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런 말을 하면 누구나 납득하기 힘들것이다. 세계에 어느 나라가 군대가 없는 나라가 있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균형잡힌 군대가 있었지만 이후 점차 사라져서 결국에는 정규군없이 유사시에 고작 민병을 동원해서 싸울뿐인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의 군제는 번상병番上兵제도가 근간이었다. 번상병제도는 생산에 종사하던 인력을 그대로 전투원으로 고용하는 민병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는 당연히 복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직없군인제에 비교할 바가 못됐고,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는 징병제에도 미치지 못했다.
번상병이 가지는 문제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번상병제도는 훈련을 한다는 것이 힘들다. 생업과 훈련을 병행해야 했을 뿐더러 공공사업에도 차출되어 부역에 동원되었다. 이민족의 침입이 잦던 국초에는 나름대로 실질적인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평화가 지속되면서 점차 군대는 훈련보다는 토목공사에 더 자주동원되어버렸다.
둘째로 번상병은 소속감과 결속력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가 부대명을 정하고 병사들에게 똑같은 군복과 무기를 사용하게 하는 것은 해당부대에 대한 소속감을 배양하기 위해서이다. 군대는 장기간의 훈련과정동안 단체생활을 통해 전투력뿐만 아니라 결속력을 가지게 되는 집단이다. 군대는 군복무에 대한 자부심과 명예를 심어주기 위하여 군공에 따라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고, 계급을 올려주기도 하지만, 조선의 정규군은 병사들의 복무기간에 대한 아무런 보상이 없을 뿐 아니라(복무지까지 가는 여비도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 입영열차 승차권을 자기 돈으로 끈어야 한다는 얘기) 설령 군공을 세운다 해도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승진은 엘리트군인계급인 갑사甲士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조선의 군대는 태종 때의 군제개편당시 서류상으로는 30만 이상을 징집할 수 있게 편성되었으나, 이후 점차 붕괴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농민을 징집하여 대군을 이루더라도 핵심주력부대가 되는 전문군인집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고려와 비교할 때, 고려도 유사시에 농민을 징집하여 대병을 편성했으나 평시에도 4만 가까운 직업군인이 있었다. 고려의 직업군인들은 하나의 신분계층을 이루어 군인전을 세습하는 댓가로 군복무를 하는 전문군인들이다.
(전근대에서 전문군인집단이 필요한 것은 전근대와 근대의 무기체계가 틀리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총이 전쟁의 주역이 되면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기간이 극히 짧아진 이후 군대가 징병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이전의 군대는 무기사용법을 훈련시키는 기간이 매우 길어 숙련된 병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군의 주력무기가 활이었던 이유는 활의 훈련이 비교적 시간이 적게 걸리는 이유도 있었다)
*제승방략의 치명적 실책
제승방략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무리 많은 병력을 모아봤자 급조한 혼성부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병력의 지휘를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이 맡는 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탁상행정의 극치를 엿볼 수 있다. 왜 이런 멍청한 체제가 선택된 것인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놓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방군대의 반란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에 함경도 지방에서 여러차례 군사반란이 있던 사실로 보아 조선의 위정자들은 지방에 군지휘관을 상시 파견하여 두면 반란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평화로운 시대에 야심많은 장군이 있다면 그럴 만도 하다. 허나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의 실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어찌 잘 싸우기를 기대하겠는가...더구나 이런 식으로 군대를 모으다 보면 징집과정에서 탈영이 흔히 발생한다. 무기나 군복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다.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기에는 애초부터 그른 것이다.
*임진왜란당시의 조선군상태
수군
사실 수군은 조선의 군대를 논할 때 거의 유일하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다. 철갑선과 함포라는 신무기를 이용하여 해전의 방식을 바꿔놓은 이순신함대는 세계 해전사에도 당당히 이름이 오를 만 하다. 그렇지만 임란개전 직후에 경상도 지역의 수군이 궤멸당한 것으로 보아 조선의 수군역시 그다지 잘 정비된 체제는 아니었다.
조선의 수군은 이른바 ‘대륙해군’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말하자면 해군이 독립적인 작전개념을 갖고 작전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부속된 개념으로서의 해군작전을 하는 것이다. 조선의 해군은 각 도별로 편성되어 각자 자기 지역의 해안방비를 맡았다. 이런 방식은 해군보다는 해경에 적합하다. 조선의 수군이 정비된 조선 초에는 왜구의 침입이 활발했기에 이런식의 해안방어체제를 갖춘 것이다. 조선도 임란의 1년 전에는 일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새로 군선을 건조하는 등의 전쟁준비를 하지 않더라도 해군을 통합하여 주둔시켜두었더라면 초기에 전력의 절반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일본군이 초기에 기습상륙을 성공시켰다해도 후속병력의 상륙에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육군
신립은 왜 조령을 버렸는가? 여기에 관한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이다. 신립의 군대는 훈련받지 못한 군대이다. 사실 신립이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매복작전에 있어서 군사들이 숙련되지 못했다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탈영이다. 조령같은 험준한 산악지대에 이런 군사들을 매복하라고 남겨두었다간 안그래도 도망치고 싶어 안달난 병사들이 어떻게 할지는 불 보듯 뻔한일이 아닌가..ㅡㅡ;; 신립이 조령을 포기한 것은 신립이 한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군대가 너무 한심했기 때문이다.
용인전투는 조선군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투이다. 전라감사 이광李光의 지휘아래 충청,전라지역에서 징집된 군사 5만명이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일본군 기병 1천600명의 기습을 받고 용인에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사건아다ㅡㅡ;; 조선군은 근접전투에 매우 약했다. 근접전에 사용되는 무기-창과 칼-은 숙련되게 다루는 일이 매우 어렵다. 활도 잘 쏘려면 긴 훈련이 필요하지만 수백명 이상이 동시에 사격할 경우 명중률 저하를 줄일수 있기에 조선의 주력무기가 활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근접전투에는 이른바 ‘깡’이 있어야 하는데.. 농사만 짓고 살던 조선농민에게 그런게 있을리 없다. 근접전투에서 전국시대를 헤쳐나온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무기체계도 완전히 뒤떨어져 있어, 일본군은 조총 외에도 6m가까운 장창을 사용했는데 조선군은 뒤떨어진 개념의 단창(短槍)으로 무장하여 창병끼리의 싸움에서도 상대가 못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군복조차도 입지 못하였다. 당시의 전투를 기록한 일본군장수는 흰옷을 입은 조선군이 마치 양떼의 무리와 같이 보였다고 적고 있다)
결국 전투 초반에 소규모 진영을 제압해가며 승기를 올리던 조선군은 민병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숙련된 기병대의 돌격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Bonus...
문) 조선시대 국방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1) 정군(정병)은 복무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기도 하였다.
2) 노비는 군역의 의무가 없어 군데 편제될 수 없었다.
3) 종친과 고급 관료의 자제들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4) 중앙군인 5위는 정군을 중심으로 갑사나 특수병으로 편성되었다.
