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대련→단동→환인 (오녀산성)→집안→이도백하→천지 북파→장백폭포
다롄(대련)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는 다롄은 중국인에게 선망의 도시다. “학업은 베이징에서, 일은 상하이에서, 노후는 다롄에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 깊고 푸른 바다와 다채로운 해안선이 펼쳐지고, 도심에는 푸른 광장이 80여 개에 달한다. 인구 밀도가 낮아서 거리가 언제나 한산하고 깨끗하다. 유엔 환경 계획(UNEP)은 세계 환경의 날을 맞이해 세계 환경 보호에 공헌한 도시 중 하나로 중국 도시 중에서는 유일하게 다롄을 선정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다롄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청 · 일 전쟁 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조차하면서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그 시절 러시아가 건설한 건축물이 지금껏 고풍스럽게 보존돼 있다. 러 · 일 전쟁 후에는 일본이 조차하여 남만주철도 본사를 다롄에 설치하고 만주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지금도 일본식 전차가 도심을 관통하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롄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항일 운동에 불을 지폈던 안중근 의사가 생을 마감한 뤼순 감옥이 시내에서 50분 거리에 있다.
간도는 17세기,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동남부와 압록강·두만강 너머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한국 간 분쟁하던 지역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만주에 사는 조선인이 미간지를 개발하고 정착하면서 분쟁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변두리였던 만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간도 문제는 국제 문제와 연동되었다. 1907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해 간도는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한일합방 후 민족운동가들은 1870년대부터 형성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시도하였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침략이 지속되었다
간도
청나라는 병자호란 뒤 간도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정하고 조선 사람이든 청나라 사람이든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도록 하였는데, 간도라는 지명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間]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땅을 새로 개간하였다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으며, 또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45° 이내 방향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적었다.
널찍한 대륙의 일부를 '섬'으로 칭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본래 '간도'는 조선의 도강자(渡江者)들이 처벌을 피하고자, '강을 건넌 게 아니라 강 사이의 섬, 즉 하중도(河中島)에 다녀왔다'라고 둘러대면서 붙은 호칭이다. 국경을 몰래 건너 농사짓고 사는 것은 실제론 조선 정부의 통제력 부족으로 형식적 가벼운 처벌만 하긴 했지만 조선 법에서 원칙적으로는 사형감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뻔한 말로라도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게 후에 의미의 변화를 일으켜 강 너머 특정 지역에 대한 호칭이 된 것. 그렇기에 애초에 지리적으로 명확한 개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