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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4일
2010년 1월 4일 한국 중부에 내린 폭설
은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수도
권과 강원도 등을 비롯한 중부 대부분 지역
에 내린 폭설이다. 특히 서울에는 1월 4일 오후 2시에 25.8cm의 눈이 쌓이면서19
37년 적설 관측 이래 최대적설을 기록했다. 폭설로 인해 수도권과 강원도 지역을 중심
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2010년서울, 사상 최대 폭설
▶2010년세계 최장 빌딩
부르즈 칼리파(옛 부르즈 두바이) 개장
부르즈 칼리파의 모습.
▶2009년과테말라, 산사태 발생
▶ 2007년 국내 最古 추정 '한글 금속활자' 발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금속활자가 발견됐다. 15세기 중반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7년 1월 4일 박물관이 소장한 수십만 점의 금속활자 중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한글 금속활자 752자를 최근 1차로 정리했는데, 이 중 30자는 1461년(세조 7년)에 간행된 ‘능엄경언해’와, 1481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인 ‘두시언해’(두보의 시 등을 한글로 번역한 시집)를 찍을 때 사용했던 한글 금속활자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조사를 담당한 이재정 학예연구사는 “30자를 전자현미경 등으로 확대 촬영해 분석한 결과 ‘능엄경언해’나 ‘두시언해’의 한글 자체 (字體)와 똑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머지 720여 활자도 1668 년에 만든 활자(=무신자.戊申字)로 간행한 각종 언해본(諺解本.한 글 번역본)의 자체와 같아서 1668년에 만든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2007년美 첫 여성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취임
4일 취임한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자신과 동료 의원들의 자녀, 손자·손녀들에 둘러싸여 의사봉을 들어 보이고 있다.
▶2004년미국 탐사로봇 ‘스피릿’ 화성 안착
화성에 안착한 NASA 탐사로봇.
화성 탐사 로봇 스피릿이 우연히 파헤친 곳에서 미생물 생존에 완벽한 조건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이는 화성의 과거가 드러났다고 BBC 뉴스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미항공우주국(NASA) 과학자들은 스피릿의 바퀴가 망가져 헛돌다가 파낸 지점의 흙이 온천수나 뜨거운 증기가 화산암과 만나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지구라면 이런 지형에서는 박테리아가 우글거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12월 12일 보도
화성은 태양계 내에서 생명체가 존재하거나 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행성이다. 또한 미래에 인류가 이주하여 살 수 있는 유일한 행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미국은 2030년대 유인 화성 탐사를 우주 탐사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화성 탐사는 생명체의 존재와 과거의 흔적을 탐지하는 것이다. 특히 물의 존재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분의 우주과학자들은 화성에 액체 상태의 물이 없고, 오존층이 없으며, 지각의 대류운동인 판구조 활동과 화산활동이 전무하단 점 등을 들어 현재는 생명체가 존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35억 년 전에는 대기가 따뜻하고 두꺼워 미생물 정도의 생명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피릿은 지금도 화성을 돌아다니며 탐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NASA의 화성 탐사 로봇인 스피릿은 화성에 현재 또는 과거에 물이 존재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다. 물의 흔적을 찾으면 생명체의 존재 여부도 자연적으로 밝혀지게 되고, 물은 미래의 유인 화성 탐사에 필요한 음료수, 산소 그리고 로켓 연료 등 중요한 자원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화성 탐사 로봇 소저너(무게 11.5kg의 전자레인지 크기)는 1997년 7월에 화성에 도착하여 6주간에 걸친 탐사 활동을 하였다. 초속 1cm로 움직이며 불과 수십 미터를 이동하였지만 화성 탐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후 2004년 1월 미국 NASA는 보다 대형인 화성 탐사 로봇 스피릿과 쌍둥이 동생 오퍼튜너티를 각각 화성에 착륙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스피릿의 무게는 173kg으로 소형 전동골프카트 정도의 크기다. 최초 스피릿의 임무 수행 기간은 90일이었다. 2004년 1월 3일 화성에 착륙한 스피릿은 현재 임무수행 기간을 16배나 넘긴 지금까지도 건재하게 활동 중이다. 하루에 40m를 이동할 수 있으며 반경 1km를 움직일 수 있어 이전의 소저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발휘한다. 3차원 카메라, 광물성분 분석을 위한 알파 입자 X선 분광기, 열탐지장비, 드릴, 연마기 등을 갖추고 있어 '움직이는 지질학 실험실'이라고 불릴 만하다. 화성탐사선 스피릿은 이러한 장비를 동원하여 물에 의해 생긴 퇴적암층을 발견하였으며, 물속에서만 생성되는 황산염 결정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스피릿의 흥미로운 탐사 결과 중 하나는, 탐사 지역인 구세브 분화구에 있는 '마자찰(Mazatzal)'이라는 암석을 분석한 것이다. 이 암석을 통해 3개의 분리된 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구세브 분화구에 자체 물 공급원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최근 활약도 눈부시다. 