만들어지면서 근대적 감옥 형태가 생겨난 것이다. 이 감옥은 범죄자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을 규율에 순응하는 존재로 교화하는 역할을 한다. 감옥은 육체를 통제하고 길들이는 모든 장치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기관이다. 육체를 격리시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게 할뿐 아니라, 죄수에게 노동을 부과하는 것도 그러한 장치의 수단이다. 이러한 감옥은 개인을 통제하고, 교화하고,
관찰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수형자들에 대한 임상의학적 지식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1830년대에 만들어진 일망 감시 장치(lepanopticon)는 바로 그러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 수형자 개인의 신체적 특징과 행동방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를 교정할 수 있도록 감시망을 조직화한 시설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범죄자에 대한 실증적 지식은 의학적 지식과 구별되면서도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 푸코는 감옥이 범죄자를 제거하는 기관이라기보다 범죄자를 생산하는 기관임을 역설한다. 감옥의 환경이나 체제가 범죄자를
교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보다 범죄자의 정신을 더욱 오염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신상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권력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감옥과 경찰은 권력의 동일한 장치일 것이다.
감옥의 제도를 포함한 사회체의 모든 규율 중심적 통제는 개인의 신체에
대한 접촉을 하지 않을수록 그만큼 통제의 효과가 증대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실행된다. 가령 일망 감시 장치의 구조는 권력이 개인의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아도 가동될 수 있는 장치이다. 가능한 한, 신체에 거리를 두고 권력의 끊임없는 시선의 통제가 작동하면, 권력의 효과는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권력은 비육체적 형태를 지향한다"는 것이 어쩌면 『감시와 처벌』의 핵심적 내용일 것이다 육체에 대한 접촉을 하지 않고, 육체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개인을 통제하고 예속화하는 권력의 기술이야말로 근대적 권력의 주요한 특징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근대 산업 사회의 복잡한 체제를 푸코식으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푸코의 생체 통제 권력(biopouvoir)'의 개념이다. '생체 통제 권력'은 인구의 증가와 출산, 국민의 건강과 질병 등 질병과 성의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의 기술이 18세기에 태어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결국 개인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를 '생체 통제 권력'의 개념
으로 이해한다면, 이 개념 속에는 『감시와 처벌』에서처럼 기계로서의
신체를 훈련하고 순응시켜 그 효용성을 최대 한도로 증대하려는 방법의 문제와, 『성의 역사』에서처럼, 성과 성욕, 출생과 사망, 수명 연장, 인구 증가, 국민의 건강 등 인간의 육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문제가 포함될 수 있다. '생체 통제 권력'은 권력에 육체를 순응시키면서 생산적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의 장치는 공장, 병영, 감옥, 병원, 학교 등 다양한 집단에서 제도화되고 운영된다. 육체를 순응적으로 길들이는 통제 방법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자본의 축적과 권력의 축적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은 푸코의 독특한 시각이다. 푸코는 '생체 통제 권력'의 개념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권력의 메커니즘을 다양하게 논증한다. 권력에 대한 그의 다양한 논증과 개념화는 결국 권력이 얼마나 정치적·경제적 물질성의 근거에서 인간의 육체를 관리하고 지배해 왔으며, 또한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철저히 침투하고 점령해 왔는지를 보여준 작업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육체에 대한 인식은 아무래도 비극적이고 절망적이다. 육체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이나 출구의 빛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4. 들뢰즈와 '욕망하는 기계'의 육체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3)을 통해 니체의 중심적 작업이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일이었고, 또한 칸트로부터 시작된 비판철학의 과제를 완성하려는 노력이었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욕망'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
하며, 전자의 경우가 능동적인 의지이고 긍정의 원천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노예적이고 반동적인 부정적 욕망이라고 규정짓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권력에의 욕망'은 '권력에의 의지'가 전락한 형태일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권력에의 의지'를 힘과 육체의 개념을 통해 접근한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니체의 철학에서 세계의 본질이란 이런 존재도 안정된 통일성을 누릴 수 없는 변화와 생성의 형태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역동적 관계에 놓여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육체 역시 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의 관계로 나뉘어, 지배하는 힘은 능동적인 힘이 되고, 지배받는 힘은 반동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의 철학을 논의하면서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기에 급급한 입장이
아니라 니체를 통하여 그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개진한다. 그가 정신분석학자인 가타리와 함께 쓴 책으로 널리 알려진 『안티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맑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한 책이 아니라 '맑스와 프로이트를 니체주의적
틀 속에 융해하고 있는'14) 책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그는 니체의 철학과
그 영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이끌어 내며 발전시킨 것이다. 이 책의 1장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란 제목으로 욕망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논의하는 가운데, '욕망하는 기계(machined?sirante)', '기관들 없는 신체(corps sans oranges)', '독신 기계(machine c?libataire)' 등 상호 연결된 의미의 개념들을 제시하고 설명한다.
