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도 없는 사람들
함석헌
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의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있다면 한달에 한번 ‘소리’를 내는 것뿐이요, 그중에서도 여러분께 이 편지 하나를 쓰는 것이 고작인데,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합니다.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여러 가지 바깥 조건이 좋지 않아, 자유가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나 자신을 나무라서 하는 말입니다.
물론 바깥 조건은 나쁩니다. 되는 일이 거의 하나도 없습니다. 방금 오늘도 매일같이 오는 중앙정보부의 사람을 보고 나무라기도 했습니다마는, 오는 28일 금요일 아침 가기로 돼있던 연세의대 기도회 시간의 설교를 허락이 되지 않아 못하겠으니 오지 말아달라는 통지를 학생이 와서 하고 갔습니다. 이날까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벌써 몇십 차례 됩니다. 얼마 전에는 대구의 어떤 청년이 결혼주례를 해달라 해서 갔더니 시간이 다 됐는데 신랑이 겁이 시퍼렇게나 달려 와서 “선생님 이거 일 났습니다” 했습니다. 그래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형사가 와서 “왜 그런 사람더러 식을 해 달랬느냐” 조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격의 무시오, 공민권의 짓밟음입니다.
그래서 이날껏 참아왔지만 하도 괘씸하기 때문에 그 중당정보부 사람보고 “말을 한 후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잡혀가도 좋고 감옥살이를 해도 뭐라지 않겠지만, 하기도 전에 미리 내 길을 막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횡포 아니냐, 그것은 그냥 당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구가 무슨 이유로 그런 명령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좀 알아다가 내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의 담임 정보부원입니다.
씨의 소리를 인쇄할 때도 우리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인쇄소 직공에게 가서 원고를 가져다 읽고는 이걸 깎아라 저것은 못 낸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당신들 만든 법에 검열제도로 돼 있지는 않으니 내가 일단 발행을 한 후에 그 법에 비추어서 고소를 하든지 정간 폐간을 시키든지 하지, 이것은 무슨 비겁한 짓이냐? 또 내 글이 뭣이 잘못된 말이냐 설명을 해라” 하면 그 관계 담당자는 번번이 하는 말이 “선생님 좀 생각해주십시오” 합니다. 그러면 내 말은 “정부의 권력을 가지고 왜 그렇게 당당하지를 못하고 나더러 사정을 보아달라느냐? 법대로 하자” 하면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당하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입니까? 친구들은 다 감옥에 가 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15년 징역 선고를 받고 있다가 건강이 나빠져서 갑자기 백병원으로 나온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몇번 그 병실 문 앞까지 찾아갔었지만 경관이 밤낮 지키고 있어 면회를 막고 있습니다. 문 하나 열면 그 안에는 일본군인 앞에서 마취약을 한방을 쓰지 않고 생 손을 코도 찌끗 아니하고 째우던 그 얼굴이 있는 줄 알건만 볼 수가 없습니다. 방문에는 분만실이라 써 붙였습니다. 아기 낳는 방이라는데 장준하는 무슨 아기를 어떻게 낳으려고 거길 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동길 박사는 씨알의 소리 발행 4주년 기념강연 밤에 그 자리에서 끌려가서는 지금은 서대문 교도소에 가 있다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기소가 되는지, 재판을 받는다는 말도 이렇다 저렇다 소식도 없습니다. 그날밤「인생과 해학(諧譜)」이란 제목으로 청중을 섭섭이가 들먹거리도록 웃겼는데 그 자신이 하나의 해학이 되고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가 한번 끊겼다가 다시 복간이 될 때 박상희란 아가씨가 한동안 사무를 보아주었는데 그는 한국신학 대학생으로 잡혀 들어가 7년 형을 받았는데 지금 건강이 아주 나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72년 4월호가 하마터면 날치기를 당할번 한 것을 연극같이 빼내다가 발송을 했을 때 박양은 사슴처럼 날쌨는데 지금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한 형편이라지만 한번 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씨알의 소리에 직접 관계된 분들 이야기입니다마는. 그 밖에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학생, 젊은이가 몇백 명이 가 있지 않습니까? 당국의 발표로 관계 인원이 천 명이 넘는다 했습니다. 역사 이래의 큰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느 신문 하나 잡지 하나가 그 내용의 자세한 것을 보도한 일도 없고, 어느 언론가 어느 학자 어느 종교인 하나가 거기에 대해 설명 하나 분석 비판 하나 걱정하고 동정하는 말 하나 앞으로 젊은이 지도 교육 방침에 대해 의견 하나 발표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무감각 몰인정한 인간사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부족한 대로나마 옅은 생각이나마 지난달 호에 말을 해보려고 했는데 한 글자도 못내고 삭제당하고 말았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은 명동엘 나갑니다. 일요일 오후 3시. 