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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 (옮김)조선의 군대..
Daum Bark 추천 0 조회 2,053 07.02.20 17:26 댓글 8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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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2.20 19:16

    그럼 묻죠. 조선군은 군복이 없어서 (하얗기때문에) 양떼같다는 언급을 한 부분은 그쪽이 제시한 참고문헌중 어디에 있습니까?네?

  • 작성자 07.02.20 19:34

    문득 찾아보니.... "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이라는 구절이 있군요. 아마도 이런 내용을 보고 일본에서도 기록이 있다는 말이 와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인가 보군요.... 전연 근거 없는 말만은 아니었습니다...좀 오래된 일이어서 전후문맥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아무튼 윗글은 나도 옮겨온 글입니다.

  • 07.02.20 19:22

    푸훗-ㅋㅋㅋㅋ

  • 07.02.21 11:13

    Ctrl + C,V는 편하군요. 나중에 문제가 되면 "아무튼 윗글은 나도 옮겨온 글입니다."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 07.02.20 19:37

    (쫑알님 토론은 좋은데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는 좋지 않아요.)

  • 07.02.20 19:44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주의하도록하겠습니다.

  • 07.02.20 19:51

    뭐 임란직전 조선군이 위의 내용처럼 엉망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조선의 군사제도 자체를 너무 폄하해서 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민병 수준이라고 보수만은 없습니다. 조선의 병역 복무 방식을 보면 지금의 경우는 2년여 동안 아예 군대에 갇혀서 훈련을 받고 복무를 하는 방식이지만 조선의 겨우는 6개월 정도 단위로 교대로 복무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신 전체적인 복무기간은 길었지요. 그런 방식이 반드시 빟ㅅ율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임란직전에 조선군의 상태가 그모양이었던건 군사제도의 붕괴의 원인이지 군사제도 자체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도 무리가 아닐까요?

  • 07.02.21 04:41

    제대로 관리를 않해서 엉망진창인 환자가(최소한 국방이라는 부분에서만은) 상태에서 각잡고 쳐들어오는 깡패에 싹발리지 않고 물고 늘어졌으면 그럭저럭 잘한거 아닙니까-ㅂ-? "한성이 무너지고 평양이 떨어졌다~ 중앙 시스템의 60%가 붕괴됬다~ 캐발렸다~"라고 흔히들 임진년을 악평하지만 재미있는건 중앙정부의 컨트롤, 즉 수족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수족들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거에요.

  • 07.02.21 04:56

    어설프게나마 자생적으로 형성되가던 '민족'의 개념-최소한 왜놈,뙈놈,조선놈의 개념은 당시에도 있었으니 말이죠-, 유교사상을 촉촉히 머금은 향촌의 양반세력 -지배,피지배간의 갈등은 있엇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 때로는 근거도 희박하고 무지에서 나온 말도 안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역시 부정할수 없던 항쟁의 원동력이 된 '우월감'등. 이런 '끊어진 수족이 능동적으로 움직일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들 또한 군사제도의 붕괴만큼이나 조선의 시스템이 역어낸 산물입니다.

  • 07.02.21 05:10

    좋은예가 바로 소위 '의병'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향촌세력이 극렬하게 저항했던 경상우도, 명군의 개입없이도 일본군의 수차례 공세속에 지켜낸 전라도, 반역자의 등장과 초장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기후와 험난한 지형, 풍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성공적으로 가토의 2군을 밀어낸 함경도, 그리고 조선의 수군이에요. 이런 얘들을 찬찬히 둘러보면 조선의 시스템도 그다지 엉성하지 만은 않아요. 장단점이야 누구나 있는 거지요. 먼치킨은 절대 못되지만 그렇다고 꿇릴것도 없지요.

  • 07.02.21 05:04

    여담이지만 서애 유성룡 선생이 '호남을 지켜서 나라가 보존되었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전략적,경제적 요충지인 전라도 말입니다. 임진전쟁 7년중 전라도가 가장 위험했던 때는 딱 두번있어요. 첫번째는 설욕을 하겠다며 미칠듯한 물량으로 후방 게릴라 까지 봉쇄해가며 각잡고 조지고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제 2차 진주성 전투' 두번째는 추석날에 대가리 터지게 싸워 함몰된 '남원성 전투' 이 두전투에서 명군은 뭐하고 있었을까요. 전자는 합천서 넋놓고 앉아있었고 후자는 . . . 설명 생략하겠습니다. '절박하게 싸울만한 이유가 없다' 명군을 무조건 호평할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인-행패나 가끔씩 조선군 뺨치는허약한 전투력 이상으로-

  • 07.02.21 05:05

    이라고 생각해요.

  • 07.02.20 20:41

    볼때마다 참 재밋다.

