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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138주(2012.7.11)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김재현(계명대)
1. 들어가며
이번에 <통청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게 되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책을 다시 집어 읽게 되었다. 애초에 프롬을 강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목 스님께서 이런 책이 꼭 알려져야 하는데, 김 선생이 발표를 한 번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그 말씀에 따르게 된 것이 오늘 발표의 출발점이었다. <통청 아카데미> 강의 일정이 확정되면서 이 참에 『소유냐 존재냐』 뿐 아니라 프롬의 책을 전반적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우선 『소유냐 존재냐』를 다시 한번 다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프롬의 생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전기물을 워낙 좋아하는데다가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어보게 되었다.
프롬의 생애와 사상을 잘 정리한 책으로는 박찬국 선생님의『에리히 프롬과의 대화』가 있었다. 앞 쪽에 짧게 프롬의 생애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프롬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프롬의 조교이자 유고 정리인이었던 라이너 풍크()가 쓴 내가 『에리히 프롬에게 배운 것들』은 본인이 직접 프롬을 만났을 때의 인상과 개인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이 들어 있었다. 특히 풍크의 책에는 『소유냐 존재냐』가 원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마르크스를 비교'하려고 했던 책이었다고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는데, 『소유냐 존재냐』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프롬의 생애를 포괄적인 틀로 해서 그의 저작들을 소개하는 책으로는 박홍규 선생님의 『우리는 사랑하는가?』가 있다.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전에 몰랐던 생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프롬의 유대교적 배경, 프롬이 청년 시절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프롬의 두 번째 아내가 벤야민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사실, 생애의 후반부를 멕시코에서 보냈다는 사실, 스즈키 다이세츠를 통해 선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등은 새롭게 알게 된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박찬국 선생님은 통속 철학자로 비하된 에리히 프롬이 사실은 현대의 탁월한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원래 나는 프롬이 그저 그런 저자인 것은 아니지만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와 같이 영혼을 뒤흔드는 그러한 사유의 깊이와 힘을 가진 것으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왠지 내게 프롬은 통속적인 사유가처럼 느껴져 왔었다. 사실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내게 중요한 물음은 ‘박찬국 선생님께서 어떻게 해서 프롬을 그토록 탁월한 분으로 여기게 되었는가?’였다.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나니,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2. 프롬의 사상적 배경
에리히 프롬은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저술가이다. 먼저,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교 신자로서 토라를 공부했다. 특히 그는 청년 시절에 6년에 걸쳐 라빈코프라고 하는 인문주의적 랍비에서 성서를 인문적으로 읽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여느 유대인들과는 다른 그러한 종교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신약성서와 기독교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청년 시기에는 불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멕시코에 건너가서는 선불교를 접하게 되고 선불교 공부와 좌선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서양에 선불교를 전파하는데 가장 탁월했던 스즈키 다이세츠와의 만남은 선공부에 큰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프롬은 기독교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접하고 그를 열심히 공부했다. 최근 국내에도 에르하르트 열풍이 불고 있는데, 프롬은 그를 일찍부터 알아보았고 열심히 알린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런 종교에 대한 공부 때문에 프롬은 보수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프롬의 종교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보수적이라고 공격했다.
프롬은 일찍부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저술가, 강사, 교수도 그의 직업이었지만, 프롬이 평생 꾸준하게 행한 일은 정신분석가로서의 활동이었다. 프로이트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카렌 호나이, 해리 설리반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통 프로이트파를 벗어나게 된다. 프롬은 한 이론 체계가 6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프롬은 또한 마르크스를 열심히 연구했다. 프롬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연구소에 가입하여 그들에게 정신분석을 소개하는 한편, 그들로부터 마르크스의 사상을 배웠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결별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마르크스를 읽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전기와 자신의 마르크스 해석을 담은 작은 책도 출판했다.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작업을 많이 수행했는데, 그의 이름을 미국과 세계에 알린 첫 번째 단행본인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사회학과 심리학이 잘 결합된 책이었다. 그의 실질적인 마지막 책인 『소유냐 존재냐』에도 역시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처럼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상가에게는 종교, 정신분석, 사회학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서로 함께 결합되어 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구되던 세 방향이 시간이 지날수로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서로 상통하게 되고,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생각되던 신구약 성경이나 선불교, 그리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비슷한 지평에서 논의된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종교’에 반대한 인물이지만 ‘종교적’ 인물들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학자이자 신비가였지만 무신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 요소의 결합이야말로 프롬의 업적이며 그의 고유한 자리이다.
3. 『소유냐 존재냐』
(1) 세 편의 시
바쇼의 하이쿠, 테니슨의 시, 그리고 괴테의 시를 언급하는 부분은 『소유냐 존재냐』의 가장 인상적이며 유명한 부분이다. 사실 프롬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이 비교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강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롬은 스즈키와 데 마르티노와 더불어 『선과 정신분석』이라는 책을 펴 내었는데, 지금도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여겨진다.