정답 맞춰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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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군대생활] 서태원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군대문제로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는 하지만, 군대생활에 대한 불안감과 적게는 6개월에서 많게는 30개월 정도의 기간을 일반사회와 다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인해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래서 군대를 기피하기 위해 갖가지 편법이 등장하여 종종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고, 신의 아들(면제)장군의 아들(방위:단기사병)어둠의 자식(현역)이라는 냉소적인 유머까지 나오게 되었다.
과연 조선시대 사람들은 군대생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졌을까? 조선시대에도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싫어했을까?
[군대생활의 빛과 그림자]
조선시대의 군대생활은 요즈음과 다른 점이 많았는데,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등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무기간이 길었다. 원칙적으로 16-60세까지의 양인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담당해야 했다.
요즈음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복무기간이 긴 셈이다. 비록 6개월이나 2년정도의 기간을 군대에 계속해서 매어 있는 현행의 제도와는 달리 조선시대는 2개월-1년 정도의 기간을 교대로 근무하였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에 걸쳐 군역부담을 졌던 것이다. 때문에 군대복무는 괴로운 의무로 간주되었다.
둘째 일반 군인에게는 월급이 제공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직접 군사활동을 수행하는 정군에게 보(정군을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으로, 봉족이라고도 불렀음)를 병종에 따라 달리 지급하였을 뿐 일반 군인에게는 별도의 급료를 주지 않았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훈련도감이라는 군대가 생기기 전까지 하급 군인에게는 월급이 없었다.
요즈음 현역 사병은 물론이고 방위나 공익근무요원 등에게도 적으나마 월급이 제공되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하급 군인은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저 군역담당자들 상호간의 부조에만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셋째 조선시대의 군인은 종종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나 복장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몇 년 전인가 현역인 아들을 둔 부모에게 당신의 아들이 무기를 잃어버려 감옥에 갈 위험에 처했으니 돈을 부치라고 사기를 친 사건이 있었다. 물론 요즈음의 군대는 국가에서만 무기를 지급할 뿐이어서 설사 무기를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무기를 사서 보충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군사지휘관에게 무기나 복장 등을 검열받을 때 처벌을 피하기 위해 실제로 군인 스스로가 돈을 마련하여 그런 물품을 구입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1657년(효종 8년) <효종실록>의 기록은 이러한 사례의 하나이다.
'
군대의 장비가 조금이라도 정밀하고 예리하지 못하거나 의복이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영장이 순시를 하다가 낭자하게 매를 칩니다. 때문에 혹 소나 말을 전당잡히거나 혹 전답을 팔아서 병장기군복군량 등을 마련합니다'
위의 기록은 지금의 연대장에 해당될 영장이 속오군을 점검할 때 무기나 군복이 불량하면 처벌을 심하게 하였으므로, 속오군이 무기나 군복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조종과 같은 비싼 무기를 자신의 돈으로 구입한 군인에게는 조세 등을 면제해 주는 혜택을 국가가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조선시대 군인은 요즈음과는 달리 군인 스스로가 무기나 복장 등을 마련한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선시대의 군대는 대체로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편성되었다. 양반의 군대로 볼 수
있는 갑사별시위내금위충의위충찬위충순위도성위호익위도성위 등이 있고, 일반 양인은 정병, 그리고 천인은 잡색군이나 속오군 등이 편성되었다. 물론 시대에 따라 폐지 또는 신설되는 군대가 있었고, 속오군처럼 양인과 천인이 함께 편성되었다가 사천만으로 편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앞의 구분이 조선시대 모든 시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군대는 신분에 따라 편제된 까닭에 각각에 대한 차별대우가 존재하였다. 양반의 경우 군대복무와 관료로의 진출이 동시에 보장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지방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창설된 속오군은 실제로 훈련을 받고 전투에도 참여하는 부대였으나, 천인이 주축을 이룬 까닭에 대우가 보잘 것 없었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천인이 국가에 의해 인격을 갖춘 존재로 인정받아 국가의 통제 대상이 되었다는 것과 군공이나 시재를 활용하여 속오군에 편성된 천인은 신분 변동의 기회를 보다 많이 갖게 되었다는 점등에서 사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섯째 조선 후기에는 군역의 담당자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국가재정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가혹한 수취는 군정의 폐단을 초래하여 전정환곡 등과 함께 조선 후기 일반 백성의 몰락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군대는 현재의 군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양반의 군대생활은 관료로 진출하는 특전을 얻는 것이었지만, 군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반 양인들에게 군대복무는 감당하기 힘든 고된 생활이었다. 또 복무기간이 긴 점, 하급 군인에게 월급이 제공되지 않은 점, 종종 군인 스스로 무기나 복장을 마련함으로써 군인의 경제적 부담이 심했던 점, 신분에 따라 군대편성이나 처우가 달랐던 점, 군역세를 내는 군역담당자가
존재했던 점등도 그 원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의 군인들은 공식적으로 군역에서 면제되는 것과는 별도로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병역을 기피하려 하였다.
[공식적인 군역면제의 사유]
<경국대전><대전회통>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법전에는 군역면제(군대면제)의 사유가 규정되어 있는데, 현행 병역법과 그 내용을 도표로써 간략히 비교해 보면 다음 쪽과 같다.
도표를 통해 요즈음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군역을 마치는 나이가 매우 늦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사자의 자손 및 연로하거나 불구불치의 부모를 모신 자식에게 군역면제의 혜택을 폭넓게 준 점에서 충효 윤리를 강조하는 조선시대의 사회성격이 잘 나타난다. 반면 요즈음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족보다는 핵가족이 그리고 아이를 적게 낳는 추세로 인해 독자가 많으므로, 독자라든가 노부모를 섬기는 자식에게 혜택을 주기보다는 가족의 생계곤란 여부와 연관되어 군대면제가 결정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경제력을 중요시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에는 지랄병맹인벙어리천치난쟁이곱사등팔다리 중
하나를 쓰지 못하는 등의 불치병에 걸렸거나 불구인 남자, 현직관료와 관학생(성균관유생, 사학유생, 향교생도), 2품 이상의 전직관리 등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향교나 향소의 임원아전 등도 군포 징수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군역기피]
조선시대 비합법적으로 군역을 기피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우선 재력이 있는 경우는 아르바이트 군인을 고용하여 자기 대신 군대 생활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중앙에서 군복무를 하는 군인에게서 나타나는 대립이다. 대립은 당초 군복무로 인하여 장사에 지장을 받았던 상인이나 군대생활을 꺼렸던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뒤에는 군대의 지휘관에 의해 강요당하면서 대립의 폐단이 한층 심각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사진은 없었지만 군인의 용모와 특징 등을 기록한 파기가 있었고, 대립을 알선하는 전문 브로커가 생겨 한 사람이 일년 내내 군인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군대지휘관은 쉽게 가짜 군인을 식별할 수 있었는데, 이 때에 군사지휘관은 가짜를 묵인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진짜 군인이 오면 돈을 받을 수 없으므로 나중에는 대립을 강요하기까지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대립의 폐단은, 지방 군사지휘관의 월급이 책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에서 복무하는 군인에게 금품을 받고 군대를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함께, 조선 전기의 군역제도를 동요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다음은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방법이다. 조선 전기에는 양인이면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군역을 저야 했기 때문에 공경의 아들에서 일반 백성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모두 각종 군대에 편성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군역에서 빠지게 되었기 때문에 군역을 담당했던 일반 백성들은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여 국왕 및 공신의 자손으로 꾸미는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려 하였다.