스피릿의 화성 궤도선에서 촬영한 고해상도 영상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새롭게 흐른 물줄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또 로봇 차량의 바퀴가 헛돈 자국에서 밝은 색을 띤 규산염의 존재도 밝혀냈다. 이는 과거에 물이 존재했었다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이며, 최근에도 화성에 많은 양의 물이 존재해 지열 등의 원인으로 지하에 얼어있던 물이 지표로 분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소규모의 열과 수분이 존재하는 열섬에 살아있는 생명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화성의 물이 지표수인지 지하수인지 언제부터 물이 뒤덮고 있었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물이 존재했었는지, 그 양은 얼마인지,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어떠한 형태로 있는지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에 NASA는 더 상세한 연구를 위하여 향후 2년마다 화성에 무인 로봇 탐사선을 보낼 예정이다. 오는 2013년에는 화성에 로봇을 보내 암석과 토양 샘플을 채집, 지구로 가져와 정밀 분석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만일 화성에서 지구 외에 생명체의 존재가 밝혀지면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래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될 것이다. 과학은 물론 종교와 철학에 미칠 영향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클 것이다.
▶1997년미국, 대북 식량 거래 허가
▶ 1994년 오늘,
국회 법사위원회, #김구암살사건의 조사를 위한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 규명 소위원회를 첫 가동
김구 암살범 안두희,국회 증언"장은산이 지시"..가장 치욕적인 미제사건
지난해 6월 26일 오전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김구 선생 제69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이 헌화 후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994년 1월 4일 백범 김구(1876∼1949년) 암살 사건 범인 안두희(1917∼1996년)의 국회 증언이 이뤄졌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 소위원회’는 이날 회의를 열어 안두희 등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안두희는 증언에서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녹음테이프의 진술 내용은 사실 ▲진술은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한 것을 시인했다.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 측은 이날 1992년 6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안두희가 “처음으로 고백한다. 마지막 유언이다”라며 진술한 내용을 담은 121개의 녹음 테이프를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하지만 이런 국회 차원에서의 김구 암살 사건 진상 규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광역시에 있는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됐다. 김구 암살범이자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안두희가 죽음에 따라 김구 암살 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김구 암살은 민족지도자의 암살이었을 뿐 아니라 암살범이 현장에서 검거됐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국내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자 치욕적인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범. 1949년 6월 백범을 암살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잔형면제를 받았으며 정치적 의혹에 대해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잠적하였다. 여생을 은신생활로 보내다가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으며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백범김구선생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셨는데,1994년에야 '국회 진상규명
위원회'가 처음으로 꾸려졌다??
그 사이 45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늦여 졌나!
<이승만12,3년,박정희18년,전두환7년,노태우 5년 합43년!>
이게 '정답'아닐까?
▶1991년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1차 개정. 형사재판권 자동포기조항 삭제
▶1989년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수단의 전시사용 금지에 관한 의정서, 국내에서 발효
▶1989년WBA, 프로복서 유명우 선수를 ‘88년 최우수복서’로 선정
1990년 12월 26일, 한국체육기자연맹이 주관하는
‘체육기자의 밤’에서 유명우 선수가
1990년 체육유공자들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1986년미국 오클라호마주 동부 핵연료 공장서 방사능가스 유출사고 발생, 100여명 사상
▶1983년문학평론가 이헌구 사망
▶1982년바르샤바조약국 정상회담 개막
▶1982년문교부, 중고교생 머리·교복 자율화 발표
982년 1월 4일 발표된 중-고등 학생들에 대한 조발(調髮)및 교복자율화 조치에 따라 1982년 새학기부터 학생들의 머리모양이 자유화 됐고, 1983년부터는 교복자율화가 실시됐다.