이 책은 또한 기존의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정신분석과 관련된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적 논리와 낡은 중심적 체제를 비판하는 한편, 이 체제에서 희생된 분열증 환자의 목소리로 욕망의 해방을 모색한다. 여기서 저자들이 말하는 정신분열증적 인간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병적인 모습으로 규정된 환자가 아니라 새로운 '자연인'이며, 기존의 관습적 코드와 구조 혹은 통제된 언어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자유롭고 유동적인질서 속에서 유목민처럼 사는 사람이다. 기존의 정신분석은 욕망의 문제를 '어머니-아버지-나'라는 가족의 삼각형 도식 속에서 개인에게 형성되는 문제를 다루고,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신분열증 환자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신분석적 해석에 의하면, 욕망은 가족의 범위 안에서 생성되고 거세되는 오이디푸스화의 과정을 거쳐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질서를 내면화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어디까지나 거세된 욕망이고, 오이디푸스화한 욕망이며, 생산적 측면이 배제된 표상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정신분석적 표상 체계나 질서에 갇혀 있지 않고 거세되지 않은 욕망의 본래적 성격을 주장하고, 진정한 욕망은 폐쇄적인 가족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욕망 개념과 구별된다.
라캉의 욕망은 대상이 부재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지만
들뢰즈의 욕망은 대상의 부재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욕망은 대상의 존재나 부재와 상관없이 프로이트의 리비도와 같은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낸다. 라캉은 요구와 욕망을 구별지어서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어린아이에게 요구는 의식적인 것이지만, 욕망은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다거나, 남근(phallus)이 되고 싶다는 것 등
채워질 수 없는 결핍으로 정의한다. 라캉의 상상계(l’imaginaire), 상징계(le symbolique), 현실계(le r?el)의 개념은 한 사람의 주체가 상정하는 세계와
언어 행위를 통해 정립되는 세계를 구별하여, 이것과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욕망의 근원과 욕구 충족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이다. 어린아이인 주체가 상징계로 들어가는 과정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으로서 무의식의 생성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언어를 습득하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의식의 그림자로 무의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욕망은 상상계와 동시에 태어난 무의식적인 것으로 거세 콤플렉스와의 관련에서 상징계 안에 재구성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무의식적 욕망이 상징계 안에서 언어 표상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라캉의 무의식과 욕망의 개념을 비판하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의식 안에서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한 부정적 의미보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욕망을 '욕망하는 기계들'로 명명한다.
이렇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육체의 모든 기관이나 욕망에 기계라는 개념을
부여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 기계'라는 18세기적 개념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다. 가령 그들이 인간의 육체를 여러 가지 '욕망하는 기계'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육체의 모든 기관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면서도 통일된 체계에 예속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단절되고 접속되고 분열하면서 생산하는 자유로운 기계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은 기계이다."15) 이렇게 모든 것을 기계로 규정할 때, 그것은 또한 어떤 대상의 의미가 중요하지가 않고 사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계의 기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사용과 용법일 것이다.
그러한 용법은 고정된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고,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육체 기계도 들뢰즈의 시각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육체의 모든 기계들의 분절과 결합의 방식은 통일되어 있지않고, 연쇄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이다. 가령 젖가슴 기계와 입 기계 사이의 우유의 흐름
이거나, 입 기계와 귀 기계 사이의 언어의 흐름도 그러한 유동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결코 통일적이거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라캉의 부분 충동과 유사하다.16) 그것은 충동적 성격을 갖고 있고,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욕망의 목적이 있더라도 그것도 궁극적인 목표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정의 추구가 중요한 목적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계와 같은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의 개념은 현실적으로 물질적인 육체의 개념과 같은 것으로서 자아의 통일성을 부정한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적 범위를 넘어서서 정신적 에너지가 투여된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많은 다른 주체들과 연속적으로 동일시되는 탈중심적 자아를 전제로 한다. '욕망하는 기계'의 논리가 통일된 자아와 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존의 정신분석과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도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정신분석은 '욕망하는 계'의 생산적 흐름을 코드화하고 영토를 구획지어 억압하고 통제하며 욕심 많은 자본가처럼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해 왔다. 들뢰즈에 의하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정신분석의 공통적 속성인 영토 확장의 메커니즘이자 정주민의 탐욕적 속성이다. '욕망하는 생산' 혹은 '욕망하는 기계'는 코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분열적 흐름을 생산하고, 주어진 영토의 경계를 벗어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탈주선(la ligne de fuite)을 지향한다. 그것은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굴절되고 속박된 리비도를 본래의 사회적 영역으로 해방시키려는 유목민의 작업과도 같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을 '리비도'라고 명명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것들 자체의 힘으로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한다"17)고 말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부분 충동들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성감대가
유기체를 이루지 않고 이질적 종합의 상태로 작용하는 신체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끝 부분에서 프루스트 소설의 화자가
하나의 거대한 '기관들 없는 신체'라고 말하면서 화자의 역할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18)는 거미가 미세한 진동의 기호를 감지하고 그 기호가 뜻하는 먹이의 대상을 향해 덤벼드는 행위에 비유를 한다. 그가 소설의 화자를 거미에 비유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성이 거미줄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미와 같은 존재인 화자는 뛰어난 감수성이나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있지만 이 능력을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비의지적 감수성과 기억력, 사유를 통해 자신의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어 나가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분열증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분열증적 주체에 '독신 기계'라는 이름을 붙이고, 독신 기계의 에너지를 '환희(Voluptas)'라고 부른다. 그가 주체를 독신 기계로 명명한 것은, 이 기계가 욕망을 오이디푸스화할 장치인 부모도 배우자도 갖지 않는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노마드적 주체의 힘은 종국에는 참으로 인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말한다.