그 밖에도 학생이 되면 군역이 면제되는 것을 이용하여 향교의 교생에 모입하는 것, 각 읍 향청의 관속차비가 되는 것, 감영이나 병영의 군관이 되는 것, 영장 및 수령에 속한 정원 외의 군관이 되는 것 등의 방법이 있었다. 아울러 승려가 되는 것, 양반가에 종으로 들어가는 것, 향교나 향소의 임원이 되는 것, 서원에 모입하는 것 등도 군역을 기피하기 위해 자주 동원되었던 편법이었다.
이러한 군역 기피현상으로 인해 나머지 군역 담당자들은 더욱 가중된 군역부담을 지게 되었으며, 이를 감당하지 못해 연쇄적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시기에서 발견되는데, 한 예로 1538년(중종33년)의 <중종실록>에는 "보병이 내는 군포는 전에는 1달에7~8필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고 군포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전에 비해 10배까지를 요구하게 되었다 때문에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보인이 도망가면 이어 정군도 연쇄적으로 도망가고, 그러면 친척의 친척, 그리고 이웃의 이웃까지 군포를 부담시켰다... 그 결과 도망이 계속 이어져 온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수령은 군역 담당자를 책정된 대로 확보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으므로 군역담당자가 도망을 간 경우에도 문서상으로는 있는 것처럼 꾸몄다. 따라서 도망자의 친족은 물론이고 이웃사람에게까지 도망자의 군역 책임을 전가하게 되었다.
족징인징 외에도 어린아이죽은 사람예순이 넘은 사람 그리고 한사람에게 이중 또는 삼중으로 군역을 부담시키는 등의 폐단이 심해지면서 군역담당자의 몰락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군역을 기피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되자, 정부는 호패법을 실시하여 도망가거나 군역을 지지 않는 자의 색출에 나서고 ,승려가 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도첩제를 실시하고, 교생에 대한 고강을 통해 군역을 피해 향교의 학생이 된 자를 색출하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영장을 활용한 토호 통제를 통해 역이 없는 장정을 군역에 편성하고, 군역세의 부담을 낮춰 지방 관청에 군인이 편입되는 것을 방지하고, 일반 양인에 대한 군역부담을 줄이기 위해 천인을 군역에 동원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실학자들의 주장처럼 토지개혁을 통해 군인에게 토지를 제공해줌으로써 군인의 생활을 안정시키거나, 수가 급증한 양반에게 군역을 부담시키는 등의 근본적인 군역 기피 방지책을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군역기피는 남아 있는 군역 담당자의 부담을 가중시켜 전정환정 등의 폐단과 함께 일반 백성의 몰락과 항쟁을 야기 시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스스로 군인이 된 사람들]
군대생활이 그토록 고토록 고됨에도 조선시대 동안 자발적으로 군인이 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양반으로 편성되는 군대를 제외하면, 조선 전기에는 이러한 군인이 매우 적었다. 당시에는 힘이 좋은 양인 장정이 시험을 보아 들어갈 수 있는 군대로 팽배와 대졸이 있을 뿐이었다. 무예를 익힐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반 양인으로서는 팽배와 대졸이 하급 무관직으로나마 진출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당시의
군인 총수 약 15만명 가운데 양반으로 편제된 군대의 군인 수가 1만 6천명을 넘었던 것에 비해, 이들의 정원은 8천명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팽배와 대졸이 자주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된 까닭에 곧 기피 대상이 되어, 그 정원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설치된 훈련도감은 가난한 장정들에게는 그런대로 좋은 일자리였다. 전란이 1년 남짓 진행되어 소강상태로 접어든 국면에서 하루에 쌀 2되씩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훈련도감군을 모집하자, 당장의 끼니를 잇기 어려운 서울의 빈민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 다투어 몰려들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노비 신분 장정도 많았으나, 정부도 신분을 가려 뽑을 형편이 못 되어 모두 군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자 이들도 고역을 견디지 못하고 반 가까이 도망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정부는 여러 가지 포상 규정을 만들고 하급 무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고 나서야 다소 안정적으로 훈련도감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도 군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의무적으로 군대생활을 하는 군인들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실제 군대생활을 하는 군인에 비해 군포만 내는 군인의 비중이 커져 갔다. 18세기 중엽 균역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어떤 부대 또는 관청에 소속되는가에 따라 군포의 부담이 달라서, 부담이 적은 쪽을 찾아 몰려드는 현상도 벌어진 바 있다.
이들은 번을 나누어 복무했기 때문에 실제 근무자는 그 일부였는데, 19세기가 되면 25분의 1만이 근무했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직업군인인 훈련도감군이 서울에서 실제 근무하는 군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화약무기의 중요성이 크게 높아져 있었는데, 훈련도감군처럼 1년 내내 근무하는 군인이라야 화약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말기에는 자연히 자원하여 군인이 된 직업군인들이 숫자로 보나, 전투 능력으로 보나 어느 면에서도 중앙 군대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서태원 (기전여자전문대 강사)
이상은 다 펌입니다...^^;
퍼오는 김에 하나 더...^^
병참의 문제에 대한 글입니다...
아무리 군대가 많으면 뭐합니까..먹어야 싸우는데... 아래는 조선후기의 예이지만, 훈련도감으로 체계화된 이후에도 저 모양이었다면, 조선전기, 임란때는 뭐..쩝 대충 안습이었을 거란생각이 듭니다. 당연하게 수십만이든 수만이든 이를 유지할 능력이 전기농업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는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국가가 망하기 일보직전에서 싸우는 특수한 상황등을 고려하면 말그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모조리 나가서 싸웠다고 봐야 하지만, 이런 백성들을 "군인" "병력"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많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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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1인의 식사량에 대한 논의의 경우, "청장관전서"에는 성인남성이 한끼에 7홉의 쌀을 먹는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끼당 식사량을 좀더 자세하게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大男은 7홉, 中男은 5홉, 小男은 3홉을 먹으며, 大女는 5홉, 中女는 4홉을 먹는다고 하였다. 28)
우인수 교수의 조선후기 서인계열의 이유태의 정훈을 토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유태 집안의 노의 경우 6개월은 세끼, 6개월은 두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28) 이를 고려하면 대체로 상대적으로 건장한 체격일 가능성이 높은 훈련도감의 직업병의 경우 최소 한끼에 5홉, 하루 두끼로 1되의 최소식사량을 가정할 수 있다. 최대로 잡을 경우, 하루 세끼 2되까지 식사량이 증대한다. 현대의 쌀 한섬은 180리터로, 도정한 쌀인 경우 144kg이다. 즉 리터당 0.8kg의 무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1되의 리터기준은 현대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1되는 연구자들에 따라 최소 0.518리터에서, 최대 0.5967리터로 추정되어지고 있다.(현대 기준으로 1말은 18리터, 1되는 1.8리터) 29)
그렇다면, 조선후기 1일 성인남성의 최소식사량을 1되로 잡았을 때, 최소 414g에서, 최대 477g의 쌀을 소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를 훈련도감의 편제상 1개 대, 즉 10명의 1대에 1명의 복마군이 편제된 구조에 따라 적용될 경우에, 1필의 복마가 지게되는 60kg의 무게를 비교하면 편제상 어느정도의 병참이 가능한지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 복마가 소비하는 콩을 고려해야 한다. 콩의 경우, 대두로 추정되는데, 1리터당 0.75kg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현대 마필의 1일사료 섭취량은 9kg으로 이중 농후사료인 곡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로 그렇다면 4.5kg의 곡류를 1일에 섭취하나, 19세기의 영국 정치가 조오지 커즌이 1894년 조선을 방문한 "Problems of the Far East"나, 조랑말을 타고 금강산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다지 많지 않으며 200파운드까지 짐을 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훈련도감의 마필보유자에 대한 추가 봉급은 쌀이 1말, 콩이 9말이다. 이중 콩이 사료용인 걸로 추정할 경우, 최소한 대두기준으로 46kg에서 53kg을 1달동안 섭취하고 최소로 잡았을 때 1일 콩류의 섭취량은 1.53kg이다.
