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411 / 심방 요청하세요 (요21:1-14)
오늘은 4월 16일의 교회창립을 기념하여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말씀 시작 전에 하나 여쭙겠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로는 ‘신자들이 예배 등의 종교적 의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세운 건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건물이면 다 교회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디커플링’이라는 게 있습니다. 비동조화라고도 하며 쉬운 말로는 ‘따로 논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예수님의 몸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 교회를 보면 몸 된 교회가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으로써의 교회가 디커플링 즉 머리 되시는 예수님과 따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한 분이 남부로 출장을 갔던 차에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려고 가까운 교회엘 갔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안내위원이 ‘흑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흑인을 위한 교회로 가세요.’라며 쫓아냅니다.
이미 예배 시간은 늦었고 해서 교회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칩니다. 돌아보니 흰옷을 입은 예수님이 옆에 앉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너도 쫓겨났구나. 나도 쫓겨났다.’고….
그러나 어찌 보면 예수님은 쫓겨나신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교회엔 들어가시질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리는 없고 몸뚱이로 보여지는 것에만 우선하는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단 건물로서의 교회는 그렇다 치고 예수님을 믿노라는 나는 어떤가요?
왜 교회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나는 어떤가를 묻느냐고 하실 텐데, 고린도전서 3:16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곧 교회’라는 말인데, 여러분은 나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을 살고 계시는지요? 예수님의 몸으로써의 사명에 충성하며 살고 계시는지요?
예수님이 계셔야 교회가 교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성도가 성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창립을 기념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예수님이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보면 ‘그 후에’라는 단어와 ‘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그 후에가 언제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의 일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뒤에 ‘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이로 보아 본문의 그 후에라 함은 그전에도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던 사건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언제일까요? 14절에 보면 본문의 사건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 두 번째는 도마를 뺀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며, 세 번째가 8일 후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라고 한다면 본문의 기록은 그 후인 네 번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렇듯 쉬지도 않으시고 일일이 제자들을 찾아가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국어 사전에 보면 ‘찾아가서 만나 봄’을 ‘심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찾아오심은 ‘예수님의 심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통상 교회가 하는 사역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교인들을 심방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목사와 교인 몇몇이 찾아가는 게 심방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결국 심방은 심방 받는 성도와 성도의 가정에 예수님이 계시게 하려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조차도 심방의 주체가 아닙니다. 교회든 성도든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의 심방’을 사모하고 믿는 것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예수님의 심방과 관련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심방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은 기대조차 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안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도 감당 못 할 슬픔인데 시신마저 누군가가 훼손했단 생각에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슬픔과 절망 가운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방!' 이로 인해 마리아에게는 절망과 탄식의 시간이 환희의 아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은 슬픔의 눈물, 절망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절망과 슬픔과 낙심의 순간에 처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믿어야 할 것이 예수님의 심방이어야 합니다.
내가 울고 있는 그 자리, 내가 힘들어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심방은 내게도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다락방에 모여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심방하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은 제자들로서는 예수 잔당이라는 꼬리표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믿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예수님이 안 계신 앞날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문제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걱정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락방 한가운데로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심방과 평강이 있으라는 축복의 순간, 제자들에게는 불안과 근심의 다락방이 기쁨과 감격의 도가니로 바뀌었습니다.
돌이켜 보세요. 이제까지 여러분이 계셨던 자리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심방은 죄의식과 불안, 염려를 몰아내는 힘이 있다 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세상 한복판에서 홀로 두려워 떨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기 전에, 불안하여 염려하기 전에 먼저 기억하세요. 나에게도 예수님이 심방해 주신다는 것을.
세 번째, 예수님은 다시 또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하고 있던 베드로 일행을 심방하셨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함께 있을 때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는 상황 속에서 저들에게 닥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고기잡이를 나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3절에서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이 따라나섰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심방을 받고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저들이 어부였기에 고기 잡는 일상으로 복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 마지막에 보면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한 밤이었습니다. 갖은 수고를 다 하고 애는 썼으나 절망과 좌절만 맛본 밤이었습니다.
어쩌다 이리되었을까요? 아쉽게도 제자들이 복귀한 일상의 그 자리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던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는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슬픈 고백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실패의 빈 그물을 들고 좌절감에 젖어 있을 때 예수님이 심방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일상에 복귀하여 열심히 애를 써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지난 밤이었으나, 아침에 예수님이 심방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그 자리가 다시금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리가 되게 되었고 결과는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는 축복이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 나를 도와줄 아무런 사람도 찾지 못할 때와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에 서 있을 때도 예수님은 찾아와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제껏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상에서 무엇을 위해 애쓰고 힘쓰고 살아오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얻고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보며 살고 계시는지요?
