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고개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너무 빡빡해도 못 쓴다. ‘뽀드득’ 소리를 일으키면서 들어간다고 하여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외려 약간 헐렁할수록 낫다. 잦은① ‘드나듦’에 익숙해져, 제법 닳아 길이 나면 서로가 편하다. 할랑하면, 서로 ②‘부비어’ 상처를 남기는 일이 줄어들어 좋다. 나는, 그가 유세부리지 않고 언제라도 쉽게 몸을 내어주기에 값싼 맛에 즐기기도 한다. 달력에 빨간 숫자로 된 날이면 그를 찾곤 한다. 때로는 거칠게 다루어도, 함부로 불평하는 법 없어 만만하다. 그저 몰캉하다.
단언컨대, 돈 냥께나 있고, ‘화이트칼라’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를 찾지 않는다. 자신들의 체면이 구길세라 찾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반지르르한 상대를 손쉽게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루칼라’들은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걸맞은 상대이기에 종종 ③‘적은 돈’으로 그를 취하곤 한다.
그 얼굴은 못난이 모습 그대로다. ④‘검은 피부’를 지녔다. 생물학적으로는, 검은 살갗이 ‘흑단(黑檀 ; ebony)’ 같다고들 하면서도, ⑤ ‘생산 능력’이 뛰어나기에 ‘우성(優性’)으로 치면서도, 실상은 그런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비교적 함부로 대한다. 업신여기는 편이다. 미친년처럼 낯짝을 ‘잘 씻지도’ 않는데다가, ⑥‘흙으로 화장’을 하고 온데 돌아다니는 수도 있다. 자기 주인을 따라 ⑦물에 ‘저벅저벅’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물기를 닦지도 않은 채 자기 ⑧‘기둥서방’이 하자는 대로 졸졸 따라 다니기 일쑤다. 담배 냄새, 술 냄새, ⑨ ‘몸 냄새’ 풀풀 나는 이가 뭣이 그리 좋은지 쉬이 떠나지 못한다. 본디는 그도 깨끗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그 임자가 제대로 ⑩‘거시기’를 씻지도 않고 자주 덤벼드는 바람에, 그는 몹쓸 병균이 득실거리는 ⑪‘쉬궁 구멍’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칫 ⑫‘시궁창병’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예도 많다. 심지어, 제 몸 속으로 ⑬‘물이 잔뜩’ 들어감에도 짜증내는 일이 없다. 그는 독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피부가 다소 ⑮‘질겨서’ 독사도 물 수 없다. 무던하여, 웬만한 가시에 찔려도 ⑯‘피가 나지 않아’, 자기 주인이 풀섶을 쏘다닐 때도 따라 나선다. 얼음구덩이에 가도 ⑰‘추위를 덜 탄다.’ 군대에서는 짓궂은 선임병, 대학에서는 개구쟁이 선배들이 그를 희롱하여, 막걸리를 가득 담기도 했다. 그리고는 ⑱ ‘폭포주’라며 들어 마시게도 했다. 그는 농부, 어부, 식당 아지매, 어시장 아재 등 주로 생산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⑲‘짝’이다. 끝으로, 그는 계모 허씨한테 학대를 받던 ‘배좌수(裵坐首)’의 딸, ⑳‘홍련(紅蓮)’의 자매다.
어느새 스무 고개를 다 넘었으니, 그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는 ‘장화(長靴)’다. 사실 장화홍련전에 나오는 ‘장화(薔花)’만이 애절한 사연을 지닌 게 아니다. 내 짝꿍 장화도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그 동안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심지어, 위에서 스무 고개를 넘는 동안에도 깔보는 말들을 많이 했다. 통풍이 아니 되어 무좀균한테 온상이 되어준다고 빈정대기까지 했으니... .