이것으로 계산할 경우, 1개 대(살수던 포수던)를 구성하는 10인과 복마군 1인의 11인의 식량인 약 4.5kg과 말사료용 콩 1.53kg을 합한 약 6kg정도가 1일 필요한 곡류라고 할 수 있다. 마필이 기준량 60kg을 실을 경우, 보급량은 10일을 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개인이 추가로 상당량의 식량을 지참하지 않을 경우, 조선 최대 정예군인 훈련도감병력의 작전가능거리는 도보로 10일 이내여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복마던, 전마던 간에 조선시대에는 조정과 군을 비롯하여 지속적인 전마 및 복마의 유지문제에 시달려왔다는 점과 조선후기 제주마의 품질하락과 짐말사용과정에서의 폐사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며, 상기한 소비량 기준이 항상 최소기준에 맞춰진 것임도 고려되어야 한다. 게다가, 훈련도감에는 국출신, 별기군을 비롯한 병력과 대량으로 곡류를 소모할 마병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따르면 훈련도감에는 전마가 별무사 25필, 마병에 좌마병 214필, 우마병 231필로 470필의 전마와 334필의 복마가 있었다. 병력은 별무사와 국출신, 마병과 살수, 포수, 제색표하군을 비롯하 5801명의 병력이 편제되어 있었다. 12)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수레가 9량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도감의 24척의 직속 수송선이 실어오는 쌀과 물자를 이송하는 용도로 추정된다. 복마 334필은 규정상 20톤정도를 수송할 수 있다. 훈련도감 전체의 식량소비량을 추산하면 먼저 1일 소비되는 말사료용 대두가 1224kg, 일일 2끼, 중남기준으로 했을 때 2401kg이 소비된다. 총 소비되는 곡류는 1일 3625kg으로 이 경우 훈련도감이 행군을 개시한 6일째에 식량 및 마초가 모두 소모된다.
물론, 개개인이 추가로 식량을 지참하는 경우에는 조건이 개선된다. 만기요람상의 포수기준으로 대략 2.7kg의 조총과 0.9kg의 환도, 연환 50개무게 1kg정도를 지참하는데 대략 4.6kg이다. 여기에 12냥 5돈의 화약을 합하면 5kg, 유삼이나 갑주를 지참하지 않는 경우 개인의 군용장비의 무게는 5kg수준이다. 여기에 15kg정도의 물자를 전체 병력이 지참하는 경우 작전가능일수는 30일로 늘어난다. 그러나 여기에 복마는 추가로 여분의 화약과 연환을 비롯하여 만약 화포를 지참한다면 더 힘들어지며, 개개인의 병력은 번갈아가며 거마창이나 녹각목을 지참할 의무가 있었다. 즉 조선군 최정예군인 훈련도감의 병력의 평시 작전가능일수는 10일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지 군량문제에 집중되 있으나, 조선군의 병참능력상의 문제는 화약이나 탄환, 화살과 같은 소모품에서도 가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군의 병참사정은 호란과정에서도 드러난다. 1637년 홍명구, 류림이 이끄는 평안도 근왕병은 평안감사 홍명구가 2000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에서 방어하다. 12월 14일 평안병사 류림과 합류, 도합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월 26일에 김화로 진입했다. 27일에 당시 일대에 배치되었던 청군 우익군 6000여명의 병력이 접근해왔고, 28일의 전투에서 홍명구군은 전멸, 류림은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하루내내 격전을 벌였고 해가 지자 탄환 및 화살의 부족으로 야음을 틈타 적을 기만하고 후퇴했다. 30) 단 하루만의 교전으로 인해 화기위주의 조선군이 교전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광교산 전투에서는 전라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병 선봉군 2000명은 1월 4일에 광교산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량등 군수물자를 비축했다. 전투는 1월 5일부터 6일까지 청군의 지속적인 공세를 조선군이 격퇴해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6일 밤 김준룡은 식량과 화살의 부족으로 인하여 후퇴해야 했다. 3일만에 2000명의 선봉군이 보유하고 비축했던 군량 및 물자가 소모되어 전투가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
이러한 문제는 실질적인 전술운용보다 대규모 정규전 상황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다. 정조대에 치열하게 일어났던 병학지남에 대한 유효성논쟁이나 전차전의 도입논의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이러한 취약성은 조정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이는 적대지역에서의 원거리 작전에서의 독자적인 병참체계유지보다는 대체로 국내에서의 작전이 대부분으로 군사적 분쟁상황과 점점 거리가 있게된 조선후기의 필연적인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조선 자체 내에서 그러한 병참능력을 구축하기 위한 기간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는데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해상수운 위주로 유통로가 유지되고 육상도로가 미비했기 때문에, 수레를 위한 기본적인 기술발전과 도로가설을 위한 충분한 노력도 견지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실지로, 전차운용과는 별개로 수레의 도입과 운용에 대해서, 심지어 19세기 중반의 헌종때까지도 조정내에서는 험지에서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지상에서 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오히려 수레를 사용함으로서 이에 익숙치 않은 말이 잘 죽는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조선의 수레의 문제점은 조선에서는 일반적인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는, 즉 산지가 많은 조선의 지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숙종때에 논의된 전차역시 독륜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풍천유향"의 검거 역시 세로로 2개의 륜이 달린 독륜거형태를 취한다. 특히 독륜거는 우마가 끄는 것이 아니라 인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숙종 36년 10월 10일자 실록에 의하면 민진후가 북경에 갔을 때의 독륜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수어청에서 양륜거를 제작하였는데, 이 역시 우마를 사용하기 위해서보다는 독륜거를 조선인이 익숙하게 사용치 못하여 양륜거를 제작해서 사람이 끌게 하였다고 언급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산지의 험함으로 인해서 인력을 통한 독륜거가 사용되야 하고 수레가 적합치 않다는 주장은 합리적인가? 이에 대해서는 정조대에 홍양호가 명백하게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정조 7년 7월 18일에 대사헌 홍양호는 사행과정에서 중국에서 본 수레의 활용에 대해서 논하면서, 섬서, 관중, 사천, 촉도의 험한 길과 강소, 절강, 광동의 먼길을 다수의 상인들이 수레를 활용해 드나드는데, 이것이 짐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펼리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수레 1량이 5, 6마리의 말이 끌어도 수십필이 적재하는 것과 맞먹게 적재가 가능한데 도로가 험악하고 우마가 희소해 이것이 불가능하다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다. 중국의 촉도의 험준함과, 자신이 사행에서 실제 본 청석령과 마천령이 조선의 동선령보다 더했지만 수레의 사용이 일반적임을 들어 비판하였다.
