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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0월 발견된 제3땅굴. |
탈북자 수가 약 1만 명에 이르러도 南侵(남침)땅굴 작업과 관련된 일을 했던 사람은 1974년에 귀순했던 북한군 병사 金富成(김부성)씨뿐이다. 그는 제3땅굴을 팠던 사람인데 그의 提報(제보)가 단초가 되어 全斗煥 소장이 지휘하던 1사단이 1978년 10월에 제3땅굴을 발견했다. 이 땅굴은 너비와 높이가 2m이고,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을 435m 지난 지하 73m까지 파들어간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우리 쪽으로 침투 길이가 가장 긴 땅굴은 1975년 3월 제6사단(사단장 鄭名煥 소장)이 발견한 제2땅굴로서 1100m였다. 북한 쪽 길이까지 계산하여 가장 긴 땅굴은 제1(고랑포)땅굴과 제2땅굴로서 3500m이다.
지금까지 네 개의 땅굴이 발견되었는데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 북쪽에서 발견된 제4땅굴이 마지막이다. 軍에선 땅굴 굴착이 1980년대에 끝났을 것이라고 본다.
최근 기자는 땅굴 작업과 관련한 일을 했던 한 탈북자를 만났다. 그는 군수공업부문에서 근무했던 고위기술자인데 南侵 땅굴 굴착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땅굴 현장엔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증언을 했다. 땅굴을 북한에선 「機通手(기통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機通手는 군대에서 신문이나 문서를 배달하는 일종의 연락병이다. 땅굴 굴착은 인민무력부 직속의 583부대(군수건설국)가 맡고 있다. 이 부대는 金日成·金正日의 숙소나 별장 등 이른바 「모신 사업」과 관련된 건설사업과 비밀군사시설 건설을 전담한다. 평양의 동대원구에 본부가 있다.
이 탈북자는 북한 583부대는 한국에서 터널을 뚫을 때 쓰는 자동굴착기 TBM(Tunnel Boring Machine)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만드는 이 기계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큰 장비는 한국 측에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한은 착암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고 여기에 다이너마이트를 넣은 뒤 폭파시킨 다음 정이나 망치를 써 굴을 넓혀 가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6명씩 교대를 하면서 하루 24시간씩 뚫으면 한 달에 수십 m를 나갈 수 있다.
작업상 가장 큰 문제는 산소 부족이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폭파한 뒤 작업을 하다가 有毒(유독)가스에 질식하거나 산소 부족으로 죽기도 했다. 방독면을 쓰고 작업을 해도 희생자는 줄지 않았다. 이 탈북자는 산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여했다.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산소발생장치를 坑(갱) 안으로 갖고 들어가 산소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으나 땅굴 굴착 중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산소발생기는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坑內(갱내)의 가스에 인화되어 폭발사고가 자주 났다.
땅굴을 뚫는 데 가장 큰 난관은 換氣(환기) 문제이다. 일반 광산에선 바깥으로부터 압축공기를 주입받거나 별도의 斜坑(사갱)을 뚫어 공기를 소통시킨다. 남침용 땅굴은 그렇게 하면 한국 측 高空(고공)정찰기에 노출되므로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 계속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03/2007040300757.html
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op.asp?tnu=200704100014&catecode=C&tIdx=318
첫댓글 김대중 정부 시절 국방부는 북한군이 자동굴착기 TBM(Tunnel Boring Machine)를 사용했다면 남한에서 몰랐을 리 없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땅굴은 없다고 주장했으며, 파아란 등이 국방부 설을 지지하며 남굴사측을 비판했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감시단과 함께 현장에 갔었던 분과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요. 확실히 아니라고 보아도 된다고 합니다. 당시 지만원씨는 땅굴을 계속 거론하며 몇 미터만 파내려가면 있다고 주장해서 왜 안파느냐 했더니 돈이 없어서라고 대답하셨다네요. 만일 굳건한 의지라면 몇 명이라도 꾸준히 파내려갔다면 돈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노무현 부정전자개표기 때에 사람들에게 부정선거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 그가 나와 오로지 땅굴 얘기만 하셨다네요. 전 이 땅굴 얘기 내용이 불안감확대를 지나치게 하는 것 같아 거론조차 하는걸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지빅사님과 남굴사 윤여길 박사님이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해 6월에 사이버24뉴스에서 땅굴은 없다는 기사가 나가니깐 남굴사 입장 변호하느라 지박사님이 끼어들게 되었지요. 그 후에는 자기가 한 말을 뒤집을 수 없었던 상황에 처하게 되신 듯합니다.
글쎄요. 그렇다면 자신이 올린 그러한 자료들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잖습니까. 그의 추종자 분들이신 몇 분들께 물어 본적 있는데 에전의 저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고 매우 두려워 하셨습니다. 전 그 분을 좀 이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정치의 소신을 가지고 정당을 창설하시고 활동하시려 하는 분이 그러면 안되지 않을까요. 어찌됐든 이건 저의 생각이니까 기분 나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않으시고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자료들이 있었던가요? 연천 땅굴 문제로 모 방송국과 소송이 걸린 일이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건은 지박사님 말이 옳았었고, 남굴사 옹호론은 좀 무리였던 것만 기업합니다. 여하튼, 일단 쓴 글은 보존해 두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제 경우 저의 식견이 부족했었던 글들도 그대로 보존해 둡니다.
땅찾사에서 본 것 같거든요. 며칠동안 블러그가 아닌 홈페이지 주소를 찾아 고생하다가 찾을 수 있었는데 땅굴이 사실이니까 인터넷 해킹을 많이당해 홈페이지 운영이 수월치 않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역사학도님의 지적을 들으니 아마도 제 기억이 틀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지만원씨 이름이 거론되었고 땅굴 관련 글들 때문에 속단 했던가 봅니다.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2002년말 화성땅굴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도 조갑제 기자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