청년기까지는 줄곧 운동화를 신고 지냈다. 신발끈을 제법 단단히 조여매고 장래를 준비하였다. 군대생활 삼년 동안 군화를 신고 지냈다. 군화끈을 고쳐맬 때마다 전의(戰意)가 되살아나곤 했다. 그러다가 사반세기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어쩔 수없이 구두를 신고 지냈다. 구두끈을 이쁘게 묶고, 자주 광(光)도 내곤 했다. 때로는 뒤축도 갈았다. 나아가서, 와이셔츠에다 넥타이에다 양복을 갖춰 입는 등 직장 규칙에 얽매였다. 장화를 찾을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갯바위 낚시를 갈 때 어쩌다 한 번씩 찾았을 뿐이다. 그러다가 주말농장을 가꾸면서부터 장화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구두를 아주 벗었다. 정녕, 반질반질하게 닦았던 ‘구두의 세월’은 끝났다. 그리고는 나한테 ‘장화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묶을 끈’이 소용치 않는 나날이다. 장화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위에서 언뜻 소개했지만, 물에 들어갈 때나 도랑을 칠 때나 밭갈이를 할 때나 풀섶을 다닐 때 만판이라는 걸 차츰 알게 되었다. 물, 오물, 흙, 풀독[草毒], 약해(藥害), 벌레, 독사 등으로부터 발과 발목을 보호하는 데는 장화만한 존재가 없다. 작업화와 운동화가 그 목이 짧은 데 비해 장화는 그것이 길어, 위에 이야기한 훼방꾼들로부터 발과 발목를 온전히 보호해 준다. 관리기로 ‘로터리’를 칠 때에 ‘자갈 튐’으로부터 촛대뼈를 보호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산길을 걸을 때 길섶 나무회초리로부터 종아리 ‘얻어맞음’도 피해준다. 더욱이, 겨울에는 어느 정도 ‘발 시림‘도 덜어준다. 한편, 돌봐주기도 비교적 용이하다. 신은 채 물을 적당히 채우고, 저벅저벅 걸어 다니다가 보면, ‘아시빨래’가 저절로 된다. 그 은밀한 신발코까지 제대로 씻자면, 이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이때 몇 방울 물비누를 떨어뜨리면 더욱 효과적이다. 그러는 동안, 고약한 내음이 배인 발도 더불어 씻긴다. 이번에는 제법 많은 물을 채워 몇 차례 헹구고, 탈탈 턴 다음 물구나무서기로 벌을 주면 된다. 그러면, 시쳇말로 ‘빨래 끝~’ 된다. 물론, 겉을 따로 씻어줄 일은 없다. 맑은 물속에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절로 씻기기 마련이다.
굳이 따지자면, 여지껏 내가 누린 ‘구두의 세월’도 신성한 노동이었다. 그것이 생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흙 곁으로 돌아와 흙과 더불어 여생을 꾸려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장화의 세월’을 열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장화라는 훌륭한 동반자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가짐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행동함으로써 마음이 새로워지는 예도 있다. 복장에 따라서도 행동양식과 마음가짐이 사뭇 달라졌음을 기억한다. 장화는 농부로 살아가는 나의 자세를 자주자주 고쳐주곤 한다.
나의 장화는 수수하고 털털하다. 애초 그를 ‘생산한’ 어버이의 심성(心性)도 헤아려보게 한다. 그들은 용을 써서, 몸 대부분을 검은 비닐계 수지로 만들고, 밑바닥을 샛노란 찰고무로 덧붙여두었다. 친절하게도, 밑바닥이 땅거죽에 착착 붙으라고, 요철(凹凸)로 두드러지게 마감해 두었다. 이 찰고무와 요철의 조화로, ‘발 디딤’ 맛을 제법 ‘폭신폭신’하게 해주기도 한다. 벌써 수년째 신었건만, 쉬이 닳지도 않는다. 다만, 오십 대 후반인 제 주인을 닮아, 활력 내지 탄력만 다소 줄어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속을 망사(網絲)로 덧입힘으로써, 발의 촉감을 더해주고 발 미끄러짐을 방지하려고 애쓴 흔적도 있다. 내 장화는 꽃무늬나 레이스 따위의 장식도 없다. 하기는 패션장화도 나와 있더라만, 나의 장화는 말 그대로 실용적이다. 그러니 박차(拍車)가 달린 ‘말 장화’나, 지퍼가 달린 ‘롱부츠(long boots)'와도 사뭇 다른 품성이다. 고무제품이 대체로 그러하듯, 내 장화는 웬만한 가시에 찔려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곧바로 ‘자기치유’로 멀쩡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물마를 날이 없는 횟집 주방 아지매와 달리, 나는 과일밭 농사를 하고 있어, 완벽한 방수(防水)까지 바란다는 것은 분에 넘친다.