홍양호는 국내에서도 영남의 안동, 의성, 해서의 장연과 신천, 관북의 함흥등 우차의 사용이 잦음을 언급하면서, 문제는 제작이 조잡하여 운행에 불편이 많음을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정의조는 함흥에서 수레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를 수원부에 적용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조선후기에는 지형이 험한 함경도, 북관지역에서는 민간에도 소가 끄는 우차가 매우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 홍의영(洪儀泳:1750∼1815)이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 일대를 답사하고 그 연혁과 정황 및 자기의 개혁안을 엮어 조정에 올린 "북관기사"에는 소 1마리가 이끄는 대차가 2, 3마리의 말이 지는 짐을 끌 수 있고, 함흥에는 모두 수레를 이용하기에 등에 짐을 진 소가 없다고 언급한바 있다. 31)
지형이 평탄치 않은 함경도는 조정의 엄격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민간이 편의를 위하여 도로를 개척하는 일이 잦았고 개시와 후시를 통해서 상업경제가 융성해짐에 따라서 조정이 백성의 사치함으로 인해 검박했던 풍토가 바뀌고 있음을 걱정할 정도로 민간경제가 성장하였다. 민간경제의 성장과 외부문화의 높은 유입가능성등이 종합되어 함경도 일대에서 수레는 보다 일상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산지지형과 수레의 활용은 그다지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다른 문제는 이 시대의 전마, 복마용 마필의 청국에 대한 의존도 심화에 있다고 봐야한다. 청과 실질적인 교전관계가 야기되지도 않았고, 국내에서 마필에 의한 유통인프라의 의존도 역시 일부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청마(청에서 수입된 말)에 대한 심각한 의존과 북마(조선 북부지역에서 생산되어 전마로 활용된 말)나 제주마의 품질저하는 청마가격의 저하와 유입증대로 인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청을 가상적으로 수립하고 조선군이 충분한 병참체계를 위한 수레의 활용을 상정할 경우에는 높은 청마에 대한 의존도는 문제가 될 만 하다.
특히 공식적인 개시 내에서의 마시는 청과 교역 초기에 군사적 필요성과 함께 만주지역의 농경화를 위한 농우의 필요성이 증대됨으로서 불리한 교역비로 청마를 농우와 북마로 교환하여 북마의 유출로 인해서 우수한 종마가 대거 유출됨으로서 북마의 생산능력이 저하되었고 목마장이 농경지로 전용되는 등의 관리소홀, 그리고 조선후기 가시화된 제주마의 품질저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숙종 36년 이후 청마와 소의 우마교역으로 전환되고 3영의 마병증가로 인해 전마의 수요는 증대되었고 북마의 품질저하(우수마의 유출)과 생산능력 저하와 개인의 말 수요 증가는 조정의 마필부족을 심화시켰다. 영조대에는 종마수입을 통한 마정쇄신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31) 게다가 강희제 이후 청이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전마의 수요가 줄고, 만주개발로 농우수요가 증대되며, 만주에서의 말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청마공급이 증대됨으로서 31), 청마의 유입이 국내의 목마장의 경제성을 더욱 하락시켰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여건상으로 순조대까지, 훈련도감과 같은 중앙정예군에도 기본적인 병참체계가 구축되지 못하고 복마위주의 병참체계가 유지되었다는 점은, 화기중심의 보병을 핵심으로한 조선군의 군사체계가 단순히 전술운용상의 문제를 넘어선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조선의 근본적인 경제적 인프라라는 배경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병참체계가 중요한 화기중심의 군사체계를 구축한 국가가 북벌이라는 국가의 중차대한 전략을 한때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본적인 고려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군사체계의 발전과 삼수병체계를 비롯한 전술운용의 논의가, 근본적인 전례의 부족과 잘못된 관점으로 인해 탁상공론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감히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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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30) 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통사 III, 조선시대 전편"
31) 고승희, 국학자료원, "조선후기 함경도 상업연구"
문득 찾아보니.... "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이라는 구절이 있군요. 아마도 이런 내용을 보고 일본에서도 기록이 있다는 말이 와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인가 보군요.... 전연 근거 없는 말만은 아니었습니다...좀 오래된 일이어서 전후문맥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아무튼 윗글은 나도 옮겨온 글입니다.
뭐 임란직전 조선군이 위의 내용처럼 엉망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조선의 군사제도 자체를 너무 폄하해서 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민병 수준이라고 보수만은 없습니다. 조선의 병역 복무 방식을 보면 지금의 경우는 2년여 동안 아예 군대에 갇혀서 훈련을 받고 복무를 하는 방식이지만 조선의 겨우는 6개월 정도 단위로 교대로 복무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신 전체적인 복무기간은 길었지요. 그런 방식이 반드시 빟ㅅ율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임란직전에 조선군의 상태가 그모양이었던건 군사제도의 붕괴의 원인이지 군사제도 자체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도 무리가 아닐까요?
제대로 관리를 않해서 엉망진창인 환자가(최소한 국방이라는 부분에서만은) 상태에서 각잡고 쳐들어오는 깡패에 싹발리지 않고 물고 늘어졌으면 그럭저럭 잘한거 아닙니까-ㅂ-? "한성이 무너지고 평양이 떨어졌다~ 중앙 시스템의 60%가 붕괴됬다~ 캐발렸다~"라고 흔히들 임진년을 악평하지만 재미있는건 중앙정부의 컨트롤, 즉 수족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수족들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거에요.
어설프게나마 자생적으로 형성되가던 '민족'의 개념-최소한 왜놈,뙈놈,조선놈의 개념은 당시에도 있었으니 말이죠-, 유교사상을 촉촉히 머금은 향촌의 양반세력 -지배,피지배간의 갈등은 있엇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 때로는 근거도 희박하고 무지에서 나온 말도 안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역시 부정할수 없던 항쟁의 원동력이 된 '우월감'등. 이런 '끊어진 수족이 능동적으로 움직일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들 또한 군사제도의 붕괴만큼이나 조선의 시스템이 역어낸 산물입니다.
좋은예가 바로 소위 '의병'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향촌세력이 극렬하게 저항했던 경상우도, 명군의 개입없이도 일본군의 수차례 공세속에 지켜낸 전라도, 반역자의 등장과 초장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기후와 험난한 지형, 풍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성공적으로 가토의 2군을 밀어낸 함경도, 그리고 조선의 수군이에요. 이런 얘들을 찬찬히 둘러보면 조선의 시스템도 그다지 엉성하지 만은 않아요. 장단점이야 누구나 있는 거지요. 먼치킨은 절대 못되지만 그렇다고 꿇릴것도 없지요.