테니슨의 시와 바쇼의 하이쿠를 비교해 보면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테니슨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따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 그대가 무엇인지,
뿌리 뿐만 아니라 그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신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반면 바쇼의 하이쿠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 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
두 시의 차이는 현저하다. 테니슨은 소유하려고 한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낸다. 그 시는 꽃에 대한 지적 명상으로 끝을 맺지만, 꽃 자체는 생명을 상실한다. 테니슨의 시는 서구과학자에 비견된다.
그러나 바쇼의 태도는 다르다. 가만한 살펴볼 뿐이다. 손을 대지 않는다. 바쇼는 꽃을 소유하지 않는다. 가만한 바라볼 뿐이다. 그것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된다.
괴테는 테니슨과 바쇼의 사이에 있다.
찾아낸 꽃
나는 홀로
숲속을 헤맸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정처없이
나무 그늘에서 찾아낸
한 송이 꽃
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같은
꺾으려는 손을 보고
꽃은 상냥하게 말했다.
어째서 나를 꺾으려 하세요
곧 시들어버릴 텐데.
나는 그것을
뿌리째 파내어
아름다운 정원에다 심으려고
집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꽃을 다시 심었다.
이제 그것은 많이 자라
꽃이 피게 되었다.
테니슨은 소유양식을 대표한다. 바쇼와 괴테는 존재양식에 속한다.
(2)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명사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져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괴롭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대신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성가족』에서 동사가 명사로 대치되는 문제를 잘 설명했다. 인간의 사랑(사랑하는 인간)에서 사랑의 인간으로 바뀔 때 소외가 발생한다. 인간의 사랑이 사랑의 인간으로 바뀌면서 사랑은 잔혹한 여신이 된다. 그러면서 사랑은 인간과 격리된 존재로서 독립된 실재가 된다. 하지만 사랑이나 행복과 같은 것은 ‘명사’로 존재하면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사가 되어 소유하려고 할 때 오히려 내가 소외된다. 프롬은 이러한 현상을 종교용어로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 구분된다. ① 학습: 소유양식의 학습은 지식을 모으며 집적한다. 지식을 소유하려고 한다. 존재형 학습은 학습을 통해서 내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의도한다. ② 기억: 소유형의 기억은 기억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존재양식에 있어서는 이전에 보고 들은 어떤 것을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③ 권위: 소유양식의 사람은 권위를 소유하려 한다. 그러나 존재 양식의 사람은 그 자신이 권위인 사람이 된다. 존재 권위는 한 개인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고도의 성장과 통합을 달성한 인격의 본질 자체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 인물은 권위를 방사할 뿐 명령을 내리거나 협박하거나 매수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④신앙: 소유양식의 사람은 신앙도 소유하려 한다. 그러나 존재 양식에서는 사람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내가 신앙 속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⑤ 사랑: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사랑을 소유할 수 없고, 사랑한다는 행위만이 존재한다. 사랑의 소유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감금하고 지배한다. 결혼이 힘든 이유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결혼이 사이가 좋은 소유 형태로 변모해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개의 자기중심주의를 하나의 합동자본으로 삼은 회사, 즉 가정이라는 회사인 것이다.
(3) 성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서 살펴본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프롬은 구약성서의 주제가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가야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사막으로 간다. 사망은 이 해방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사막은 나라가 아니다. 도시도 재물도 없다. 유목민의 삶이다. 안식일 개념도 소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고기를 그리워한다. 그들은 황금송아지를 만든다. 그들은 민주적인 부족생활을 전제정치로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소유양식이 다시금 강조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혁명적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바로 예언자들이다. 예언자들의 후계자는 랍비들이었다. 대표적인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대-로마 전쟁시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 국가, 성전, 사제, 군인, 제사등을 모두 포기했다. 그들은 오로지 존재의 이상만을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서. 초기 기독교는 가난하고 멸시받는 자들의 운동이었다. ‘산상설교’는 노예반란의 연설이었다(Marx Weber). 초기 기독교는 모든 물질적 재화의 자발적인 공동소유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프롬은 여기에서 Q자료를 언급한다. 특히 그는 슐츠(S. Schulz)의 오래된 전승과 새로운 전승 가설을 언급한다. 오래된 Q의 담지자들은 소유구조를 총체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은 묵시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확신에 근거해서 당시 세계를 심판했다. 새로운 Q는 시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악마는 소유의 대표자이며, 예수는 존재의 대표자이다. 교부들도 소유보다는 존재를 대변했다.