조그만 종교모임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거기 오염된 강물 위에 떠다니는 죽은 고기떼 같은 젊은 남녀의 밀려들고 밀려나는 탁류 속을 뚫고 나가노라면 “남의 세상엘 왔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고,남의 세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네 세상이 아니냐 하고 자기에 돌아오게 되면 분노와 슬픔이 가슴 속을 뒤섞여 설레입니다. “내가 독재자가 됐다면 저런 것을 한데 몰아 강제 노동소로나 보내지” 했다가는 다음 순간 곧 나는 자신을 책망합니다. “강제노동소에는 그래도 윽무는 이빨이나 부러쥐는 주먹이라도 있지 않겠느냐? 여기는 더 참혹한 곳이다. 스스로 썩는 곳이다. 더 불쌍한 곳이다. 독개쓰실이요, 오염의 바다요, 미친 줄도 모르게 미쳐버리는 안개의 골짜기다. 저것들은 미워하기에는 너무도 불쌍한 존재 아니냐? 그들은 도둑이 아니요 도둑맞은 자들이다. 그들은 뛰고는 싶은데 받아 쥐어야 할 바톤을 받지 못한 선수들이다. 그들의 미친 춤은 가져다 대고 비빌 언덕을 못 찾아서 제 몸에 대고 저를 비비려 하기 때문에 나오는 맴돌이질이요 사판됨이다. 그들에게 언덕을 주어라, 나갈 구멍을 내놓지 않고 몰아치면 차는 그 발길을 물수 밖에 없지 않으냐? 물어뜯을 발길도 없으니 배꼽이라도 물어뜯을 수밖에 없지 않으냐? 너는 과연 네 달릴 코스를 달렸으며 넘겨야 할 바톤을 넘겼느냐?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가던 길이 다 되고 골방 속엘 들어가 여남은 되는 사람이 둘러앉아 고요한 가운데 기도를 하노라면,
“어둠 속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그 밑에 책을 열면 거기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
“빈 들에 님의 길을 열어라.
모래밭에 님의 길을 닦아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 작은 언덕마다 낮아지고
고르지 않은 곳이 번듯해지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되어
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보리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님의 어린 양을 보라.”
나는 바깥 조건을 나무랄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나무랄 때는 그래도 그 속에 도리의 마지막 한 가닥 빛을 믿던 때입니다. 이제 그것도 믿을 수 없어졌습니다. 물론 이제도 믿어 주어야지요. 그들보다 우선 나 자신이 사람이기 위하여 믿어야지요. 사람 속에 빛을 믿지 않는 것은 나를 믿지 않음이오 나를 믿지 않음은 하나님을 믿지 않음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나도 믿을 것입니다. 나는 유다가 예수와 손을 잡고 지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말로는 아니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 아니라면 직접 행동으로냐고 성급히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직접 행동이란 말보다 아래입니다. 말 못하는 짐승은 직접 행동밖에 모르지만 사람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로 아니 된다는 것은 말보다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이 깊어갈수록 고급약을 쓰는 모양으로 사람이 하는 일이 잘못될수록 그 고치는 방법은 더 도덕적이고 더 정신적이어야 합니다. 정신병을 약으로 못 고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을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마음으로야 되고 영은 영이 아니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인간성을 잃어가는 것 은 단순히 욕심이나 판단의 잘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작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볼 때 문제는 크게 달라집니다. 이 사회부정의(社會不正義)를 맘대로 지어내고 있는 사람은 명동 골목의 썩어진 물고기떼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역 사적 피해자입니다. 우리는 돈을 뺏기고 지위를 뺏기고 사상언론의 자유를 뺏겼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영혼을 잃고 악령의 종이 됐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참혹한 피해자입니다. 그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답답하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 그들을 나무라고 비판하고 경고하는 정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데, 일은 그만큼 다급해졌는데, 나는 오히려 소위 투쟁 정도 반항 정도의 버릇을 못 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볼 때 14년 동안 해온 결과가 뭐냐? 천 명 넘는 젊은이를 죄인으로 만들고 가장 사랑하는 동지들을 감옥에 몰아넣고 그리고 거기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앓는지 우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자고 먹으며 비인(非人)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차를 모는 사람이 정신이상이 생겼는데 그것을 보면서 멍청하게 누워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게 보여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때는 타이르기도 하고 풀어 가르치기도 하고 책망까지 했고, 말로는 아니될 때는 여러 가지 기적까지 행했지만, 그것으로도 아니되는 정도로 넘어갔을 때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해서 아주 십자가의 길을 분명히 택하고 나섰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악령의 이빨과 발톱에서 뽑아내는 데는 그것밖에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예수를 죽이던 시대 예언자 요나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게 하던 세대보다 다른 것이 있을까?
내 마음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게 되나 들어보시렵니까?