여담이지만 서애 유성룡 선생이 '호남을 지켜서 나라가 보존되었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전략적,경제적 요충지인 전라도 말입니다. 임진전쟁 7년중 전라도가 가장 위험했던 때는 딱 두번있어요. 첫번째는 설욕을 하겠다며 미칠듯한 물량으로 후방 게릴라 까지 봉쇄해가며 각잡고 조지고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제 2차 진주성 전투' 두번째는 추석날에 대가리 터지게 싸워 함몰된 '남원성 전투' 이 두전투에서 명군은 뭐하고 있었을까요. 전자는 합천서 넋놓고 앉아있었고 후자는 . . . 설명 생략하겠습니다. '절박하게 싸울만한 이유가 없다' 명군을 무조건 호평할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인-행패나 가끔씩 조선군 뺨치는허약한 전투력 이상으로-
에...개판사판 오장판이 된 시점에 이 말을 올려도 되나...합니다만, "흰 옷을 입은 조선군...." 멘트는 대동강 전투에 참가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기록에서도 보입니다. 구로다가 적길 "소오의 진영에서 싸움이 계속되며 새벽동이 텃다. 군졸들이 걱정하며 강 반대편을 바라보니, 흰 아지랑이가 이는듯 하였다. 얼마 되지않아 술렁이며 모두가 강둑으로 모였다. 삼천여명의 조선군이 성문을 열고 도하지를 건너는데, 마치 하얀색 구름이 이는듯 하였다..." 고 적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글쓴이는 이 기록을 보고 썻다기 보다는 임진왜란과 관련한 개설서에서 많이 나와있는 용인전투에 대한 징비록의 기록을 가지고 위와 같이 (용인전투는 조선군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투이다. ...중략... 당시 조선군은 군복조차도 입지 못하였다. <<당시>>의 전투를 기록한 일본군장수는 흰옷을 입은 조선군이 마치 양떼의 무리와 같이 보였다고 적고 있다)글을 쓴 듯 하군요. 유성룡을 일본군 장수로 슬쩍 바꿔치기하고, 군기가 없어서 양떼같다는 말을, 자의적으로 곡해ㆍ확대해석하여 조선군의 군장이 형편없다는 자신의 논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야비한 행위로밖에 안보입니다.
저도 그구절은 읽어 본것 같군요. 용인전투가 벌어지기전 출정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본 유성룡이 유려의 시선으로 한말이 '마치 양때들이 노니는 것 같다.....' 글의 묘사를 보고 받은 느낌은 뭐랄까 1차대전 초에 애국심에만 덜떠서 전선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독일군에 발렸던 프랑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임란때라면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들도 꽤 잇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증언과 같이 종합해보면 아마 부대마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갑옷을 갖춰 입은 부대나 병사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부대나 병사들도 있었던 듯 합니다. 말이 17만이라지만 의병 빼면 전체 정원의 절반도 못미치는 병력이 모였던 것을 보면 장비의 상태도 그렇게 양호하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아... 그리고 제승방략부분의 내용인데요. 저것은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보긴 힘듭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저런 유사한 시스템(고도의 중앙집권국가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같은 나라도 중앙에서 집정관이 총 사려관으로 파견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중국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차피 실질적인 야전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것은 현지의 휘하 장교들입니다. 신립장군의 경우 탄금대 전투가 무리없이 치루어 졌다면 조선군을 총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될 소임이었습니다. 이후에 권율장군이 그 역할을 맡게 되지만...... 정작 문제는 당시 중앙조정의 늦장 대처가 이유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조선의 국토가 협소한게 문제지요. 도보로 보름이면 동래에서 한성까지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당시 통신 사정으로 2주만에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성곽 중 한 두성만 몇주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조선군의 모랄은 형편없어서 ;;;;;
제가 볼땐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다못해 대마도쪽의 동향만 시시각각 예의주시하고 잇었어도 대비는 가능햇다고 봅니다. 어차피 침공을 위해선 대규모 병력이동이 잇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모르고 있엇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 수집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본 애들은 조선 곳곳에 첩자까지 파견해서 정보 수집을 했다는 데 우리는 달랑 사신 두명 보내놓고 정보 수집이라고 했으니... 그나마 두사람의 의견도 달랐으니......;;;;;;;
의병이라고 하지만 의병이 사실상 대부분 관군의 인적 자원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관군의 상태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정문부의 기병 또한 사실상 의병이었고, 대다수 기병입니다. 의병이었지만 인적 자원은 정규군이었던 것이죠. 17만여명의 동원 병력 실적도 솔직히 전국토의 60퍼센트 이상이 점령 및 행정불능이 된 상황에서 관군또한 10만이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고 또한 의병또한 수만명이 투입이 되었습니다.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병력은 거의 7만이 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승방략의 문제에 대해서 이일이 쓴 '증보제승방략'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국역본이 현재 존재하는데 '국역제승방략'이라고 해서 국역본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승방략이 만사 능통한 것은 아니겠지만, 중앙에서 지휘관에 내려오는 문제점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이 제승방략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 지휘권이 중앙에서 내려온 지휘관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10월 1일의 기사에 '지난 을묘년 변란 이후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법(分軍法)으로 고쳐 도내의 여러 고을의 순변사(巡邊使),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도원수(都元帥) 및 본도의 병사와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이를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기 보면 본도의 병사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켰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순변사 같은 중앙지휘관이 내려오기전에 이미 각 도의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는 각 병력에 대한 지휘권이 존재했었습니다. '국역제승방략'에서도 여진족과 전투를 벌일때 중앙지휘관이 편성되어서 파견된 것 보다는 각 고을이나 병영의 대장이 여진족을 방어 및 공격을 실시했었습니다. 그 와중에 유명해진 것이 온성부사 신립이죠. 여진족들이 신립을 보고 '온성의 영공이 왔다!'라고 할정도로 두려워했었습니다.