  • 07.02.20 20:44

    병학지남, 거기보전 등등 조선후기 군사체제의 한계는 곧 올립니다. ㅋㅋㅋ; 아...근데 참 저 참조문헌....어딜가나 다 겹치는 구만;;

  • 07.02.21 08:44

    에...개판사판 오장판이 된 시점에 이 말을 올려도 되나...합니다만, "흰 옷을 입은 조선군...." 멘트는 대동강 전투에 참가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기록에서도 보입니다. 구로다가 적길 "소오의 진영에서 싸움이 계속되며 새벽동이 텃다. 군졸들이 걱정하며 강 반대편을 바라보니, 흰 아지랑이가 이는듯 하였다. 얼마 되지않아 술렁이며 모두가 강둑으로 모였다. 삼천여명의 조선군이 성문을 열고 도하지를 건너는데, 마치 하얀색 구름이 이는듯 하였다..." 고 적습니다.

  • 07.02.21 11:12

    제가 보기에는 글쓴이는 이 기록을 보고 썻다기 보다는 임진왜란과 관련한 개설서에서 많이 나와있는 용인전투에 대한 징비록의 기록을 가지고 위와 같이 (용인전투는 조선군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투이다. ...중략... 당시 조선군은 군복조차도 입지 못하였다. <<당시>>의 전투를 기록한 일본군장수는 흰옷을 입은 조선군이 마치 양떼의 무리와 같이 보였다고 적고 있다)글을 쓴 듯 하군요. 유성룡을 일본군 장수로 슬쩍 바꿔치기하고, 군기가 없어서 양떼같다는 말을, 자의적으로 곡해ㆍ확대해석하여 조선군의 군장이 형편없다는 자신의 논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야비한 행위로밖에 안보입니다.

  • 07.02.21 20:02

    저도 그구절은 읽어 본것 같군요. 용인전투가 벌어지기전 출정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본 유성룡이 유려의 시선으로 한말이 '마치 양때들이 노니는 것 같다.....' 글의 묘사를 보고 받은 느낌은 뭐랄까 1차대전 초에 애국심에만 덜떠서 전선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독일군에 발렸던 프랑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07.02.21 08:46

    그런데 군복....은 그당시 전장터에서 그다지 많이 입는 물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치와 통신물품이 군복보다 더 중요하지요.

  • 07.02.21 09:34

    임란때라면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들도 꽤 잇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증언과 같이 종합해보면 아마 부대마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갑옷을 갖춰 입은 부대나 병사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부대나 병사들도 있었던 듯 합니다. 말이 17만이라지만 의병 빼면 전체 정원의 절반도 못미치는 병력이 모였던 것을 보면 장비의 상태도 그렇게 양호하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 07.02.21 10:41

    아... 그리고 제승방략부분의 내용인데요. 저것은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보긴 힘듭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저런 유사한 시스템(고도의 중앙집권국가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같은 나라도 중앙에서 집정관이 총 사려관으로 파견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중국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차피 실질적인 야전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것은 현지의 휘하 장교들입니다. 신립장군의 경우 탄금대 전투가 무리없이 치루어 졌다면 조선군을 총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될 소임이었습니다. 이후에 권율장군이 그 역할을 맡게 되지만...... 정작 문제는 당시 중앙조정의 늦장 대처가 이유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 07.02.21 14:30

    조선의 국토가 협소한게 문제지요. 도보로 보름이면 동래에서 한성까지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당시 통신 사정으로 2주만에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성곽 중 한 두성만 몇주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조선군의 모랄은 형편없어서 ;;;;;

  • 07.02.21 19:37

    제가 볼땐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다못해 대마도쪽의 동향만 시시각각 예의주시하고 잇었어도 대비는 가능햇다고 봅니다. 어차피 침공을 위해선 대규모 병력이동이 잇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모르고 있엇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 수집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본 애들은 조선 곳곳에 첩자까지 파견해서 정보 수집을 했다는 데 우리는 달랑 사신 두명 보내놓고 정보 수집이라고 했으니... 그나마 두사람의 의견도 달랐으니......;;;;;;;

  • 07.02.22 12:55

    들리는 소문으로는 돈으로 사람을 보내서 대신 군 복무를 했다는... 요즘은 걍 영창으로 ㄱㄱ지만//

  • 07.02.22 14:29

    의병이라고 하지만 의병이 사실상 대부분 관군의 인적 자원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관군의 상태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정문부의 기병 또한 사실상 의병이었고, 대다수 기병입니다. 의병이었지만 인적 자원은 정규군이었던 것이죠. 17만여명의 동원 병력 실적도 솔직히 전국토의 60퍼센트 이상이 점령 및 행정불능이 된 상황에서 관군또한 10만이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고 또한 의병또한 수만명이 투입이 되었습니다.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병력은 거의 7만이 넘지 않습니까?

