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작품들은 예년과 수준이 비슷했다. 주변의 사물과 풍경묘사를 통한 생의 성찰과, 그 고통의 각인이 예사롭지 않은 질문처럼 느껴졌다. 우리 삶의 소외된 상태를 떠올리면서도 이를 어루만지는 연민의 시선이 가슴을 치기도 했다. 삶과 시간의 인식이 갖는 누추를 광휘의 꿈빛으로 떠올리는 시선도 눈길을 끌었다. 때로는 현실과 꿈의 간격이 커서 비유가 헐거운 경우도 있고, 처음의 촘촘한 언어 밀도가 뒤에 가서 풀어지는 단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지만 현실 인식과 이를 떠받치는 연민의 기둥이 단단하여 우리 시의 고통스러우면서도 숭엄한 현재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서 불거졌다. 신춘문예는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지는 만큼 이미 문단 활동(공모전 수상, 시집 발간 등)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제외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번 수상 대상 시인들이 그 점에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수상에서 제외된 것은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수상 대상을 좁히는 과정에서 이 문제가 계속 불거져 부득이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본심 작품 가운데 스님의 작품 한 편을 가작으로 선정한다. 시 ‘정중동’은 선시 특유의 분위기로 소리와 정적, 움직임과 멈춤, 그리고 시각과 후각의 미묘한 파동이 어우러지는 깔끔한 세계를 드러낸다. 핏기 없는 맑은 세계만을 다소 고답적으로 떠올리는 미흡감을 느끼면서도 지금 우리 시들에서 보기 힘들어진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을 산 것이다.
-심사위원/이하석(시인)
【당선소감】
연일 계엄 사태로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데모대가 시가지를 점령했다.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수많은 군중의 구호가 전국을 뒤덮고 있고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맞는지 도무지 판단하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또한 알 수 있을까?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위로하면서 큰 기침 한 번 해볼 뿐이다.
한통의 낯선 전화로부터 시작된 감동과 감사가 동시에 몰려왔다. 다름 아닌 한국불교신문사 주최 신춘문예에 출품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편집국장편으로 전해왔기 때문이다.
출가자가 점점 줄어가고 불자가 줄어가는 이때에 절에서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부처님 잘 모시고, 또 신도를 부처님으로 대하면서 지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여여해지는 걸 보니 체질인 듯하다.
소승이 시를 쓴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혹 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점 하나도 찍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그냥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시상을 얼른 메모를 하는 것이 나만의 요령이며 순간 포착이다. 지나가 버리면 다 지워지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그렇지만 조용하게 산 속에서 지내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소재가 부처님과 산, 그리고 밤 야경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생활 속에서 찾기 마련이고 생활이 곧 시가 되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다른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정중동’(고요 속에 움직임)을 쓰는 그날도 늦은 봄 어느 날 혼자 차 한 잔 하면서 졸린 눈에 잡힌 저 멀리 흰 구름을 보고 시상을 떠올린 후 돌아본 모습을 시로 옮긴 것이다.
**"정중동(靜中動)"**은 "고요 속에서 움직임이 있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정적이나 그 안에서 내적인 움직임이 느껴지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 시는 산사의 고요한 풍경과 은은한 움직임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표현한다.
2. 주제
고요 속에 존재하는 자연과 인간의 미묘한 움직임. 시인은 산사의 고요함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생동감을 통해 정적과 동적 요소의 조화를 보여준다.
3. 상징 분석
흰구름: 변화하지 않는 고요함. 움직임 없이 머물러 있는 상태를 상징한다.
솔향과 실바람: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을 나타내며, 정적 속에 존재하는 미세한 변화를 상징한다.
촛불: 고요 속에서도 활발히 움직이는 생명력을 나타낸다.
산승: 고요 속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
녹차향: 남아 있는 여운과 고요 속에서도 활동적인 감각을 상징한다.
4. 연 단위 해설
1연: 고요히 머물러 있는 흰구름.
“고개 걸린 흰구름 걷힐 생각 없고”
흰구름은 산사의 고요한 풍경 속에 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고요함을 극대화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드러낸다.
2연: 실바람과 솔향의 섬세한 움직임.
“솔향 실바람 열린문 닫는다”
실바람과 솔향은 정적 속에서도 움직이는 자연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열린 문을 닫는 모습은 자연이 고요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을 상징한다.
3연: 촛불의 생동감.
“깊게 타든 촛불 꼬리를 흔들고”
촛불은 고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명을 상징한다. ‘꼬리를 흔든다’는 의인화된 표현은 촛불의 생동감을 강조하며 정중동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4연: 산승의 하품.
“게으른 山僧(산승) 긴하품 몰아 쉰다”
게으른 산승의 모습은 고요한 산사의 분위기를 상징한다. 긴 하품은 정적이면서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나타내며, 고요와 생동의 조화를 보여준다.
5연: 녹차향의 여운.
“다리다 만 녹차향 골방을 맴돈다”
다 마시지 않은 녹차의 향이 골방을 맴도는 모습은 고요 속에서도 감각적으로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이는 정적 속에서도 여운과 생명력을 나타낸다.
5. 이미지의 연쇄
흰구름 → 실바람과 솔향 → 촛불 → 산승의 하품 → 녹차향. 이미지는 정적에서 동적으로, 자연에서 인간으로 점차 이동하며 고요 속에 생명과 움직임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6. 결론
「정중동(靜中動)」은 산사의 고요 속에서 은은한 생동감을 포착한 시다. 흰구름과 실바람 같은 정적인 자연의 요소와 촛불과 산승의 하품 같은 동적인 요소를 통해 정적과 동적 요소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일상의 고요 속에서 생동감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며, 정적과 동적 요소의 경계를 초월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