물론 초반에 조선군이 무너진 것은 경상도 제승방략에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진 경우가 될 겁니다. 경상좌수영의 경우에는 솔직히 제가 판단을 못하겠습니다. 이미 좌수영 소속들은 육상고립방어 들어가서 거의 전몰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고, 경상우수영은 초기에 집결상태 개판으로 출동하지 못하고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했습니다. 부산진이나 동래성이 전몰할 때도 상당수 병력이 동래성으로 집결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분명 전시 집결이 잘되고 있었던 것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경상좌병사 이각이 병력소집령을 내려 놓고 적전도주를 실시해서 경상좌병사 휘하 병력들은 공중분해 되었고 대구로 집결한 병력이 최소 수천에서 최대
수만명인데 그것도 경상감사 김수에 멍청한 명령 때문에 공중분해가 되어버렸습니다. 즉 순변사 이일이 오기전에 일본군이 대구에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순변사 지휘할 병력이 완전 날아가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삼도순변사 신립은 더욱 급했고 병력을 모으기전에 8천여명으로 결전을 벌일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충분히 중앙지휘관들이 내려오기 전 병사와 감사가 병력을 제대로 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는 초반에 부산진성, 동래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너무 빠른 시간에 무너졌습니다. 경상도가 무너졌고 신립의 패배에 있어서 서울까지 완전히 고속도로로 기동하게 되는 결과를 일본군에게 안겨준거죠
하지만 제승방략의 제도 자체에 문제점이 있다기 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사람에 의해서 완전 무너진 것이 임진왜란 초반입니다. 만약 거점방어 형식인 진관 체제라면 삼도순변사 신립이 내려갔더라도 8천여명도 야전 지휘하기 힘들었을겁니다. 제승방략이므로 각 고을 책임자들이 병력을 이끌고 해당 집결지로 집결하고 본도 병사, 감사 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장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군의 야전 전투능력은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진관 체제 보다는 제승방략이 대규모 전면전에 훨씬 맞는 제도 같습니다.
제승방략이 틀렸다는 소리는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제승방략이 진관법과 전혀 반대되는 체제인 것으로 호도해도 안 되고. 제승방략체제 하에서도 병력 동원의 기반은 행정구역과 일치된 부/목/군/현이었고, 제승방략 이전처럼 병마절도사가 방어사 통제를 받아야 하는 체제에서는 대규모 병력에 대한 즉각적인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남부의 패락은 제승방략 자체의 문제가 아닌, 병마절도사의 능력 문제였죠. 방어사나 순변사는 병마절도사가 무너진 다음에 투입되는거니까.
그럼 묻죠. 조선군은 군복이 없어서 (하얗기때문에) 양떼같다는 언급을 한 부분은 그쪽이 제시한 참고문헌중 어디에 있습니까?네?
문득 찾아보니.... "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이라는 구절이 있군요. 아마도 이런 내용을 보고 일본에서도 기록이 있다는 말이 와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인가 보군요.... 전연 근거 없는 말만은 아니었습니다...좀 오래된 일이어서 전후문맥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아무튼 윗글은 나도 옮겨온 글입니다.
푸훗-ㅋㅋㅋㅋ
Ctrl + C,V는 편하군요. 나중에 문제가 되면 "아무튼 윗글은 나도 옮겨온 글입니다."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쫑알님 토론은 좋은데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는 좋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주의하도록하겠습니다.
뭐 임란직전 조선군이 위의 내용처럼 엉망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조선의 군사제도 자체를 너무 폄하해서 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민병 수준이라고 보수만은 없습니다. 조선의 병역 복무 방식을 보면 지금의 경우는 2년여 동안 아예 군대에 갇혀서 훈련을 받고 복무를 하는 방식이지만 조선의 겨우는 6개월 정도 단위로 교대로 복무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신 전체적인 복무기간은 길었지요. 그런 방식이 반드시 빟ㅅ율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임란직전에 조선군의 상태가 그모양이었던건 군사제도의 붕괴의 원인이지 군사제도 자체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도 무리가 아닐까요?
제대로 관리를 않해서 엉망진창인 환자가(최소한 국방이라는 부분에서만은) 상태에서 각잡고 쳐들어오는 깡패에 싹발리지 않고 물고 늘어졌으면 그럭저럭 잘한거 아닙니까-ㅂ-? "한성이 무너지고 평양이 떨어졌다~ 중앙 시스템의 60%가 붕괴됬다~ 캐발렸다~"라고 흔히들 임진년을 악평하지만 재미있는건 중앙정부의 컨트롤, 즉 수족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수족들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거에요.
어설프게나마 자생적으로 형성되가던 '민족'의 개념-최소한 왜놈,뙈놈,조선놈의 개념은 당시에도 있었으니 말이죠-, 유교사상을 촉촉히 머금은 향촌의 양반세력 -지배,피지배간의 갈등은 있엇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 때로는 근거도 희박하고 무지에서 나온 말도 안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역시 부정할수 없던 항쟁의 원동력이 된 '우월감'등. 이런 '끊어진 수족이 능동적으로 움직일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들 또한 군사제도의 붕괴만큼이나 조선의 시스템이 역어낸 산물입니다.
좋은예가 바로 소위 '의병'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향촌세력이 극렬하게 저항했던 경상우도, 명군의 개입없이도 일본군의 수차례 공세속에 지켜낸 전라도, 반역자의 등장과 초장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기후와 험난한 지형, 풍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성공적으로 가토의 2군을 밀어낸 함경도, 그리고 조선의 수군이에요. 이런 얘들을 찬찬히 둘러보면 조선의 시스템도 그다지 엉성하지 만은 않아요. 장단점이야 누구나 있는 거지요. 먼치킨은 절대 못되지만 그렇다고 꿇릴것도 없지요.
여담이지만 서애 유성룡 선생이 '호남을 지켜서 나라가 보존되었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전략적,경제적 요충지인 전라도 말입니다. 임진전쟁 7년중 전라도가 가장 위험했던 때는 딱 두번있어요. 첫번째는 설욕을 하겠다며 미칠듯한 물량으로 후방 게릴라 까지 봉쇄해가며 각잡고 조지고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제 2차 진주성 전투' 두번째는 추석날에 대가리 터지게 싸워 함몰된 '남원성 전투' 이 두전투에서 명군은 뭐하고 있었을까요. 전자는 합천서 넋놓고 앉아있었고 후자는 . . . 설명 생략하겠습니다. '절박하게 싸울만한 이유가 없다' 명군을 무조건 호평할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인-행패나 가끔씩 조선군 뺨치는허약한 전투력 이상으로-
이라고 생각해요.
볼때마다 참 재밋다.
병학지남, 거기보전 등등 조선후기 군사체제의 한계는 곧 올립니다. ㅋㅋㅋ; 아...근데 참 저 참조문헌....어딜가나 다 겹치는 구만;;
에...개판사판 오장판이 된 시점에 이 말을 올려도 되나...합니다만, "흰 옷을 입은 조선군...." 멘트는 대동강 전투에 참가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기록에서도 보입니다. 구로다가 적길 "소오의 진영에서 싸움이 계속되며 새벽동이 텃다. 군졸들이 걱정하며 강 반대편을 바라보니, 흰 아지랑이가 이는듯 하였다. 얼마 되지않아 술렁이며 모두가 강둑으로 모였다. 삼천여명의 조선군이 성문을 열고 도하지를 건너는데, 마치 하얀색 구름이 이는듯 하였다..." 고 적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글쓴이는 이 기록을 보고 썻다기 보다는 임진왜란과 관련한 개설서에서 많이 나와있는 용인전투에 대한 징비록의 기록을 가지고 위와 같이 (용인전투는 조선군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투이다. ...중략... 당시 조선군은 군복조차도 입지 못하였다. <<당시>>의 전투를 기록한 일본군장수는 흰옷을 입은 조선군이 마치 양떼의 무리와 같이 보였다고 적고 있다)글을 쓴 듯 하군요. 유성룡을 일본군 장수로 슬쩍 바꿔치기하고, 군기가 없어서 양떼같다는 말을, 자의적으로 곡해ㆍ확대해석하여 조선군의 군장이 형편없다는 자신의 논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야비한 행위로밖에 안보입니다.
