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이야! / 양선례
큰 학교에서는 동학년 단위로 움직인다. 부장을 중심으로 학년 교육계획을 짜고, 교육과정과 연계한 현장 체험 학습지를 고르고, 학예회 종목을 정한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 우리 반 아이들이 1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긴 하나 누구와 동학년을 하는 것인가도 무시할 수 없다. 함께 차를 마시고, 간간이 회식도 하며, 봄과 여름에는 짧은 나들이도 즐긴다. 동학년을 잘 만나면 1년이 즐겁다.
우리 학교 3학년과 4학년 선생님들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미리 같은 학년을 희망하여 담임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웬만해선 잡음이 나지 않는다. 조금 늦더라도 서로 끌어주고 기다려 주기에 지켜보는 나도 마음이 편하다. 학년에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능히 해결할 것 같은 믿음과 신뢰가 생긴다.
선배와는 두 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다. 2년 선배라 대학에서도 한 울타리 안에서 2년이나 있었을 텐데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통성명하고 보니 친구의 언니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도, 선배도 교직 초년병이었다. 그리 큰 학교가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나는 첫 발령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신규 교사였고, 신혼인 선배도 주말부부로 지내느라고 바빴다.
두 번째 학교에서는 6학년 담임으로 만났다. 그녀의 교실은 위층, 나는 아래층이었지만 동학년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가르쳐 준 선배 선생님들 덕분에 이미 교직 6년 차였지만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부전공으로 국어교육을 전공한 것은 서로 알았지만, 그녀도 나도 글쓰기를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에게서 함께 지역의 문인 협회에 가입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잠시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그때쯤에는 독박 육아로 직장도 겨우 다니는 형편이라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남편이 밀었다. 그게 고마워서 용기를 냈다. 문협 회원 다수가 시를 쓰는 데 비해 선배와 나는 수필을 썼다. 겨우 산문 수준의 글이었지만 배울 데도, 시간도, 의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 외에는 한눈 팔 겨를이 없었다.
1년에 한 번씩 펴내는 문협 잡지에 수필 두 편을 써내는 것도 벅차서 그조차 채우지 못한 적도 숱했다. 괜히 이름만 걸어 두고 밥값을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원고 마감일이 되면 글을 썼는지 여부를 공유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때론 독촉했다. 선배도 안 썼다는 말을 들으면 묘한 위안이 되었다. 이제는 자기 글에 책임을 지라며 등단을 권유하는 주변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 안 듣는 아이처럼 우리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달 간격으로 같은 문예지로 문단의 세계에 들어섰다. 또 내가 한 학기 먼저 시작한 목포대 평생 교육원 <일상의 글쓰기>에서 수필 쓰는 법을 함께 배웠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 데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욕심도 한몫했다. 좋은 스승을 만나 재미를 붙여 열심히 공부했다.
그녀의 글은 정겹다.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화려한 수사가 없어서 담백하다. 잘 익은 홍시 하나를 먹은 듯 포만감이 든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 것을 좋아한다. 목청이 크고 수다스러운 나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나직하다. 수줍은 듯 활짝 웃으면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도 정겹다. 글과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마음이 간다.
글이 모이니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했다. 그동안 쓴 글을 묶어 책으로 펴내고 싶었다. 전남 문화 재단 지원금을 받으려고 서류를 제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여 함께 문학의 길을 걸어왔는데 나만 선정되고 말았다. 선배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히 미안했다. 이듬해에 서류를 보완하여 다시 도전했으나 또 미끄러지고 말았다.
선배는 3수 만에 올해 책을 펴냈다. 글쓰기 공부를 같이 했기에 눈에 익은 글이 많았지만 책으로 묶은 걸 연결하여 읽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수필은 나를 너무나 많이 드러내어 불편하기도 하지만, 또 그게 수필의 매력이라는 걸 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바로 그게 글, 특히 수필의 힘일 것이다.
1부는 ‘인연 따라’, 2부는 ‘사는 일’, 3부는 새로운 바람, 그리고 마지막 4부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가 중심이 된 ‘바로 지금이야.’의 소주제를 달고 있었다. 각 부에 열다섯 편씩, 모두 예순 편의 글이 실렸다. 문학의 향기를 함께 나누는 벗에게 준다는 글귀가 책의 속지에 적혀 있었다. 선배가 있었기에 글쓰기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부족한 부분을 함께 채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고 그녀는 썼다. 초임 발령지에서 만난 친구 언니가 내 오랜 문우가 되어 여기까지 왔다. 지난 35년간 그랬던 것처럼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도 같은 자리를 지켰으면 좋겠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2집, 3집 수필집을 기다린다.
이남옥 작가의 첫 수필집 『바로 지금이야!』 출간을 마음을 다해 축하한다.
첫댓글 아, 이남옥 선생님이셨군요.
말과 보이는 분위기에서 소녀 감성 물씬
선생님 이번 글 정말 좋습니다.
읽고 또 읽고 싶은
하하, 고맙습니다.
"나, 착해요."라는 게 분위가와 말씨에서 다 보이는 분이죠.
어른께
이런 표현 좀 버르장머리 없긴 한데요,
되게 머리를 잘 써서 지은 글이네요. 하하.
자연스럽게
모든 문장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축하합니다. 이남옥 선생님.
하하하.
제가 어른이구나.
뒤늦은 자각.
칭찬, 고맙습니다.
설명과 묘사가 정밀하게 들어간 글 잘 읽었어요. 이남옥 선생님이 이끌어주셨군요. 좋은 인연이 부럽네요.
네. 맞아요. 좋은 글동무랍니다.
미술과 이금화 친구의 언니이기도 해요.
이남옥 작가의 첫 수필집을 마음 다해 축하해 주시고, 좋은 인연입니다. 맞아요 나직나직한 목소리,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겠습니다.
선생님과도 좋은 인연입니다.
책을 꼭 보내야 한다고 말하시던걸요?
@이팝나무 이남옥 선생님의 산티아고 이야기가 저를 어디로 이끌지 가슴이 두근 거립니다.
이남옥 선생님 보고 싶어요. 선생님의 산티아고 글 정말 좋아했는데.
맞아요. 글이나 행동이 다 음전하신 분이죠.
산티아고 순례기 재미있게 읽었는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이남옥 선생님에 대한 느낌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같이 활동하면서도 성격이 여리고 때로는 아우리는 리더쉽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표현을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분을 좋아한다는 것, 잘 아시지요?
책 제목이 참 좋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기 재밌게 읽었는데 책으로 나온다니 기대됩니다.
그러게요. 책 내는 것 부담스러워도 하셨는데 끝내고 나서는 감회가 새롭다 하시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