  • 07.02.22 14:33

    그리고 제승방략의 문제에 대해서 이일이 쓴 '증보제승방략'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국역본이 현재 존재하는데 '국역제승방략'이라고 해서 국역본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승방략이 만사 능통한 것은 아니겠지만, 중앙에서 지휘관에 내려오는 문제점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이 제승방략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 지휘권이 중앙에서 내려온 지휘관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10월 1일의 기사에 '지난 을묘년 변란 이후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법(分軍法)으로 고쳐 도내의 여러 고을의 순변사(巡邊使),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도원수(都元帥) 및 본도의 병사와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 07.02.22 14:35

    이를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기 보면 본도의 병사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켰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순변사 같은 중앙지휘관이 내려오기전에 이미 각 도의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는 각 병력에 대한 지휘권이 존재했었습니다. '국역제승방략'에서도 여진족과 전투를 벌일때 중앙지휘관이 편성되어서 파견된 것 보다는 각 고을이나 병영의 대장이 여진족을 방어 및 공격을 실시했었습니다. 그 와중에 유명해진 것이 온성부사 신립이죠. 여진족들이 신립을 보고 '온성의 영공이 왔다!'라고 할정도로 두려워했었습니다.

  • 07.02.22 14:39

    물론 초반에 조선군이 무너진 것은 경상도 제승방략에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진 경우가 될 겁니다. 경상좌수영의 경우에는 솔직히 제가 판단을 못하겠습니다. 이미 좌수영 소속들은 육상고립방어 들어가서 거의 전몰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고, 경상우수영은 초기에 집결상태 개판으로 출동하지 못하고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했습니다. 부산진이나 동래성이 전몰할 때도 상당수 병력이 동래성으로 집결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분명 전시 집결이 잘되고 있었던 것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경상좌병사 이각이 병력소집령을 내려 놓고 적전도주를 실시해서 경상좌병사 휘하 병력들은 공중분해 되었고 대구로 집결한 병력이 최소 수천에서 최대

  • 07.02.22 14:43

    수만명인데 그것도 경상감사 김수에 멍청한 명령 때문에 공중분해가 되어버렸습니다. 즉 순변사 이일이 오기전에 일본군이 대구에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순변사 지휘할 병력이 완전 날아가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삼도순변사 신립은 더욱 급했고 병력을 모으기전에 8천여명으로 결전을 벌일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충분히 중앙지휘관들이 내려오기 전 병사와 감사가 병력을 제대로 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는 초반에 부산진성, 동래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너무 빠른 시간에 무너졌습니다. 경상도가 무너졌고 신립의 패배에 있어서 서울까지 완전히 고속도로로 기동하게 되는 결과를 일본군에게 안겨준거죠

  • 07.02.22 14:45

    하지만 제승방략의 제도 자체에 문제점이 있다기 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사람에 의해서 완전 무너진 것이 임진왜란 초반입니다. 만약 거점방어 형식인 진관 체제라면 삼도순변사 신립이 내려갔더라도 8천여명도 야전 지휘하기 힘들었을겁니다. 제승방략이므로 각 고을 책임자들이 병력을 이끌고 해당 집결지로 집결하고 본도 병사, 감사 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장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군의 야전 전투능력은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진관 체제 보다는 제승방략이 대규모 전면전에 훨씬 맞는 제도 같습니다.

  • 07.02.22 17:15

    결국은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고 이런점에서 조선군의 전체적 채점점수가 낮아지는건 어쩔수 없죠-_-;; 제도가 사람을 망치는건지 사람이 제도를 망치는건지 원;;

  • 07.02.22 18:47

    한가지 더 장수들이 어쩌면 정치적이 돼었기 때문일지도 장수는 장수다워야. 그분의 발끝만치라도.

  • 07.02.27 00:28

    제승방략이 틀렸다는 소리는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제승방략이 진관법과 전혀 반대되는 체제인 것으로 호도해도 안 되고. 제승방략체제 하에서도 병력 동원의 기반은 행정구역과 일치된 부/목/군/현이었고, 제승방략 이전처럼 병마절도사가 방어사 통제를 받아야 하는 체제에서는 대규모 병력에 대한 즉각적인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남부의 패락은 제승방략 자체의 문제가 아닌, 병마절도사의 능력 문제였죠. 방어사나 순변사는 병마절도사가 무너진 다음에 투입되는거니까.

  • 07.04.03 19:01

    개판 오분전 군대를 지금까지 당나라 군대라고 했지만 바꿔야겠습니다. 조선군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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