나의 장화는 헐렁헐렁 속이 넓다. 전혀 옹색하지 않다. 본디 장화는 목이 긴 까닭에, 신발 벗겨짐이 적다. 그러기에 여타 신발들과는 달리, 끈을 꿰어 얽맬 일이 없다. 따라서 헐렁헐렁 속이 넓어도 된다. 이러한 ‘속 넓음’은 ‘융통성(融通性)’으로 곧잘 이어지곤 한다. 나는 이 점을 알기에, 다소 할랑한 것을 들여놨다. 그랬더니, 웬만한 발 크기를 넉넉하게 받아들인다. 내 농장에 오는 이들도 두루 신게 된다. 겨우내 내가 발이 시려 양말을 여러 켤레 겹으로 신든가 등산 스타킹을 신든가 하여도 착용이 가능하다. 그 ‘속 넓음’은 공기의 소통도 제법 돕는다. 속이 좁으면 아무짝에도 못 쓴다. 땀과 내음을 가중시킬 뿐이다. 속이 좁으면 무좀균들이 활개를 치는 등 위생상 문제가 생기기 쉽다. 다시 말하지만, 다소 넉넉한 치수이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앞으로 이 장화를 신고 흙과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 나는 산촌에서 태어났고 농학을 공부했던 사람 아닌가. 본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진 날, 궂은 날도 꽤 겪게 될 것이다. ‘물마를’ 날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장화는 나를 도와 생산적인 일 즉, 소출나는 일을 이룩해나갈 것이다. 그러면 내 여생, 또 다시 스무 고개를 넘을 것이다.
끝으로, 고린내 나는 발 냄새를 꾸역꾸역 참아주는 장화한테 진실한 맘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한 품성을 지닌 또 다른 동반자, 내 아내한테도… .
* 본 작품에 관한 자평(自評)
수필 장르는 여타 장르와 달리, 발전 속도가 더딘 편이다. ‘새로운 작법(作法)’, ‘새로운 내용’ 등에 관해 많은 분들이 논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몇몇의 수필작가들은 새로운 작법과 새로운 내용을 시도(試圖)하고 있는 데 그치고 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인천의 한상렬 평론가께서는 여러 권의 평론집에서, 나의 기발표작들 가운데 여러 편을 이러한 ‘새로운 시도’로 보아, 포함시켜 적은 바 있다. 늘 고맙게 여긴다.
여담이다. 10여 년 전 일로 기억된다. 내가 어느 수필전문잡지 발행인에게 ‘어느 샌님’이란 본인의 수필 작품 원고를 보낸 적이 있다. ‘쥐’를 ‘서생원(鼠生員)’이라 하는 데 착안하여, ‘새앙쥐’를 미화(美化)하여 적은 글이다. 스무고개를 넘듯, 한참을 읽어내려가야 그 주인공이 ‘쥐’임을 알 수 있는 글이었다. 독자들 한눈팔지 못하게 문장을 끌고가는, 나름의 문장기술(文章技術)이 적용된 글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그 잡지에 실어주지 않았다. 몇 개월 후 그 발행인은 ‘참새’에 관해, 유사한 작법(스무고개 넘듯 꾸려간 이야기), 유사한 제목 등으로 자신의 잡지에 발표하고 있었다. 그분의 명작(名作)으로 꼽히는 글이기도 하다. 이 경우, ‘우연의 일치’ 단계를 넘은, ‘표절’의 냄새가 무척 짙은 게 사실이다. 그냥 내 속으로만, ‘아, 이런 일도 있구나.’ 여기고 말았지만, 여태 개운치 않다.
그 일이 있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글 ‘스무고개’는 아예 다른 이들이 흉내내지 못하도록, 제목 자체를 ‘스무고개’로 정했다. 그리고 20개의 ‘암시적 어휘(?)’에다 번호까지 매겨두었다. 위에서 말했듯, 스무고개를 넘듯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어린 시절 즐겼던 ‘스무고개’ 놀이는 늘 흥미진진했던 데 비추어, 독자들에게 다음 문장 또 다음 문장… 유도하여 끝문장까지 읽도록 하는 기술이었노라고 감히 말한다. 허두(虛頭)에 밝힌 ‘새로운 작법’, ‘새로운 내용’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자부한다.
* 이 글은 2011년 어느 현상문예 낙선작 가운데 한 편이기도 하다. 특허등록(?) 하듯, 한국디지털 도서관(네이버>윤근택>작품/논저>미발표작)에 수록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