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 소주와 사이다를 섞은 ‘막걸리 폭탄주’가 대유행이다. 또 다른 한쪽에선 막걸리에 생과일주스를 부은 ‘막걸리 칵테일’도 인기절정이다. 아저씨 술인 막걸리가 젊은이, 특히 젊은 여성의 술로 탈바꿈되고 있다.
술이 있는 곳에 으레 등장하는 폭탄주는 막걸리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14일 오후 7시 현대아산 관광영업부의 회식자리. 메인 술자리는 한창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막걸리다. 회식자리에 폭탄주가 빠질 리 없다. 샐러리맨들의 대표적인 음주 방식이 이른바 ‘폭탄주’다. 폭탄주란 어느 한 종류의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맥주, 소주, 양주, 심지어는 포도주까지 섞어 만드는 술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심하게 취하게 만든다.
- ▲ 사진: 안호성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라”는 권기섭(46) 부장의 특명이 떨어졌다. 전재영(34) 대리가 막걸리를 부은 유리잔과 잔 사이에 소주와 사이다를 절반씩 넣은 소주잔을 올렸다. 첫 번째 소주잔을 쓰러뜨리자 도미노처럼 소주잔이 막걸리잔 속에 빠졌다. 일명 도미노주. 소주잔이 막걸리잔에 빠지면서 넘친 막걸리로 상위가 지저분해졌다. 마침 안주를 내오던 식당 아줌마가 “그렇게 막걸리 폭탄주를 만들어 먹는 건 처음 본다”며 “뭘 좀 깔아 놓고 하지”라며 눈을 흘겼다.
폭탄주는 보통 양주에다 맥주를 섞는다. 반면 막걸리 폭탄주는 막걸리에 소주를 붓고 사이다를 약간 가미한다는 것이 다르다. 제조법은 이렇다. 먼저 맥주컵에 막걸리를 반쯤 따른다. 그런 뒤 소주와 사이다를 소주잔에 각각 반 잔 정도 따라 맥주컵에 부으면 된다. 막걸리를 즐겼던 고 박정희 대통령은 양주를 먹고 마지막에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마셨다고 전해진다. 폭탄주에 대한 품평은 나이와 경험, 추억에 따라 달랐다.
“막걸리의 알싸한 맛에, 사이다의 달달한 맛이 더해져 달콤해요. 굉장히 부드러워서 ‘술술’ 넘어가는데요. 여자 친구랑 마시면 딱이겠어요.” 처음으로 막걸리 폭탄주를 마신다는 전재영 대리는 “과일을 갈아 넣으면 더 맛있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임상우(37) 과장은 좀 싱겁다며 전 대리의 막걸리 폭탄주 예찬론에 딴죽을 걸었다. 양주 폭탄주에 입맛이 길들여진 임 과장은 “사이다를 줄이고, 막걸리나 소주의 양을 더 늘리라”고 폭탄주 제조를 주문했다. 다시 막걸리 폭탄주가 한 순배 돌았다.
권기섭 부장은 “처음 만난 여자랑 막걸리 먹었을 때가 기억난다”며 옛 추억을 더듬었다. 그는 “군 복무 시절 천리행군을 하다 농부들이 건넨 막걸리 한잔은 피로를 잊게 한 마취제였고, 피로회복제였다”며 “얼마나 맛있던지 그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막걸리 폭탄주는 ‘혼돈주’로 불린다. 18세기 문인인 정철조(1730~1781)가 소주와 막걸리를 섞은 뒤 ‘혼돈주’라 부르며 마셨다는 데서 유래한다. 정철조는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등 조선시대 실학자들과 긴밀히 교류했던 인물로 돌의 모양과 재질을 따지지 않고 벼루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어 석치(石癡)란 호로 불렸다.
최근 유명디자이너인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가 ‘혼돈주’에 대한 상표 등록을 출원해 그 심사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영세 대표가 상표 등록을 요청한 혼돈주의 비율은 막걸리 6, 소주 3, 사이다 1이다. 또 상표 사용 범위로는 소주, 약주, 인삼주, 청주, 탁주, 합성청주, 쌀로 빚은 술 등 7가지 주류로 정했다. 혼돈주 애호가로는 홍석우 중소기업청장이 꼽힌다. 홍석우 청장은 혼돈주가 주로 중소기업이 만드는 막걸리가 주재료인데다 ‘맥주 + 양주’로 제조하는 폭탄주에 비해 건강에도 좋다며 즐겨 마시고, 주위에도 권하고 있다.
막걸리 폭탄주 칵테일로 진화
‘막걸리 폭탄주’는 진화를 거듭해 이제는 ‘막걸리 칵테일’로 재탄생했다. 여성들이 즐겨 찾는 막걸리 칵테일의 제조 방법은 간단하다. 막걸리에 일정량의 생과일주스를 붓고 잘 섞어주면 된다. 딸기·키위·복숭아·파인애플 등 생과일 외에 쌀·콩·보리 등을 섞기도 하고, 수삼을 갈아 넣기도 한다. 또 딸기요구르트 또는 곡물요구르트와 탄산음료를 섞기도 한다. 섞는 재료에 따라 빨강, 노랑, 보라 등 형형색색의 빛깔을 낸다. 막걸리 칵테일은 사발이 아니라 유리 칵테일 잔에 담겨 나온다. 1990년대 초반 소주에 각종 과일주스를 섞어 먹든 ‘소주 칵테일’에 비견된다.
막걸리 칵테일 열풍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 ‘마코리’로 불리는 막걸리가 웰빙 음식으로 뜨면서 일본 여성들이 ‘마코리 칵테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일본 여성들 사이에 막걸리 칵테일이 유행한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막걸리 칵테일 주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 신촌 등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다. 부드러움에 달콤함과 고소함을 더해 20~30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 ▲ 조선일보 DB
- ▲ 조선일보 DB
tip 막걸리 폭탄주 원조는 고 박정희 대통령
막걸리의 참맛을 아는 이로는 고 박정희 대통령과 천상병 시인이 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국민과의 소통로였고, 천상병 시인에게는 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권농일이면 반드시 농촌에 나가 모내기를 하고, 벼 베기 돕기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일을 하고 나서 논두렁에서 농부들과 마시는 걸쭉한 막걸리를 최고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신 막걸리는 경기도 고양시 배다리 술도가에서 만든 ‘고양 막걸리’다. 처음 맛을 본 뒤 매주 한두 말씩 시켜먹다 1966년부터 14년 동안 마셨다. 그래서 고양 막걸리는 지금도 ‘박정희 막걸리’로 불린다. 박 대통령은 대구에 가면 팔공산 자락의 천연수로 빚은 ‘불로 막걸리’에 취했으며, 부산에선 금정산 산성마을의 ‘산성 막걸리’를 즐겼다고.
고양 막걸리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도 찾았다고 한다. 지난 2000년 김정일 위원장이 ‘박정희 대통령이 마신 막걸리를 마셔보고 싶다’며 고양 막걸리를 주문했던 것. 당시 방북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막걸리 이야기를 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주문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을 통해 고양 막걸리가 공개적으로 북한에 보내졌다.
시인 천상병(사진 오른쪽)은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막걸리를 예찬했다. 그에게 막걸리는 한마디로 밥이었다. 천 시인은 친구나 지인으로부터 500원, 1000원씩 받아 막걸리를 사먹었다. 그는 이 때문에 큰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대학친구에게서 막걸리 값을 받아썼던 게 빌미가 돼 6개월간 고문을 받고 선고유예로 풀려났다.