4.5월을 합병호를 겨우 내고 6월도 다 저물어가서 편집 사무를 맡은 사람들은 어서 써야 한다고 독촉을 하는데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잘됐거나 못됐거나 간에 내 가슴이 울려서 나오지 않는 소리를 차마 쓸 수는 없는데 누워도 앉아도 문을 열고 생각해도 닫고 생각해도 도무지 움직여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답답해하면 못쓰지, 생각은 하건만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답답하던 가슴이 열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22일 토요일 밤까지는 꼭 써야 이달 안에 잡지가 나올 수 있다는 경고를 받고도 그 밤을 그냥 보내다 밝아서 23일 주일 아침 일어나 성경을 펴놓고 ‘보내 죄를 지고 가는 냘 죄어린 양을 보라”는 귀절을 읽으며 생각을 하다가 예배시간이 가까워오기 때문에 일어나 나갔습니다. 신촌 행 버스를 탔습니다. 자리에는 사람이 차 있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막 올라서는 순간 한 사람이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자 주잡아 끌어올리면서 “여기 앉으셔요” 하고 자기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요새는 남께 자리를 사양해주는 것 주받는 일이 많습니다. 차는 늘 좁은데 이 백발이 돼 버린 머리와 수염이 말을 해서 누군가가 자리를 내주곤 합니다. 그래 미안해서 될수록 앉은 앞에가 서기를 피하지만 그래도 따라와서 끌어다 앉혀주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날 아침 귀절을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손목 주잡히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얼굴 주피긋 보면서 거기 뭔지 좀 다른 것이 있는 것 주느꼈습니다. 말은 아니하지만 나를 잘 알고 있노라는 태도였습니다. 나도 그린 머느낄 뿐 말을 아니했고 그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마 다음 정류장에 내리나보다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얼마 동안을 가다가 그는 옆에 놨던 커다란 짐짝을 들고 내리려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비는 제가 냈습니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려서 쑥쑥 가버렸습니다.
나는 전신에 가을바람처럼 핑 도는 무엇을 느꼈습니다. 나는 자연히 나도 모르게 운전대 앞 유리창을 통해 어디라 할 수 없는 먼 하늘을 내다보게 됐고 손을 옆집에 넣어 수건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는 보통 그런 때 사람들이 하는 대로 어디서 나를 봤다, 언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무슨 책을 봤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무슨 부탁을 한 것도, 사람들이 잘하는 모양으로,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인사를 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차에서 내려서 몇발 걸음을 가다가 잠깐 돌이켜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잠깐 빙긋이 웃고는 허리를 꾸부려 짐을 지고 갔습니다. 그는 행상이었습니다.
이름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뒤흔들었습니다. 구태여 형용한다면 그저 뭔지 모르게 슬프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뭐냐?
내가 그에게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름도 모릅니다. 언제 무슨 신세지운 것도 없습니다. 긴 말을 나눠본 일도 없습니다. 그가 내게 무슨 기대가 있을 리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뭔가?
그가 누군가?
기억은 잠자던 어린아기처럼 일어났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급해서 공항까지 택시를 탔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 가서 요금을 내려니 아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낸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은 저를 물론 모르시지요. 그러나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제가 어찌 선생님께 택시 값을 받을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그런 일이 그것만 아니고 몇 번 있었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 내 가슴속에서 내 자리를 피해 비켜섰습니다. 그것이 나보고 하는 절이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마다 일본 도지사에게서 천황의 교육 칙어를 받아오다가 전송하는 관리가 칙어보고 하는 절을 자기보고 인사하는 줄 착각하고 고개를 굽실했다가 “이 자식아 너 보고 한 줄 알아?” 하고 책망하는 말을 들었던 내 친구의 지난날 얘기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의 차 삯을 문 것인가?
누구보고 고마워한 것인가?
그들은 누군가? 그 이름 모를 사람들.
나는 아침에 책상 위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란 귀절을 읽으며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던 그 뜻이 좀 알려진 것 같은 것을 느껴졌습니다. 며칠 두고 쓰려 해도 써지지 않던 글이 어쩌면 써질 것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의 문이 좀 열린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6월의 푸른 동산 속에 거닐고 있는 것을 첨으로 느꼈습니다.
오늘은 6·25날이라고 전에 없이 야단입니다. 부르짖는 확성기 소리가 봄철 밤에 우는 승냥이 울음 같습니다.
정말로 6·25의 참혹한 전쟁에서 이 나라를 건진 것은 누굴까요?
“차비는 제가 냈습니다” 하고는 말도 않고 짐을 지고 헐떡헐떡 길을 가던, 그러면서도 한 웃음 빙긋하고 가던 그 이름도 없는 사람들 아닐까?
대적을 물리쳤노라 번쩍번쩍 가슴에 훈장을 달던 사람들, 나는……
나라를 건진 사람은 사람 죽인 사람이 아니라 그 시체를 치우고 또 씨를 뿌리고 또 갈고 말이 없는 그들 이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모든 짐을 다 지면서도 이름 앙탈도 자랑도 없는 이름 모를 사람들 입니다.
씨알의 소리 1974. 6월 33호
전작집; 8- 175
전집; 8-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