저도 그구절은 읽어 본것 같군요. 용인전투가 벌어지기전 출정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본 유성룡이 유려의 시선으로 한말이 '마치 양때들이 노니는 것 같다.....' 글의 묘사를 보고 받은 느낌은 뭐랄까 1차대전 초에 애국심에만 덜떠서 전선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독일군에 발렸던 프랑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복....은 그당시 전장터에서 그다지 많이 입는 물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치와 통신물품이 군복보다 더 중요하지요.
임란때라면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들도 꽤 잇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증언과 같이 종합해보면 아마 부대마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갑옷을 갖춰 입은 부대나 병사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부대나 병사들도 있었던 듯 합니다. 말이 17만이라지만 의병 빼면 전체 정원의 절반도 못미치는 병력이 모였던 것을 보면 장비의 상태도 그렇게 양호하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아... 그리고 제승방략부분의 내용인데요. 저것은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보긴 힘듭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저런 유사한 시스템(고도의 중앙집권국가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같은 나라도 중앙에서 집정관이 총 사려관으로 파견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중국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차피 실질적인 야전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것은 현지의 휘하 장교들입니다. 신립장군의 경우 탄금대 전투가 무리없이 치루어 졌다면 조선군을 총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될 소임이었습니다. 이후에 권율장군이 그 역할을 맡게 되지만...... 정작 문제는 당시 중앙조정의 늦장 대처가 이유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조선의 국토가 협소한게 문제지요. 도보로 보름이면 동래에서 한성까지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당시 통신 사정으로 2주만에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성곽 중 한 두성만 몇주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조선군의 모랄은 형편없어서 ;;;;;
제가 볼땐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다못해 대마도쪽의 동향만 시시각각 예의주시하고 잇었어도 대비는 가능햇다고 봅니다. 어차피 침공을 위해선 대규모 병력이동이 잇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모르고 있엇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 수집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본 애들은 조선 곳곳에 첩자까지 파견해서 정보 수집을 했다는 데 우리는 달랑 사신 두명 보내놓고 정보 수집이라고 했으니... 그나마 두사람의 의견도 달랐으니......;;;;;;;
들리는 소문으로는 돈으로 사람을 보내서 대신 군 복무를 했다는... 요즘은 걍 영창으로 ㄱㄱ지만//
의병이라고 하지만 의병이 사실상 대부분 관군의 인적 자원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관군의 상태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정문부의 기병 또한 사실상 의병이었고, 대다수 기병입니다. 의병이었지만 인적 자원은 정규군이었던 것이죠. 17만여명의 동원 병력 실적도 솔직히 전국토의 60퍼센트 이상이 점령 및 행정불능이 된 상황에서 관군또한 10만이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고 또한 의병또한 수만명이 투입이 되었습니다.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병력은 거의 7만이 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승방략의 문제에 대해서 이일이 쓴 '증보제승방략'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국역본이 현재 존재하는데 '국역제승방략'이라고 해서 국역본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승방략이 만사 능통한 것은 아니겠지만, 중앙에서 지휘관에 내려오는 문제점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이 제승방략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 지휘권이 중앙에서 내려온 지휘관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10월 1일의 기사에 '지난 을묘년 변란 이후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법(分軍法)으로 고쳐 도내의 여러 고을의 순변사(巡邊使),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도원수(都元帥) 및 본도의 병사와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이를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기 보면 본도의 병사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켰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순변사 같은 중앙지휘관이 내려오기전에 이미 각 도의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는 각 병력에 대한 지휘권이 존재했었습니다. '국역제승방략'에서도 여진족과 전투를 벌일때 중앙지휘관이 편성되어서 파견된 것 보다는 각 고을이나 병영의 대장이 여진족을 방어 및 공격을 실시했었습니다. 그 와중에 유명해진 것이 온성부사 신립이죠. 여진족들이 신립을 보고 '온성의 영공이 왔다!'라고 할정도로 두려워했었습니다.
물론 초반에 조선군이 무너진 것은 경상도 제승방략에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진 경우가 될 겁니다. 경상좌수영의 경우에는 솔직히 제가 판단을 못하겠습니다. 이미 좌수영 소속들은 육상고립방어 들어가서 거의 전몰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고, 경상우수영은 초기에 집결상태 개판으로 출동하지 못하고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했습니다. 부산진이나 동래성이 전몰할 때도 상당수 병력이 동래성으로 집결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분명 전시 집결이 잘되고 있었던 것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경상좌병사 이각이 병력소집령을 내려 놓고 적전도주를 실시해서 경상좌병사 휘하 병력들은 공중분해 되었고 대구로 집결한 병력이 최소 수천에서 최대
수만명인데 그것도 경상감사 김수에 멍청한 명령 때문에 공중분해가 되어버렸습니다. 즉 순변사 이일이 오기전에 일본군이 대구에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순변사 지휘할 병력이 완전 날아가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삼도순변사 신립은 더욱 급했고 병력을 모으기전에 8천여명으로 결전을 벌일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충분히 중앙지휘관들이 내려오기 전 병사와 감사가 병력을 제대로 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는 초반에 부산진성, 동래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너무 빠른 시간에 무너졌습니다. 경상도가 무너졌고 신립의 패배에 있어서 서울까지 완전히 고속도로로 기동하게 되는 결과를 일본군에게 안겨준거죠
하지만 제승방략의 제도 자체에 문제점이 있다기 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사람에 의해서 완전 무너진 것이 임진왜란 초반입니다. 만약 거점방어 형식인 진관 체제라면 삼도순변사 신립이 내려갔더라도 8천여명도 야전 지휘하기 힘들었을겁니다. 제승방략이므로 각 고을 책임자들이 병력을 이끌고 해당 집결지로 집결하고 본도 병사, 감사 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장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군의 야전 전투능력은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진관 체제 보다는 제승방략이 대규모 전면전에 훨씬 맞는 제도 같습니다.
결국은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고 이런점에서 조선군의 전체적 채점점수가 낮아지는건 어쩔수 없죠-_-;; 제도가 사람을 망치는건지 사람이 제도를 망치는건지 원;;
한가지 더 장수들이 어쩌면 정치적이 돼었기 때문일지도 장수는 장수다워야. 그분의 발끝만치라도.
제승방략이 틀렸다는 소리는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제승방략이 진관법과 전혀 반대되는 체제인 것으로 호도해도 안 되고. 제승방략체제 하에서도 병력 동원의 기반은 행정구역과 일치된 부/목/군/현이었고, 제승방략 이전처럼 병마절도사가 방어사 통제를 받아야 하는 체제에서는 대규모 병력에 대한 즉각적인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남부의 패락은 제승방략 자체의 문제가 아닌, 병마절도사의 능력 문제였죠. 방어사나 순변사는 병마절도사가 무너진 다음에 투입되는거니까.
개판 오분전 군대를 지금까지 당나라 군대라고 했지만 바꿔야겠습니다. 조선군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