이제 프롬의 관심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로 이어진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에크하르트의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마음의 가난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 불교와 비슷하게도 에크하르트는 욕망이라는 것이 근본문제라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마음의 가난은 바로 '무집착'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하고, 심지어 신마저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신께 나를 신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무소유의 개념을 이보다 더 철저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지향한 것은 영혼에서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하지는 않지만 능동적인 상태이다. 그것을 에크하르트는 낳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달리는 상태라고 부른다. 능동적이고 살아있는 인간은 채워짐에 따라 커지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
(4)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에 대한 심층적 탐구
소유양식은 사유재산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타는 소유양식을 갈망이라고 묘사했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묘사했다. 프롬은 소유양식이 프로이트가 말한 항문애적 성격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항문애적 성격’은 감정, 몸짓, 말, 정력 뿐 아니라 돈과 물건을 소유하고 절약하며 축적하는데 삶의 에너지를 다 소비하는 성격이다. 그것은 인색한 사람의 성격으로 보통은 다른 특성, 예를 들면 지나치게 규율이 바르다거나 지나치게 깔끔하다거나 지나치게 고집이 세다거나 하는 특성과 결부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유에 대한 지배적인 지향성은 완전한 성숙이 달성되기 전의 시기에 나타나며 만일 영속적으로 되면 그것은 병적이다.” 이런 병적인 사람이 대부분의 구성원이 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프롬이 소유양식을 비판하고는 있지만 생존을 위한 소유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존재양식 보다 소유양식을 더 많이 알고 있다. 존재양식은 비-소유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알려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파란색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파란색의 파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각된다. 존재양식은 수동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존재양식은 능동적이다. 능동성은 분주함과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는 노동과 구분되는 ‘능동적 활동’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활동적인 삶’(vita contemplativa)을 인간 능동성의 최고의 형태로 보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능동성의 삶을 찬양한다. 스피노자 역시 고통이 수동에서 오며, 기쁨이 능동에서 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피노자는 정신질환이 올바른 삶과 그릇된 삶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만일 탐욕스러운 사람이 돈과 소유물만을 생각하고 야심 많은 사람이 명예만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불유쾌하게 생각할 뿐이다. 대개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탐욕과 야심 따위는 정신이상의 형태인 것이다. 보통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병이라고 생각지 않지만”(『윤리학』)
마르크스 역시 존재양식에 관한 훌륭한 교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생명과 인간성에 있어서 경제학자가 당신으로부터 빼앗아간 모든 것을 그는 돈과 부의 형태로 되돌려준다.”
슈바이처도 마찬가지로 존재양식을 강조한다. 그는 산업시대의 인간을 “자유가 없고, 산만하고, 불오나전하고 인간성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산업시대의 인간이 자유를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노력’하고 있다고 보았다. “2-3세기간 인간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존재로서 살아왔다.” 슈바이처는 노동을 줄이고 과잉소비와 사치를 줄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는 능동적인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정신적인 완성에 기여하라고 말한다. 프롬은 슈바이처가 ‘신 없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점에서 불교와 잘 통한다고 보았다. “사랑의 종교는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슈바이처)
(5)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간이 새로운 사회를 촉진시킨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은 다음과 같은 21개의 특성을 가진다(『소유냐 존재냐』, 203-204 참조). 어떻게 이러한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새로운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 그 책의 제목은 『존재의 기술』이 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에 대해서 프롬이 제시하는 설득력 있는 대안은 ‘연간 보증 수입’이다. 그는 이런 노력이 복지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 용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롬은 인간에게는 소유지향과 존재지향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구조가 바뀐다고 본다. 그는 이 두 양식 사이에서 개종과 같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억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사회가 변화되려면 다음과 같은 제조건이 채워져야 한다고 본다. ① 소유의 동기가 존재의 동기로 대체되었을 때 ② 시장적인 성격이 새로운 사랑의 성격으로 대치될 때 ③ 종교가 인도주의 정신으로 대체될 때. 그는 새로운 무신론적 종교성, 불타에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무신론적인 제도화되지 않은 종교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인도주의적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유냐 존재냐의 마지막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중세 후기의 문화가 번영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진보와 번영의 나라’의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이상이 바벨탑으로서 무너지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만약 하나님의 나라와 진보의 나라가 변증법적인 정과 반을 의미한다면 새로운 합은 ‘존재의 나라’이다. 『소유냐 존재냐』가 프롬의 실질적인 마지막 저작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존재의 나라'라는 말은 프롬의 전 인생과 전 저작을 하나로 모으는 결론적인 말이다. ‘존재의 나라’라는 말은 그래서 우리가 깊이 숙고할 가치가 있는 말이다. 존재의 나라라는 말에는 정신분석, 유대교, 기독교, 불교,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통합되어 있다.
4. 나가면서
박찬국 선생님은 프롬이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시킬 수 있는 사상가였다고 보았다. 20세기의 거대한 두 물줄기였던 두 조류를 통합시킬 수 있다는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프롬이 매우 귀중한 방향을 제시해 준 인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그의 전체 저작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집약되는데, ‘소유’와 ‘존재’라는 말에서 그의 모든 사유가 응집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재’란 어려운 말이며 평생 고민해 볼만한 주제이다.
종교 연구에 관심을 가진 나로서는 프롬의 종교관이 흥미로웠다. 유대교, 기독교, 선불교가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장이었다. 프롬은 기독교와 불교의 매개자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언급한 것 같다. 하지만 심오하게 들어가서 설명하기 보다는 짤막 짤막한 통찰을 주는 글로만 되어 있어 피상적인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프롬 독서는 때때로 놀라운 시각을 제공하기도 했다.
프롬 독서는 흥미로웠다. 프롬은 평이하다. 3페이지를 읽기 위해서 몇 시간을 씨름해야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글과 다르다.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고, 또 그러면서도 적잖은 통찰을 던져준다는 장점이 있다. 정말 철학이나 사상을 힘들어하는 분들이나,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적합한 책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