학교별 복장선택권은 학교장에 일임, 각 중-고교장은 학생 학부모의 의견을 참작하여 학생의 신분에 어울리는 자유로운 활동복을 입게 할 수도 있고 학교단위로 통일된 복장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자유로운 머리모양은 1982년부터 모든 중-고등학생이 자신의 기호에 맞게 조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파머나 염색 등 인공적으로 머리모양을 가꾸는 것은 금지했으며, 남학생의 경우 머리길이가 귀를 덮을 정도로 길게 하는 것은 허용치 않았다.
교복자율화 발표 이후 첫 등교일인 1983년 3월 2일, 중-고교생들이 교복을 벗고 청바지와 점퍼 등 간편한 옷차림으로 등교하고 있다.
▶1981년연합통신 창간
▶1980년카터 미국 대통령, 소련군 아프간 침공을 항의한 후 곡물수출대폭삭감등 대소련보복조치 발표
▶1972년한미섬유협정 조인
▶1966년프랑스 리옹시 근방 정유공장 폭발 110명 사상
▶1965년영국 시인 T.S. 엘리엇 사망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 극작가로 알려진 T.S.엘리엇이 1965년 1월 4일 사망했다. 미국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생으로 스미스 아카데미를 거쳐 1906년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는 한편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상징시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 영향은 후에 그의 시작품에 나타나게 됐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하는 동시에 영국 국교로 개종, 영국문단의 중진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초기의 시는 영국의 형이상학시와 프랑스 상징시에서 받은 영향이 짙으며 현대문명의 퇴폐상을 그리면서 그 배경으로 신화의 세계를 엿보게 했다. 시인으로서의 정점은 제2차대전부터 쓰기 시작하여 전후에 완성한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로 볼 수 있다.
▶1961년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슈뢰딩거 사망
▶1961년아프리카 수뇌회의 개최. 7일 카사블랑카 선언
▶1960년알베르 카뮈 사망
ㆍ반항적 인간의 길 제시 ‘부조리 문학’
부조리(不條理). 이 화두를 세상에 던진 남자, 바로 카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란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그 자체에 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의 감정이나 감각에 빠져 자살과 절망에 이르는 허무주의(니힐리즘)를 긍정하는 대신 인간과 세계, 의식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반항적 인간의 길, 즉 삶의 출발을 제시하고자 했다.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카뮈는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함께 빈곤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카뮈가 1937년 처음으로 발표한 수필집<표리>는 어둡고 가난했던 시절의 생활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42년에 발표한 <이방인>은 카뮈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는 이 소설에서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 뒤 법정에서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다고 진술하는 인물 뫼르소를 등장시킴으로써 이른바 부조리 문학의 대명사가 된다. 기존의 질서와 전통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 대가로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고 죽어가는 주인공 뫼르소는 부조리에 맞서는 반항아로 받아들여졌다.
<이방인>이 젊은 세대에게 준 충격은 컸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이지만 그 삶 속의 쾌락을 사랑하고, 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녔음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 카뮈의 소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합리성에 절망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정신적 도덕을 제시했고 실존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카뮈는 실존주의 작가라는 낙인을 거부했다. “아뇨. 난 실존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르트르와 나는 언제나 우리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후 발표한〈페스트>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난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는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이다.”
카뮈가 44세가 되던 1957년, 그의 전 작품에 대해 노벨상이 수여된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허무하게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부조리하지만 사랑하고 싶었던 이 세상을 남겨둔 채.
▶1958년스푸트니크 1호 소멸
구 소련의 로켓 천재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지휘아래에 만들어진 스푸트니크 1호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1957년 10월 4일 발사되어, 이듬해 1월 4일 소멸하였다. 스푸트니크호의 발사로 당시 우주개발 기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미국은 물론 서방 국가들이 엄청난 충격에 빠졌는데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 라고 한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에서 스푸트니크(Sputnik)는 러시아 어로 ‘동반자’ 라는 뜻이다. 1957년 10월 4일 금요일 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됐다. 스푸트니크 1호는 라디오 송신 장치를 단지름 58cm, 무게 83.6kg의 공 모양으로, 금속구(金屬球)에 4개의 안테나가 달린 모양이었으며, 내부에는 측정기와 2대의 송신기 등이 있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근지점 228km, 원지점 947km, 주기 96.2분, 적도경사 65.2°, R-7로켓에 실려 지구 위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메시지를 지구로 보내왔다. 우주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1958년소련과 동구7개국, 경제종합 15개년 계획 합의
▶1956년소련-몽고-중국 간 직통 철도 개통
▶1951년1.4 후퇴 서울, 또다시 공산치하로
"미안하다. 너희들만 두고 내려가서 이렇게 고생을 시켰구나."
