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골과 청국장
윤민희
누군가 사 준 밥을 맛있게 먹었지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침 일찍 청소하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니 남은 하루가 길었다.
이마트에 가서 다음 주 먹거리도 사고, 아울렛에 가서 겨울 코트도 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바뀌면 보관하기 어려운 겨울옷은 세일을 많이 한다. 영숙이는 뭐하나~ 카톡을 보내니 고양이랑 재미없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고 했다.
영숙이는 대학 1학년 때 만나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40년지기 친구다. 우리는 약속 시간을 정하고 각자 준비해서 늘 만나던 장소에서 만났다.
겨울옷들은 모두 세일을 시작했고, 특히 두꺼운 외투류는 세일을 많이 했다. 나는 유행을 안 타는 기본적인 디자인으로 검은색 롱코트를 50% 세일해서 반값에 사고, 영숙이는 청바지를 40% 세일해서 샀다. 우리는 만족한 쇼핑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헤어져서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 생각해 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다. 영숙이도 혼자라고 했다. 입맛도 없는데 저녁 먹고 들어가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뭐 먹을래?” 우리는 서로 먹고 싶은 것을 물었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이 없다고 말을 안 해도 표정으로 다 읽고 있다는 듯 마주보며 웃었다. 예전에 엄마가 먹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한 끼 때우면 된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핸드폰으로 맛집을 찾아보다가 지난번에 모임에서 갔던 두부 전골집을 생각했다.
식당까지 가려면 거리는 꽤 있지만 내일은 일요일이고, 해도 조금 길어졌으니 드라이브도 할 겸 그곳을 향하여 출발했다.
겨울 햇살이 냉기를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빈 들판을 부드럽고 여리게 덮고 있다. 강렬하고 에너지 넘치는 여름 햇살은 아니지만 겨울 햇살 속에는 따스한 엄마의 품속 같은 포근함과 평온한 표정이 가득하다. 군데군데 살얼음이 논에 수를 놓으며 겨울을 재촉하고 있다. 모두가 춥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터널을 지나면 멀리에서 연초록 산빛이 활짝 웃으며 다가올 것이다.
주말 저녁이고 맛집으로 소문난 집이라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영숙이는 툭하면 차를 얻어 탔으니 자기가 산다고 했지만 밥을 사려고 선수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게 마음이 편하면 그렇게 하자 했다.
메뉴판을 훑어보는데 8,000원짜리 청국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숙이는 15,000원짜리 두부버섯 전골을 먹자고 했다. 맛도 있고 건강에도 좋고 가격도 싼 청국장을 쳐다보면서 비싼 전골을 먹겠다고 찬성한 것이 화근이었다. 청국장을 먹자고 말이라도 해 볼 것을 우물쭈물하다가 전골을 시켜놓고 속으로 끙끙대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떤 상황에 닥치면 내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이 특별히 싫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면 나의 의견을 스스로 묵살해 버리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이런 내가 싫어서 새해에는 의견을 바로바로 피력하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다짐한지 며칠 만에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영숙이가 산다고 해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보이지 않는 나의 갈등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듯 두부 버섯전골은 두부와 버섯이 듬뿍 들어있고, 무엇보다 두부를 직접 만들어서 고소하고 콩의 식감이 진해서 없던 입 맛을 사로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숙이를 집 앞에 내려주고 오는데 청국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영숙이가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밥값 때문에 신경 쓸 친구는 아니다. 하지만 청국장을 쳐다보면서 말하지 못하고 비싼 전골을 시킨 내가 슬기롭지 못했다는 것과 생각을 생각으로 멈추었다는 나의 답답한 행동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새해에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자고 다짐했는데 연초부터 삐그덕 했다.
아무튼 오늘은 친구에게 맛있는 밥을 얻어먹고 돌아왔지만 나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다.
-2024. 1. 6.(토)-
첫댓글 친구와 사이에서 식당 메뉴로 잔잔한 마음의 갈등을 풀어놓으셨군요.
만일 청국장으로 정했다면, 모르긴 해도 친구의 마음에 파장이 일었을 줄로 여겨 지네요.
메뉴에 상관없이 친구와의 다음 만남이 즐거우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실은 그 친구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줘야했는데
그러지 못 했어요.
물론 친구와는 여전히 좋습니다.
세심한 배려심은 좋은 성품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는
인정머리 없는 세상이 되지요.
정말 좋은 친구거든요.
감사합니다.
윤민희 선생님의 배려 깊은 속 마음에 숙연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