정주민이기를 거부하고, 영토성을 부정하며, 유목민의 속성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기존의 정신분석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욕망의 사회적 투여를 분석하는 작업은 '분열증적 분석(la schizo-analyse)'이다. 그것은
억눌려 있던 무의식적 욕망의 힘을 분출시켜 파괴와 소탕과 혁명의 임무를 수행한다. '분열증적 분석자'는 '무의식의 압력선'을 중시하지 않고, '무의식의 탈주선'19)을 중시하는 사람이며, '오이디푸스적 억압의 함정과 예속 관계'20)를 해체하는 사람이다. '분열증적 분석'은 그러한 욕망의 탈주선을 찾고, 오이디푸스를 거부한 욕망이 사회 공간 속에 투여되지 못하고 붕괴될 때 발생하는 정신병의 단계를 뛰어넘는 작업을 감행해야 한다.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라면, '분열증적 분석'은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를 교란하고 전복시키는 혁명적 힘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통한 혁명의 꿈과 논리는 유토피아적인 것일까? 분열증적 흐름에 기초한 자유로운 욕망의 해방이 과연 기존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정신분열증의 지나친 미화이거나, 분열증적 세계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간과하고 관념적인 입장에서 욕망과 정신된열증의 긍정적인 측면만 확대해서 것은 아닐까? 물론 정신분열증 환자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통제된 언어를 수용하지 않고,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자유로운 세계 속에서 체제와 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갖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의 유목민들은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 주긴하지만, 혁명의 현실적 세력으로 규합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혁명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책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육체 속에 내재한 욕망의 정체와 크기 혹은 그것의 진정한 힘과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미셀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서평에서 이 책이 욕망과 현실과의 관계를 분석한 책으로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사유와 언술과 행위 속에 욕망을 끌어들이고 있는가?", "욕망은 정치의 영역 안에서 어떻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 힘이 강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헤친 역저라고 평가한다.21) 그의 말처럼 『안티 오이디푸스』의 참된 의미는 인간의 외부와 내부의 어디에서건 굳건히 자리 잡은 정주민적 사고 파시즘 형태를 타기하고, 권력의 경직된 외피를 깨뜨리면서 진정한 자유와 욕망의 인간을 복원시키고 육체적 무의식의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의 가치를 일깨운 점에 있을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욕망과 권력의 사회사라는 관점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역사로 파악하는 다음의 견해는 우리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익하고 시사적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역사는 어느 정도까지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전개되는 니체의 권력사, 그리고 『저주받은 몫』(1954)에서 전개되는 바타이유의 일반적, 리비도적 과잉의 경제학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은 '욕망하는 생산'을 새로운 분석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의 탐구 대상과 유사한 것이다. 푸코의 권력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들에 스며들며, 개인의 하부수준에 있는 신체를 관통하며, 행동과 생산의 보다 큰 회로들 내부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구조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신체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투자를 실행한다.22)
이러한 견해처럼 푸코와 들뢰즈의 작업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푸코에게 권력의 문제가 일차적인 반면에, 들뢰즈에게는 욕망의 문제가 일차적이다. 푸코가 권력의 전술이나 '생체 통제 권력'의 개념을 세밀히 분석하면서 육체의 예속성을 부각시켰다면,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가 권력의 지배 체제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모두 욕망과 권력, 육체와 권력의 밀접한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서 육체와 욕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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