2004년7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 금강산 김정숙휴양소. 아흔 살이 넘은 남측의 김정원 할머니와 황인규 할아버지는 53년만에 만난 두 딸을 끌어안고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
1951년 1.4후퇴 당시, 5남매를 데리고 함흥부두에 갔던 부부는 가족이 모두 배에 탈 수 없게 되자 당시 여섯살과 아홉살이던 둘째, 넷째딸을 남겨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달만 있다가 돌아오겠다"던 그 약속은 자책과 걱정과 그리움에 사무친 50여년을 넘어서야 지켜졌다.
황인규 할아버지는 "이제 여한이 없다. 너희들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씻겠느냐만 이렇게 만났으니 됐다"고 말하며 두 딸의 손을 놓지 않았다.
1.4후퇴.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7개월째 접어든 오늘.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세는 38도선까지 다시 밀렸고 서울은 또다시 공산치하로 들어갔다.
서울 함락소문에 시민들은 대부분 피난길에 나섰다. 북한 피난민들은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에 맞춰 미군 LST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얼어붙은 한강에는 가재도구를 이고진 피난민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피난민 행렬에서 엄마아빠를 놓치지 않으려고 꼬옥 쥔 꼬막손을 놓는 순간이 생이별의 반세기가 될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미 8군 사령관 릿지웨이 중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혹한과 눈바람 속에 수많은 피난민이 채 굳지 않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건넜다. 이 비참한 행렬 가운데에는 누구 한 사람 이웃을 돌볼 여력이라고는 없었다. 눈을 밟는 신발소리만 가팔랐고 탄식만을 남긴 채 피난민들은 묵묵히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곧 다시 오마” "일주일 후 서울역에서 만나자”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루하루 보낸 게 어느새 70년. 전쟁이 남긴 생이별의 치유되지 않은 아픔은 아직도 2020년 1월 한반도에 남아 있다.
1월 5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행렬. 1.4후퇴는 혹한 탓에 6.25 발발 직후의 피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1949년동경에 주일대표부 설치
▶1949년한미석유협정 조인
▶1948년미얀마,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7년임시운항무역법 공포
▶1944년소설가 황석영 출생
▶1941년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 사망
▶1940년각도에 경제경찰과 신설
▶1940년영국의 물리학자 브라이언 조지프슨 출생
▶1938년채만식, 장편 `탁류`를 조선일보에 연재(~5.17)
▶1935년미국 프로 권투 선수 프로이드 패터슨 출생
▶1920년간도국민회 임국정(林國楨)등 5명 조선은행 회령지점의 현금수송차 습격
▶1916년총독부 `교원심득(敎員心得)` 공포
▶1901년카네기, 카네기재단 설립
▶1884년영국에서 페비안협회 결성
▶1881년독일의 조각가 렘브루크 출생
▶1858년미국의 정치가 카터 글래스 출생
▶1785년독일의 형제작가 야고프 그림 출생
▶ 1643년 오늘,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_뉴턴 (Isaac Newton)영국 Woolsthorpe Manor 에서 출생 (~1727년 3월 31일 영국 런던 켄징턴 에서 사망)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 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 다/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인 f ( x ) = 0 { f(x)=0} {f(x)=0}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1181년백성들, 사경원(寫經院) 방화
▶1135년묘청의 난 발생
고려 인종 때인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왕의 권위가 실추되고 궁궐이 불타 민심이 불안해지자 고려 왕실은 위기를 맞게 된다. 더욱이 나라 밖으로는 강성한 여진족이 금을 세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때 지덕이 쇠한 개경(개성) 대신에 지덕이 왕성한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서경 천도의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승려 묘청 등은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들을 `서경파`라 한다. 서경파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자는 민족 주체성을 주장하여, 이의 실천 방안으로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게 하고,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고려 정권의 주류는 개경의 문벌 귀족 출신의 유학자(개경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사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북진 정책의 추진, 칭제 건원으로 인한 외세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현상 유지자들이었다.
이같은 대립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지는 등 불길한 조짐까지 보이며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는 1135년 1월 4일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대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이 서경에 당도하자 묘청은 부하인 조광에게 죽임을 당한다. 조광은 이후 1년여를 버티다가 식량부족과 사기저하로 정부군에 성을 빼앗기고 1136년 2월 9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화궁 터, 인종이 묘청 일파의 주장에 따라 천도를 위해 서경에 지은 궁궐 터.
https://youtu.be/SgsFB91RQ8M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