피곤함에 지쳐 심신이 녹초가 되었을 때, 실패와 허탕으로 인해 두 어깨가 축 늘어져 있을 때, 삶의 현장에서 빈 그물 들고 낙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심방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찾아오시니 절망이 환희로, 불안이 평안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듯 제자들에게 ‘다시’ ‘또’ 찾아와 주셨던 예수님은 오늘 제게도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다시’ ‘또’ 심방하시고 찾아와 만나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찾아와 주시는 ‘예수님의 심방’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8에서 이미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실패한 제자들, 절망만 가득 안고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그냥 보고만 계실 수가 없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예수님이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도 심방해 주실 것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힘들 때도, 내가 고통받을 때도 예수님은 그런 나의 처지와 형편을 아시고 서둘러 나를 찾아오십니다.
기대하고 기다리세요. 지체하지 않고 정녕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심방하실 것이고 그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여러분의 실패와 상처를 치유해 주려고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다 닭 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로 머리를 쥐어뜯고 통곡해봤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후로 우연히라도 골고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지기라도 할라치면 베드로의 맘은 죄책감에 괴로웠습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꼬이고 힘들어질 때마다 “내가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무서웠고, “하나님께 매 맞는 것은 아닐까?”로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심방하신 것입니다. 왜요?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의 간증이란 걸 들어보면 주일을 어기고 드라이브 갔다가 차 사고가 나서 차는 박살이 났는데 몸은 하나도 안 다쳤노라며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는 말을 듣곤 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뭘 몰라서 하는 얘깁니다. 아무려면 하나님이 주일 빼 먹었다고 금방 쫓아가서 차 사고나 나게 하시는 그런 쪼잔한 분이실까요?
명심하세요. 죄책감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심방해 주십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예수님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는 분이 계신다면, 여직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혼내고 계시는 건 아닌가 하여 염려하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예수님의 심방을 요청하세요.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믿으세요.
예수님께는 사랑만 있고 용서만 있고 오직 축복만 있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믿음대로 여러분에게도 될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다가 상처받을 일이 왜 하나도 없겠습니까? 나의 실수와 약점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도 매 좀 맞고 혼 좀 나야 할 일들을 어찌 하나도 안 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저와 여러분을 심방하십니다. 찾아오셔서 상처를 치유하시고 잘못을 용서하시고 축복은 넘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리하실까요?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있어야 할 자리는 갈릴리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동참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덕분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노라며 매일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 잡기만을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게 물질과 건강 등의 축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기든 물질이든 필요한 건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건 예수님이 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하라시는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밤새 고기만 잡고 있었고 실패한 후에도 다시 고기잡이를 나가기 위해 그물만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그럴 때 예수님이 심방하신다는 겁니다. 신앙적으로든 세상적으로든 "내게 문제가 있게 되면 그땐 예수님이 심방하신다." 이게 성경이 주는 메시지이자 우리에게 있어야 할 소망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들 엉뚱한 곳에들 가 있습니다. 시험이 있다고요? 그때가 예수님이 심방하실 타이밍인데 그때 우린 예수님과 교회에서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믿음과 기도에 힘이 빠져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요?
예수님의 심방은 언제나 그 목적이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심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빈 그물을 채워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예수님의 심방’.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며 교회가 해야 할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아직도 여러분 인생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예수님께 심방 요청하세요. 예수님이 도우시면 엄청난 축복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방해 주시기만 하면 불가능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무능이 유능으로 바뀌게 됩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집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11절을 보면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기를 많이 잡았다 하더라도 그물이 찢어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의 그물이 찢어져 불행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에 큰 축복을 받았으나 건강의 그물이 찢겨진 사람, 행복한 결혼을 하는 듯하였으나 가정의 그물이 찢어진 사람, 뭔가 되는가 싶었으나 엉뚱한 곳에서 그물이 찢어지고 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특히나 출세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신앙이 찢겨진 어리석은 인생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린 기억해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방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으며 사는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인생의 그물도 찢겨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시기를 심방 요청하세요.
찾아오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각양 빈 그물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은혜의 빈 그물이 채워지고, 실패했던 사업의 빈 그물이 채워지고, 냉랭했던 가정의 빈 그물이 채워지고, 소홀했던 교회의 빈 그물이 채워지고, 특히나 인생의 병든 육체나 상한 심령에 치유와 회복과 다시 강건함이 채워질 줄로 믿습니다.
또한 그 모든 복이 채워지되 그것들을 누리는 여러분의 인생이 다시는 찢어지지 아니하는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단하세요. 그리고 요청하세요 “예수님 내게도 심방해 주세요.”라고.
여러분의 인생에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 인생의 그물을 채워주시되 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는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